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 사기 10 삼국시대를 다룬 역사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히는 <삼국사기>.
여기에는 한 전쟁의 기록이 남아 있다.
# 책 + 전쟁 이미지 30 (*)
"수나라의 30만 군대가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그러나 3개월 후, 이중에 살아돌아간 사람은
열가운데 하나둘에 지나지 않았다."-
598년, 고구려와 수나라간에 벌어진 전쟁에 관한 내용이다.
제 1차 고구려 ,수나라 전쟁을 기록한 이 간략한 내용 -
그 이면에 숨겨져있는 진실은 무엇인가.
<ST 1>
(* 살수대첩 민족 기록화가 배경으로 세워진 기본 세트 /
바닥에는 중국 + 한반도 지도 깔려 있다
MC, 그림 앞에서 천천히 걸으면서 멘트 )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동아시아 전체를 뒤흔들었던 전쟁이 있었습니다.
598년부터 614년까지,
무려 네차례에 걸쳐 벌어진
고구려와 수나라간의 전쟁이 바로 그것입니다.
장장 16년에 걸쳐서 이뤄진 장기전인데다
그 규모가 가히 세계대전을 방불케할 정도로 거대했던
고구려, 수나라 전쟁 -
그러나 612년 제 2차 전쟁이었던 "살수대첩"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역사 기록이 남아있지않은 상태라,
그 진실 역시 오랫동안 역사 속에서 가려져 있었습니다.
(* 삼국사기 뜬다)
이것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598년 제 1차 전쟁에 대한 내용입니다.
(* 책 -> 기록으로 바뀌고 / MC 멘트 따라 글자 돌출)
"영양왕 9년, 수나라가 30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해왔다.
그러나 당시에 장마와 질병이 있었고,
수군은 태풍을 만나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수나라 군대 가운데 죽은 사람은 10에 8,9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역사서에서,
당시의 전쟁에 대해 남아있는 기록의 전부인데요-.
어쩐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 MC 정면 )
수나라 이전에도
고구려는 중국 대륙으로부터 끊임없는 도전을 받았지만,
그 규모는 수만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무려 30만병력을 동원해 시작한 전쟁이
이렇게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더구나 전투 한번 없이 단지 자연재해만으로 죽은 사람이 10에 8,9였다?
아무래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도대체 당시에 어떤 일들이 있었던 걸까요?
오늘 우리는,
598년 고구려와 수나라가 맞붙었던
제 1차 전쟁의 미스테리들을 하나하나 추적해보려고 합니다.
먼저, 전쟁은 어떻게 시작됐는지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VCR 1>
# 북경시내 TRA. 13 (* 자막 들어갈 때)
중국의 역사 속에서, 이 전쟁은 과연 어떻게 기록돼 있을까.
(* 도서관 자막 보고 -)
북경대 도서관을 찾았다.
# 서가 PAN 9 수나라 시기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현재까지 전해오는 것은 <수서>와 <자치통감> 정도 -
# 수서 기록 14 그런데 여기서, 뜻밖의 내용을 발견할 수 있었다.
(* PAUSE/ 글자 나오기 시작하면 -)
수나라가 전쟁을 일으키기 전,
고구려의 영양왕이 먼저 요서지방을 공격했다는 것이다.
# 자치통감 11 전쟁을 시작한 쪽이 고구려라고 밝혀놓은
중국의 역사 기록 - 이것이 사실이라면,
고구려가 수나라를 선제공격한 이유는 무엇일까.
# 교수 만나러가는... 16 (* T.U 하면 -)
수나라시대를 연구해온 왕소부 ( 짱깨 역사 학자 ) 교수는,
당시의 상황을 중국 정세의 변화와 연관지어 설명한다.
# 지도 그래픽 생기면 바로 - 25
6세기 후반, 중국은 세개의 나라로 분열돼 있었다.
그런데 북주가 북제를 정복한 뒤 새로이 수나라를 세우고,
창업 8년만에 진나라까지도 멸망시킨다.
400여년만에 중국에 나타난 통일 왕조 - 이것은 그동안
고구려를 중심으로 했던 동아시아의 질서에 새로운 위협을 의미했다.
# 왕소부 교수 INT 45 (* 현장음)
중국이 분열돼있을때는 요녕에 지방정권 예를 들어
소수 민족이 세운 북연이나 후연이 동북지방에 있었지만 ,
고구려보다 힘이 약했습니다.
수가 중국을 통일할 당시에
고구려는 이미 이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고
북쪽 몽고 접경지역도 고구려의 영토였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두 나라 이에 당연히 세력다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 국서 13 새롭게 세력을 키우려 하는 수나라와 전통의 강국 고구려 -
두 나라간에 긴장감이 높아갈 무렵,
수나라로부터 한 장의 국서가 날아든다.
# 자막 나오기 시작하면 0 27
수나라의 황제인 문제가 고구려왕을 신하로 칭하며,
수나라에 굴복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 PAUSE/ 자막 바뀌면 -)
고구려가 마치 자신들의 속국인양 거만한 태도를 취한 이 국서는,
사실상 수나라의 선전포고문이나 다름없었다.
# 서가 10 이같은 수나라의 행동에 대해, 고구려의 입장은 어땠을까.
이에 관해 남아있는 역사기록은 거의 없다.
# 조선상고사 11
그러나 단재 신채호 선생이 지은 <조선상고사>에는,
당시 고구려의 상황을 전하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 책 내용 + 대사 더빙 20 (*)
"기원전 597년은 고구려 영양왕 8년이요,
수의 문제가 진을 병합하여 중국을 통일한지 17년 되는 해이다.
수는 이즈음에 고구려와 자웅을 다투고자
고구려를 지극히 업신여기는 내용의 오만하기 이를데없는
글을 보내왔다."
