모래밭 위에 무수한 발자국들이 찍혀 있다. 크고 작은 발자국들, 오가는 발자국들, 얕고 깊은 발자국들, 길게 짧게 이어지던 발자국들은 서로 얽히기도 하고 겹치기도 하면서 결국 너른 모래밭을 가득 메우고 있다. 우리 삶도 이 족적과 같아서 지나고 나면 서로의 구별이 별 의미없어 보인다. 그저 너나없는 발자국들일 뿐이다. 파도를 기다리는 발자국들일 뿐이다. 파도에 지워질 발자국들일 뿐이다. 어제의 발자국들이 지워진 곳에 오늘의 발자국들이 찍힌다. 오늘의 발자국들이 지워지면 또 내일의 발자국들이 나타날 것이다. 바다로 사라진 발자국들은 우리 삶의 은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바다에서 나와 바다로 사라진다. 그 바다는 실존의 바다일 수도 있고 허무의 바다일 수도 있다. 나는 오늘도 백사장을 걷는다. 모든 것이 깨끗이 지워진 순백의 모래밭이다. 그러나 영원히 사라지는 건 없다. 나는 때로 지워진 발자국들을 본다. 다시 살아나는 발자국들을 본다. 말발굽도 보이고 선사시대 새의 발자국도 보인다. 토벌대의 군화 자국도 보이고 끌려가는 자의 맨발도 보인다. 모래밭 위에선 영원히 사라지는 건 없다. 모래들이 그 모든 것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가 그 모든 것들을 되살리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세상에 새로운 건 아무 것도 없다. 다만 기억이 기억을 지우고 기억이 기억을 덮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