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코장 - 영화는 70년대 후반의 낯익은 풍경을 전한다.
그것은 <진짜진짜 미안해>를 보던 고교생이 자라서 자신의 이야기를 화면에 옮길 만큼 성장했다는 시대 변천을 의미한다. 어른들은 모른다. 우리들이 1980년대 TV에서 해주던 <호랑이 선생님>을 보면서 "에이~"하는 야유를 보냈던 사실을, <고교생일기>를 보면서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모든 예술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 시대를 반영하게 된다. 그토록 엄혹했던 교육현실을 경험하고 있는데도 어른들은 자기 자식들이 '고교얄개'들처럼 친구들 사이의 우정과 각별한 보살핌 속에 자라난다고 믿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모범생 현수와 불량아 우식(이정진)은 그렇게 서로의 코드에 접속한다. 거기에 단순히 이소룡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거기엔 그보다 먼저 성(性)이 있었고, 그 성의 주인은 은주(한가인)였다. 영화 <말죽거리잔혹사>는 근대화의 풍경 속에 자리한 성장 이데올로기 못지 않은 여성에 대한 전형적인 스테레오타입을 보여준다. 은주은 구원이자 동시에 파국의 원인이다. 우식은 여자는 나눌 수 있어도, 권력은 나눌 수 없다는 식의 남성성의 한 전형을 보인다.
영화 속 화자인 현수는 은주에게 끝끝내 제대로 된 사랑 고백을 전하지 못하고 돌아선다. 물론, 첫사랑의 실패에서 오는 아련한 회한을 강조하는 청춘물의 특성을 고려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는 이소룡을 전면으로 끌어내면서 육체적인 강함, 즉 순수함이 어떻게 굴절되는가를 보여준다.
지금은 기성세대가 된 유하가 어린 후배들에게 보내는 또다른 고교얄개이기도 하다. 아마도 지금 저 영화를 보고 있는 고교생들은 훗날 자라나서 당신들이 보고 있는 우리네 현실은 실제와는 또 이렇게 다르다는 말을 건네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유하 감독에게 당신은 그렇게라도 교실 유리창을 박살내 본 추억이라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어항 속 물고기들의 서열이 그러하듯 가장 힘 센 물고기가 어항 밑 바닥을 차지한다. 그는 2학년 짱이었고, 현수네 반의 비공식적인 우두머리였다. 선도부장 종훈과는 서로 엇비슷한 세력이었으나 종훈의 입장에서는 우식보다 잃을 것이 많았기 때문에, 게다가 우식은 학급 내에서 그다지 인기없는 짱은 아니었으므로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우식은 스스로의 무덤을 팠다. 우식이 학급 내에서 소위 자기가 거느릴 수 있는 아이들을 챙기는 조폭(마피아식)의 조직경영법을 알았다면 그가 그렇게 맥없이 종훈에게 당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소룡이 창안했다는 무예 '절권도'는 중국의 무예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정통 무술인들에게는 단지 승리하기 위한 기술만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천대받았다. 물론 이소룡이란 배우가 지닌 미덕이 단지 그것만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지만 영화는 우식의 패배를 통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워야만 승리할 수 있는 비정한 현실을 두 번, 세 번 강조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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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강남에서(Once Upon a time in KangNam)
<말죽거리잔혹사>는 시간적으로 제4공화국이라는 유신시기를, 공간적으로는 강남이라는 서울시의 특수한 지역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특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제목인 "말죽거리잔혹사"는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의 영화 <갱스 오브 뉴욕Gangs of New York>(2002)과 다르면서도 닮아있다. 뉴욕이 미국이란 제국의 성장사와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라면, 한국의 강남은 대한민국이란 민주공화정제 나라의 내막이 어떤 것인지 여실히 보여주는 공간이다. 우리는 지난 2003년 대선에서 모든 보수정당들이 불법 선거 자금 문제로 홍역을 치르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그 와중에 문제가 된 기업의 불법선거자금의 출처가 되었던 곳들이 바로 건설업종이다.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재벌들이 건설업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이렇듯 건설업이 비자금을 조성하기 유리한 기업환경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그 이유는 건설업종의 기업경영 이 그만큼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강남 개발의 숨겨진 이야기 중 하나는 이 지역개발 자체가 당시 집권당과 정부의 비자금 조성용이었다는 데 있다.
