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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땅끝마을
1. 해남군 개요
해남군(海南郡)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서남쪽에 있는 군이다. 동쪽에는 강진군, 북쪽에는 영암군, 서쪽과 남쪽에는 바다를 건너서 진도군과 완도군이 인접하여 있다. 백두대간의 남쪽에 위치한 구릉지대를 형성하여 해양성 기후로 따뜻하기 때문에, 농업과 어업이 융성한 지역이다. 화원반도를 중심으로 리아스식의 긴 해안선이 있다. 땅끝마을 등의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현재의 해남지방은 백제이래 고려 시대까지의 분립된 행정체계(고해남현 죽산현 황원군)을 청산하고 하나의 영역으로 묶여지는 것은 조선조에 이르러서였다. 본래 해남지역은 본래 백제의 새금현으로 신라때 침명(혹은 투빈)으로 고쳐 양무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때 지금의 이름 해남으로 고쳐 영암에 속하였고, 조선조에 들어와 태종 9년(1409) 진도현과 합해 해진현이 되었다. 태종12년(1412) 읍의 치소를 영암땅 옥산에 옮겼고, 세종 19년(1437)에 해남과 진도를 다시 분리시켜 해남현으로 삼고 현감을 두었다. 1955년 해남면이 읍으로 승격, 현재의 해남지방은 1읍 13개면 총 179개 리(里)로 편제되어 있으며, 면적으로는 총 864.67에 달하는 전남 최대의 군이 됐고, 이후 고천암 간척공사와 영산강 3-2지구 간척공사로 면적이 더욱 넓어졌다.
해남지역 최초의 문화는 신석기(후기 구석기) 문화부터이다. 청동기시대의 유적으로는 지 석묘(고인돌)와 패총(조개무덤) 등이 발견되고 있다. 군의 명칭은 고려시대에 해남현이라고 칭하다가, 조선시대 고종 32년(1895) 관제개혁으로 해남현에서 해남군으로 바뀌면서 전남 최대 군이 되었다. 지형적으로 소백산맥의 끝에 위치하여 구릉지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온화한 해양성 기후로 농업과 어업을 하기에 적당한 천혜의 땅이다. 이곳은 윤선도, 윤두수로 알려지고, 김남주, 황지우, 김준태, 고정희 해남의 아기 김시림 등 시인의 본고장이다.
2. 녹우당-전라남도 해남군 해남읍 연동리 연동마을
고산 윤선도의 고택으로 효종대왕이 윤선도를 위해 지어준 수원집의 일부를 뜯어 옮겨 지은 건물이다. 사적 제167호로 지정된 녹우당은 전라남도에 남아있는 민가 가운데 가장 규 모가 크고 오래된 집이다. 수원의 집 일부를 뜯어 옮겨온 것이 현 고택의 사랑채이고, 현 재는 해남 윤씨 종가 전체를 통틀어 녹우당이라 한다.
녹우당은 형식과 규모에 있어 호남의 대표적인 고건축물로 인정되고 있으며, 현재는 고산 윤선도의 14대손인 윤형석씨가 살고 있다. 녹우당 뜰안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문간채가 여러 동 있다. 건물들은 ᄆ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집 뒤편 담장 너머에는 추원당(제각)이 자리 잡고 있다. 고택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해남 윤씨의 중시조인 어초은공 윤효정의 사당이 있으며, 그 옆에 윤선도의 사당이 있다.
은행나무 옆으로 난 문으로 들어가면 작은 정원과 사랑채가 나온다. 사랑채 현판에 걸려있는 '녹우당(綠雨堂)'이라는 당호는 윤두서와 절친했던 옥동 이서가 쓴 것이다. 녹우당의 뒤편에는 천연기념물 제241호인 비자나무숲(수령 약 500년 400여본)이 있는데, 바람이 불면 비자나무잎이 흔들리며 마치 비가 내리는 듯한 소리를 낸다고 해서 녹우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녹우당의 사랑채는 효종이 자신의 스승이었던 고산을 위해 수원에 지어 주었던 집을 일부 뜯어 옮겨 온 것으로, 앞으로 불쑥 나온 차양이 매우 독특한 건물이다.
사랑채 뒤로 난 문을 들어서면 안채가 나오는데, 현재 고산 윤선도의 14대손인 윤형석씨가 살고 있는 가정집으로 외부인은 들어갈 수 없다. 행랑채 마당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빠져 나오면 어초은사당, 고산사당, 추원당이 나온다. 수풀이 우거진 추원당으로 향하는 길에 들어서면 고산 윤선도가 나타나 시라도 한 수 읊을 듯하다.
녹우당은 조선시대 상류층의 주거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공간이다. 하지만 으리으리한 대궐 같은 집이라기보다 우리의 옛집들이 그러하듯 자연과 어우러진 삶을 지향하는 소박하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곳이다. 고산유적 관리사무소(061-533-4445) 후손 윤길중.
3. 땅끝마을
이곳은 한반도의 최남단으로 북위 34도 17분 21초의 해남군 송지면 갈두산 사자봉 땅끝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만국경위도에서는 우리나라 전도(全圖) 남쪽 기점을 이곳 땅끝 해남현에 잡고 북으로는 함경북도 온성부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에서는 해남 땅끝에서 서울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온성까지를 2천리로 잡아 우리나라를 3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였다.
땅끝에 서서/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새 되어서 날거나/고기 되어서 날거나/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간에/변하지 않고는 도리 없는 땅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저 바다만큼/저 하늘만큼 열리다/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이 빛나는/한 오리 햇빛/애린/나(김지하의 시 ‘애린’ 전문)
시인 김지하가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간에/변하지 않고는 도리 없는 땅끝에’라고 읊은 곳 해남군 송지면 송호리 지나 땅끝마을. 말 그대로 한반도의 최남단 땅끝에 위치하여 얻은 이름이다. 122m의 사자봉 아래 형성된 마을이며, 사자봉의 전망대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다도해와 날씨가 좋으면 제주도 한라산까지 보인다. 이곳은 한반도의 최남단으로 북위 34도 17분 21초의 해남군 송지면 갈두산 사자봉 땅끝이다. 오래 전 대륙으로부터 뻗어 내려온 우리민족이 이곳에서 발을 멈추고 한겨레를 이루니, 역사 이래 이곳은 동아시아 3국 문화의 이동로이자 해양문화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사자봉 전망대 아래에는 작은 토말비가 있고, 이 토말비 옆으로 작은 내리막길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면 바닷가에 서있는 땅끝탑이 있다. 땅끝탑까지 가는 경우 다 시 사자봉 쪽으로 올라가지 말고 옆길로 빠져 해안을 따라 땅끝마을로 들어가는 길도 있다. 토말·갈두마을이라고도 한다. 북위 34°17'38"에 위치. 해남읍 남쪽 43.5km 지점인 이곳은 함북 온성군 남양면(南陽面) 풍서동(豊西洞) 유원진(柔遠鎭:북위 43°0'39")과는 한반도에서 가장 긴 사선(斜線)으로 이어져, 극남과 극북을 이룬다.
최남선(崔南善)의『조선상식문답』에 따르면, 땅끝의 해남에서 서울까지 1,000리, 서울에서 극북의 온성까지 2,000리를 헤아려, 이로부터 ‘삼천리강산’이라는 말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땅끝에 솟은 사자봉(獅子峰:122m) 아래와 갈두마을 주민은 반농반어의 생활을 한다. 1986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토말탑이 세워졌다. 사자봉 정상에 건립된 전망대에서는 흑일도·백일도·노화도 등 다도해가 한 눈에 보인다. 남해를 향한 그 벼랑에는 “…맨 위가 백두산이며, 맨 아래가 이 사자봉이니라. 우리의 조상들이 이름하여 땅끝, 또는 토말이라 하였고…” 라고 새긴 토말비(1981년 건립)가 서있다. 역사적으로는 725년(성덕왕 24) 인도에서 돌배(石船)가 불상과 경전을 싣고 와 미황사(美黃寺)를 지었다는 기록이 그 사적비에 새겨져 있다. 또,《난중일기》에는 1597년(선조 30) 9월 이순신이 어란진(於蘭鎭)에서 왜선을 이곳까지 추격하는 접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1) 봉수대(烽燧臺)
육지의 최남단 갈두산(葛頭山,해발156.2m) 정상에 위치해 있다. 갈두산 봉수는 광무 10년(1906) 영암군에 속하였던 송지면이 해남군에 이속됨에 따라 편입된 지역이다. 이곳 갈두산 봉수대는『세종실록지리지』『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에 “동쪽으로 강진현 좌곡산(佐谷山, 현 북일 면 봉태산), 서쪽으로 해진군 화산(花山, 현 해남 화산면 관두산(館頭山))에 준하여 설치”된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조선 초에 설치되어 고종 때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봉수제도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 세종의 4군6진 개척과 더불어 확립되었다. 봉수는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써 국가의 급한 소식을 왕에게 전달하는 동시에 해당지역에도 알려 적의 침략에 대비했던 군사통신방법으로 그 수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조선시대 법전인 『경국대전』에서는 평상시에는 1개의 홰, 적이 나타나면 2홰, 경계에 접근하면 3홰, 경계를 범하면 4홰, 접전하면 5홰를 올리도록 했다. 그러나 만약에 적이 침입했을 때 안개·구름·비바람으로 인하여 봉수가 전달되지 않을 경우에는 화포나 각성 또는 기로써 알리거나 봉수군이 직접 달려가 알리도록 했다. 갈두산 봉수대는 당초 원형을 알아볼 수 없도록 파괴되어 있었던 것을 복원한 것으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막돌로 쌓았으며 봉수의 직경은 4.5m내외이다. 봉수대의 하부는 바윗돌을 사용하고 상부로 올라갈수록 작은 돌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다.
(2) 땅끝전망대
1987년 세워진 기존 전망대를 철거하고 2002년 개관한 현재 전망대가 세워진 땅끝은 우리나라 국토 육지의 최남단으로써 많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21세기의 장을 여는 시점에서 우리의 땅끝에서 새 희망과 새 출발을 의미하는 새로운 장을 갖추고 여기에 조국의 통일을 기원하고 대양을 향한 새로운 출발을 담아, 서남해안권 문화관광벨트의 중요한 핵으로 발전하여 지역 문화발전과 국민의 정서 함양에 기여하고자 하는 바램에서 세워졌다.
한반도 최남단 [땅끝]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에 따라 지역관광의 중심지로서 주변의 수많은 수목과 기암괴석이 이루는 천혜의 자연적 경관과 더불어 남해안 관광의 구심적 역할을 수행하여 왔다. 우항리 공룡화석지, 두륜산 대둔사 등과 더불어 해남의 주요한 관광명소로 인근의 송호해수욕장과 연계되어 관광지로서의 최적의 위치로 노령산맥의 줄기가 내뻗은 마지막 봉우리인 해발156.2m의 갈두산 사자봉 정상에 위치한다. 22km에 달하는 해안 관광도로가 연계되어 있어 다도해의 절경을 이루며, 대지의 북으로는 우거진 송림이 있고 동남서로는 시야의 막힘이 없는 드넓고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남으로는 드넓은 대양의 시점으로서 흑일도, 백일도, 보길도, 노화도 등 다도해 섬들을 바라볼 수 있으며, 날씨가 쾌청한 날에는 추자도 및 제주도를 바라볼 수 있다. 또한 일출과 일몰을 한 장소에서 볼 수 있는 한반도 전역에서 유일한 곳이다.