# 평양성 + 대사 더빙 20 (*)
"영양왕이 이 모욕적인 글에 크게 노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회답의 글을 보낼 것을 의논하니,
강이식이
" 이같이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아니라 칼로 회답할 것입니다 . " 하고
곧 개전하기를 주장하였다.
# 온창일 ( 대한민국 육군 사관학교 교수 ) 교수 INT 42 (* 현장음)
그 국서를 받고난 후에 고구려 내부에서는
화전양면의 논의가 활발했을것으로 생각이 듭니다. ~~
순응을 해서 국체를 보존하는게좋겠다 그런 의견이 있을수 있고
무인들쪽에서는
한번 싸워보는게좋다
수나라의 기세를 꺾을 필요가 있다
그쪽이 더 강하지않았겠느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 공격 이미지 15
수 문제의 국서가 온 이듬해인 598년.
고구려의 군대는 요하를 건너 수나라로 진격한다.
고구려와 수나라의 16년 전쟁이,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ST 2>
(* 벌판 느낌 세트- 아무것도 안보이는 상태 / MC, 서있다)
아마 많은 분들은,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 대해서 수나라가 먼저 공격을 시작했고
고구려는 이를 잘 막아냈다는 정도로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러나 앞서 보신 것처럼,
선제공격을 통해 먼저 전쟁을 시작한 쪽은 오히려 고구려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 문제의 국서가,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고구려를 자극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 광개토왕비쪽으로 이동)
이것은 고구려 제 19대왕인 광개토대왕비입니다.
이 비석을 통해 우리는 고구려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 뜨고 -)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 - 고구려 사람들은 광개토왕을 가리켜,
왕중의 왕인 호태왕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이 비석에는
끊임없는 정복 활동을 통해 대제국을 건설한 광개토왕의 업적이
화려하게 기록돼 있는데요.
그런 광개토왕을 고구려 사람들은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 "태왕 은택 황천 위무 사해" 뜨고 -)
태왕의 업적은 황천에 달하고 위력은 사해에 떨쳤다.
(* MC, 다른 편으로 이동하면 금동판 있다)
이번에는 함경남도의 한 절터에서 발견된
고구려의 금동판을 한번 보겠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고구려 사람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습니다.
(* "천손" 돌출)
천손, 다시 말해 하늘의 자손이라는 뜻이죠.
(* MC 정면)
지금 보신 고구려 유물에 나타난 기록,
태왕, 사해, 천손과 같은 말들은 바로
고구려가 천하를 지배하는 중심국가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구려에 비해
수나라는, 비록 중국을 통일했다고는 하나
나라를 세운지 겨우 17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수나라가 고구려를 신하의 나라로 칭한 것은,
그냥 보아넘길 수 없는 일이었겠죠.
그런데... 단지 이같은 이유만으로,
고구려는 수나라를 공격했던 것일까요?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 그 이면에는 또다른 배경이 있지 않았을까요?
<VCR 2>
# 벌판 TRA. 15 (* 3초쯤 흘리고 -)
수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발한 고구려 군대는, 요서로 향한다.
목표가 된 지역은 영주 - 지금의 조양이었다.
# 조양 전경 9 지금은 인구 80만의 작은 도시에 불과하지만,
고대에 조양은 여러 나라가 쟁탈전을 벌인 요지였다.
# 요탑 18 시내로 들어서면 한눈에 뜨이는 요탑은,
이 지역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조양을 차지하려는 각국의 다툼 속에서 한때 이곳을 장악한 요나라는,
그 기념으로 이처럼 거대한 탑을 세웠다.
# 당탑 (팻말) 13
당나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조양이 당나라의 영토임을 확실하게 하기위해,
80미터 높이의 당탑을 세운 것이다.
# 부감 20
이처럼 조양이 중요했던 첫번째 이유는 경제적인 이권이다.
6세기 무렵, 조양에는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제시장이 들어서 있었다.
조양을 차지하게 되면,
이처럼 거대한 시장권과 교역권을 가질 수 있었다.
# 지도 30
또한 이곳은,
동북아시아를 분할하고있던 각 나라간의 세력 다툼에서도 중요했다.
특히 고구려와 수나라에 있어서, 영주 -
그러니까 지금의 조양을 중심으로 하는 요서 지역은
완충 지대인 동시에 끊임없는 충돌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요서를 장악하는 것이 곧 , 세력의 확장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 이성제 교수 INT 38 (* 현장음)
진출 내지는 반드시 장악해야만 하는...
다음단계로
본토나 내륙이 침범 내지는 위협을 받을 수 있는
전략적인 공간이라는 거죠.
차지를 안하면 반드시 그보다 몇배의 댓가를 치를 수밖에 없는...
거기를 잃는다는거는 곧바로
경계선이 안으로 후퇴하게되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출과 방어라고하는 그런 의미에서
거기는 대단히 의미가 중요한 거죠.
# 수서 기록 26
그런데 수나라가 등장하기 전까지,
요서는 고구려의 세력권 아래 있었다.
597년 수 문제가 보낸 국서에도,
이같은 정황을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당시 요서가 고구려의 영토는 아니었지만,
고구려는 이곳을 차지하고있던 말갈과 거란에 대해 지배력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 요하 26
요서지방이 고구려의 세력권이었다는 또하나의 증거 -
그것은 고구려성의 존재다.
(* PAUSE/ 자막 나오면-)
중국의 사서인 <자치통감>에는,
요수 서쪽에 고구려성 무려라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고구려가 이 성에서, 요수를 건너는 자들을 감시했다는 것이다.
# TRA. 7
그렇다면 지금도, 그 성의 흔적이 남아있을까.