강남은 영화에서처럼 처음부터 강남이라 불리운 것도 아니고, 다른 여러 이름으로 불리웠었다. 말죽거리, 영동, 남서울 등의 여러 이름과 경쟁하다가 통칭 강남이란 이름을 얻었지만 지금도 강남을 단순히 강남구로 한정할 것인지, 서초, 양재 지역을 포함할 것인지 등으로 나뉘어 진다. 그 까닭은 강남이 지리적 공간에 의한 구분이라기 보다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문화적 벨트이자 삶의 형태로 구분되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그런 강남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을까? 강남 형성의 역사는 박정희 정권의 제3공화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현대건설은 국유하천을 막고, 공유수면을 매립하는 사업 허가를 얻어내고 이땅에 현대아파트를 건설한다. 이 무렵만 하더라도 아파트는 특별한 주거 형태였고, 그다지 각광받는 거주 공간이 아니었다. 1980년대 불처럼 일었던 아파트붐의 시작은 강남의 현대아파트로부터 시작되었다. 강남 현대 아파트들 중 일부는 정계, 언론계 등 권력층 요인들에게 은밀하게 분양되었고,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정계 안팎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처음엔 집권당 일부 의원들과만 관련이 있는 것처럼 드러났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단순히 여당의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야당의원들도 특혜분양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이 일과 관련해 당시 야당 총재는 "자식들이 많다보면 후레자식도 있기 마련”이라며 한 발짝 물러섰고, 결국 허가를 내주는 주무관서인 건설부 관료들마저도 이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그냥 거기서 끝났다면 강남 바람은 불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강남의 현대아파트에 권력층에 속하는 이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그네들이 특혜를 받아가며 입주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한 편으론 이들을 규탄하면서도 강남의 아파트들은 폭발적인 수요를 자랑했다. 이 일이 있기 5년전에 건설된 흔히 구반포라 알려진 반포아파트는 미분양이었기 때문에 인근 관악캠퍼스로 이전해온 서울대 교수들 중 집없는 이들에게 할애되었을 만큼 강남은 특별히 환영받는 거주 공간이 아니었다. 강남은 권력과의 밀착이라는 오명으로 더럽혀졌지만, 그것은 염치불구하고 성공하여 부자만 되면 괜찮다는 이 땅의 천민자본주의의 양심엔 전혀 거리낄 것이 없는 일이었다. 아니 도리어 어떻게 해서든 권력층 인물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공간에 빌붙어 오다가다 한 번이라도 만나고 싶다는 욕심에서인지, 그들과 함께 살면 그들과 같은 계급이 된다고 믿었는지 몰라도 강남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 재원, 서비스, 문화가 집중되어 있는 서울에서도 모든 면에서 삶의 조건이 월등한 공간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강남은 그 안에서 다시 수직적으로 분화된다. 강남 땅 여기저기에 하루가 다르게 성장한 아파트촌들은 다시 계급분화가 이루어져 어느 단지에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사회적 신분이 규정되었다. 같은 강남에도 서열이 있었고, 오늘날 강남 신분 상승의 종착지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되었다.
강남 사람들은 대한민국 자본주의의 정점이었고, 찬란한 금자탑이었다. 그들은 한 세대를 거치면서 강남은 이제 고정계급화되어가고, 유럽 내의 선진국들이 같은 유럽의 다른 국가들에 대해 배타적인 것처럼 같은 서울 사람에게도 배타성을 발휘한다. 종종 강남 일대의 아파트 단지에서 벌어지는 반상회는 아파트 값을 담합하는 비밀스런 회합 장소가 되었고, 본인들이 원치 않아도 타지역 사람들과는 일정한 경계에 놓이게 된다. 그동안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십 차례가 넘는 부동산 안정책이 발표되었지만 대책을 마련하는 이들조차 강남에 거주하고, 자식들을 강남의 8학군 학교에 진학시켜 온 사람들이었다. 정부가 부동산 가격 안정책을 발표할 때마다 도리어 강남의 부동산 가격은 폭등하기만 했다. 물론 강남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죄악시할 근거나 필요는 없다. 강남은 단지 한국의 천민자본주의란 더러운 연못이 피워 올린 한 송이 연꽃이다. 강남은 강하여 아름답다. 그러나 연꽃이 아무리 아름다와도 더러운 연못에서 올라오는 악취마저 가릴 수는 없다. 강남은 지역적으로 서울 한 복판에 우뚝 선 것이 아니라 서울의 다른 지역에 의해 포위된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는 모두 아름다운가?
