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03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 성령강림 후 제14주)
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서
출3:1-15; 롬12:9-21; 마16:21-28
지난 한 주는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과, 깊어진 가을 하늘, 그리고 밤하늘을 아름답게 비춰주는 보름달이 있어서 행복하고 풍성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타들어가게 만들어 버릴 것 같이 작열하던 태양은 과실과 곡식이 여물도록 한결 부드러운 빛으로 바뀌었습니다. 올 해 들어 가장 컸던 슈퍼문과 블루문이 뿜어내는 신비로운 빛을 바라보면서 바쁜 일상을 잠시 멈추고 내면에 작은 공간과 틈을 만들어내는 뜻밖의 기회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열려 있기만 하다면, 현재를 누릴 수 있는 은총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출애굽기 본문은 모세가 이집트 공주의 양자로 왕궁에서 지내다가 동족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고, 얼마 후에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싸움을 말리려다 그들에게서도 거부당한 뒤 미디안으로 도망친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모세는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딸과 결혼하여 장인의 양을 치면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집트에 두고 온 동족의 탄식소리와 부르짖는 소리에 전혀 반응할 수 없던 모세는 좌절감과 무료함 속에서 삶의 전환점이 된 불에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보게 됩니다.
이 떨기나무는 호렙산 주변의 미디안 광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키가 작은 관목류의 가시덤불입니다. 이 가시덤불은 너무 약해서 여름의 사막 열기가 뜨거워지면 일부러 불을 붙이지 않더라도 쉽게 발화되고, 일단 발화가 되면 나무가 너무 약해서 즉시 소멸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에게는 떨기나무에 스스로 불이 붙어서 미처 알아차리기도 전에 소멸되어 버리는 일은 흔했습니다. 그렇게 연약한 떨기에 불이 붙었는데도 타서 없어지지 않는 현상은 모세가 보기에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 놀라운 광경을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떨기나무를 향해 다가오는 그에게 하나님은 “모세야, 모세야!” 하고 부르셨습니다. 여기에 있다고 대답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너는 신을 벗어라.” 유한한 인간의 신 경험은 두려움과 신비로움을 일으키면서 사람을 매료시킵니다. 이것을 누미노제라고 부릅니다. 모세는 누미노제 경험 앞에서 이것을 머리로 파악해보려 합니다.
그러나 성스러운 신적 현현 앞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머리가 아닌 맨발로, 몸으로 직접 경험하라고 명하십니다. 이미지들이 너무나 선명합니다. 불에 타지 않는 떨기나무, 벗어놓은 신발, 맨발로 땅을 딛고 서있는 모세. 우리도 머리로 모세의 경험을 파악하는 대신, 이 이미지들을 그저 고요히 바라보면서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러면 이미지는 우리를 신비로운 상징의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신발은 우리가 입고 착용하는 의상과 물건 가운데 가장 아래에 있습니다. 우리가 두 발 딛고 있는 현실과 관련한 우리의 입장을 드러냅니다. 신발은 우리가 발로 땅 위에 얼마나 굳건히 서 있는지, 땅이 우리를 얼마나 굳건히 지탱해주는지 우리의 상태와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신발은 우리 존재를 오롯이 담아내는 그릇이며, 우리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존재를 잘 담아내고, 우리의 색깔을 표현할 수 있는 신발을 신는 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발을 그저 하찮고 부끄럽게 여겨 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고유의 신성함이 드러나도록 신발은 발을 받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자신을 잘 드러내고 지지해줄 수 있도록 우리에게 어울리는 신발을 찾아 신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 자신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소중히 여기는 삶의 태도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말씀은 좋은 신발을 찾아 신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갑니다. 우리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의 존재를 잘 돌보고 가꾸는 징표였던 소중한 신발마저 벗어버려야 하는 중요한 순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에 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 서서 신을 벗는 행위가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과 본래 하나였던 우리는 본모습을 잊은 채, 여러 옷가지들과 물건들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 소외감을 감추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시선과 기준에 맞춰 따라가기보다 자신의 고유한 형태와 색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분명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후에 자신의 본모습을 알기 위해 지금까지 자신이 만들어놓은 틀과 형태를 벗어버리는 일이 또한 뒤따라야 합니다. 자신의 신발을 벗고 맨발로 성스러운 땅을 딛는 일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다시 일치되고 하나 되는 순간입니다.