(3) 모노레일카
땅끝모노레일카는 땅끝을 찾는 관광객에게 국토순례 시발지인 땅끝의 아름다움을 더욱 생동감 있게 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고 장애인, 노약자 등이 땅끝 전망대까지 갈 수 없었던 많은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2005년 12월19일부터 운행을 시작하였다.
[종합이용권(모노레일카 및 전망대, 문의: 땅끝모노레일카 061-533-4414)]
구 분 어 른 청소년(군경) 어린이
왕 복 개 인 4,000원 3,000원 2,000원
단 체 3,500원 2,500원 1,500원
편 도 개 인 2,000원 1,500원 1,000원
단 체 2,000원 1,500원 1,000원
※ 단체 30인 이상, 땅끝 전망대 입장료 별도
(4) 땅끝탑비-글 손광은, 글씨 하남호
이곳은 우리나라 맨 끝의 땅 갈두리 사자봉 땅 끝에 서서 길손이여 땅끝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게 먼 선 자락 아스란 백령도, 흑일도, 당인도, 장구도, 보길도, 노화도, 한라산까지 수묵처럼 스며가는 정 한 가슴 벅찬 마음 먼 발치로 백두에서 땅끝까지 손을 흔들게 수천년 지켜온 땅 끝에 서서 수만년 지켜갈 땅 끝에 서서 꽃밭에 바람일 듯 손을 흔들게 마음에 묻힌 생각 하늘에 바람에 띄워 보내게
(5) 갈산마을 오솔길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산속 오솔길, 약초 냄새가 풍겨온다. 약초 냄새에 취해서일까. 산새들의 재잘거림이 끝없이 이어지고 그곳에 서 있는 나도 오감을 열어젖히며 자연과 긴 호흡을 반복한다. 땅끝은 그저 땅일 뿐이다. 그러나 자연에 끝없는 가치를 부여하길 원하는 인간에 의해 땅끝은 땅의 끝이라는 가치를 선물 받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땅끝이 인간의 입김이 닿지 않는 처녀지로, 태초의 모습 그대로 서 있길 원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기대를 땅끝은 저버리지 않았다. 땅끝마을에서 갈산으로 이어지는 산속 오솔길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는 처녀림 그대로이다. 나무 터널 밑으로 구불구불 놓여 있는 부드러운 흙길, 울창한 난대수림 사이로 빼꼼히 얼굴 내민 갖가지 약초들은 이곳이 인간 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었음을 말해준다. 도라지, 더덕, 봉황삼, 천문동, 마, 하수오 등 약초에 대한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바람결에 실려 온 약초들의 냄새를 금방 맡는다.
당초 이 오솔길은 해안초소를 위한 길이었다. 그러나 땅끝관광지 관리사무소(소장 민경매)에서 군부대의 양해를 구해 작은 오솔길을 정비했다. 태초에 만들어진 길이 세상과 소통을 시작한 것이다. 산속 오솔길을 걷는 상큼함과 함께 이곳은 숲 생태 체험을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다. 더운 여름 날 울창한 나무 숲 터널 사이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우선 반갑다. 이 오솔길에는 해남 최대의 난대림 군락지가 형성돼 있고 갖가지 약초들이 서식하고 있다. 후박나무, 동백나무, 돈나무, 보리수 등의 아름다운 군락을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곳이 이곳이다. 갖가지 나무들에 대한 이름과 특징, 재미있는 유래 등을 공부하면서도 우리의 청각은 끝없이 반응한다. 온 갖가지 새들의 재잘거림에 화답하는 경쾌한 파도소리. 경쾌하면서도 우렁찬 파도소리를 들으며 걸을 수 있는 산속 오솔길이 여기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땅끝마을에서 시작한 이 작은 오솔길은 갈산마을 중간 지점에 이르러 큰 용트림을 한다. 군부대 비상초소 앞, 나무 사이로 시원한 바다가 확 트이면서 자갈밭 바다가 펼쳐진다. 300미터 정도 펼쳐진 자갈밭도 장관이지만 그 자갈밭에 부셔지는 파도소리가 온 산에 경쾌한 리듬을 실어 나른다. 2km에 이른 산속 오솔길의 끝이자 시작인 갈산마을, 송호해수욕장을 끼고 도는 이 마을은 울창한 난대림 숲에 꽁꽁 숨겨진 마을이다. 곡선의 해안선을 따라 한참을 가다 나타나는 이 마을은 초입부터가 온통 난대림 숲이다. 몇 백 년은 되었음직한 동백나무 숲과 후박나무 군락지, 마을 길가에 늘어선 팽나무, 그 웅장함과 색다름에 입이 쩍 벌어진다. 갈산마을의 난대림의 보고는 갈산에서 군부대로 이어진 오솔길에 있다. 시원하게 펼쳐진 바닷가에 펼쳐진 난대림 숲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무한한 감동을 준다.
갈산 넘어 오솔길 끝에 위치한 땅끝마을 팽나무도 장관이다. 수백 년 된 팽나무 20여 그루가 해안가에 기다랗게 늘어서 있고 그 아래에 관리사무소에서 설치한 쉼터들이 있어 잠식 몸을 맡길 수 있다. 땅끝관광지 관리사무소는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오솔길을 선보이며 머물고 가는 땅끝을 만들고 있다. 땅끝관광지 관리사무소는 송지 갈산과 땅끝마을을 잇는 숲 속 해안선 오솔길에 이어 송호리 해수욕장에서 땅끝테마파크- 땅끝전망대로 이어지는 산행 코스를 비롯해 땅끝테마파크에서 자갈밭 바다로 이어지는 코스 등 여러 산행코스를 정비해 홍보에 나섰다.
4. 두륜산과 대흥사
(1) 두륜산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산8-1에 위치한 산이다. 두륜산(703m)은 해남의 영봉이며 여덟 개의 높고 낮은 연봉으로 이루어진 규모 있는 산이다. 북서쪽으로 경사가 완만하고 빼어난 경관을 이루며 산행코스가 험하지 않아 2~3시간 정도면 가련봉 정상에 오를 수 있다.
8개 암봉이 이룬 연꽃형 산세를 이루고 있다. 두륜산은 가련봉(703m)을 비롯해 두륜봉(630m), 고계봉(638m), 노승봉(능허대 685m), 도솔봉(672m), 혈망봉(379m), 향로봉(469m), 연화봉(613m)의 8개 봉우리로 능선을 이루었다. 이 여덟 봉우리는 둥근 원형으로, 마치 거인이 남해를 향해 오른손을 모아 든 듯한 형상이다. 오른 손을 가지런히 펴고 엄지를 집게손가락에 붙인 다음 손가락 끝을 당겨 오목하게 물을 받을 듯 만들면 영락없는 두륜산의 지세가 된다. 두륜산은 대둔산이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산이란 뜻의 '듬'에 크다는 뜻의 관형어 '한'이 붙어 한듬→대듬→대둔으로 변한 것으로 풀이한다. 때문에 과거 대둔사는 한듬절로 불리기도 했다. 대둔사지에 의하면, 두륜산은 중국 곤륜산의 '륜'과 백두산의 '두'자를 따서 두륜산으로 불리다가 나중에 두륜산으로 변했다고 한다.
두륜산행은 여러 고승 대덕의 발자취를 뒤따라 적당히 땀을 흘리며 산봉을 오르면 되는 산행이라기보다는 유유자적한 소요에 가까운 행위가 된다. 사계절 언제 찾아도 좋은 산이기도 하다. 이른 봄은 지천으로 핀 동백, 여름에는 울창한 수림과 맑은 계류가 가을에는 찬란한 단풍이 길손을 맞아준다.
(2) 대흥사
대흥사는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799에 위치한 유서깊은 사찰로 신라 진흥왕 5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 문화재 자료 제 78호 지정되어 있는 대흥사는 13대종사 와 13대강사 를 배출한 우리나라 31본산의 하나로 조선후기 불교 문화권의 산실이었다. 지금은 대한 불교 조계종 제22교구본사로 해남·목포·영암·무안·신안·진도·완도 등 8개 시군의 말사를 관할한다. 백두대간의 영맥이 남으로 뻗어내려 지리산을 만들더니 영암의 월출산을 지나 한반도의 최남단에 이르러서 융기한 두륜산 중턱에 이 가람이 있다. 사찰경내에는 대웅보전·침계루·명부전·백설당·대향각·천불전·용화당·봉향각·동국선원·표충사(表忠詞)·강례재·서산대사유물관·대광명전 보련각·일로향실·청신암·진불암·일지암·만일암· 북미륵암 등이 있다.
1) 대흥사의 역사
대흥사의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는 『죽미기(竹迷記)』·『만일암고기(挽日庵古記)』·『북암기(北庵記)』등이 있다. 이러한 옛 기록들을 종합하여 쓴 책이『대둔사지』로 수룡(袖龍) 이성, 초의(草衣) 의순이 편집하고 기어(騎魚) 자홍, 호의(縞衣) 시오가 교정한 것으로 1823년(순조23)에 간행되었다. 이러한 옛 자료를 토대로 대흥사의 창건과 관련한 기록을 살펴보면 『만일암고기』에는 백제 구이신왕 7년(426)에 신라의 정관존자가 만일암을 창건하고, 그 후 백제무령왕 8년(508)에 이름을 전하지 않은 선행비구가 중건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한 고기(古記)에는 통일신라시대인 헌강왕1년(875)에 도선국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귀국한 후 500개의 사찰을 짓는 게 좋겠다고 하여 지은 절 가운데 하나가 바로 대흥사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처럼 대흥사의 창건에 관한 여러 기록이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대흥사를 신라 진흥왕 5년(544)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신라말의 창건이후 대흥사가 고려시대에 어떠한 변천을 해왔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리고 조선시대 전기까지도 사찰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점으로 보아 당시에는 그다지 번성하지 않은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흥사가 역사상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조선후기에 와서이다. 서산대사의 유품을 이곳 대흥사에 봉안하게 되고 서산대사를 기리는 표충사(表忠祠)를 세우면서 절은 크게 번창한다.
대흥사는 넓은 산간분지에 크게 네 곳으로 나누어져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일원, 중앙에 넓게 자리한 천불전 일원, 서산대사의 사당과 유물관이 있는 표충사 일원, 그리고 중심사역 뒷편에 있는 대광명전 일원이다. 이중 표충사와 대광명전 일원은 대흥사와 관련이 있는 스님들에 의해 후대에 조성되어 별원(別院)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흥사의 옛 모습은 침계루 앞 계곡을 중심으로 남원과 북원 일대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절이 처음에 어느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지금과 같은 모습은 조선시대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하며 「대둔사지」에서는 「죽미기」에 대흥사가 해탈문을 지나는 시냇물을 중심으로 남원과 북원으로 나뉘어 있었다고 인용하고 있어 초창기 가람의 모습을 추정해볼 수 있다.