뒤돌아보는 자는 누구나 반성문을 써야 한다고 누군가는 말했다는데, 최근 우리 영화계에는 이렇게 과거를 회상하는 영화들이 붐을 이루고 있다. 최근작으로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태극기 휘날리며>와 박정희 시대 실재했던 특수부대를 다룬 <실미도>를 비롯해서 지난해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했던 <살인의 추억> 등과 같이 실제 있었던 사건과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영화로부터 1981년 미국에서 죽은 복서 김득구를 그린 <챔피온>,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친구>,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똥개>, <품행제로>, <해적, 디스코 왕 되다>, <박하사탕>에 이르는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어떤 영화들은 시대물이라고는 하지만 단지 분위기를 빌려왔을 뿐이지만 어째서 지금 만들어지는 영화들이 이토록 과거에 집착하는가를 한 번쯤 물어봐야 한다. 거기엔 분명 과거에 대한 향수를 기대하고 만들어진 <친구>, <똥개>, <해적 디스코 왕 되다>와 같은 영화들이 있고, 과거에는 말하지 못했으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식의 영화들 <태극기 휘날리며>, <실미도>, <박하사탕>, <살인의 추억>과 같은 영화들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 <말죽거리잔혹사>가 다루던 시대인 1970년대에도 분명 한국에서는 영화가 제작되었고, 고교생을 다룬 영화들 이덕화, 임예진 주연의 <진짜 진짜 미안해>와 <고교얄개>와 같은 영화들이 극장에 걸렸고, 나름대로 관객들의 좋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 그런데 왜 한참이나 시대가 지난 뒤 그 시대를 다룬 영화들이 제작되는가?
그것은 <진짜진짜 미안해>를 보던 고교생이 자라서 자신의 이야기를 화면에 옮길 만큼 성장했다는 시대 변천을 의미한다. 어른들은 모른다. 우리들이 1980년대 TV에서 해주던 <호랑이 선생님>을 보면서 "에이~"하는 야유를 보냈던 사실을, <고교생일기>를 보면서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다. 모든 예술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그 시대를 반영하게 된다. 그토록 엄혹했던 교육현실을 경험하고 있는데도 어른들은 자기 자식들이 '고교얄개'들처럼 친구들 사이의 우정과 각별한 보살핌 속에 자라난다고 믿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감독 유하는 <말죽거리잔혹사>를 통해 사실은 이랬다는 말을 하고 싶어 한다. 그것은 70년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그 자신의 반영이자 동시에 지금은 기성세대가 된 유하가 어린 후배들에게 보내는 또다른 고교얄개이기도 하다. 아마도 지금 저 영화를 보고 있는 고교생들은 훗날 자라나서 당신들이 보고 있는 우리네 현실은 실제와는 또 이렇게 다르다는 말을 건네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유하 감독에게 당신은 그렇게라도 교실 유리창을 박살내 본 추억이라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가슴에 뺏지 3개를 달고 다니던 시절, 나는 교실에서 선생님을 쫒아내본 경험이 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중학교도 훗날 다니게 될 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강북에 있다가 이전해온 학교였는데, 비 오는 날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고무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신흥 깡촌으로 온 덕분에 아이들은 선생님들에게 무척이나 많이 맞아야 했다. 학교에 입학하던 날부터 졸업할 때까지 거의 매일같이 단체기합과 매타작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엔 조금의 과장도 섞이지 않았다. 인간은 쾌락에는 금방 익숙해져도 고통에는 익숙해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도 이 때 처음 실감할 수 있었다. 매일같이 갖은 이유로 쏟아지는 매 타작은 익숙해질 법도 한데, 그 고통만큼은 언제나 생생했다. 교사들마다 아이들을 때리는 도구가 달랐다. 여 선생 중에는 자기 팔목만큼이나 굵은 지휘봉으로 때리는 경우도 있었고, 아이들 사이에 특수부대 출신이라는 풍문이 떠돌던 기술 선생과 영어 선생은 아이들 보는 앞에서 대 걸레 자루를 손날로 부러뜨려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매를 만들어 때리는 것을 즐겼다. 매질은 대개 단체기합으로 진행되었고, 나는 곡갱이 자루로 맞아본 적도 있었다. 종종 선생님들의 별명은 그네들이 사용하는 폭력도구와 동일해서 어떤 이는 박달나무를 깍아 만든 봉으로 때린다고 해서 별명이 "박달봉"이었다. 그런 학교 분위기는 고스란히 학생에게도 전달되어 반장이나 선도부원들 역시 권위적이었고, 같은 학생끼리 매질하기도 했다.