# 어딘가로 가는 취재팀 17
요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신민시의 한 마을을 찾았다.
(* PAUSE/ 교수 질문 모습 보고 -)
고구려성에 대해 묻는 취재팀에게,
주민들 ( 짱깨 주민들 ) 은 단번에 위치까지 알려줬다.
# 주민 얘기 10 (* 현장음)
저기 저쪽에 있는게 바로 고구려 시대 것입니다.
동산 저쪽에 고구려 성이 있어요.
# 취재팀, 걸어가는... 13 (* 2초쯤 보고-)
주민들의 말을 따라 찾아간 곳에는,
과연 뚜렷한 성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 성 아래 내려다보이는- 17
성벽 위에 올라서면, 요하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자치통감의 기록에서처럼,
요하를 건너는 자들을 감시할 수 있는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 교수 INT 19 (* 현장음)
사서에는 무려라 성이 요수 서쪽에 있는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요수는 여기 산의 동쪽을 통과해서 가야하는데
산(성)이 요수의 서쪽에 있으니 문헌기록과 맞아떨어지는 것이죠.
이 성의 위치는 분명한 것입니다.
# 성 Z.O 29
지금은 군데군데 성벽이 허물어지고 잡초가 우거졌지만,
천사백년 전 이곳은 요서 지배를 위한 고구려의 거점이었을 것이다.
취재팀이 중국 신민시에서 확인한 고구려성 무려라 -
그것은 요하의 서쪽 너머까지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고구려의 흔적이었다.
# 왕소부 ( 짱깨 역사 학자 ) 교수 INT 20 (* 현장음)
중국남북조시대 때 고구려는 요동을 거의 다 장악했었고
요서는 고구려 영토는 아니었지만
소수민족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수민족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
영주를 중심으로 한 요서지방이
고구려의 영토는 아니지만 그 세력권 아래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조양 전경 16
그런데 6세기 후반,
수나라가
고구려의 지배 아래 있던 요서지방의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다.
수나라의 거점이 된 곳은,
전략적 경제적 가치가 높은 조양이었다.
# 인민정부 F.S 11
583년, 수나라는 조양의 소수민족 세력을 토벌한 뒤
영주총관부를 세운다.
# "한왕을 병주총관에 임명" 기록 24
이후에 문제는 넷째아들 양을 병주총관으로 임명한뒤
52주를 다스리게 하고, 여기에 영주를 포함시켰다.
수나라 4대 총관의 하나였던 병주의 군사력이
영주총관을 직접 지원할 수 있게 함으로써,
영주의 군사력을 키운 것이다.
# 이성제 교수 INT 38 (* 현장음)
지금 이미 개전논의가 한창인데 그렇게 갑자기 확장 증강하게된다는거는
저게 타켓이 돌궐이 될수도 있지만 우리가 될 수도 있다~~
침공해올것이다라고 하는 판단을 할수있는 시기가 된거죠.
그래서 침공해오기 전에 미리 선제에 제압한다고..
기선을 제압하는 의미에서 선제공격을 할수도 있다.
# TRA. 16 (* 2초쯤 보고 -)
598년, 고구려의 영주 공격 -
이것은 수나라가 요서의 지배권을 넘보도록 묵과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ST 3>
(* 기본 세트 + 바닥에 지도 / 수나라쪽에 서서 멘트)
고구려가 수나라 공격에 동원한 병력은 1만 -
그것도 고구려의 정예 부대가 아닌 말갈군이었습니다.
대규모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작정을 하고 공격을 했다기보다는,
무력행동에 대한 의지를 보임으로써
수나라의 움직임을 차단하려는 의도가 더 컸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러면 이같은 고구려의 선제공격에 대해,
수나라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 MC, 수나라쪽에서 고구려쪽으로 걷는다 )
고구려가 영주 지방을 선제공격한지 석달만에,
수나라는 30만 대군을 조직해 대대적인 고구려 원정에 나섭니다.
그야말로 신속하기 이를데없는 대응이었죠.
전쟁을 하기위해
군사를 조직하고 각종 물자를 조달하는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612년, 제 2차 전쟁때
수나라의 양제는 고구려에 선전포고를 하고도
1년이 지나서야 실질적인 공격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30만이라는 대군을 일으키는데
불과 석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
이것은 수나라가 이미 오래 전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겠죠.
그렇다면 수나라의 문제는 왜,
고구려와의 전쟁을 원했던 것일까요?
<VCR 3>
# 장안시 전경 22 (* 지도 들어가면 -)
중국 섬서성 서안시 - 장안이라는 지명으로도 불렸던 이곳은,
중국에서 손꼽히는 역사도시다.
수천년간 13개의 왕조가 이곳을 수도로 정했다.
수나라 역시 이가운데 하나였다.
# TRA. 7
1400년 전, 이곳 장안에서 수나라를 세운 문제 -
# 문제 릉 PAN 12
장안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마을에, 그의 무덤이 있다.
언뜻 보기엔 그저 야트막한 언덕 같아 보이지만,
# 비석 9
그 앞에 세워진 비석은 무덤의 주인이 분명
수 문제임을 말해주고 있다.
# 걸어가는 취재팀 17
오랫동안 돌보는 손길 하나 없었는지,
무덤 한쪽에는 사람들이 오르내린 길이 나있었다.
20여년간 중국을 통치했던 황제의 릉이라기엔,
초라한 모습이었다.
# 쓰레기들 10
분열돼있던 중국을 400년만에 통일하는 업적을 이뤘지만,
문제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 사당안 보이는- 23
원래 북주의 왕 정제의 외할아버지였던 그는,
어린 나이의 정제를 대신해 실권을 휘두르다가
581년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랐다.