2) 대흥사 입구-피안교, 일주문, 부도전, 운학교, 해탈문
대흥사는 피안교를 건너면서 본격적인 절의 경내로 진입한다. 서편제의 촬영지로 잘 알려진 유선여관을 지나 속세와 사찰의 경계라고 하는 ‘피안교’를 건너면 속세에 찌든 속인들은 잠시 피안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울창한 숲 사이로 마음을 가다듬고 걷다보면 일주문을 바로 앞에 두고 한 쌍의 장승이 서있다. 천하대장군과 금귀대장으로 보통 절을 수호하는 수호신으로 사찰 앞에 서있는 장승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50여기의 부도와 14기의 탑비가 모셔져 있는 부도전이 나온다. 부도전은 스님들의 집단묘소로 이곳에는 임란이후 대흥사를 중흥시킨 청허당(서산대사)을 비롯하여 풍담, 취여, 월저, 설봉, 연담, 초의 등 대흥사의 불법을 크게 일으킨 대종사 스님들과 만해, 연해, 영파, 운담, 벽담, 완호, 상월 등의 강사스님, 기타 고승대덕의 스님들이 모셔져 있다. 대개 조선 중·후기에 대흥사에서 활약했던 스님들이다. 이곳의 부도들 중에 단연 으뜸은 서산대사 부도로 정교한 조각이 일품이며 현재 도 유형문화재 57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학교를 지나 약간 오르면 해탈문이 나온다. 해탈문에는 사천왕상이 없다. 일설에 의하면 대흥사에 사천왕상이 없는 이유는 북으로는 영암 월출산, 남으로는 송지 달마산, 동으로는 장흥 천관산, 서로는 화산 선은산이 대흥사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풍수적으로 완벽한 형국을 취하고 있어 사천왕상이 세워져 있지 않다고 한다.
[대흥사 부도전(大興寺 浮屠殿)]
부도(浮屠)는 큰 스님의 사리(舍利)나 유골(遺骨)을 모신 탑이며 그분의 행적을 살필 수 있어 당시의 사회상이나 역사적 사실까지도 알아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보통사람들은 한문에 밝지 않아 알아보기 힘들고 재미없어 지나치거나 겉모습만 훑어보기 십상이다. 이곳 대흥사 부도전에는 호국의병대사인 서산대사를 비롯하여 그의 문도들 중 초의·호암·상월 등 13분의 대종사(大宗師)와 만화·원호·연예·광열 등 13분의 대강사를 위시하여 그 외 고승들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대흥사 입구 일주문을을 막 지나면 오른편을 부도 54기와 탑비 27기가 자리 잡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17세기 말에서 19세기 사이에 제작된 것이다. 대흥사 부도전에 많은 부도가 자리 잡은 것은 그 만큼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후기 고승들을 숭상하는 세력과 절 분위기가 일치한 때문이다. 이곳은 1974년 12월 26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석조물) 제57호로 지정된 서산대사 부도가 위치하고 있어 더욱 유명하다. 서산대사 부도(浮屠)는 총고(總高) 260cm로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는데 서산대사 비 보다 앞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서산대사가 입적한 후인 1631년(宣祖)에 세워진 이 부도는 청허당 서산대사비의 뒷편에서 약 5m 떨어져 있는데 팔각당식(八角堂式) 부도의 계통을 이은 재미있는 작품이다.
상륜부 받침에는 용의 머리를 새기었고 옥개석팔각의 귀꽃 위치에는 용 여섯마리, 쥐 한마리를 부각하였다. 그리고 지반위의 하대석 받침은 가늘고 긴 안상(眼象)과 복연(伏蓮)의 연화(蓮花)를 새기고 있다. 전반적으로 이 조각수법은 장흥보림사의 서부도(西浮屠)(보물 156호 고려시대)와 같은 계통의 작품이다. 이 부도는 표현양식이 매우 사실적이며 조각기법에 있어 이곳 부도 중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대흥사 부도전은 40여 년 전 영국 왕립 고고학회 회원 1백 20여명이 찾아와 역사적 가치와 예술성에 탄복했을 정도의 뛰어남을 자랑하지만 부도와 탑비의 연대별 배치나 성격별 분류가 안돼 아쉽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곳의 탑비(塔碑)들은 대부분 부도의 주인공에 해당되며 그 외에 이곳에 시주했거나 다산 정약용 등 도움을 준 사람들의 비(碑)가 주를 이룬 곳이다. 이곳 탑비 중에서 대흥사 창건연유와 내력을 소상하게 기록한 대흥사 사적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조각의 정교함과 크기로 이름나 있다.
[대흥사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
임진왜란 당시에 승병을 이끌고 왜군을 무찌르는데 앞장 선 서산대사의 부도로 현재 대흥사 부도밭에 자리하고 있다. 탑에는 ‘청허당’이라는 당호가 뚜렷이 남아있어 이 부도의 주인공이 서산대사임을 확실히 밝혀준다. 전체적으로 아주 세련된 형태로 한눈에 보더라도 매우 정성을 다하여 만들어 졌음을 알 수 있다. 건립연대는 청허당의 건립이 조선 인조 25년(1647) 이었음을 감안할 때, 이 시기를 전후로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전체의 높이는 2.6m로 1974년 12월 26일에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3) 대흥사 경내-대웅보전과 현판, 석가삼존불, 16라한, 삼층석탑
대흥사의 대웅보전은 대흥사의 중심 건물로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놓여 있는 심진교를 건너 침계루를 지나면 나타난다. 침계루를 들어서면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현판에 붙어있는 글씨다. 용틀임을 하고 있는 듯한 이 서체는 한눈에 봐도 명필임을 알 수 있다. 대웅보전의 힘찬 서체와 함께 조선 정조시대의 명필인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다. 대웅보전의 현판글씨가 남게 된 데에는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추사 김정희는 1840년(헌종6) 제주도로 귀양 가는 길에 이곳 대흥사에 기거하고 있는 초의선사를 만나기 위해 대흥사에 들렀다. 그리고 이광사가 써준 대웅전 현판을 보고 조선의 필체를 망가뜨리는 글씨라며 직접 자신이 대웅보전의 현판을 써주고 갔다. 그 후 추사는 유배지에서 깨우침을 얻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렀다. 그리고 이광사의 현판 글씨가 아직도 보관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자신의 아집을 사과드리며 다시 내다 걸게 하였다. 그리고 대신 대웅전 왼편 백설당에 ‘무량수각(無量壽閣)’의 현판을 써주었다 한다.
당시 이곳 대흥사에는 추사와 절친하였던 초의선사가 기거하고 있어 추사 김정희와의 교류가 이어지며 이웃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고 있던 다산 정약용과도 교류 관계가 이어져 대흥사를 중심으로 한 이들 석학들의 차와 학문·시·서화 등 예술의 교류는 한때 새로운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한다.
대웅보전 안에는 목조로 된 석가삼존불과 16라한이 봉안되어 있고 삼존불 뒤에는 영산, 약사, 미타의 삼불회도 후불탱화가 그려져 있다. 대웅보전 오른편으로 가면 응진전 앞에 신라말에 조성된 삼층석탑(보물 320호)이 있다.
4) 천불전
대흥사에 있는 유물 중 가장 앞선 시기의 유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신라대의 자장율사(慈藏律師)가 가져온 석가여래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다. 대웅보전을 나오면 맨 먼저 마주치는 것이 천불전이다. 한마리의 용이 천장에서 날아가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가허루를 들어서면 옥으로 만든 천개의 불상이 있는 천불전이 나온다. 남원 중심곽의 가장 안정된 곳에 자리 잡은 법당으로 대둔사지에는 이 건물이 1811년(순조11년)에 소실된 뒤 2년 후에 완호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완호는 초의대사의 전법(傳法)스승으로서 천불전 중건에 주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 천불전의 편액도 대웅보전을 쓴 이광사의 글씨이며 법당 앞문에 치장한 국화문양, 연화문, 무궁화 문양의 꽃창살이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어 채색된 문양의 화려함을 자랑한다. 천불전에 봉안된 옥으로 만든 천불은 조성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이 옥불은 처음 완호스님 등이 천불전을 짓고 경주에서 생산되는 옥석으로 열사람이 6년간에 걸쳐 조성했다 한다. 불상이 완성되자 옥불을 3척의 배에 싣고 경주에서 울산을 거쳐 부산 앞 바다를 지나 대흥사로 향했다. 그러나 한 척의 배가 울산진(蔚山津)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결국 닿은 곳이 일본의 장기현(長崎縣)이었다. 일인들은 옥불을 보고 기쁜 마음에 서둘러 절을 짓고 불상을 봉안하려 했다. 그러나 일인들의 꿈에 이 불상들이 나타나 우리들은 지금 조선국 해남의 대흥사로 가는 중이니 이곳에 봉안하면 안된다고 말하였다. 일인들은 이 꿈을 꾸고 나서 옥불들을 거두어 배에 실어 해남 대흥사로 보냈으며 일본을 거쳐 온 불상들은 불상을 분칠할 때 밑바닥에 <日> 자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5) 표충사와 서산대사
무염지(無染池)를 지나면 서산대사를 모신 표충사가 나온다. 표충사는 오늘날 대흥사의 사격(寺格)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건물로 이곳에는 임진왜란 때 국란극복에 공훈을 세운 서산대사와 그의 제자 사명과 처영의 영정을 봉안하고 있는 호국정신이 서린 유서 깊은 건물이다. 서산대사는 입적하면서 제자들에게 내가 죽은 뒤에 의발(衣鉢)을 두륜산 대흥사에 전하여 제삿날에 재를 받게 하라고 부탁한다. 그는 두륜산은 모퉁이에 치우쳐 있어 명산은 아니지만, 기이한 화초가 언제나 아름답고 옷감과 곡식이 넉넉한 곳이며, 왕의 교화가 제대로 미치기 힘든 먼 곳이지만, 어리석고 아둔한 풍속을 깨우칠 수 있으며, 처영 등 여러 제자들이 남방에 있으므로 종통(宗統)이 돌아갈 곳은 바로 대흥사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제자들은 삼년상을 치른 후 서산대사의 유물을 챙겨 대흥사로 모여들었다. 먼저 영잠(靈岑)대사가 1607년(선조40) 스승의 유품인 금의(錦衣)와 벽옥발(碧玉鉢) 등을 절로 가지고 왔으며, 이듬해 기일(忌日)에는 이 유물들을 받들어 놓고 재를 올렸다. 이어 진영을 모시는 영각을 짓고, 1631(인조9)에는 당대의 명문장가 장유(張維)가 지은 서산대사의 비문을 새겨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1655년(효종6)에 묘향산에 있던 서산대사의 발우와 신발, 가사 등을 절로 가져 왔다고 한다. 이렇게 서산대사의 유품과 진영이 봉안되고 비석이 세워지면서 절은 서산의 문도들이 모이는 중심 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표충사는 1669년(현종10)에 건립되었다. 1788년(정조12)에 표충사라는 사액을 받았으며 이듬해 사당과 영정이 이루어지자 정조는 사액을 내리고 제문을 지어 보냈다. 이리하여 대흥사는 조정으로부터 면세 혜택과 더불어 제수도 공급받았으며 서원사찰로서 인근 유생들의 침탈도 모면할 수 있게 되어 인근 선암사나 송광사와 당당하게 사격을 겨룰 만큼 그 지위가 향상되었다. 표충사 편액은 정조대왕의 친필이다. 표충사와 어서각 현판이 함께 걸린 본전에는 서산, 사명, 처영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옆의 조사전에는 대흥사 역대 고승들의 영정이 있으며 표충비각에는 ‘서산대사표충사기적비’가 세워져 있다. 현재 서선대사의 유물인 금란가사, 발우 등의 유품과 정조임금이 하사한 금병풍등 유물들이 표충사 아래 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가 승병(僧兵)을 모집하여 왜적을 물리친 공로로 사액사당을 대흥사 경내에 건립했던 것이 표충사이다. 이와 함께 1978년에는 서산대사유물관이 건립돼 선조, 정조대왕의 하사품(下賜品)과 대사의 유언에 따라 대흥사에 간직해 오던 여러 유물들이 보존 전시되고 있다. 서산대사 유물관에는 서산대사가 사용하던 바리대, 칠보염주, 신발을 비롯해 승병활동때 사용한 승군단 표지와 소라나팔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서산대사의 교지와 대사의 친필이 기록된 서적, 대사가 남긴 금병풍 등을 볼 수 있다.