내가 UDT출신이라는 풍문이 있던 영어 선생님을 우리 교실에 쫒아낸 것은 여름방학을 한 달여 앞둔 중3 무렵이었다. 중학교 3학년 교실은 고3교실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인문계 진학을 염두에 둔 아이들에게는 나름의 입시교실이었다. 참, 미리 밝혀둘 것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반장을 맡았다고 해서 전교 석차 1, 2위를 놓고 다투던 수재는 아니었다는 거다. 우리 반엔 전교 1위를 하던 정말 강남스러운 아이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공군 장교 출신으로 제네럴 다이나믹스에 근무했고, 그 녀석의 집은 청담동에 있었다. 영어 선생은 영어 성적이 평생을 좌우한다면서 학업에 유별난 의욕을 불태우던 분이었다(나는 지금도 그 선생님을 무척 좋아한다). 그는 교과서를 모두 외우면 당연히 좋은 성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며 1학기 중반부터 아이들에게 영어교과서를 외우게 했는데, 못 외우면 줄줄이 불려나가 매를 맞아야 했다. 그러던 어느날인가, 반 아이들 태반이 교과서를 못 외워왔고, 우리는 단체기합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 나는 선생님께 정식으로 항의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일이 선생님의 심기를 건드려 "너희들 같은 녀석들 가르필 필요가 없다"며 출석부를 패대기치고 나가 버렸다. 반 아이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고, 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은 고개를 떨궜다. 여름방학을 일주일 정도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는데, 일주일에 사흘 정도는 빠지지 않는 영어 수업 시간마다 우리는 자습을 해야했고, 그것을 참다 못한 한 친구가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일이 있었다. 결국, 나는 영어선생님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정식으로 사과했지만 진심으로 설복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 분에게 진심으로 설복된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선생님은 나중에 아이들의 비겁함을 질타했고, 자신의 속이 좁았음을 사과했다. 따지고 보면 촌동네 학교였으므로 가능했던 에피소드였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은 아름답다기 보다는 입맛이 씁쓸한 기억이었다. 동료들에게 버림받고, 적에게 구원받는 일이 즐거울리는 없지 않은가?