때문에 집권 초기에는, 수많은 비판과 반란에 시달려야 했다.
# 마치 교수 INT 20 (* 현장음)
문제는 외손자의 왕권을 찬탈해 수나라를 세웠습니다.
즉 정당하지못한 방법으로 황제자리에 올랐던 거죠.
# "사취천하" 기록 20
<자치통감>에는 문제의 등극과정에 대한 당시의 평가가 어땠는지를
알 수 있는 기록이 있다.
(* PAUSE/ 한자 다 나오면 -)
"황제는 본래 공덕이 없는 사람으로, 천하를 사취하였다"는 것이다.
# 문제의 초상화 18
이같은 분위기에서,
문제는 신하들에게조차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들 대부분이 북주 왕조에서 문제와 같은 서열에 있었기 때문에,
반감이 더욱 컸던 것이다.
# <수서> 기록들 30
당시 수나라의 명문 귀족 양소는 공공연하게
자신을 천자로 칭했다고 전한다.
(* PAUSE/ 두번째 한글자막 나오면 -)
당시의 귀족들 간에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황제가 될수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던 것이다.
# 장안시내 부감 33 (* 2초쯤 흘리고 -)
때문에 문제는,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통일왕조의 위엄을 과시하는데 많은 힘을 쏟았다.
(* PAUSE/ 장안성벽 보이면 -)
장안에 새로운 성을 건설한 것도, 이같은 노력의 하나였다.
581년 수나라를 세우고 장안에 도읍한 문제는
이듬해부터 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지금은 장안성이라 불리는 대흥성이다.
# 마치 교수 INT 35 (* 현장음)
(수 문제는) 북주에서 수를 세운 것을 혁명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새 수도를 지었습니다.
또 전국을 통일하고 국가가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의 옛직함 대흥공을 따서 대흥성이라 이름붙인 것입니다.
# <황수영감지>편찬 기록 20
또 문제는 594년, 서른권권에 이르는 <황수영감지>를 편찬하게 한다.
<황수영감지>는 민간가요와 불경등에서
신왕조의 정통화 논리를 추려모으고
수나라의 정치적 이상을 집약해놓은 책이었다.
# 원정 이미지 30
왕조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문제가 택한 또하나의 방법은 대외 원정이었다.
수나라를 세운 이후,
문제는 돌궐, 거란 등과 끊임없이 전쟁을 치른다.
전쟁을 통해 왕조의 힘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의 신망을 얻고,
신하들을 통합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같은 대외 원정 사업의 마지막에, 고구려가 있었다.
# "조야에서 고구려를 치자는 의견많았다" 기록 15
수나라의 중국 통일 전까지 동아시아 최대의 강국으로 군림해온 나라 -
고구려를 정복한다면
수나라의 힘을 만천하에 과시할 수 있을 터였다.
# 왕소부 ( 짱깨 역사 학자 ) 교수 INT 24 (* 현장음)
당시에 고구려는 막강한 나라였습니다.
(아직까지는) 직접 적인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돌궐이 이미 수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수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였던 셈이죠.
# 석양 33 이같은 분위기에서,
수나라와 고구려의 일전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598년 6월, 고구려가 영주를 공격한지 석달만에
수 문제는 넷째아들 양과 개국공신 고경 등을 지휘관으로 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조직한다.
병력의 수는 무려 30만!
국력을 총동원한 대공세였다.
<ST 4>
(* 서제 세트 / MC 서서 )
원정군의 규모와 지휘관의 면면만 봐도,
수 문제가 이 전쟁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짐작이 되는데요.
그러나 고구려를 침으로써 통일왕조의 힘을 대내외에 과시하고자 했던
문제의 야심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지 석달만에,
수나라 군대는 열가운데 여덟,아홉이 죽었을 정도로
큰 패배를 안은 채 돌아가야했던 것입니다.
(* 삼국사기 기록 뜬다)
<삼국사기> 나 <수서> 와 같은 역사서들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장마와 전염병,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가 있었고
이 때문에 수나라군대가 큰 피해를 입게된 것이라고 적고 있는데요.
현재까지 전해오는 당시의 기록은 이정도가 전부입니다.
때문에 이 전쟁에서 수나라가 패한 것은,
고구려와의 전투가 아니라 자연재해 때문이라고 믿어져 왔었죠.
하지만... 이것이 과연 진실일까요?
(* 책상에서 조선상고사 집어든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 지은 <조선상고사> - 이 책에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전혀 다른 내용이 나옵니다.
고구려와 수나라군대는 분명히 전투를 벌였고,
강이식이란 장군이 고구려군대를 지휘했다는 것입니다.
(* 대동운해, 서곽잡록 뜬다)
단재는 이 내용이
<대동운해><서곽잡록> 등의 역사서를 참고한 것이라고 밝혀놓았는데요.
아쉽게도 이 책들은 현재 남아있지않은 상태라,
내용의 진위를 두고 엇갈린 의견들이 많았습니다.
(* 책 사라지고 MC, BS)
그간 전해오던 역사의 기록들과는 완전히 다른 <조선상고사>의 내용 -
이것은 과연 사실일까요?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의 지휘관이라는 "강이식"이라는 이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가 실존인물이고 고구려의 장수였다면 ,
<조선상고사>의 내용이 사실일 가능성도 높기 때문입니다.
<VCR 4>
# TRA. 7 (* 2초쯤 흘리고 -)
우리나라에서 "강"이라는 성은, 진주 단일본이다.
# 진주강씨중앙종회 가는- 11
그렇다면 진주 강씨의 족보에서,
강이식 장군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
진주 강씨 중앙종회를 찾았다.