◈ 서산대사(1519-1604) : 호가 청허이며 법명이 휴정이고 속성은 최씨. 오랫동안 묘향산에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서산대사라고 불렀다. 스님은 안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었는데 고을 군수의 도움으로 한양에 올라와 공부하였다. 15살 때 진사과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여행길에 올랐는데, 지리산에서 승인장로를 만나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일선화상으로부터 계를 받고 부용영관에게서 법을 배웠다. 이후 오대산과 금강산 등의 명산을 구름처럼 떠돌다가 33세 때에 문정왕후와 보우선사에 의하여 부활된 승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36세에 판교종사와 판선종사가 되었고, 이어서 선교양종 판사라는 최고의 승직에까지 올라갔으나 곧 이를 버리고 금강산 두륜산, 묘향산 등에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589년(선조 22) 정여립 모반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로 옥에 갇혔으나 결백이 밝혀져 선조의 명으로 석방되었다. 3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관군이 패퇴하고 임금마저 의주로 피난하였는데, 73세의 휴정은 선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팔도도총섭이 되어 전국의 모든 승려를 총궐기케 하여 싸움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스님의 문도가 중심이 되어 전국 각지에서 의승군이 일어나니, 그 수가 5,000명이나 되었다. 이듬해 의승군은 휴정의 지휘로 명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큰 전공을 세웠으며, 왕이 환도한 후에는 늙었다는 핑계로 제자 유정과 처영에게 총섭의 일을 부탁하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선조는 스님에게 '국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부종수교보제등계 존자' 라는 존호를 내렸다. 1604년(선조 37)에 세속 나이 85세로 묘향산 원적암에서 입적 보현사와 안심사 등에 부도를 세웠고, 스님의 유촉에 따라 금란가사와 발우 등은 부도와 함께 대둔사에 봉안되어 오늘에 전한다. 서산대사의 제자는 1000여 명이 있는데 그 가운데 유정, 언기, 태능, 일선 네 사람이 유명하여 서산문하의 4대파라 일컫는다. 서산대사의 저술로는「선가귀감(禪家龜鑑)」과, 선과 교를 대비하여 풀이한「선교석」, 선과 교의 차이를 간결하게 해설한「선교결」, 수도생활에 필요한 주문을 모은「운사단」, 시문을 모아 놓은 「청허당집」이 있다. 대둔사는 서산대사의 유품을 보관하면서부터 조선후기 불교계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특히 서산대사를 모시는 표충사를 세움으로써 절은 대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서산대사는 임란에 승병을 일으킨 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불교사상적인 면에서 한국의 선풍을 진작시킨 분이다. 난세에 태어나 한평생을 선(禪)과 호국의 이념으로 살다 간 그는 조선시대의 찬연한 하나의 빛이었다.
그는 또 선교 양종을 통합하여 단일한 불교로 발전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저서 『감선가귀감』에는 "선은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씀이다"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극렬하게 대립의 길을 치닫고 있던 선교의 대립을 지양하고 불교 본연의 통일을 모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휴정은 좌선, 진언, 염불, 간경 등 여러 경향으로 나뉘어, 각자의 우월을 주장하던 당시의 모순에서 벗어나, 선교일치를 주장하면서 한국 불교의 전통을 확립하였다. 서산대사의 의발이 대흥사로 옮겨지면서 대흥사는 명실공이 선교의 총본산이 되었다. 특히 대사의 문도들 가운데 13대종사, 13대강사가 배출되었고, 이와 같이 찬연한 학풍을 배불의 그늘 속에서도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서산대사의 유지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주요 가람의 특성 : 경주불국사(신라귀족의 보수화 상징), 장흥보림사(보수화 반대), 양양낙산사(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조화), 양산통도사(율종의 본산), 합천해인사(법보 종찰), 승주송광사(고려불교의 반성과 자기개혁의 상징, 토착 선종의 조계종찰), 화순운주사(고려의 민간신앙 주축 천불천탑), 김제금산사(미륵불교의 상징), 해남대흥사(조선 불교의 중흥, 교종과 선종통합 서산종찰)
6) 탑산사동종과 대광명전(동국선원)
보물 제88호로 지정되어 있는 탑산사동종(塔山寺銅鍾)은 고려시대 후기양식으로 용뉴에서 부터 상대 유곽 하대 및 당하에 이르기까지 그 조식방법이 매우 섬세한 종(鍾)이다. 용뉴는 정교하게 처리되어 박력 있는 용두(龍頭)를 갖추고 있고 앞으로 뻗은 왼발에는 여의주를, 2개의 파염무늬는 용통을 감싸고 있다. 이 종은 원래 탑산사(塔山寺)에 있던 종이나 해남읍의 일본 헌병수비대와 만일암 등을 전전하다가 현재 대흥사에 보관하게 되었다. 소장하고 있는 또 하나의 태극무늬 동종은 높이 36cm, 하구경 28.5cm로 소형이긴 하지만 조선시대 전형양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종에서 보인 태극무늬 괘의 순서는 국기와는 달리 역순으로 있어 독특함을 보인다. 제작시기는 조선시대 말기로 추정하고 있다. 표충사 약간 뒷편에 있는 선원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대광명전(동국선원)이다. 이곳 대광명전 일원에서 초의선사가 머물면서 다선일매의 선(禪) 생활을 하며 쇠미해 가던 대둔사를 다시 중흥케 했다 한다. 중심법전인 대광명전(비로전)을 1841년에 초의스님이 짓고 단청했다는 상량문이 발견되기도 해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7) 13대종사와 13대강사
대흥사는 13대종사와 13대강사의 뛰어난 스님들을 배출하였다. 이들은 모두 서산대사의 문도와 법손이다. 서산대사의 법맥을 이어받은 문도 들은 크게 4파로 나누어진다. 송운유정계와 편양언기계, 소요태능계, 정관일선계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대흥사에 있었던 13명의 대종사와 13명의 대강사는 법손이 가장 번성했던 편양언기계와 소요태능계 승려들이었다. 13대종사로는 풍담의심·취여삼우·월저도안·화악추봉·환성지안·벽하대우·설봉회정·상월새봉·호암체정·함월해원·연담유일·초의의순이며, 13대 강사로는 만화원오·연해광열·영곡영우·나암승제·영파성규·운담정일·퇴암태관·벽담행인·금주복혜·완호윤우·낭암시연·아암혜장·범해각안이다.
[13대종사]
서산문하의 4대파-유정, 언기, 태능, 일선. 이 가운데 편양언기계와 소요 태능계가 가장 번창, 대둔사에서 배출한 13명의 종사와 13명의 강사는 대부분 이들의 문도이다. 소요태능계는 강진의 만덕사를 중심으로, 편양언기계는 대둔사를 중심으로 그 법맥을 계승. 소요태능계인 취여삼우, 화악문신, 설봉회정 등은 대둔사의 13대종사이면서 만덕사의 8대사에도 포함되고, 더구나 대둔사의 제4대 대종사까지 편양언기계와 소요태능계가 서로 번갈아 가면서 대종사의 법맥을 계승하였다. 이들 서산대사의 두 법손들은 대둔사와 만덕사를 중심으로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조선 후기 서산문종의 법맥을 이끌었다. 취여삼우, 풍담의심, 월저도안, 화악문신, 설암추봉, 환성지안, 벽화대우, 설봉회정, 상월새봉, 호암체정, 함월해원, 연담유일, 초의의순이다.
[13대강사]
제 10대 대종사였던 호암체정 스님의 문도들(만화원오, 연해광열, 영곡영우, 퇴암태관, 완호윤우 등)이다. 벽담행인은 부휴선수계로 제 8대 대강사에 오른 것 이 특이하다. 아마도 부휴선수계도 대둔사와 일정한 관계를 지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만화원오, 연해광열, 영곡영우, 나암승제, 영파성규, 운담정일, 퇴암태관, 벽담행인, 금주복혜, 완호윤우, 남암시연, 아암혜장, 범해각안이다.
[초의선사](1786~1866)
초의선사(1786~1866)는 무안출신으로 속가에서 성은 장씨였고 법명은 의순(意恂)이며 초의(草衣)는 호이다. 대흥사의 13대 종사의 한 사람인 대선사로 침체된 조선후기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 선사(禪師)이며, 근근히 그 명맥만 유지해오던 한국의 다도(茶道)를 중흥시킨 다성(茶聖)으로서, 한국문학사에 깊이 각인된 인물이다. 강가에서 놀다가 물에 빠진 것을 지나가던 스님이 건져 준 일이 인연이 되어 6세 때 나주 운흥사에서 출가했다. 그 후 각지로 다니며 운수행각 하다가 대흥사 10대강사인 완호윤우(琓虎 尹佑)스님의 법을 받고 초의라는 법호를 얻었다. 초의선사는 불문에 몸담고 있었으나 그 테두리에 그치지 않고 유학, 도교 등 당대의 여러 지식을 섭렵하며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 자하 신위 같은 학자나 사대부들과 폭넓게 사귀었고 범패와 서예, 시, 문장에도 능했다. 그는 조용한 곳을 찾아 가부좌를 틀고 앉는 것만이 선이 아니었으며 현실의 일상생활과 선이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차(茶)와 선(禪)을 하나로 보아 ‘동다송’에서 ‘다선일미(茶禪一味)’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초의선사는 차한잔을 마시는 데서도 법희선열(法喜禪悅)을 맛본다고 하였으며, 차는 그 성품에 삿됨이 없어서 어떠한 욕심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것이며 때 묻지 않은 본래의 원천과 같은 것이라 하여 ‘무착바라밀(無着波羅蜜)’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가 지은 ‘동다송(東茶頌)’은 동다(東茶) 즉 우리나라 차에 대한 예찬을 담고 있는 것으로 차의 효능과 산지에 따른 품질, 만들고 마시는 법 등을 적은 것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차에 관한 책이다. 차는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주로 불가의 학승들을 중심으로 발달했고 지리산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과 영남지방은 차나무가 자라는데 풍토가 알맞았으므로 우리나라 차의 본고장이 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시대 들어와 불교가 밀려나면서 다도도 쇠퇴하여 겨우 명맥만 이어지고 있었다.
초의선사는 차와 선이 한가지라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사상을 바탕으로 다도의 이론을 정리하고 차를 만들어 널리 폄으로써 전래의 차 문화를 중흥시켰다. 24세 연상이어서 스승으로 모셨던 정약용과 동갑으로 승속과 유불의 경계를 넘어 누구보다도 친밀한 정을 나누었던 김정희와의 사귐에서도 학문과 예술, 차의 향기가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초의선사는 귀양살이하는 김정희를 만나러 제주도를 다녀오기도 했을 만큼 서로 터놓고 도탑게 지냈다. 김정희가 말년에 초의선사가 보낸 차를 받고 써 보낸 걸작 ‘명선(茗禪)’이 대흥사에 전해온다. 초의선사는 중년이후 큰절의 번거로움을 피해 일지암을 짓고 40여 년 간 은거하며 차와 더불어 지관(止觀)에 전념하다가 81세로 입적했다.