주먹은 가깝고 법은 멀었던 시대에 천대받는 육체의 냉소
시인으로서의 '유하'가 걸어온 길이 반드시 평탄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감독으로서의 '유하'가 걸어왔던 길에 비하면 시인 유하는 무척이나 행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90년대 초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라는 그의 두 번째 시집을 통해 그야말로 문단의 기린아가 되었다. 어찌보면 본래 그가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그의 시가 당시 출현하고 있던 소위 오렌지족이라는 강남족 시대 풍속사를 너무나 적실하게 반영한 탓도 컸던 '유하 붐'은 그로 하여금 본래 자신이 성취하고 싶었던 이상이었을 '하나대'의 풍경은 지워버리게 만들었다. 그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실패냐, 성공이냐의 기로에 선 감독에 불과했다. 그것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성공 이전에 자신이 출판했던 시집의 제명과 같은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게 가야한다고 너무 큰 실패를 했기 때문이다. 감독의 첫 데뷔작이 실패작인 일은 영화계에 비일비재한 일이다. 그러나 시집의 실패와 달리 영화의 실패는 보다 많은 책임을 지게 만든다. 게다가 그는 먼저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기에 그의 실패는 더욱 크게 보였다. 그가 절치부심한 끝에 감독으로 제기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영화의 실패는 상대적으로 시인으로서 유하의 입지를 좁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가 시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의 외도가 그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에 혼란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감독 유하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성공 이후에도 두 편의 단편 영화 <몰락 취미를 꿈꾸다>와 <좀비처럼 걸어봐>를 만들며 영화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 않았다. |
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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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쓰면 경박하다는 핀잔을 듣고, 진지하게 쓰면 자기 자신부터 적응이 잘 안 되는" 시인이지만, 영화에서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한 감독이다. 그건 아마도 시와 산문, 그리고 영화의 경계가 그로 하여금 다른 태도를 갖게 만드는 걸거다. 그는 1963년 전북 고창에서 출생하여, 세종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및 동국대학교 영화과를 졸업했다. 1988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하였고, 1996년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으로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시인으로서 유하는 사회의 풍속사를 풍자와 희화화를 통해 시로 드러내는데 능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의 첫 시집 <무림일기>에서는 대중문화의 한 줄기이자 마이너리티인 무협지적인 상상력을 통해 우리 사회의 폐부를 찌른다.
그는 "압구정동"을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으로, 이에 대비되는 공간으로서의 "하나대"를 "모든 것들을 오래 오래 길러온 어머니"와 같은 마음의 고향으로 표상한다. 그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곳은 '압구정동'이지만, 그의 시선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멀리 있는 '하나대'이다. 그의 시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모순은 하나대와 압구정동 사이의 긴장이자, 시인이 현재 머무는 지점이 압구정동이라는 사실에 있다. 시인으로서의 '유하'가 걸어온 길이 반드시 평탄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감독으로서의 '유하'가 걸어왔던 길에 비하면 시인 유하는 무척이나 행복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90년대 초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라는 그의 두 번째 시집을 통해 그야말로 문단의 기린아가 되었다.
어찌보면 본래 그가 의도했던 것 이상으로 그의 시가 당시 출현하고 있던 소위 오렌지족이라는 강남족 시대 풍속사를 너무나 적실하게 반영한 탓도 컸던 '유하 붐'은 그로 하여금 본래 자신이 성취하고 싶었던 이상이었을 '하나대'의 풍경은 지워버리게 만들었다. 그는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실패냐, 성공이냐의 기로에 선 감독에 불과했다. 그것은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성공 이전에 자신이 출판했던 시집의 제명과 같은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게 가야한다고 너무 큰 실패를 했기 때문이다. 감독의 첫 데뷔작이 실패작인 일은 영화계에 비일비재한 일이다. 그러나 시집의 실패와 달리 영화의 실패는 보다 많은 책임을 지게 만든다. 게다가 그는 먼저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기에 그의 실패는 더욱 크게 보였다.
그가 절치부심한 끝에 감독으로 제기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영화의 실패는 상대적으로 시인으로서 유하의 입지를 좁히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가 시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의 외도가 그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에 혼란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어쨌든 감독 유하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성공 이후에도 두 편의 단편 영화 <몰락 취미를 꿈꾸다>와 <좀비처럼 걸어봐>를 만들며 영화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 않았다.
■ 대표작 「천일마화」,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 (2004), <좀비처럼 걸어봐> (2003), <몰락 취미를 꿈꾸다> (2002)- 단편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2001),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1993), <시인 구보씨의 하루> (1990)-단편 영화 |
관련 사이트 & 참고 도서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2.3』-돌베개인문.사회과학신서 50/ 박세길 지음/ 돌베게(1988) - 1980년대 말에 대학생활을 한 이들은 대개 이 책을 읽어보았거나 아니면 '다쓰사'라는 약칭으로 호명되곤 하던 이 책의 이름이 기억날 것이다. 대학에서 의식화 학습의 커리큘럼에 포함되곤 하던 책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 이 책을 처음 접했던 여러분의 선배들과 달리 여러분들은 이 책을 접하면서 새삼스러운 충격을 받을 일은 없을 것 같다. 사실 이 정도 강도의 충격이란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매일같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MBC에서 방영해주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같은 프로그램에서도 과거 우리의 현대사 이면에 숨겨져 있던 비화들을 새롭게 발굴해서 보여주고 있으며 시사주간지에서도 심심치않게 반미적인 인식의 일단들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책을 읽으면 누구나 반미가 된다거나 갑자기 의식화되어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거리로 나서게 되는 것은 아니다.