# PD와 종친회 사람들 11
뜻밖에도 종친회 사람들은,
모두가 강이식장군에 대해 알고있었다.
그가 바로, 진주 강씨의 시조라는 것이다.
# 종친회 사람 INT 20 (* 현장음)
저희들이 어려서부터
저희 시조 할아버지는 고구려 영양왕 때
수나라 30만 대군을 임유관에서 무찌른 명장이면서
훌륭한 장군의 후손이라고 듣고 자랐습니다.
# 남한보 20
1685년 조선 숙종 때 만들어졌다는 남한보 -
진주 강씨 집안에 전해오는 가장 오래된 족보다.
(* PAUSE/ "여기 강이식장군이 나와있습니까?")
여기에는 강이식 장군에 대해, 어떻게 기록돼있을까.
# "강이식" 기록 부분 27 (* 현장음)
저희시조 강이자식자께서는 고구려를 침공해왔을 때 병마원수로서
수나라를 격퇴시켰다고 하는 그런 내용이 기록돼있습니다.
(당시에 병마원수..) 네, 병마원수셨죠.
# 얘기 F.S 4 남한보의 기록은,
<조선상고사>의 내용과 거의 일치했다.
# 진주강씨 세보 12
그런데 1964년에 만들어졌다는 진주강씨세보에는,
또다른 흥미로운 내용이 덧붙여져있었다.
(* 이하 현장음/ "여기 별록으로...")
# 후손 얘기 21 (* 현장음)
예, 별록으로 기록돼있는 거는 원수공할아버지 묘역을
일제때 1930년대에 선조들께서 봉심하고오신 기록을 ~
별록으로 처리를 한거 같습니다.
# 별록 T.D 12 (* 현장음)
묘는 심양역 원수림역...
만주 봉길선 원수림역전앞에 있다고 돼있습니다.
# TRA. 11 족보에 기록돼있는 중국 요녕성의 한 마을 -
이곳에 지금도, 강이식의 묘소가 남아있을까.
# 원수림 PAN 10
만약 그렇다면 강이식 장군의 실체를 밝히는데
더없이 귀중한 근거가 될 것이다.
# 교수와 PD, 걸어가는- 17
취재팀은 심양대 역사학과 김규천교수의 도움을 받아,
강이식 장군의 무덤을 찾아보기로 했다.
오래 전부터, 강이식 장군에 대해 연구해왔다는 김규천 교수 -
# 좌대 14
그의 안내를 따라 찾아간 곳에는,
거북 모양의 묘비 좌대가 하나 있었다. (* 보고 -)
# 교수 + PD 7 (* "그때만 해도 여기..." 정도까지 보고 -)
밭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아있는 거북 좌대 -
# 좌대 13
여기에는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어떤 단서도 보이지 않았다.
과연 이곳에 강이식 장군의 무덤이 있었던 것일까.
# 족보 넘기는 - 8
진주 강씨 세보에 기록돼있는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해 보았다.
# PD + 교수 15
여기에는 강이식 장군의 무덤에,
"병마원수 강공지총" 이라 쓰여진 비석이 있다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지금, 그 비석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 김규천 교수 INT 16 (* 현장음)
중국 새정부가 난 후에 여기를 개척을 해가지고
이제는 전부다 농토가 되면서 비석이 없어져버렸어요.
그래서 이제 비석 좌대만 남아있습니다.
# 마을 풍경 9
무덤이 있는 땅을 개간한 것은, 50여년 전이라고 했다.
# 교수와 PD, 걸어가는 6
그렇다면 마을의 노인들 ( 짱깨 노인들 ) 은
무덤의 존재를 알고 있지 않을까.
# 사진 PAN 17
3대째 이 마을에 살고있다는 꾸어차이칭 노인을 찾았다.
(* PAUSE/ "그럼 거기 비석이 있는걸 보셨는지...?" 듣고 바로 -)
그는 어릴 때만 해도 고구려 무덤과 비석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 꾸어차이칭 할아버지 INT 28 (* 현장음)
비석을 언제 봤냐구요 ? (몇살 때 처음 봤냐는 겁니다.)
언제 봤느냐 하면은... 약 열몇살 때 처음 봤어요.
그때는 비석있는곳이 모두 풀로 뒤덮여있었습니다.
숲이었어요.
할아버지가 그 무덤을
고구려인 무덤이라고 하는것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고구려인무덤이 확실한가요?)
그렇게 들었어요.
# 원수림 PAN 19
거북 좌대가 있는 마을은, 고려영자촌 원수림이라고 불린다.
고려영이란, 고구려 군영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원수림"이라는 지명은,
강이식장군의 직책으로 기록돼있는 "병마원수"와 묘하게도 일치한다.
# 좌대 12
1400년 전, 수나라의 30만 군대와 싸웠던 고구려 장군, 강이식 -
그는 정말 이곳에 묻혀있는 것일까.
# 비석 생기는 그래픽 17
여러 가지 정황은 그런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이식장군의 무덤을 찾아 중국으로 간 취재팀이,
이곳에서 확인한 그의 흔적은 아쉽게도 여기까지였다.
# TRA. 7
그런데 얼마 전, 취재팀에게 새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 예천 권씨 종택 14
경북 예천의 권씨 종택에,
강이식장군에 대한 중요한 사료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 목판 18 (* 현장음)
서안선조께서 편찬하신 대동운부군옥 목판입니다.
20채... 20질로 돼있습니다.
현대로 말한다면 백과사전입니다.
# 금고 보는- 24 (* "이게 초고본입니다~ 이게 영인본이고..." 듣고 -)
조선 선조 때의 학자인 권문해가 1589년에 편찬한 <대동운부군옥>.