대흥사의 초의선사가 김명희에게 보낸 다시(茶詩)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옛부터 성현들은 모두 차를 즐겼나니, 차는 군자처럼 성미에 사악함이 없어서라네(古來聖賢俱愛茶 茶 如君子性無邪)" 그리고, 이능화의『조선불교통사』에서는「차는 풀의 현성(즉,禪)이다. 현 미한 도, 청화의 덕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다도란 차생활을 통해 서 얻어지는 깨달음의 경지이지, 차생활의 예절이나 법도 그리고 차를 끓이는 행다법을 말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차를 대접하는 예법이요, 차 끓이는 방법일 뿐이지 결코 다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초의의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은 ‘차와 선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다. 차를 마시되 '법희선열식(法喜禪悅食)'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한 잔의 차를 통해 법희선열을 맛본다는 것이다. 선사인 초의의 생애는 오로지 좌선하는 일에만 머물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멋을 찾고 불법을 구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언제나 제법불이(諸法不二)를 강조했으며, 선과 차가 별개의 둘이 아니고, 시와 서가 둘이 아니며 시와 선이 둘이 아니었다.
조계종 선운사의 백파(白坡 1767~1852) 선사로부터 비판을 받고 역비판 “교와 선이 같다 고 하는 것은 잘못이오.”하는 비판에 “그대가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대목이야 말로 내가 진리라고 여기는 대목이오.”라고 맞받아친 일화로 유명하다.
초의선사는 다산 정약용보다 25년이나 후배였다. 초의는 다산에게서 유서(儒書)를 빌어 읽고 시를 배웠으며, 또한 역학을 배우기도 했다. 이들 교류에는 풍류가 넘쳐흘렀고 즐겨 마시는 차가 있었다. 다산은 혜장으로부터 다도를 배웠고, 다도에 깊이 빠져들게 된 것은 초의의 영향이었다. 『동다송』은 초의가 다도를 알고자 하는 홍현주를 위해 지은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동다 즉 우리나라 차에 대한 예찬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전편이 동 다에 관한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전해지는 차에 대한 전설이나 차의 효험, 산지에 따른 다명과 그 품등 그리고 다도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조다, 천품, 포법, 다읍법 등을 수록했다.
초의는 ‘우리차의 품질에 대하여 차의 색과 향기가 함께 뛰어나다’고 평하며, ‘어떤 사람은 동다의 효가 월산다에 미치지 못한다고 했지만, 내가 보건대, 색, 향기, 미가 조금도 차이가 없다. 또 다서에는 육안지방의 차는 맛으로, 몽산의 차는 그 약효로 뛰어났다고 하나, 동다는 이 두 가지를 겸하고 있다.’ 라고 했다.
8) 북미륵암과 남미륵암
두륜산 노승봉 아래에는 마애미륵불이 조성되어 있는 북미륵암과 남미륵암이 있다. 하나는 북쪽에 있다하여 북미륵, 다른 하나는 남쪽에 있다하여 남미륵이라 부른다. 이 두 암자는 창건에 관한 기록이 없어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대둔사지」에는 1754년에 온곡영탁(溫谷永鐸)대사가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는 북미륵암이 북암으로 불려졌음을 알 수 있으며 근세에 염담유일(蓮潭有一), 벽담행인(碧潭幸仁), 아암혜장(兒庵惠藏)같은 고승들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북미륵암은 용화전, 요사로 이루어져 있으며 용화전은 마애여래좌상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이곳에 신중탱화와 산신탱화와 1987년에 조성한 중종과 위패가 모셔져 있다. 「대둔사지」에는 ‘두륜봉 아래 남미륵암에 있는 미륵불은 전실(前室)이 없어 이끼가 끼어 있다’라는 남미륵암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실제로 남미륵암은 지금도 전실이 없이 밖으로 노출되어 있어 바위 틈새로 난 이끼를 볼 수가 있다.
구전에 의하면 음각의 남미륵은 남자가 조성했고 양각의 북미륵은 여자가 조성했다 하며 이들은 모두 제석천이 하강하여 남북에 각각 조성한 것으로 음양각으로 한 것은 음양의 조화를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한다. 북미륵은 완성되어 현재 보물 제 48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남미륵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채 남미륵암 터에 초라한 전각만 남아있다. 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은 높이가 4.2m에 달하는 마애불로 마애불의 얼굴과 각부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 전반기인 11세기 무렵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북미륵암 조성전설]
북미륵암이 볼록하게 도드라져 올라오게 하는 양각의 조각수법임에 비해 남미륵암은 평평한 곳에 선을 이용해 그린 음각의 조각형식을 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두 미륵은 아주 대조적인 모습을 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조성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북미륵암과 남미륵암은 조성과 관련해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에 하늘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천동과 천녀가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다시 하늘에 다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하루 만에 바위에다 불상을 조각해야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하루 만에 불상을 조각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해가 지지 못하도록 천년수 나무에다 해를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천동은 남쪽 바위에다 입상의 불상을 조각하였고, 천녀는 북쪽 바위에 좌상의 불상을 조각하였다. 그런데 천녀는 앉아있는 좌상의 불상을 조각하였기 때문에 입상의 모습을 조각한 천동보다 먼저 조각할 수 있었다. 불상의 조각을 다 마친 천녀는 먼저 하늘에 올라가고 싶은 욕심이 생겨 그만 해를 매달아 놓은 끈을 잘라 버렸다. 해가 지자 천동은 더 이상 불상을 조각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하늘에도 올라갈 수 없게 되었다는 얘기다.
[만일암터]
북암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도중에 천년수와 함께 만일암터가 나온다. 만일암터에는 오층석탑을 비롯하여 석등부재들이 흩어져 있으며 5.4m의 탑은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하고 있다. 만일암의 만일(挽日)은 해를 잡아맨다는 뜻으로 북미륵과 남미륵 조성전설과 관련하여 천년수에 해를 매달았다는 이야기와의 연관성을 말해준다. 만일암은 대흥사의 첫 터라고도 말한다. 대흥사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만일암고기」에는 백제 구이신왕 7년(426)에 신라정관존자가 만일암을 창건하고, 백제 무령왕 8년(508)에 이름을 정하지 않은 선행비구가 중건했다고 기록하고 있어 만일암의 역사가 매우 오래됨을 알려주고 있다. 만일암에서는 만화원오(萬化圓悟), 연해공열(燕海廣悅), 금하우한(錦河優閒), 금봉희영(禽峰僖永), 백화찬영(白花贊英), 지월정희(智月鼎熙), 응성민훈(應星旻訓) 등의 여러 고승들이 머물렀다.
암자터 주변에는 오층석탑, 연자맷돌, 석등, 샘터 등이 남아있다.『만일암지』에는 7층 석탑이 있으며, 그 탑은 아육왕이 세웠기 때문에 아육왕탑 이라고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5층의 석탑은 석등의 옥개석을 상륜부에 올려놓은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정관존자가 만일암을 창건할 때 암자보다 탑을 먼저 세웠다고 한다. 탑을 완성한 후 암자를 지으려니까 해가 서산 너머로 기울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해가 지지 못하게 탑에 묶어두고, 암자 세우는 작업을 계속했는데 암자를 완공한 후에 암자명을 잡을 만(挽)자와 해 일(日)을 써서 만일암(挽日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천년수의 유래와 전설]
수종 : 느티나무 (괴목) / 수령 : 1,200 ~ 1,500 년 / 흉고 : 9.6m / 수고 : 22m
전설에 따르면 아주 옛날 옥황상제가 사는 천상에 천동과 천녀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어느 날 천상의 계율을 어겨 하늘에서 쫓겨나게 되는 무서운 벌을 받게 되었다. 이들이 다시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었다. 그것은 하루 만에 바위에다 불상을 조각해야 하는 일이었다. 지상으로 쫓겨난 천동과 천녀는 하루 만에 불상을 조각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해가 지지 못하도록 천년수 나무에다 끈으로 해를 매달아 놓고 천녀는 북쪽바위인 북암에 좌상의 불상을 천동은 남쪽바위인 남암에 입상의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천녀는 앉은 모습의 미륵불을 조각하였기 때문에 서있는 모습의 미륵불을 조각하는 천동보다 먼저 불상을 조각하였다. 미륵불을 완성해놓고 한참을 기다려도 완성하지 못하는 천동을 기다리다 못한 천녀는 빨리 올라가고 싶은 욕심으로 그만 해를 매달아 놓은 끈을 자라버리고 혼자서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이로 인해 천동은 영원히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이 미륵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수목이다.
북미륵암의 조성시기가 고려시대 전반기인 11세기경이며 여러 구전과 수목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천년수의 수령은 1,200 ~ 1,500년인 것으로 추정된다.
9) 일지암(초의선사 유적지)---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일지암
대웅전에서 700m가량 정상쪽으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조선후기 대표적 선승가운데 한 사람이며, 우리나라의 다성(茶聖)으로 추앙 받는 초의선사가 그의 ‘다선일여(茶禪一如)’사상을 생활화하기 위해 꾸민 다원(茶苑)인 일지암이 나온다. 초의선사는 일지암을 39세 때인 1824년(순조24)에 중건하였으며, 1866년(고종3) 81세로 입적할 때까지 40여 년 간 이곳에서 독처지관(獨處止觀)을 한 유서 깊은 암자이다.
초의선사는 이곳에서 유명한「동다송(東茶頌)」과 「다신전(茶神傳)」을 펴냈고, 선다일여의 가풍을 드날리며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와 같은 석학, 예인들과 교류하며 쇠퇴해 가는 차문화의 중흥을 도모해 일지암은 한국차의 성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일지암은 명실상부한 차의 성지요, 다도의 본향으로 일찌기 혜장이 다선일여를 강(講)하던 곳이며, 당시 대흥사 가까이에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 유명한 다인들이 있었으며 이들은 초의와 차를 통하여 더욱 두텁게 교유하였다. 다산은 이곳과 가까운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대흥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추사 또한 제주도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 까닭에 대흥사와의 관계를 맺게되고, 초의와도 남다른 친교를 가졌다. 이런 까닭으로 19세기 초 대흥사를 중심으로 한 다도는 다시한번 중흥을 이루게 된다.
다산이 와서 실학사상과 주역과 천주학을 논하던 곳이며, 때로 완당이 들러 금석학과 서지학과 청조문화를 편 곳이기도 하고, 유당 김노경(추사 부친)이 사랑하는 아들의 친구를 살피면서, 명사(名詞)를 남긴 곳이다. 또한 소치 허련(허유)이 이곳에서 초의선사의 그림공부 지도를 받았고 초의선사를 통해 추사 김정희라는 스승을 만나게 된 곳으로 당시 조선후기 일지암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학문과 예술의 활동은 이후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근처에는 찻잎을 다루는 맷돌이 놓여 있고, 일지암 마루 뒤편에는 찻물 끓이 는 부뚜막이 있다. 일지암과 연못 사이의 석축에는 다감이라 새겨진 면석이 끼어있고, 그 앞에 넓적한 돌이 하나 놓여있는데, 초의선사가 앉아 다선삼매에 들던 돌평사로 보기도 한다. 이곳에는 옛 정취가 그대로 살아 숨쉬는 차나무가 심어져 있고 선다를 음미했던 다정(茶亭)이 있으며 집 뒤의 바위틈에서 솟는 물이 나무대롱에 연결된 돌물확(수조)에 담겨져 흐른다. 이 다천(茶泉)과 돌물확, 차를 끓이던 다조(돌부엌), 그리고 위아래의 연못과 좌선석(坐禪石)등은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다. ‘일지암’ 편액이 붙어 있는 정자는 1980년 한국다인회 회원들이 다도의 중흥조 초의가 기거했던 일지암을 기념하기 위해 복원하여 놓은 것이다.
