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0 편을 묵상하며
다윗의 시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6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7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이 시는 메시아에 대한 암시로 유명하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은 이 시를 인용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메시아이심을 증거했다. 즉,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이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으신 것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었다(행 2:35, 7:55~56, 롬 8:34, 골 3:1, 히 1:3, 8:1, 10:12, 12:2, 벧전 3:22).
예수께서도 이 말씀을 인용하셔서 자신이 바로 그리스도임을 암시하셨다(마 22:44, 26:64, 막 12:36, 14:62, 16:19, 눅 20:43). 신약시대의 신자들에게 예수님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아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분이라고 서슴없이 대답할 것이다. 그들은 시편 110편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확신했기 때문이라고 상상해 볼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할 때 시편 110편을 인용했다(히 5:6, 10, 11, 6:20, 7:1, 6, 10, 11, 17). 시편 110편은 그리스도를 노래한 전형적인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편 110편을 그 자체로만 보면 그 시는 어떤 날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날은 ‘주의 권능의 날’이며(3절), 동시에 주님이 ‘노하시는 날’이다(5절).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날은 세상을 심판하는 날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시온에서 왕으로 등극하시는 그리스도는 원수들을 다스릴 권능의 규를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 날에 많은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주님께 나와 헌신할 것이다.
그 날에 하나님의 오른쪽에 계신 주님이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다. 이 세상 임금들을 쫓아내신다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요 12:31, 16:11)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다스리던 세상은 이제 끝이 나고 세상을 다스리는 새로운 왕이 나셨다. 그분은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셨고 하늘과 땅의 대권을 받으셨다. 그분의 통치가 시작되었다고 선포하는 것이 바로 복음선포였다.
시편 110편을 노래하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서 일으키셔서 그에게 모든 대권을 맡기시고 세상 나라들을 통치하실 세상을 고대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날이며, 주의 날이며, 주님이 그들에게 오시는 날이다. 신약성서에서 주님이 오신다는 말씀은 바로 이런 전통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주님의 날을 기다렸다. 그들은 주의 권능의 날을 기다렸다. 그날은 진노하시는 날인데 그 이유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심판을 받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날은 보응의 날이 될 것인데 그 이유는 신실한 백성들이 옳았음을 하나님이 인정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님이 2천년 전에도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껏 오시지 않은 것을 보면 이상하단 말이야. 그렇지 않나요?’ 라는 질문은 주의 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의 누구에게나 약속하시는 분이다.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에 악을 하나님은 보신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의 충성된 삶을 다 아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 3:11).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 4:7).
하나님의 사람들은 노아의 시대에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하고 용기를 얻는다. 그들은 또한 모세를 통하여 그 백성을 애굽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 시대에도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을 믿고 기대한다. 또한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도 그 위대한 대열에 합류하고 있음을 깨닫고 자긍심을 갖는다. 그리고 주님이 속히 오셔서 이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실 것을 믿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과거를 살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거나 잊어버린다. 그들의 생각은 이런 식일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하신 지 2천년이나 지났잖아? 정말 주님이 다시 오시긴 하시는 걸까? 아무도 그 날과 그 시는 알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처럼 재림에 대한 약속은 우리를 너무 피곤하게 하는 것 같아.’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그 가르침을 따르다 보면, 특이한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생각은 이 세상을 아름다운 하나님의 작품으로 이해하며, 인간을 존귀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대리인으로 여긴다. 그리고 하나님이 지금 이 모든 만물과 만국을 붙드시고 주관하심을 분명히 확신하게 한다. 그래서 살아계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그 앞에서 즐거워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현재 세대의 어그러진 모습을 바로잡으실 것임을 믿는다. 주님이 개입하시고 다시 오셔서 이 모든 것을 심판하실 때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행한 모든 일들이 드러나고 면류관을 받을 것을 기대한다. 이런 믿음이 그들에게 불의와 불법을 멀리하고 진실과 자비를 행하게 한다. 그들이 이렇게 사는 이유는 그것을 위해 자신들이 지음을 받았으며 그들이 섬기는 주님이 열어 주시는 세상이 공의와 자비가 충만할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자가 마땅히 이런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함에도 그 이상의 생각을 할 때가 있다(롬 12:3). 그들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생각을 가로막는 생각에 젖어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생각을 사로잡아 복종하게 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신자들은 스스로의 착각에 빠져 하나님의 소관인 때와 기한을 자기의 탐구분야로 삼으며, 하나님이 주시는 미래가 아닌 자신이 마음 속에 만들어낸 유토피아를 꿈꾼다.
이렇게 될 때마다 기독교 신앙은 기형적이 되고 반사회적이 된다. 그래서 극단적인 종말론자가 되거나 이 세상에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하여 책임 있는 행동을 하지 않고 공동체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 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생각하는 미래상이 그리스도의 미래상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오고 간 대화를 보면 이런 대조가 잘 드러난다. 특히 승천을 앞두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지금입니까?’ 그때 주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가 아니요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증인이 되리라.’
내일부터 대림절이 시작된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어떤 것을 기대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자.
시편 110편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의 권능의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초기교회 신도들은 자신들의 시대가 바로 그때임을 확신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세를 살고 있다고 굳게 믿었다. 하나님이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이 바로 그 증거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이제 새로운 날이 시작되었음을 알고 자신들이 바로 새벽 이슬 같은 청년들이며, 거룩한 옷을 입은 백성들로서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대로 세상에는 점점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악인들은 심판을 받았다.
동일하게 우리들도 그래야 한다. 주님이 언제 오시는지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중요한 것은 다윗의 시대에나 초기교회의 시대에도 악인이 있었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세력들이 도처에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신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았다. 그런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의 약속을 믿고 노래했다.
그들의 노래는 하나님이 권능을 나타내시는 날에 하나님의 메시아를 높이시고 하나님 오른쪽 보좌에 앉게 하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맡기실 때, 주의 백성들은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께 경배하며, 주님은 만국을 치리하시며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실 것이다. 그 날에는 대로에 시내가 흐를 것인데 왕께서는 길 가를 따라 흐르는 생명수를 마시고 고개를 들어 만국과 만민을 향하여 평안을 선포하실 것이다.
이런 환상을 기록한 것이 요한계시록이다. 그러므로 시편 110편은 주의 권능의 날을 기다리는 다윗의 희망시라면, 요한계시록은 주님의 영광의 날을 기다리는 밧모섬의 요한의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그 둘의 문학적 장르는 다르지만 그 내용은 동일하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이런 희망의 세상을 비유 속에 담아 들려주셨다.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로서 예언자들의 메시지와 조화를 이룬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돋아나 만민의 기치로 서고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라고 했다(사 11:10). 예수께서는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작은 씨앗이지만 나중에 공중의 새들이 깃들이게 된다고 희망을 들려주셨다. 여인이 가루 서말 속에 넣은 누룩처럼 작아도 그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한다고 온 세상이 새롭게 될 것을 기대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이 모든 이야기들과 예언들, 시편과 성경적 판타지들은 대림절에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일깨워준다.
<끝>.
참고 자료
대림절은 어떤 절기인가? (1)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694
대림절은 어떤 절기인가? (2)
https://cafe.daum.net/Wellspring/8SB1/6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