단군이래 명종 때까지의 역사, 지리, 인물 등 여러 분야를 총망라해
운별로 정리해놓은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
# 내용 TS 32
그런데 여기에, 강이식 장군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었다.
(* PAUSE/ STILL 잡히면 -)
진주 강씨 남한보보다 100년이나 앞서 만들어진 <대동운부군옥>에서
강이식 장군의 이름과 활동 내용을 확인한 것이다.
# 봉산사 15 (* 자막 뜰 때 -)
경남 진주의 봉산사 - 강이식 장군을 기념하기위해
고려 때 만들어졌다는 사당이다.
# 향 꽂는- 8
이곳에서는 매년 4월, 후손들이 모여 강이식 장군의 추모제를 지낸다.
# 영정 + 향불 16
598년, 수나라의 30만 대군을 상대로 싸웠던
고구려의 병마원수 강이식 - 역사는 그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존재했던 고구려의 장군이었다.
<ST 5>
(* 기본세트에 배경으로 강이식 영정이 걸려있다)
수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고구려의 장군, 강이식 -
그가 <수서>나 <삼국사기>같은 역사서에
이름을 남기지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것이,
중국의 "춘추필법"
다시 말해 중국에 불리한 내용은 기록하지 않는
역사 기록 방식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서>와 같은 역사서들은
수나라의 패배를 숨기기위해 자연재해를 핑계삼았고
<삼국사기>는 이 내용을 그대로 옮겨놓았기 때문에,
강이식 장군의 이름이나 그가 지휘한 전투의 내용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주장이 사실일까요?
598년, 고구려와 수나라가 맞붙었던 제 1차 전쟁은
과연 어떻게 진행됐을까요?
<VCR 5>
# 탁군 19 (* 3초쯤 흘리고 -)
중국 북경의 남부 - 양자강과 황하를 잇는 대운하의 끝에는,
"탁군"이라 불리는 지역이 있었다.
바로 이곳이 고구려 정벌의 출발지였다.
# 사람들 18 (* 한 CUT 정도 보고 -)
598년, 수 문제가 고구려 원정에 나설 때도
전국 각지에서 소집한 군사들이 운하를 타고 이곳 탁군으로 집결했다.
# 이동경로 그래픽 20
당시 수나라 군대의 원정길은 두 갈래 -
한왕 양과 고경이 지휘하는 육군은
탁군에서 임유관을 지나 요하쪽으로 향했고,
주라후의 수군은 동래를 출발해 평양성으로 향했다.
# 온창일 교수 INT 36 (* 현장음)
두개의 방향으로 오는 육로군과 수로군이
전술적으로는 나눠서 진격을 해서 병력을 합해서 공격한다는 ~~
보급품 수송이 어렵기 때문에
해상으로 보급을 해서 중간에서 합류해서 공격하는 그런방법을
통상 취합니다.
그래서 수나라도 고구려를 침공할 때 그방법을 택하지않았나...
# 바다 이미지 10
그러나 동래를 출발한 수의 해군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 태풍/ 자막 나오면 12
<자치통감>은 그 이유에 관해,
태풍을 만나 많은 배가 침몰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 조선상고사 21
그러나 <조선상고사>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
(* PAUSE/ 자막 나오면 -)
수의 군량 보급 작전을 미리 간파한 강이식장군이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수나라 군대를 물리쳤다는 것이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 아파트 외경 4 (* 흘리고 -)
# 윤명철 + PD 4
고구려 해양사를 연구해온 윤명철 교수를 찾았다.
# 윤명철 얘기 5 (* 현장음)
이쪽으로 출발해서 이렇게 이렇게 가고...
# 지도 보는- 8
동래를 출발한 수나라의 함대는, 왜 중도에서 침몰했는가.
# 지도 10
윤교수는 그 원인을, 태풍이 아니라
고구려군과의 전투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 이하 현장음/ "어딘가 가다가~ 못갔겠죠.")
# 이동 경로 그래픽 30
그 첫 번째 이유는, 수나라 해군의 이동 경로다.
(* PAUSE 동래 자막 뜨면 -)
동래에서 출발한 수군이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가기위해서는
묘도열도와 장산군도일대를 지나야한다.
그런데 주라후가 이끄는 수군이
이곳을 통과할 당시의 기후 조건이나 주변의 환경을 살펴보게 되면,
몇가지 의문이 생긴다.
# 윤명철 INT 48 (* 현장음)
주라후가 이끄는 수군은 사료에 의하면
음력 6월부터 8월 사이에 활동했는데
그 무렵에 황해 북부 즉 요동만과 발해만일대는
태풍이 부는 계절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여름이기 때문에 파도가 높질않구요.
더욱 중요한 것은
그곳에서는 해류가 남쪽으로 흐르기 때문에
북상하는 주라후의 해군으로 봐서는 돛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돛을 사용하지않는다는거는 바람의 영향을 적게받는다는 얘기구요. ~~
섬들이 많기 때문에 설사 태풍을 만난다하더라도
주변의 섬들에 얼마든지 피양을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 사료의 기록은 믿을수가 없습니다.
# 비사성 15
또한가지, 주목해야될 것은 고구려 수군 기지의 존재다.
중국 요령성 금현에 우뚝 솟아있는 대흑산 -
이곳 산 정상을 길게 휘두른 성벽은 바로 고구려의 것이었다.
# 대흑산산성 표지석 22
지금은 대흑산산성이란 중국이름으로 바뀌었지만,
# 비사성 Z.O
원래 이곳은 고구려 해양방어의 전진기지인 비사성이었다.
(* PAUSE/ 지도 없어지면 -)
청일전쟁 때까지도 중국의 해군 기지가 있었을 정도로,
천혜의 요새였던 고구려의 비사성 -
# 성벽 19
요동 제일의 전망을 자랑하는 이곳에서는,
요동반도 일대의 바다가 모두 내려다 보인다.