이 초정(草亭)은 가운데에 방 한 칸을 두고 사면에 툇마루를 두른 4평 규모의 띠집이다. 일지암 본당은 윗 연못에 평석을 쌓아올린 4개의 돌기둥이 누마루를 받치게 하여 독특한 운치를 자아내게 한다. 연못에 잉어가 한가로이 노니고 누마루에서 구름 낀 산경을 멀리 내려다보는 다회(茶會)와 선유(仙遊)는 자연과 우주의 섭리를 음미하게 할만하다. 그래서 초의의 시(詩)·선(禪)·다(茶)의 경지가 한데 어우러진 차 문화의 산실이 됐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 때문에 대흥사 일지암은 우리나라 다도의 요람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매년 음력 8월1일 초의의 열반일을 기해 추모행사인 초의제를 거행하고 있다.
큰 연못가에는 영산홍나무가 있는데 초의선사의 <두륜산 초암서>에는 영산홍이 피면 다홍색 꽃무리가 못에 비쳐 환희의 전경 속에서 다선에 든다는 기록이 있다. 큰 연못가에 누마루기둥을 담그고 선초의 다합은 나중에 지어진 집이다. 약 오백년 전 있던 그 유천은 아직도 흐르며, 그 시절의 차나무와 동백은 지금도 그 푸르름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다.
10) 진불암
진불암은 서산대사의 영정이 모셔진 표충사를 옆으로 계곡을 따라 약 1km 가량 올라가는 두륜산 중턱에 자리 잡은 대흥사의 암자이다. 진불암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수백년 된 은행나무가 암자의 역사를 묵묵히 말해주며 정성스레 쌓아올린 돌탑 하나가 찾는 이의 눈길을 끈다. 진불암은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지 못한다.「대둔사지」에는 1630년(인조8)에 수월 극현(水月克玄)대사와 덕호(德浩)가 함께 중건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보다 훨씬 이전에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693년(숙종19)에 이홍록(李弘錄)이 덕탄(德坦)과 함께 중건했고, 1750년(영조26)에는 북미륵암을 중수한바 있는 온곡대사(溫谷大師)와 함께 우일(宇一)장로가 진불암을 중수했다. 또한 채미대사(採薇大師)의 글에는 영곡(靈谷)·영파(影波) ·만화(萬化)·운담(雲潭)·아암(兒庵)등의 승려가 이 암자에 거쳐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진불암은 조선중기 이후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현재 진불암은 응진당, 향적당, 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응진당은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이며 안에는 불상으로 석가부처님과 28나한상, 문관상이 있다. 또한 불화로는 삼세후불탱화를 비롯해서 칠성탱화 · 신중탱화 · 산신탱화가 있다.
한편「대둔사지」에는 고진불암과 16나한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고진불암은 현재의 진불암 근처에 있다. 옛날 기록에 말하기를 강진의 백도방(白道坊)에 서씨라는 어부가 있었는데 하루는 바다 한 가운데서 고기를 잡다가 서쪽 나라의 배를 만났다고 한다. 배 안에는 16대아라한상이 실려 있어 ‘그것을 두륜산방(頭輪山房)에 봉안하고 편액을 진불(眞佛)이라 한다’ 했다 한다. 진불은 곧 응진(應眞)으로서 나한을 뜻하는 것이다. 그 후에 정사(精舍)를 산방(山房)곁에 건립하여 이름을 진불이라 했으며, 또 달리 고진불(古眞佛)이라 했다. 1740년에 위일장로(位一長老)가 중건했으며 또 1791년에 정능선로(定能禪老)가 중건했으니 전후 다섯 번을 중건했다.」
11) 유선관
남도의 아름다운 사계를 배경으로 소리꾼 일가의 애달픈 삶과 득음(得音)에 대한 집념을 그린 영화 서편제가 우리나라 영화사상 2백만 명의 관객동원이라는 성공을 거두면서 서편제의 촬영지 또한 많은 관심을 모았다. 해남은 여러 곳에서 서편제 영화가 촬영되었는데 그중 가장 많은 촬영을 하였던 곳이 대흥사다.
대흥사는 소리고개를 비롯하여 유선여관에서 서편제의 주요장면이 비중 있게 촬영되었다. 두륜산 중턱 해발 500m 지점의 공터에 위치한 곳에 소리재에 오픈 셋트가 지어지고 이곳에서 수려한 두륜산을 배경으로 소리를 하는 송화(오정해역)의 애절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또한 유선여관에서는 대가집 잔치에서 유봉(김명곤역)이 어사출도(춘향가) 대목을 부르는 장면, 북치는 법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 등이 촬영되었다. 잔치집의 흥에 겹고 술렁이는 분위기가 이 촬영될 때 해남의 주민들이 직접 엑스트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유선여관은 예전부터 국악인들이 자주 모여 산공부를 하거나 소리판을 벌였던 해남 국악의 유서 깊은 곳으로도 의미가 깊다.
5. 달마산과 미황사
(1) 달마산
달마산은 해남군에서도 남단에 치우쳐 긴 암릉으로 솟은 산이다. 두륜산과 대둔산을 거쳐 완도로 연결되는 13번 국도가 지나는 닭골재에 이른 산맥은 둔덕같은 산릉을 넘어서면서 암릉으로 급격히 모습을 바꾼다. 이 암릉은 봉화대가 있는 달마산 정상(불썬봉)을 거쳐 도솔봉(421m)까지 약8㎞에 거쳐 그 기세를 전혀 사그러 들지 않으며 이어진 다음 땅끝(한반도 육지부 최남단)에 솟은 사자봉(155m)에서야 갈무리하는 것이다.
달마산을 병풍 삼아 서록에 자리 잡은 미황사는 이 산과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신라 경덕왕 8년(749)인도에서 경전과 불상을 실은 돌배가 사자포구(지금의 갈두항)에 닿자 의조 스님이 100명 향도와 함께 소 등에 그것을 싣고 가다가 소가 한 번 크게 울면서 누운 자리에 통교사를 짓고 다시 소가 멈춘 곳에 미황사를 일구었다고 한다. 어여쁜 소가 점지해준 절인 동시에 경전을 봉안한 산이라는 뜻이다.
(2) 미황사
송지면 서정리 달마산(達摩山, 489m) 자락에 자리 잡은 미황사는 대흥사의 말사로 위도 상 우리나라의 가장 끝에 자리 잡고 있으며 달마산의 끝자락이 땅끝으로 이어진다. 달마산은 백두대간의 맥이 마지막으로 솟아올라 이루어진 두륜산의 끝자락에 이어진 산으로 이곳의 지맥이 바다를 통해 한라산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미황사는 병풍같이 펼쳐진 수려한 달마산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석양 무렵의 낙조의 모습 등 산경을 배경으로 한 경관이 매우 뛰어나다. 달마산은 멀리서 보면 마치 긴 공룡의 등을 연상시키기는 산등성이의 온갖 기암괴석으로 인해 미황사를 뒤로한 산이 수십 폭의 병풍을 펼치고 있는 듯 그 자연의 모습이 수려하다.
미황사는 우리나라 불교 해로유입설을 뒷받침하는 고찰로서 옛날에는 크고 작은 가람이 20여동이나 있었던 거찰이거니와 대웅전은 보물 제947호로서 그 규모나 정교함에 있어서 매우 훌륭한 건물이다. 신라시대 의조화상이 창건했다는 이 곳은 1692년 숙종 18년에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이 지은 '미황사 사적기' 에 창건에 얽힌 전설이 전하고 있다.
미황사의 창건과 관련한 기록은 1692년(숙종18)에 병조판서를 지낸 민암(1634~1692)이 지은 미황사사적비(美黃寺寺蹟碑)가 있다. 미황사의 부도전 옆에 있는 이 사적비는 창건시기와 창건연기설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749년(신라경덕왕8)에 의조화상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미황사는 고려시대 지원년간(旨元年間)(1264~1294)에 남송(南宋)의 달관(達官)·군자(君子) 등이 미황사에 내왕하면서 부흥기를 맞았으며, 조선전기에도 그 사세를 꾸준히 유지해왔다. 미황사의 조선시대 연혁은 1754년(영조30)에 기록된 「미황사법당중수상량문」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상량문은 1982년 대웅전 복원공사 때 발견된 것으로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후 3차례의 중건이 있었다고 한다.
첫 번 째 중건은 1597년(선조30) 정유재란 때 건물의 일부가 소실되어 다음해부터 공사를 시작 1601년에 마무리되었다. 이때의 불사는 만선(晩善)스님이 담당했다. 그 뒤 1658년(효종9)에서 1660년(현종1)까지 두 번 째 중창이 이루어졌으며, 이때는 성간(省侃)·수신(脩信)스님이 담당했다. 그리고 세 번 째는 1751년(영조27)에 덕수(德修)스님에 의해 시작되어 상량문이 씌어진 1754년에 마무리되었다. 이때의 불사내용은 1751년에 동서 양쪽에 금고각(金鼓閣)을 세우고 이듬해 기와를 바꾸었으며, 1751년에는 보길도에서 목재를 실어 왔고 대흥사와 마을에서 공사를 도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듬해 대웅전과 나한전을 완공했다. 1754년(영조30)에 여고(女古)가 4번째 중창을 하였으며 당시 대웅전의 대들보에서 묵서명이 나왔다. 그 기록에 의할 것 같으면 나한전(응진당)은 1761년(건륭16년)3월 26일에 대웅전은 같은 해 4월 11일에 각각 상양된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로 보아 대웅전과 응진당은 18세기에 건립된 전각임을 알 수 있다.
한편 18세기에는 고승 연담유일(蓮潭 有一)스님이 이곳에 머무르며 활발한 활동을 폈다. 스님은 특히 절이 바닷가에 위치하는 지역적 특성에 따라 물에 빠진 사람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수륙제를 지내기도 했다. 그래서 연담 스님의 문집인 「임하록(林下錄)」을 절에서 1799년(정조23)에 펴냈으며 스님의 입적 후 부도가 세워지는 등 스님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19세기 후반인 1858년(철종9) 에는 영허의현(靈虛義玄)스님이 이곳에서 만일회(萬日會)를 개설하기도 했다. 이때의 만일회는 아미타신앙의 법회였다고 하며 이같은 내용은 초의선사가 지은『미황사만일회기』를 통해 알 수 있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과 응진당, 그리고 명부전, 요사체 등이 남아 있으나 옛날에는 통교사를 비롯 도솔암, 문수암, 보현암, 남암 등 12암자를 비롯하여 전각이 20여동이나 있었던 대 사찰이었다고 한다.