『20세기 한국의 야만1.2』/ 노대명 외 지음/ 이병천, 조현연 엮음/ 일빛(2001) - 매일같이 반복되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은 마치 파블로프의 개의 조건반사실험의 실험체인 듯 폭력에 부감각해진다. 20세기를 마감하면서 국내의 소장파 연구자들이 주축이 되어 자신들이 평소 관심 있어하고, 주요 연구 테마로 삼았던 문제들에 대해 논문을 작성하고 그것을 한 데 묶은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우리가 지난 세기를 통해 배우지 못한다면 새로운 세기에도 역사는 반복될 것이라는 것이다. 21세기 한국의 야만은 과연 반복되어도 좋은 것인가?
『서준식의 생각』/ 서준식 지음/ 야간비행(2003) - 인권운동을 하면서 절박한 필요에 의해 서준식이 써온 글을 모았다. 지난 15년 간의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기록으로도, 서준식이라는 직업 운동가의 삶과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에세이.
『황해문화 42호 - 2004.봄』/ 황해문화 편집부 엮음 / 새얼문화재단(2004) - 42호의 특집은 말 많은 '강남 현상'이다. 일종의 특수한 '계급적 연대'를 형성하며 배타적.독점적인 공간을 재생산해온 강남, 그러나 꾸준히 원정출산에 나서는 강남권의 현주소와 해결해야 할 방향을 모색했다.
『월간 말 2004년 212호』- 월간 말에 실린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글을 참고했다. 정성일은 가장 신뢰할 만한 영화평론가들 중 하나이다.
사이버 NGO자료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족문제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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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적으로는 유하의 두 번째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 보다 그의 첫 번째 시집 <무림일기>를 무척이나 흥미롭게 읽었다. 유하는 자기 비하를 통한 냉소를 능동적으로 활용하는 시인이며, 이것은 그의 영화들에서도 반복적으로 활용된다. 가령,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준영(감우성)은 결혼은 현실, 연애는 낭만이란 나름의 결혼관을 가지고 있는 대학강사인데, 우연히 만난 디자이너 연희는 낭만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여자로 등장한다. 준영은 영화를 이끌어가는 화자이면서 동시에 결혼과 연애에 대한 특유의 냉소적인 자세로 일관하다 결국 사랑을 놓치고 마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유하에게서 드러나는 이런 면모는 영화 <말죽거리잔혹사>에서는 형태를 다소 달리 하면서 반복된다. 영화 속 화자인 현수는 은주에게 끝끝내 제대로 된 사랑 고백을 전하지 못하고 돌아선다. 물론, 첫사랑의 실패에서 오는 아련한 회한을 강조하는 청춘물의 특성을 고려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는 이소룡을 전면으로 끌어내면서 육체적인 강함, 즉 순수함이 어떻게 굴절되는가를 보여준다.
인권운동가 서준식은 그의 책 <서준식의 생각>에서 "어렸을 때 나는 거의 만능에 가까운 스포츠맨이었다. 일찍부터 땀흘리며 근육을 단련하는 일의 고통 속에 행복을 발견했던 나는 당연히 글쓰기나 책읽기와는 무관한 소년시절을 보냈다. 어느새 나는 확실히 단련된 근육이 우리에게 비겁해지지 않으려는 우직함이나 남을 속이지 않으려는 소박함을 선사해준다는 신앙과도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가냘픈 팔과 하얀 손으로 글 쓰는 자들을 ‘문약(文弱)’으로 단정하면서 본능적으로 경멸하곤 했다. ...중략... 아버지께서 경영하시던 영세한 가내공장 직공들은 거의가 내일에 대한 희망도 인생설계도 없는 떠돌이들이었다. 그들은 월급을 받으면 그것을 며칠 사이에 술과 오입질에 탕진해 버렸고 월초의 일손 부족은 늘 악몽처럼 아버지를 괴롭혔다. 뼈가 다 굵은 아들들을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애절한 눈길을 외면하지 못했던 나는 언제나 알아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지만 형이나 아우는 잽싸게 도망치기 일쑤였다.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되어 한나절을 보낸 나에게 아버지께서는 정말 고마워하시고 따뜻한 치하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진짜 기대는, 고된 육체노동을 묵묵히 견딘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망쳐 버린 아들들에게 있다는 것을 어슴푸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근육’이‘입’이나‘잔머리’에 열등감을 느껴야 하는 사회,‘근육’을 단련하면 할수록 손해를 보고 주변으로 내몰리는 사회에 대한 회의를 떨쳐내지도 못한 채 나는 고등학교 1학년말부터 근육단련 대신 지성 쌓기를 시도했다. 왠지 올바른 길을 포기하고 나 자신의 믿음을 배신한 것만 같았던 그때의 쓴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라고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고한다.