고구려는 이곳 비사성에서,
바다를 통해 진격해오는 수나라의 움직임을 지켜볼 수 있었을 것이다.
# 바다 TRA. 28
또한 이곳 비사성을 기점으로 서쪽 - 장산군도 일대에도
고구려는 세밀한 해양방어 체계를 구축해놓고 있었다.
(* PAUSE/ PAN해서 "장해현" 자막 뜨면)
지난해 8월, 현지 탐사를 통해 역사스페셜 취재팀은
고구려의 수군기지 역할을 했던 고구려 성의 흔적들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 마을 노인 ( 짱깨 마을 노인 ) 과 얘기 10 (* 현장음)
왜 고(구)려 성산이라고 부릅니까?
그야 옛날부터 고려 성산이라고 부르니까 그렇죠, 뭐.
# 고구려 성산 11 고구려인들이 살고 있었다는 고구려촌 해변가 -
바다를 향해 튀어나온 이곳을 주민들은 고구려성산이라 불렀다.
# 성 흔적으로 Z.I 12
돌로 쌓은 성벽의 흔적이 지금도 뚜렷하다.
이처럼 취재팀이, 장산군도 일대에서 발견한 고구려 성은 모두 4개.
# 그래픽 20
수나라 수군이 고구려를 치기 위해서는, 이처럼
고구려가 만들어놓은 수군기지들을 지나야만 한다.
그렇다면 수나라와 고구려 - 양국 군대간에
전투가 벌어지지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 윤명철 INT 22 (* 현장음)
당시 수나라가 구사한 수륙양면작전,
그리고 고구려가 구축한 해양방어체계 ~~
황해 북부의 해양환경을 고려할 때 주라후가 이끄는 수군은 ~~
고구려 수군에 의해서 궤멸됐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 길 TRA. 21 (* 인터뷰 이어서 -)
고구려는 이렇게, 수나라의 수륙합동작전을 무산시킨 것이다.
수의 육군이 만리장성 끝 임유관을 벗어났을 때,
수군은 이미 고구려에 패해 퇴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육군은 배후 지원과 식량보급이 끊어진 상태로, 전쟁을 치르게된 것이다
# <수서> 기록 16
<수서>의 기록은,
당시에 장마와 전염병이 겹쳐 군대의 피해가 컸다고 쓰고 있다.
이것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이유라는 것이다.
# 부경대 외경 11 (* 자막 뜨면 -)
당시의 상황을 확인해보기 위해,
부경대 환경대기과학과 변희룡 교수를 찾았다.
# 모니터 화면 15
이것은 미국 유타 주립대학이,
최근 30년간 요서지역의 강우량을 조사한 것이다.
변교수에 따르면,
이같은 강우량 통계는 천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 모니터 화면 10
따라서 이 자료를 살펴본다면, 고구려 - 수나라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의
기상 상태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 교수 + PD 30
이에 따르면, 요서지역에 장마는 9월이면 완전히 끝난다.
붉은색 표시는 건기를 뜻한다.
(* PAUSE/ "장마 다 끝났습니다."듣고 바로 -)
요서 지역이 장마권에 드는 것은 7,8월 두달 정도 -
하지만 수나라 군대는 9월에야 고구려에서 물러갔다.
다시 말해, 장마가 끝난 뒤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는 얘기다.
# 변희룡 교수 INT 43 (* 현장음)
우리나라 서울의 강수량이 연간 1200미리 정도...
조금 많게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우리나라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
장마시작 시기도 ~~
우리보다 조금 늦게 시작해서 일찍 끝난다고 볼수있습니다. ~~
7월 중순에는 장마 다 끝났습니다. 음력으로 말했을 때...
# 성 20
이런 상황으로 볼 때,
수나라 군대는 분명히 고구려와의 전투를 치렀을 것이다.
<조선상고사>에는 그 상세한 내용이 있다.
수의 군량보급선을 격파한 강이식장군은 방어작전으로 시간을 끌면서,
수군이 지치기를 기다린다.
# 달려가는 군사 / 자막 뜨면 - 22
장마와 질병에 지친데다 군량까지 떨어지면서,
수군에는 죽어가는 군사가 속출했다.
결국 수군은 고구려 정벌을 포기한 채 퇴각을 시작한다.
(* PAUSE/ 자막 바뀌면 -)
고구려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수나라 군대를 추격해
큰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이다.
# 온창일 교수 INT 48 (* 현장음)
실제로 중국에서 원정군이 왔을 때
특히 식량문제 이런거 의 보급이 어렵기 때문에 ~~
사정이 악화되기를 기다려서 전력이 약화됐을 때 원정군을 공격하는...
이런 식의 방법을 택했습니다. ~~
곤궁에 빠진 수군이 퇴각할 때 다시 역습을 하는 그런 식의 작전은
충분히 생각할 수가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 회군 이미지 32
기후조건과 자연재해를 적절하게 이용한 고구려군의 전술에 말려들어,
수나라군대는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못한 채 돌아가고 말았다.
요하를 건너왔던 30만 대군 가운데 죽은 자는 열에 여덟,아홉이나 됐다.
(*PAUSE/ 자막 없어지면 -)
제 1차 고구려,수나라 전쟁은 이처럼 ,
수나라의 처참한 패배로 끝났던 것이다.
<ST 6>
(* 평양성 보이는 세트 )
이렇게 제 1차 고구려 - 수나라 전쟁을 재구성해보면서,
우리는 또한가지 사실에 새롭게 주목하게 됐습니다.