모든 보호 장비와 방어기제들을 벗어놓고 맨발로 땅을 의식하면서 서있는 것은 지금 여기에 생생하게 살아 있음을 의미하며, 매일의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우리 안에서 형성합니다. 뿐만 아니라, 땅속에는 아직 발현되지 못한 씨앗들이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품고 잠들어 있습니다. 두발로 땅을 딛고 서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잠재력을 인식하면서, 이 씨앗들을 품고 있는 대지의 생명력과 에너지를 우리 몸 안으로 먼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대지의 생명력과 에너지는 우리 안에 잠들어있는 신성, 즉 하나님의 형상을 깨웁니다.
땅이 품고 있는 에너지와 생명력을 아무런 저항 없이 단순히 받아들이기만 해도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의 씨는 스스로 발아하여 싹을 틔우고 자라나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려는 갈망을 담아 의식적으로 내딛는 우리의 발걸음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 힘으로 세상을 향해 한걸음씩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의식하고 걷기만 해도 우리의 발바닥은 생명력과 에너지를 흡수하여 우리가 삶을 살아내도록 하는 힘이 실제로 됩니다. 변화는 이렇게 의식적으로 한걸음을 떼는 것처럼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현현하시는 자리가 바로 메마른 광야에 뿌리 내리고 있는 연약한 떨기나무라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감춰져있는 신이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어 인간과 접촉하는 장소가 바로 이 떨기나무 한가운데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이 연약한 떨기 한가운데 현현하셔서 광야의 뜨거운 태양열로부터 그 나무를 불꽃으로 지켜 준다는 역설은 우리의 시선과 마음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지키고 돌봐야하는 우리 삶의 토대이자 근간이 되는 자리는 우리 안의 너무 연약해서 하찮은 곳입니다. 떨기나무와 맨발이 바로 그 자리를 상징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의 지도자로서 부르심을 받고 삶의 방향이 바뀐 곳이 바로 불에 타지 않는 떨기나무 앞이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가장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함께 하십니다. 바로 이 낮고 연약한 자리에서 우리의 치유와 변형은 시작됩니다.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명하신 하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나의 백성이 고통 받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또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의 고난을 분명히 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적 기원을 억압과 압제로부터 해방된 출애굽 사건에 두고 있습니다. 인간을 억누르고 억압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바람처럼 자유롭고 깃털처럼 가벼워지길 갈망하십시오.
모세는 타지 않는 떨기나무 앞에서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출3:14)라고 답하십니다. 이것을 개역개정에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번역했고, 우리가 보는 새 번역에서는 “나는 곧 나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히브리어에 대한 여러 해석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나는 존재케 하는 자다”입니다. 출애굽기 3장의 문맥에서 볼 때, 하나님의 이름은 ‘고난 중에서 부르짖는 이에게 구원을 창조해 주는 분’이라는 의미와 함께 ‘고난 중에 있는 이를 붙드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존재케 하시는 분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존재하도록 구원해주실 뿐만 아니라, 연약하여 고통 받는 그 자리에 오셔서 그 고통에 함께 동참해주십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삶의 한가운데로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아픔을 감추기 위해 시선이 밖으로 향할 때마다, 가장 연약하고 고통스런 자리에 주님께서 함께 해주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자유로워지길 갈망하십시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이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잘 가닿기를 저는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는 메마른 광야처럼 혹독하고, 냉엄합니다. 온전한 자기로서 지금 여기를 살아내고 싶은 우리의 순수한 갈망이 가차 없이 무시당하고, 경멸에 찬 차가운 시선으로 되돌아올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중심을 잃고 세상의 소리와 시선에 휘둘리기 쉽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자신을 잃지 않도록 사랑 가득한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혹독하게 내몰고 판단하는 것이 정말로 외부에서 온 것인지, 자기 자신에게서 온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찬란한 가을의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바쁜 일상생활 속에서도 내면에 작은 틈을 만들어 내십시오.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자신을 존재하게 할 토대를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산책을 하면서 땅에서 올라오는 생명력과 에너지를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좋아하는 차를 마시고 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을 열고, 매일 규칙적으로 향심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십시오. 이 외에도 자신의 영혼을 돌볼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지속적으로 해나가십시오. 우리의 작은 노력들이 모여 내면에 작은 틈을 만들어내고, 그 틈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흘러들어 하나의 큰 흐름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존재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다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찬란한 가을의 향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과 정신을 날마다, 매순간 열어주시어 자연이 전해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게 해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