<말죽거리잔혹사>의 현수는 인권운동가 서준식과 똑같은 이유로 인해 반대로 근육을 단련해 나가는 과정을 겪는다. 물론 영화 속 현수의 나이가 어린 탓에 미처 그런 사실을 깨우치 못한 까닭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그가 살아냈던 세상이 절박할 만큼 뒤틀려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법은 늘 멀리있었고, 주먹은 언제나 가까운 시대. 이 영화는 그런 점에서 두 개의 판타지를 보여준다. 하나는 그런 시대에 던져보지 못했던 육체의 반항이 던지는 직접적인 복수의 카타르시스이고, 다른 하나는 이전의 것보다는 다소 미흡하지만 애마부인으로 낙인찍혀 버린 여배우 김부선에 의한 성적인 것이다. 현수는 첫사랑을 얻지 못한 대신 첫경험을 얻는다. 하지만 이것은 육체적이고 직접적인 복수만큼이나 그에겐 허망한 것이었다. 유하는 이렇게 육체의 순수를 버림으로 결국 시대의 정면에 서지 못하고 뒷길로 밀려나야 하는 삶을 노래한다.
이소룡 세대에게 바치는 비가 - 그 아픔을 반복하지마!
고향을 떠나 너나 할 것없이 잘 먹고 잘 사는 일을 지상과제로 알았던 70년대의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하면 된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오직 승리, 오직 성공, 오직 출세"를 부르짖었다. 실제 우리 사회가 요구한 것은 강팍하기 이를 데없는 성공지상주의였다. 승자가 아닌 자는 모두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분위기에서 이소룡은 진정한 강자였다. 이소룡이 창안했다는 무예 '절권도'는 중국의 무예에서 비롯된 것이긴 하지만 정통 무술인들에게는 단지 승리하기 위한 기술만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천대받았다. 물론 이소룡이란 배우가 지닌 미덕이 단지 그것만으로 평가될 일은 아니지만 영화는 우식의 패배를 통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워야만 승리할 수 있는 비정한 현실을 두 번, 세 번 강조한다. 패자가 되어 사라진 우식조차 현수에게 아이들 싸움은 먼저 선빵을 날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현수는 우식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한다. 현수는 '여드름'이 던진 우유팩에 얻어맞아 흥분하여 달려온 선도반장 종훈이 이를 말리는 햄버거를 때리는 틈을 노려 그에게 도전한다.