바로 전쟁의 시작이 됐던 고구려의 선제 공격에 대한 것입니다.
(* 지도 인서트 )
이때 영양왕은,
불과 1만의 군사로 영주 지방을 공격한 뒤 곧바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이것을 빌미로 수나라의 문제는,
대대적인 원정군을 고구려에 보냈던 것인데요 -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는 많은 늪지대가 있고 지형이 험해
천연적인 장애물 역할을 합니다.
또 장거리를 이동해야하기 때문에
군량을 조달하는 문제도 어려웠습니다.
다시 말해 두 나라가 전쟁을 벌일 경우,
원정군의 입장이 훨씬 불리한 것입니다.
(* MC, 1S)
어쩌면 고구려는, 이같은 사실을 미리 계산에 넣었던게 아닐까요?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하고있던 수나라가 선제공격을 받는다면
대대적인 원정에 나설 것이고,
그렇다면 여러 가지 불리한 여건 속에
고구려의 작전에 말려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이런 예상 아래서 고구려는 전쟁을 시작했던게 아닐까요?
그러니까 이 전쟁은,
철저하게 고구려의 주도 아래서 진행되고 끝났다는 얘기죠.
그리고 이처럼 쓰라린 패배 이후,
수나라의 문제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고구려 원정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수나라가 또다시 고구려에 도전해온 것은,
첫번째 전쟁이 있은지 14년만인 612년이었습니다.
<VCR 6>
# 군사 진격 22
수나라 문제가 고구려 정복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고 죽은지 8년만에,
그의 아들 양제가 또다시 전쟁을 일으킨다.
수나라의 백만 군대는 요하를 건너 고구려의 요동성으로 진격했다.
# 요동성 그래픽 14 (* 잠깐 보고 -)
고구려의 관문이자 요동 최고의 요새였던 요동성 -
고구려는 이곳에 50만석의 군량미를 비축해놓고
수나라군과 전투를 벌였다.
# 성 그래픽 F.S 8
수나라 군대는 3개월간, 요동성의 성벽조차 넘지못했다.
# 지도 그래픽 23 (* 요동성 불 나면 -)
요동성 함락에 실패한 양제는, 별동대 30만을 조직해
고구려 수도인 평양성을 공략한다.
바다로 진격하는 수군과 합동작전을 펴게한 것이다.
# 강 + 추격 이미지 20
그러나 고구려는 비사성을 중심으로 수나라 수군의 지원을 차단한다.
수나라의 별동대는 식량보급이 없는 상태에서 진격을 하게된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은
수나라의 별동대를 물리치기위해 유인작전을 펼쳤다.
# 살수 그래픽 40
이같은 작전이 성공을 거둔 것은 지금의 청천강인 살수에서였다.
(* PAUSE/ 둑 만들면 -)
살수 상류에 둑을 쌓고, 수나라군대가 건너가기만을 기다리던 고구려군-
(* PAUSE/ 화살표 지나가면 -)
살수를 건너 평양으로 진격했던 수나라 군대가
고구려군에 밀려 퇴각하기 시작하자,
둑을 무너뜨려 수나라군의 허리를 끊는다.
(* PAUSE/ 군사들 나오면 -)
그리고 고립된 수나라군의 선두와 후미에 총공격을 가했던 것이다.
# 강 + 추격 이미지 28
패주하는 수나라 군사를 쫓아 고구려군은 압록강까지 추격해 들어갔다.
당시 요동을 건너간 30만 군사 가운데,
살아 돌아간 자는 겨우 2천7백명 - 고구려의 대승이었다.
이후, 수나라는 두차례나 더 고구려 원정을 시도했지만,
결과는 번번이 참패였다.
# 처마 PAN 12 (* 잠깐 보고 -)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뒤,
수나라는 극도의 혼란에 휩싸였다.
# 벽 SLOW 11
그리고 618년, 수 양제는
고구려 원정군 사령관 우문술의 아들에게 피살당한다.
# 성 22
그해 중국에는, 이세민이 세운 당나라가 새로운 통일 왕조로 들어섰다.
(* PAUSE/ 자막 빠지면 -)
그리고 이듬해, 당나라는 고구려에 한 장의 국서를 보낸다.
# 하늘 + 국서 37 (*)
"우리나라와 귀국은 각자의 영토를 잘 보전하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니 다행한 일입니다.
다만 수나라가 귀국을 침공하여 피해를 입히고 우리 또한 피해가 크니,
그것이 양국의 우호에 장애가 될까 두렵습니다.
먼저 당에 있는 귀국의 포로를 송환하오니,
귀국에서도 우리의 포로를 돌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 Z.O 25 (* 조금 보고 -)
전쟁으로 국력이 쇄한 중국은, 이렇듯 먼저 화해를 요청해왔다.
이로써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명실상부한 패자로 군림하게된 것이다.
<ST 7>
(* 기본 세트 + 고구려성 배경 )
오늘 우리는 1400년 전,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을 통해
기록 이면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찾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동안 역사속에서 잊혀져 있었던 인물 -
"강이식"이란 한 영웅의 실체를 발견하고,
그가 이끌었던 전쟁이
실제로 어떻게 이뤄졌는지도 밝혀볼 수 있었습니다.
400년만에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를 상대로,
고구려가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고구려는 누구도 감히 넘볼 수 없는 강한 국력과 자부심을 갖고있었고,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수나라의 도전을 번번이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여기며 동아시아 최강의 국가로 군림했던
대제국 고구려 -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확인한 고구려의 참모습입니다.
카페 게시글
ㆍ한국역사바로알기
추적!고구려, 수나라 전쟁의 미스터리 - 2003 년 1 월 25 일 KBS ' 역사 스페셜 ' 방송
i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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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4.11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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