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권 金明權 (1889 ~ 1923)】 "대한독립단, 대한청년단연합회 가입 일본순사 척살"
1889년 5월 12일 평안남도 덕천군(德川郡) 태극면(太極面) 송산리(松山里)에서 김이근(金利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소학교 졸업 후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한일병합에 불만을 품고 배일사상을 선전하며 독립을 열망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1919년 5월과 8월 고향 송산교회 장로인 김공근(金珙根)과 함께 송산교회를 중심으로 두 차례 만세 시위를 조직하였다. 일제의 단속을 피해 9월에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浦)로 이주하였고,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였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조맹선(趙孟善)·최영호(崔永鎬) 등 10여 명이 참가하여 조직한 단체로 무장 독립전쟁을 우선 실행하려는 단체였다. 대한독립단은 맹산군(孟山郡)의 호랑이굴을 중심으로 김달규(金達奎)·박승엽(朴承燁)·이원보(李元甫) 등에게 영원군(寧遠郡)·덕천군·맹산군에 지방조직인 지단(支團)을 각각 설치하도록 하였다. 유림, 천도교회, 기독교회 인사도 가입한 지방조직을 호랑이굴에서 이름을 따 호굴독립단이라 불렀다. 호굴독립단은 전단(傳單)·격문(檄文)·독립신문 살포, 군자금 모연 투쟁, 친일파 부일분자 응징, 일본 관공서 파괴와 관원 살해 등을 활발하게 벌여, 한때 3개 군 지역을 낮에는 일제 치하, 밤에는 독립군 천하로 만들었다.
1919년 12월에 결성된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하였고, 1921년 1월 오운흥(吳雲興)·서춘근(徐春根)과 함께 국내에 잠입하였다. 서춘근은 평양부, 오운흥은 황해도, 자신은 고향인 덕천 일대에서 각자 활동하며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한 약속에 따라 왕익붕(王益鵬)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들의 잠입 사실을 입수한 경찰이 덕천 일대에서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1월 중순 왕익붕과 함께 덕천군 태극면 영창리(永昌里) 다리를 건너던 중, 덕천경찰서 후쿠이(福井) 순사부장 등 일본 경찰 3명이 불시에 검문하며 왕익붕의 신체를 검색하였다. 때마침 왕익붕 뒤에 서 있어 자신을 검문할 차례가 되자 경찰을 기습공격하여 오가와라 타쓰노스케小河原辰之助를 사살하고 현장에서 빠져나왔다. 피신 도중 옷을 벗어 나뭇가지에 사람 모양으로 꾸며 걸어 놓아 경찰의 총격을 피하며 탄환을 모두 소모하게 만들고 역습을 감행하여 검거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순사부장이 가한 위협으로 부상을 입었으나, 공의(公醫) 노창도(盧昌道)에게 비밀리에 치료를 받고 완치되었다.
맹산군수 사직 관련 보도(『매일신보』 1921.10.21) [판형4] |
부상 치료를 받은 후 1921년 2월 장원보(張源輔)에게 권총과 탄환을 건넸다. 장원보는 이때 받은 무기를 가지고 이원보·강대순(姜大舜)과 함께 덕천 덕주고개에서 한인 순사 박창의를 사살하고 공금 5,000원과 권총을 획득하였다.
김명권 판결 및 항소 보도(『매일신보』 1923.3.2) [판형2] |
만주로 갔다가 다시 평안북도에서 활동을 계속하던 중에 1922년 4월 강계경찰서 경찰대에 체포되었다. 1923년 2월 28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곧바로 불복하고 항소했지만 6월 1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9월 6일 평양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한국전쟁 때 월남한 외동딸이 머리카락을 보관하고 있다가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889년 5월 12일 평안남도 덕천군(德川郡) 태극면(太極面) 송산리(松山里)에서 김이근(金利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소학교 졸업 후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한일병합에 불만을 품고 배일사상을 선전하며 독립을 열망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1919년 5월과 8월 고향 송산교회 장로인 김공근(金珙根)과 함께 송산교회를 중심으로 두 차례 만세 시위를 조직하였다. 일제의 단속을 피해 9월에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浦)로 이주하였고,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하였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4월 조맹선(趙孟善)·최영호(崔永鎬) 등 10여 명이 참가하여 조직한 단체로 무장 독립전쟁을 우선 실행하려는 단체였다. 대한독립단은 맹산군(孟山郡)의 호랑이굴을 중심으로 김달규(金達奎)·박승엽(朴承燁)·이원보(李元甫) 등에게 영원군(寧遠郡)·덕천군·맹산군에 지방조직인 지단(支團)을 각각 설치하도록 하였다. 유림, 천도교회, 기독교회 인사도 가입한 지방조직을 호랑이굴에서 이름을 따 호굴독립단이라 불렀다. 호굴독립단은 전단(傳單)·격문(檄文)·독립신문 살포, 군자금 모연 투쟁, 친일파 부일분자 응징, 일본 관공서 파괴와 관원 살해 등을 활발하게 벌여, 한때 3개 군 지역을 낮에는 일제 치하, 밤에는 독립군 천하로 만들었다.
1919년 12월에 결성된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하였고, 1921년 1월 오운흥(吳雲興)·서춘근(徐春根)과 함께 국내에 잠입하였다. 서춘근은 평양부, 오운흥은 황해도, 자신은 고향인 덕천 일대에서 각자 활동하며 동지를 규합하고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한 약속에 따라 왕익붕(王益鵬)과 함께 활동하였다. 이들의 잠입 사실을 입수한 경찰이 덕천 일대에서 경계를 강화하고 있던 1월 중순 왕익붕과 함께 덕천군 태극면 영창리(永昌里) 다리를 건너던 중, 덕천경찰서 후쿠이(福井) 순사부장 등 일본 경찰 3명이 불시에 검문하며 왕익붕의 신체를 검색하였다. 때마침 왕익붕 뒤에 서 있어 자신을 검문할 차례가 되자 경찰을 기습공격하여 오가와라 타쓰노스케 小河原辰之助를 사살하고 현장에서 빠져나왔다. 피신 도중 옷을 벗어 나뭇가지에 사람 모양으로 꾸며 걸어 놓아 경찰의 총격을 피하며 탄환을 모두 소모하게 만들고 역습을 감행하여 검거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순사부장이 가한 위협으로 부상을 입었으나, 공의(公醫) 노창도(盧昌道)에게 비밀리에 치료를 받고 완치되었다.
맹산군수 사직 관련 보도(『매일신보』 1921.10.21) [판형4] |
부상 치료를 받은 후 1921년 2월 장원보(張源輔)에게 권총과 탄환을 건넸다. 장원보는 이때 받은 무기를 가지고 이원보·강대순(姜大舜)과 함께 덕천 덕주고개에서 한인 순사 박창의를 사살하고 공금 5,000원과 권총을 획득하였다.
김명권 판결 및 항소 보도(『매일신보』 1923.3.2) [판형2] |
만주로 갔다가 다시 평안북도에서 활동을 계속하던 중에 1922년 4월 강계경찰서 경찰대에 체포되었다. 1923년 2월 28일 평양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곧바로 불복하고 항소했지만 6월 1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9월 6일 평양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한국전쟁 때 월남한 외동딸이 머리카락을 보관하고 있다가 국립묘지에 안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