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한 문화재 발견이야기 몇 소재
화순 장 군 식
오천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민족은 소중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그 문화재는 우리 곁에 있기도 하지만 땅 속이나 또는 다른 곳에서 영영 빛을 못 보는 것도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 정말 극본보다 더 극적으로 우리 곁에 온 경우도 많다. 나는 드라마틱하다는 말로 표현하였는데 이외에도 정말 극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온 사례가 많을 것이다. 백제대향로 같은 경우처럼 문화재 발굴과정에 우연히 발견 된 것은 드라마틱하다 할 수 없다.
1. 빗물로 발견하게 된 호남 최초의 화순 대곡리 청동 유물(국보 143호)
국보 143호 화순 대곡리 청동유물은 호남 최초의 청동유물인데다 그 발견이야기가 매우 드라마틱하고 흥미롭다. 13점의 청동 유물이 출토된 것인데 그때까지는 기 출토된 청동검 등이 출토지가 불확실하였다 한다.
화순 대곡리 청동유물 일괄(13점) 문화재청 인용
(특히 이 팔주월령은 중국, 일본 등 어디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는 오로지 한국에만 존재하는 유물이다)
1971년 이 묘광(발견지)의 터 위에 살던 구재천(具在天, 당시 67세)이라는 분이 큰비로 막힌 창고 처마 밑의 빗물을 흘러 보낼 요량으로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파다가 텅텅 소리가 나고 그 아래에서 녹이 심하게 슨 쇠붙이 조각들을 발견하였다. 촌노 구씨가 이것을 유심히 보지 않았고 그는 얼마 후 이 쇠붙이들을 마을에 온 엿장수에게 주고 엿 몇 가락과 바꾸어버렸다. 그런데 천만 다행으로 이 이름 모를 떠돌이 엿장수는 그 고물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던지 전라남도청 문화공보실에 신고를 하게 된 것이다.
신고접수 4개월 후 12월 20일 경 현장 발굴 작업 결과 상하 2단의 목관에서 청동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 2점, 세형동검(靑銅劍) 3점, 청동팔주령(靑銅八珠鈴) 2점, 청동쌍령구(靑銅雙鈴具) 2점, 청동도끼(靑銅斧) 1점, 청동삭구 1점 등 모두 11점을 수습하였다. 이 청동유물은 매우 귀중한 문화재로 감정을 받아 일괄 11점이 다음해인 1972년 국보 제143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37년이 지난 2008년 주인이 없는 창고를 헐고 추가 발굴 결과 세형동검 2점이 수습되었다.
문화재 보상법상으로는 첫 발견자 구재천씨가 해당되지만 1주일 이내에 신고하도록 되어 있어 그 것을 지키지 못했고 엿장수에게 넘긴 것도 있어 당시 평가액 3,000만원의 10%인 300만원의 보상금(아마 이 돈이면 당시에 광주의 단독주택 몇 채는 살만한 거금임)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때 난 고등학생이었고 이 기사를 신문에서 본 적이 있다.)
2.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금동불, 야산 돌무더기를 파헤치다 발견되다(국보 119호)
‘금동연가 7년명 여래입상’. 이 불상은 제작연대(기미년 539년)가 있는 가장 오래된 금동불이다’(국보 제119호)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이미지 만다라불교문화원 인용).
1963년 7월 16일 경남 의령 대의면 하촌리 마을밖 도로공사에 품팔이를 나온 마을주민 강갑순씨(40)와 큰아들 전병철군(17)이 야산 비탈의 돌무더기를 파헤치고 있었는데, 얼마쯤 파내려 가다 두사람은 깜짝 놀랐다. 걸리적 거리던 잡석 하나를 곡괭이 끝으로 제치자 네모반듯한 작은 공간이 있었고, 그 안에 누워있던 금빛 찬란한 불상을 본 것이다. 급히 현장에 온 전문가들은 신고된 불상을 친견하고는 경악했다.
제작 연대가 명문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금동불상은 둥근 연꽃 대좌 위에 중생의 고통을 풀어주는 수인을 하고 있는 부처님이 소용돌이 치는 불꽃 모양의 배모양 광배와 세트를 이루고 있었다. 높이 16.2㎝에 불과하지만 광배 뒷면에 새겨져있는 ‘연가7년 고려국낙랑’(延嘉七年歲在己未高麗國樂浪)으로 시작되는 4행 17자의 명문이 불상의 가치를 높였다. 즉 이 불상은 ‘기미년(539년)’이라는 제작 연대가 있는 가장 오래된 ‘기년명 금동불’이었다. 전문가들은 고구려 불상이 왜 가야 혹은 신라지역에서 발견되었는지 의문이라 했다. 또 이 불상은 중국 북위 시대의 양식을 받아들여 한국적인 정서와 미감으로 재해석한 ‘한국적 조형미의 선구작’으로 꼽힌다. 불상은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의 이름으로 국보(제119호)로 지정됐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은 불상을 발견 신고한 강갑순씨 모자와 땅 임자(전모씨·55)에게 각각 20만원씩의 보상금을 나눠주었다.