미황사에는 현재 미황사와 관련된 고승들의 부도가 28기, 탑비가 6기 경내에 있어 조선후기에 활발한 전법도장(傳法道場)이었으며 사격이나 사세가 매우 융성하였음을 보여준다. 미황사는 이러한 융성을 거듭하다 이 고장 북평면 출신 주지인 혼허(渾墟)가 절의 중창을 위해 모금차 군고단을 이끌고 완도 청산도를 가다, 배가 조난당하여 젊은 승려들이 몰살당한 후, 군고단 준비에 진 빛 때문에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청산도 사람들은 미황사 스님들이 빠져 죽은 그 바다에서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날이면 궁고 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미황사 스님들의 12채 군고(진법군고)는 송지면 산정리 마을 사람들에 의해 전승되어 오고 있고, 진법군고의 깃발에는 바다거북이 등에 올라탄 삿갓 쓴 스님이 그려져 있다.
1) 미황사 창건신화
미황사 사적비는 미황사의 창건설화를 기록하고 있다. 자연석 기단위에 세워 특이하다. 미황사의 창건시기를 적은 미황사사적비에는 미황사의 창건과 관련한 재미있는 연기설화가 전한다. 이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8년(749)에 홀연히 한 석선이 달마산 아래 사자포구( 송지면 갈두리 땅끝)에 와 닿았다 한다. 그런데 그 배 안에서는 하늘의 음악과 범패소리가 들려나와 한 어부가 이를 살피려 하자 이때마다 번번이 배가 멀어져갔다.
마침 이곳 달마산에서 수도를 하던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이를 듣고 장운(張雲)·장선(張善) 두 사미와 더불어 촌주 우감, 향도 일백인과 함께 가서 목욕재계하고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석선이 해안에 닿았는데 그곳에는 주조한 금인이 노를 잡고 서 있었다.
배 안에는 금자(金字)화엄경(華嚴經) 80묶음, 법화경(法華經) 7묶음, 비로자나, 문수보혈 40성중(聖衆), 16나한(羅漢), 탱화 등이 있고 금환과 혹석이 각 한 개씩 있었다. 향도들이 경을 싣고 해안에 내려놓아 봉안할 장소를 의논할 때 혹석이 저절로 벌어지며 검은 소 한마리가 나타나더니 문득 커졌다. 이날 밤 의조화상이 꿈을 꾸었는데 금인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우전국(인도) 왕으로 여러 나라를 편력(編歷)하면서 경상(經像) 모실 곳을 구하였는데 산 정상을 바라보니 일만 불이 나타나므로 여기에 온 것이다. 마땅히 경을 싣고 소가 누워 일어나지 않는 곳에 경을 봉안하여라’ 하고 일렀다. 이에 의조화상이 소에 경을 싣고 가는데 소가 가다 지쳐 처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산골짜기에 이르러 다시 눕더니 미(美)하고 크게 울며 죽어 버렸다. 소가 처음 누웠던 곳에 사찰을 창건한 것이 통교사(通敎寺)요, 마지막으로 누워 죽은 골짜기에 사찰을 지어 성경(聖經)과 신상(神像)을 봉안하고 미황사라 했다. 이 때 미(美)는 소의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취하고 황(黃)은 금인(金人)의 황홀한 색을 취해 미황이라 했다 한다. 이러한 창건설화는 보편적인 불교의 북방 전래설과는 달리 바다를 통한 해로유입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2) 대웅전
달마산을 배경으로 한 대웅전은 단청이 거의 벗겨져 있어 화려함 대신 자연에 가까운 단아한 느낌이 훨씬 더 절을 고풍스럽게 한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집으로 기단은 막돌허튼층 쌓기를 하고 이 위에 연화문 초석을 놓았으며 기둥은 가운데가 볼록한 배흘림기둥이다. 무거운 지붕을 받쳐주는 배흘림기둥은 전형적인 조선초기의 건축양식으로 팔작지붕과 아름다운 대칭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주춧돌로 그 위에 물고기, 게, 문어 등 바다와 관련된 조각이 양각되어 있어 해양문화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으며, 조각된 동물문형은 토속적인 민간신앙이 불교와 만나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형은 이곳의 부도에도 나타나 미황사의 독특한 사찰양식을 알 수 있다.
대웅전 안에는 미황사의 괘불이 봉안되어 있다. 영험 있는 하느님의 마누라로 통하는 미황사 괘불은 지금의 대웅전이 중건되기 전인 1727년경에 제작된 조선후기 괘불로 높이가 10여m 가량 되는 큰 괘불이다. 괘불은 탱화와 같은 거대한 걸개그림으로 평소에는 법당 안에 모셔져 있다가 야외법회가 있을 때 내걸게 된다. 예전에는 이러한 야외법회가 자주 있었다고 하나 오늘날에 와서는 보기 힘들어졌다.
이 괘불은 가뭄에 내걸고 제사를 지내면 비를 내린다는 속설이 있어왔다. 돼지를 잡아 사찰 주변에 피를 뿌리고 지극 정성으로 기우제를 모시면 하느님이 자기마누라가 있는 곳이 지저분해 비를 쏟아 부어 씻어 낸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1992년 큰 가뭄이 들 때 미황사 괘불봉안식이 행해졌다. 어김없이 구름 낀 사이로 비가 내려 그 신통력을 발휘했다.
또 달마산 정상의 불봉 봉화대에 연기를 피우면 명산 달마산에 불이 났다고 비를 내렸다 한다. 이곳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봉수지로 완도의 숙승봉에서 연락을 받아 화산면 관두산으로 연결하였던 곳이다. 지금도 비가 오지 않으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낸다. 이러한 기우제는 민간신앙에 널리 퍼져 있는 유형이기는 하지만 미황사는 불교와 민중신앙이 더욱 습합되어 나타난다.
3) 응진당
보물 제183호인 응진당은 안쪽 벽면에 그림으로 16나한을 모시고 있다.
4) 부도전
미황사에서 가장 독특한 것 중에 하나가 부도전이다. 미황사는 석양의 낙조가 매우 아름답기도 하지만 대웅전에서 남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약 500m쯤 내려가면 옛 통교사 터 바로 옆에 21기가 있는 남부도전이 있고 그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200여m쯤 내려가면 6기가 있는 서부도전이 나온다. 이 부도들은 대략 18~19C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바다에 가까운 영향 때문인지 부도에는 물고기, 게, 문어, 거북이 등의 특이한 문양들이 부도의 기단부, 또는 전면에 조각되어 있다.
부도에 나타나는 조각이 모두 토속적이며 신라말 고려초 부도의 화려함에 비해 단순하면서도 파격성을 띄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물고기, 게, 거북이 등 다양한 바다생물의 형태가 조각되어 있다. 이 부도밭은 옛날 고승대덕들이 끊이지 않았던 도량으로서 미황사의 번창했던 역사를 반증하고 있는데 대흥사 부도밭과 함께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부도 중에 하나다. 부도 중 가장 아름다운 부도는 고압당부도이다.
(3) 금샘과 용담
달마산은 기기묘묘한 산의 모습처럼 신비스러운 것들도 많다. 그 중에 하나가 누른빛의 금가루가 떠있는 듯한 금샘이다. 금샘은 문바위재라 불리는 정상부근에서 동쪽으로 가파른 고갯길을 60m쯤 내려가면 큰 바위틈에 있다. 마치 금가루가 뿌려져 있는 듯하나 떠보면 물만 떠올라 그 신비함을 더 느끼게 한다. 이 금샘에 관한 기록이 「동국여지승람」에 나온다. 「전라도 낭주(郎州)의 속현을 송양현(松陽縣)이라 하는데 실로 천하에 궁벽한 곳이다. 그 현의 경계에 달마산이 있는데 북쪽에는 두륜산이 접해있고 삼면은 모두 바다에 닿아있다. 산꼭대기 고개 동쪽에 있는 천길이나 되는 벽아래 미타혈이라는 구멍이 있는데 대패로 민 듯 칼로 깎은 듯한 것이 두세 사람은 앉을 만하다. 그 구멍으로부터 남쪽으로 백여 보를 가면 높은 바위아래 네모진 연못이 있는데 바다로 통하고 깊어 바닥을 알지 못한다. 그물은 짜고 조수를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한다.」
달마산 도솔봉의 도솔암 아래에는 용담이라는 샘이 있다. 이곳 도솔암은 미황사의 열두 암자중에 하나로 달마산의 가장 정상부에 있어 구름이라도 끼인 날이며 마치 구름 속에 떠있는 듯한 느낌에 새로운 선경의 세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석축을 쌓아올려 평평하게 만든 곳에 자리 잡은 도솔암은 마치 견고한 요새와도 같다.
이곳 도솔암에서 50m쯤 아래에 일년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 샘인 용담이 있다. 바위산의 산 정상부에 샘이 있다는 것 자체부터 신비함을 느끼게 하는데 미황사를 창건한 의조화상이 도를 닦으며 낙조를 즐겼다는 곳이다. 약 3m정도의 높이에 어른 3~4명은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굴속에 샘물이 항상 고여 있어 여름에는 서늘함까지 느껴진다.
6. 고천암호수 갈대 그리고 철새
고천암 갈대밭은 고천암호 14Km의 둘레를 따라 갈대들이 광활하게 서식하고 있고, 해남읍 부호리에서 화산면 연곡리까지 3Km의 갈대밭은 55만평으로 국내 최대의 갈대군락지이다. 또한 고천암 갈대밭에는 먹황새, 독수리 등 희귀조류는 물론 전세계 98%의 가창오리가 겨울을 나면서 환상적인 군무를 하기도 한다.
* 해남군에 철새들이 찾아오는 이유
○ 간척지의 기온이 따뜻하고 새로 조성된 호수가 철새들에게 새로운 서식처가 됨
○ 주변의 넓은 농토와 바다 개펄이 오염되지 않아 먹이가 풍부함
○ 중국∼일본간, 시베리아, 알레스카∼호주, 뉴질랜드간 이동통로의 중간 기착지
* 철새관찰의 유의할 점
○ 새들은 경계심이 많기에 빨간색 옷차림을 피할 것
○ 돌을 던지거나 차경적, 폭음탄 등을 사용하지 말 것
○ 제방도로는 저속으로 운행할 것
(1) 고천암방조제
고천암방조제에 올라보면 푸른바다를 볼 수있고 가까이 있는 진도의 높은 봉우리를 보게 된다. 김양식을 위해 바다에 꽂아놓은 대나무열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 방조제 너머에는 바다 쪽으로 가볼 수 있도록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2킬로미터의 방조제 위를 산책하거나 공원에서 고깃배나 갈매기를 구경해도 좋지만, 그래도 여기서 가장 좋은 풍경은 해질 무렵 바다에 비치는 낙조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도 이곳이 좋은 점은 방파제 위에 서서 바다와 호수 그리고 갈대밭을 폭넓게 조명할 수 있다는 것이겠다.
(2) 고천암호수
호수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쟈게 많다. 호수를 빙 둘러서 낚시꾼들이 저마다 포인트를 잡아 몇일씩 묵어가면서 낚시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밤이면 그들의 캐미라이트나 텐트내 호롱불이 낭만으로 다가온다. 인라인 동호회들이 찾는 일이 부쩍 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호수도로에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도로는 개설된 지 이제 2년도 채 되지 않아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한다. 경사는 거의 없고 거의 모든 도로가 0% 경사의 평지이고 직선도로가 최장 5킬로미터 이상인 코스도 꽤 여럿이다. 좌측으로는 호수가 우측으로는 잘 정리된 경지가 있어서 시야 풍경 모두 환상이다. 자전거 하이킹 코스로도 적격이지만 아직은 차에 자전거를 싣고 다니면서 하이킹을 즐기는 이들이 없는 듯 바이커족들은 보이지 않는다. 자동차 드라이브코스로도 매우 좋다.
