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노동자후원회 동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깊숙이 들어선 강추위 속에서도 연일 따뜻한 꽃을 피우기 위해 구속노동자들을 일일이 챙겨주시는 구노회 모든 식구, 동지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부터 드립니다.
제가 동지들께 편지를 드리게 된 까닭은 7월 30일 오전 10시, 운동 시간에 운동을 나가던 중 갑자기 성태현 교도관에게 영문을 모르는 폭행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저를 폭행한 성 교도관은 교도소 내 정기 자리 이동으로 제가 있는 사동에서는 갓 근무를 한 중간 교대 근무자이고, 긴팔 티는 제가 운동시에나 평상시에도 항상 입었던 옷이며 교도소에서 정상적으로 판매하는 옷입니다.
7월 30일 오전 10시, 이 날도 저는 평소와 똑같이 방에서 운동 나갈 준비를 하였고 “사동 도우미”는 10시가 되자 운동 팻말을 제 방 문에 붙였습니다.
그런데 운동을 나가던 도중 누군가가 갑자기 문 밖에서 전방 갈 짐을 내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전방은 27일 오늘 가기로 정해진 것이라 저는 짐을 모두 내어 주고 방에서 바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문 앞에 서 있던 성 교도관이 갑자기 긴팔 티를 벗으라고 말하며 밑도 끝도 없이 교도관의 정당한 지시에 불응했다고 상위 긴팔 티를 잡아당겨 흔들어 대며 가슴으로 저를 떠밀치는 것이었습니다. 저를 벽으로 떠밀어 놓은 상태에서도 악을 쓰며 위협적으로 달라 들어 옷을 빨리 벗으라고 했고 저는 저의 방 문앞 구석에 떠밀쳐진 상태에서 중립적인 다른 교도관에 의해 교도소 중앙 복도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복도로 쫓아 나온 성 교고관은 복도에서도 몇 명의 교도관들 앞에서 폭행의 정당성을 순서 없이 악을 쓰며 주장했고 “30번이면 다야”라고 악을 쓰며 저의 수번만 불러댔습니다.
그래서 저는 재차 성 교도관에게 갑자기 이러는 이유와 순서를 하나씩 차례로 설명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성 교도관은 제가 묻는 이유와 순서에 대해서는 전혀 말 한 마디 못하고 그냥 순서도 없고 이해도 하기 어려운 말만 제게 악을 쓰며 해대다 자랑스럽게 본인의 명찰을 보이며 신고 할 테면 해보라고 악을 쓰며 말한 뒤 어딘가로 슬그머니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날 처음 공안 담당을 맡은 이 교도관과 관구계장에세 직접 사과를 운동 중에 받았고 운동을 마치고 전방을 갔습니다.
하지만 성 교도관은 지금까지도 사과할 의사가 없어 보이고 ‘모르세요 폭행’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중략)
구노회 동지 여러분 교도관은 수형자에게는 묻지도 순서도 설명도 없이 갑자기 ‘모르세요 폭행’을 막 해대도 벌을 받지 않는 것입니까?
그리고 성태현 교도관의 얼굴을 가끔 볼 때면 속이 울렁거리고 막 토할 것 같습니다. 구노회 동지 여러분 제가 글을 잘 몰라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만 편지를 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구노회 동지 여러분 날씨가 갈수록 추워집니다. 부디 건강하시고 감기 조심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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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열 동지 제가 동지들께 죄송한 마음에 푸념 좀 털어 놓겠습니다.
제가 구노회 동지 여러분들께 많은 연대의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감사의 표현을 감히 드리지 못한 것은 제가 글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된 이유는 서울 옥정국민학교 2학년 때 서울역 앞에서 어느 어른들이 저를 꼬여 어딘가로 데리고 갔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저와 많은 남녀 아이들을 서울역 대우빌딩 뒤에서 철창이 있는 일톤 하얀색 화물탑차 짐 칸에 강제로 싣고 어딘가로 끌고갔습니다.
저는 감옥과 똑같은 그 곳에 갇혀 처음에는 매질과 기합을 당하며 프라스틱 꽃을 조립했고 몇 달 후 계급이 상승되어(‘신입생, 구마이, 깨비짱, 조장, 반장’) 100명이 넘는 아이들과 군에서 받은 제식훈련을 받았습니다.
제식훈련을 대오를 갖추어 절도 있고 일사분란하게 구령에 맞추어 받았고 머리에서 피가 나도록 모진 기합과 매질을 당했습니다.
저는 배가 고프면 송진, 나무 껍질, 각종 열매를 닥치는 데로 먹었고 외국으로 입양을 보내는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병들어 죽거나 맞아 죽거나 하면 보호소 산 위 담장 밑에 있는 조그만 창고 맨바닥에 옷 입은 상태 그대로 두었습니다.
병에 걸려 죽은 아이는 말라서 죽어 있었고 머리를 맞아 죽은 아이는 머리가 터져 있었습니다.
저도 온갖 기합과 곡괭이 자루로 매질을 당해 너무 많은 피가 쏟아져 죽음까지 간 적이 있었고 죽은 아이 옆에서 잠을 잔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새벽 경비를 같이 서던 친구와 탈출할 계획을 세웠고 새벽 3~4시 경비로 지정되어 경비를 서다가 산을 넘어 그 곳에서 탈출했습니다. 그곳은 서울 응암동에 있는 시립아동보호소였습니다.
그래서 저의 최종 학력은 서울 옥정초등학교 2학년이고 학적부에는 ‘겨울에 행방불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구노회 동지 여러분 제가 지금 이만큼이라도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동지들께서 매달 후원해주시는 <작은책> 덕분이고, <작은책> 발행인 안건모 대표님의 ‘삐딱한 글 쓰기’가 제게는 너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한겨레 신문>의 ‘함께하는 교육’, <한겨레>가 글을 쓰고 배우는데 너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구노회 동지 여러분 저의 아주 오래된 상처의 푸념을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2012년 12월 9일 밤에
대구교도소에서 천주석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