현수는 종훈에게 "옥상으로 따라와!"를 외치고, 앞장 서 계단을 오르는 종훈의 뒷통수에 쌍절곤으로 통렬한 선빵을 갈긴다. 이 영화에서 어찌보면 가장 중요하고 슬픈 장면은 이 대목이었을 것이고, 감독은 그 중요한 대목을 충분히 느껴보라는 차원에서인지 영화 전체에서 처음으로 슬로우 모션을 통해 이 장면을 보여준다. 나는 현수의 싸움 장면을 서너 차례에 걸쳐 리와인드시켜 가며 다시 보았다. 남자들이 술자리에서 자랑삼아 주장하듯 8대 1로 맞짱 떠서 이기는 이야기는 현실에선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며, 실제 싸움 현장을 한 번이라도 목격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이라도 싸워 본 사람이라면 살기 넘치는 싸움에선 먼저 상대를 자빠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 머리를 짖이기든, 귀를 깨물든 영화에서라면 절대 등장하지 않을 온갖 구질구질함이 있다는 걸 잘 안다. 마음처럼 주먹은 속도를 내며 날아가지지도 않을 뿐더러 겨냥한 대로 맞아주지도 않고, 설령 주먹이 제대로 꽂혔다 해도 상대를 가격한 주먹엔 찌르르한 타격감이 고스란히 돌아온다. 현수의 싸움이 그가 상상해온 것처럼 멋드러진 이소룡식 액션이 아니라 개싸움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순간 육체의 헐떡임 앞에서는 분노조차 거짓처럼 느껴진다. 달려든 아이의 머리통을 부여잡고 철제문에 쾅쾅 부딪힐 때 현수를 사로잡은 감정은 상대에 대한 분노나 미움이라기 보다는 공포와 두려움이다. 그건 싸움을 해본 이들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공포가 상대를 더욱 거세게 밀어부치게 만들고, 두려움이 나도 모르게 움켜 쥔 주먹에 힘을 쏟아 넣는다. 그러나 싸움이 끝나고 난 뒤 남는 감정은 이겼다는 승리감이 아니다. 그것은 그 과정을 거쳐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마치 토끼를 쫒아 트랙을 달리는 그레이하운드가 막상 미끼를 잡았을 때 그것이 증기식 피스톤으로 날쌔게 앞을 향해 달려가도록 조작된 거짓 미끼였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싸움이 끝나고 난 뒤 현수는 허탈감에 사로잡힌다. 그런 현수 앞에 학생들과 선생들이 달려와 외친다. "저 새끼 잡아!"라고. 현수에게 세상은 그다지 매력적인 것도, 그렇다고 성취해야 할 무엇이 남아 있지 않은 곳이다. 그래서 현수는 외친다.“대한민국 학교, 다 좆 까라 그래!” 이 순간 권상우는 매력적이었다. 혀가 짧아 연기자로 발성에 다소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은 그이지만 이 영화에서 그의 이런 단점은 캐릭터의 어눌함으로 포장되어 충분한 효과를 발휘했고, 마지막 비명과 같았던 외침조차 슬퍼보였다.
학교를 떠난 현수는 과연 행복했을까? 그 질문에 대답을 구하는 일은 비루하다. 우리들은 학교라는 공간이 사회보다는 그나마 낫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학교에서는 어째서 페어플레이를 하지 않느냐고 말할 수 있지만 사회에선 그런 질문조차 패자의 목소리로 묻혀 버린다. 영화의 말미에 가서 현수의 아버지(천호진)는 현수를 이해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를 포용하는 자세를 보이며 묻는다. "그런데 이소룡이는 대학 나왔냐?"(참고로 이소룡은 워싱턴주립대학 심리학부 중퇴다) 부모 자식의 문제가 강남 문제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해결방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이 영화는 분명히 감독 자신의 퇴행적인 심리를 반영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견해처럼 좇같은 대한민국에 면죄부를 주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 이유는 뒤돌아보는 자는 누구나 반성문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쨌든 삶은 지속된다.
루이 아라공은 "죽는다고 사라지는 것은 아닐터 타인들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비록 영화 속의 현수는 행복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시대와 정면으로 격돌하지는 못했다. 영화는 1978년의 시점에 끝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듬해인 1979년 폭군이 민중혁명이라는 정당한 절차에 의해 심판받지 못하고, 심복의 총탄에 쓰러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우리들의 힘으로 폭군을 물리치지 못한 탓에 1980년 5월 18일의 피흘림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역사적 약자에게 있어 가장 최후의 무기는 기억이다. 우리의 기억은 곧 역사의 현장이며 잊지 않기 위한 투쟁의 현장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종이로 씌어지는 역사에 기록되지 못할 수도 있다. 많은 이름없는 이들이 그렇게 사라졌듯이, 그러나 우리는 그 이름없는 패배자들을 이름이 아닌 존재로 기억한다. 우리는 기억함으로써 비록 당대에는 승리할 수 없음에도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역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