3. 주막터 확장 중 발견된 금관총 금관(국보 87호)
-여러 매체 요약-
일제강점기인 1921년 어느 가을날 경주읍내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땅속에서 금 귀걸이 등 금제품이 나와 애들이 주워서 가지고 놀고 있다.’ 이 소문이 삽시간에 경주읍내에 퍼져 당시 경주경찰서 미야케 고우조우(三宅興三) 순사의 귀에 들어와 진원지를 찾아 나섰다.
소문의 진원지는 봉황대(鳳凰臺) 아래 경주 로서동 길가에 붙어있는 주막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주막을 경영하고 있던 박문환은 장사가 잘되자 주막을 확장해 손님을 더 많이 받고자 했다. 그래서 집 뒤의 언덕에 의지하고 있던 작은 뒤뜰을 확장하기 위해 터를 고르다 우연히 발견되었다. 그는 자신의 주막이 무덤을 의지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땅속에서 금붙이가 출토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되어 소문이 돌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야케 순사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고대 신라 왕족이거나 귀족의 무덤임이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즉시 공사를 중단시켰다. 당시 일본순사의 권한은 막강했기 때문에 박 씨는 대꾸 한마디 못하고 작업을 중단해야했다. 그는 이 사실을 즉시 상사인 이와미 히사미츠(岩見久光)경찰서장에게 서면으로 보고하고 긴급지시를 기다렸다.
보고를 받은 이와미 경찰서장은 당시 경주주재 조선총독부박물관 촉탁으로 있던 모로시카 히로오(諸鹿央雄)와 함께 현장으로 나가 현장을 살펴본 뒤 곧 경찰서장 입회하에 유물을 수거하기로 하고 경주보통학교(현 계림초등학교) 교장인 오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 등과 함께 발굴 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발굴조사는 4일 만인 9월 30일에 완료되었다.
외국 사례 : 양치기 소년의 돌팔매에 발견한 성경 ‘사해사본’
이스라엘 쿰란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사본’(또는 쿰란 사본)이라 불리는 성서의 사본은 BC250년 - AD68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판명되었다고 한다. 현존하는 구약성서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가장 많은 사본이 발견된 4번 동굴(1,000 텍스트 중 700여개 발견)과 이사야서 (블러그 소피아에서 인용)
양치기 소년의 돌팔매질에 의해 발견된 사해사본이 세상으로 나오기까지는 극본보다 드라마틱하고 흥미롭다. 1947년 2월, 이곳 광야에서 베두인 소년이 잃어버린 양을 찾고 있다가 저 멀리 언덕 위에 동굴을 보고 그 안에 양이 들어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동굴안으로 돌을 던졌는데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호기심을 가진 소년은 동굴 안에 들어가 8개의 항아리를 발견하였는데, 그 항아리 안에는 아마포에 잘 싸인 가죽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다. 당연히 그 소년은 그것들이 어마어마한 역사적 가치를 지녔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소년은 그 두루마리의 일부를 시장으로 가져가 골동품상인에게 넘겼다. 그 두루마리는 여러 사람을 손을 거쳐, 두루마리 중 4개는 시리아의 예루살렘 정교회 소속 대주교 마르아타나시우스 사무엘이 구입하고, 나머지 3개는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의 수케닉 교수가 구입했다고 한다. 수케닉 교수가 사망한 후, 이스라엘군의 총사령관을 지낸 그의 아들 야딘이 1954년 사무엘 대주교로부터 나머지 두루마리를 구입함으로써 총 8개의 사해 사본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사본들은 현재 이스라엘 국립 박물관의 성서의 전당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1948년 이스라엘 독립전쟁으로 발굴이 잠시 중단되다가 1951~1956년 6년간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쿰란 주변 11개 동굴에서 약 800~1000여개의 두루마리를 발견했고 주위에서 공동묘지 3개와 1,200개의 무덤지역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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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국보급 문화재의 발견~~ 참 재미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문화재발굴 스토리를 알게되어 더 가깝게 느껴지네요
우연한 기회에 발굴되는 문화재가 참 많군요. 문화재에 대하여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