그러나 길을 잃기가 쉬워서 때때로 갈림길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외지차를 종종 볼 때가 있다. 더군다나 호수가에 포진해 있는 55만평의 드넓은 갈대밭은 영화촬영지로 각광을 받고 있을 만큼 그 넓이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매년 11월초 순수민간축제인 <고천암갈대축제>가 이곳에서 열린다. 갈대는 보통 키가 3미터 이상인 것들로서 사람이 들어가면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 길을 내어 가족들이 들어가 사진도 찍고 갈대길을 거닐 수도 있게 해놓는다. 축제가 아니더라도 그 갈대밭은 항상 그곳에 있으므로 언제든지 가볼 수 있다. 다만 호수도로가 매우 길고 헷갈리므로 길을 잃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7. 중리바닷가
송지면 중리 해안가는 주변의 바닷가 풍경이 매우 뛰어나다. 이곳은 또한 신비의 바닷길로 유명해 대섬까지 바닷물이 빠지면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조개잡이 등으로 바다를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뛰어난 자연경관으로 인해 지난 2000년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MBC드라마 ' 허준 '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이곳 주변의 뛰어난 경관과 함께 인기드라마 허준의 유배지 촬영장이 일약 인기관광지가 되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곳 송지면 중리 바닷가는 개발이 안 된 순수한 어촌의 모습과 함께 천혜의 뛰어난 주변경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허준 외에도 영화 '싸울아비'촬영 등이 이루어져 조그마한 어촌마을이 관광지가 되고 있다. 리 까지 3Km의 갈대밭은 50만 편으로 국내 최대의 갈대군락지이다. 또한 고천암 갈대밭에는 먹황새, 독수리 등 희귀조류는 물론 전세계 98%의 가창오리가 겨울을 나면서 환상적인 군무를 하기도 한다.
8. 울둘목(우수영)
해남읍에서 서남쪽으로 30km 지점에 위치한 문내면은 우수영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임진왜란, 울돌목이 하나가 되어 3대 대첩의 하나인 명량대첩을 이룩한 이곳에 조선시대 우수영이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에는 보물 제503호로 지정된 명량대첩비와 도지정 지방 기념물 139호 우수영 성지, 명량대첩기념공원이 어우러진 우수영관광지가 조성되어 발길 닿는 곳곳 유적들로 가득 차있다.
우수영관광지는 1597년 충무공이 이룩한 명량대첩을 기면하고 옛 성지의 모습을 간직한 이곳을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복원하려는 뜻에서 1986년 국민관관지로 지정, 첫 사업으로 90년 울돌목이 바라다 보이는 위치에 명량대첩기념공원을 조성했다. 충무공 유물전시관에는 명량해전에서 사용했던 천자총통, 지자총통 등이 전시돼 있고 그 때의 활약상을 담은 슬라이드도 상영한다. 또 공원 곳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과 관군들의 전투모습을 조각한 상들이 배치되어 생생한 감동을 주고 있다. 우수영은 우리 선인들이 외적팀입에 대비 조선초 세종대왕이 설치한 해군기지 중 하나로 부산의 경상좌우영, 충무의 경상우수영, 여수의 전라좌수영 그리고 해남의 전라우수영이다.
[우수영 가는 길]
버스는 해남터미널에서 진도나 화원 가는 버스를 타고 우수영에서 하차한다. 우수영 정류장에서 진도대교까지는 걸어서 약 3-40분 정도 걸린다. 걷던지 또는 우수영정류장에서 진도가는 군내(완행)버스를 타고 명량대첩공원 앞에서 내린다. 승용차는 해남읍에서 진도방향(18번국도)으로 약 30분 정도 달리면 된다.
(1) 명량대첩공원
전남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에 위치한 명량대첩공원은 임진왜란 3대 수군대첩지의 한 곳으로 이순신이 대승리를 이룬 명량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임진왜란 7년 전쟁을 종식시킨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곳으로 당시 최후의 교두보였던 울돌목을 성지화하기 위하여 세운 기념공원으로서 의의를 가지고 있다.
매우 아름다운 공원이다. 이전에 근무하던 고등학교에서 곧잘 소풍가던 곳이다. 이곳은 정문만 막으면 아이들이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바다를 건너 도망치면 몰라도...공원 산책길도 이쁘고 공원에서 내려다보이는 울둘목 바다도 아기자기 하다. 전시관에는 당시 해전에서 사용하던 무기류 등이 전시되어 있고 영상실에서는 명량해전의 역사를 공부할 수도 있다. 명량대첩탑이나 팔각정까지 오르면 진도바다가 한 눈에 바라다 보인다.
(2) 울둘목
바다가 운다고 해 명량이라 이름되기도 하는 울돌목은 해남군 우수영과 진도군 녹진사이를 잇는 가장 협소한 해협으로 넓이가 325m,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이 20m, 유속이 11.5노트에 달해 굴곡이 심한 암초사이를 소용돌이치는 급류가 흐른다.
이러한 빠른 물길이 암초에 부딪쳐 튕겨져 나오는 바다소리가 20리 밖까지도 들린다고 한다. 이러한 지형의 특징이 정유재란 당시 4백여 척의 왜선들에게 손쓸 방도도 없이 참패를 안겨준 큰 요인이 됐던 것이다. 울음을 터트리는 울돌목 바다위로 지금은 아치형 진도대교가 허공을 가른다.
※ 명량해전-명량해전, 울돌목 아니다"
1597년 9월16일 단지 13척의 전선으로 거의 10배나 되는 133척의 일본함대를 ‘필사즉 생필생즉사’의 정신으로 격퇴한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승리로, 조선수군은 칠천량 해전의 패배를 딛고, 재기에 성공했으며 정유재란의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과연 지형이 좁고 물살이 가장 빠르기로 유명한 명량의 가장 좁은 곳에서 해전이 가능했을까? 이민웅 해사교수는 '임진왜란 해전사’(청어람미디어)에서 “실제 명량해전이 치러진 전장은 진도와 해남군 사이에 위치한 명량해협(울돌목)이 아니라 해협을 통과한 뒤 해남군을 따라 우측으로 구부러진 지점인 전라우수영(해남군 문내면) 앞바다였다”고 주장한다. ‘난중일기’ 9월16 일자에 나오는 “일본 함대의 접근보고를 받고 전투 준비를 마친 뒤 바다로 나갔는데, 곧바로 일본 배 133척이 우리 전선들을 에워쌌다”는 기록이 이를 입증한다는 것이다. 명량에선 조류가 멈추는 정조기(停潮期)의 짧은 시간을 제외하고는 전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역 해군 소령인 이 교수의 진단이다. 이 교수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에 철쇄를 설치해 일본군선을 격퇴했다는 지금까지 전해오는 설에 대해서도, 후대 영웅담이 확대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설화’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합포해전도 우리가 흔히 알듯이 지금의 마산시 앞바다가 아닌 진해시 합포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이 교수의 새로운 해석이다. 이 교수는 그동안의 영웅순국사관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실을 기초로 한 이순신의 참모습을 그대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3) 진도대교
해남군에서 진도로 넘어가는 유일한 길목이다. 현수교이며 길이는 약 1킬로미터 정도. 걸어서 건널 수 있도록 인도가 차도와 구분되어 있으므로 안전하게 건널 수 있다. 진도대교에서 밑으로 보이는 울둘목의 거센 물살이 굉음을 내며 소용돌이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해남 쪽으로는 거북선 상이 세워져 있고, 진도 쪽으로 건너가면 양옆으로 진돗개 상이 세워져 있다. 오른 쪽에 백구, 왼쪽에 황구의 상이 세워져 있는데 황구의 아랫도리에 뭔가가 하나 더 달린 걸로 봐서 그놈이 수놈인 것 같다.
(4) 녹진공원
진도 초입에 있다. 그저 휴게소 같은 곳이지만 한번 돌아볼 만하다. 진돗개판매장과 겸하고 있어서 귀여운 진돗개새끼들도 볼 수 있다. 다리 쪽으로 가다보면 진도대교 밑을 통과하여 바다 쪽으로 내려갈 수 있는데...밑으로 내려가면 바로 앞에서 소용돌이치는 울둘목바다를 체험할 수 있다.
(5) 팔각정(녹진전망대)
녹진공원에서 나와 진도쪽으로 약 50여미터 가다보면 팔각정 올라가는 길이 나온다. 약 100여미터 올라가면 팔각정에 다달을 수 있는 데 이곳에서 보는 진도대교나 바다 건너편의 명량대첩공원 그리고 진도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다. 또한 이 공원에는 지압도로가 이쁘게 나있으므로 한번 씩 신발을 벗고 자갈자갈 소리 내며 걸어보는 것도 좋다. 지압도로의 돌은 새하얀 해미석이다. 절대 주머니에 넣는 일이 없도록 하자.
9. 사구미바닷가
송호해수욕장은 땅끝마을로 가기 전에 펼쳐져 있는 해남의 가장 대표적인 해수욕장이다. 송호(松湖)는 해변가로 노송이 무성하고 바닷가의 고운 모래와 맑고 잔잔한 물결이 호수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 송호 해수욕장은 모래가 곱고 수심이 얕아 아이들이나 가족들이 놀기에 좋으며 수백 년 된 해송(海松)이 풍치림(風致林)을 이루고 있다. 제방을 따라 약 1km가량 이어져 있어 송림 숲 아래에서 야영을 하기에 적합하다. 이 송림 숲은 현재 전라남도 기념물 제 14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수령이 약 2백년 가량 된 6백 여 그루의 소나무가 해안 방품림의 기능으로 펼쳐져 있다.
[여름 휴가철 해수욕장 운영]
자연여건 : 백사장 1.5Km, 수심 1~2m, 송림 6,570㎡
편의시설 : 관리사무소 1동, 샤워장 3동, 화장실 5동, 음수대 4개소, 가로등 29등
숙박시설 : 여관1, 민박 57동, 야영장 1개소 3,629㎡
주차시설 : 주차장 4개소/3,883평(800여대 수용)
(1) 송호리해송림
수백 년 된 해송(海松)이 풍치림(風致林)을 이루며 제방을 따라 1km가량 이어져 있는데 푸르름을 똑똑 떨어뜨리는 완만한 경사지에는 야영을 하기에 적합하다.
(2) 사구미해수욕장
사구미 해수욕장은 땅끝 갈두에서 남창간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 보면 사구마을 앞에 위치해 있으며 처녀바다의 신선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아직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고 있는 곳으로 가족들이 한적하게 휴양을 하기에 좋다. 이곳은 약 1.5 km 의 백사장과 함께 송림 숲이 조성되어 있어 적당한 그늘을 제공하기 때문에 야영을 하기에도 적합하다. 또한 사구미에서 보는 일몰의 장관도 일품이다. 멀리 땅끝 사자봉 왼편으로 지는 석양은 다도해의 작은 섬들을 붉게 물들이며 떨어진다. 이곳은 해안도로가 다도해의 절경을 끼고 돌기 때문에 최적의 드라이브 코스로도 유명하다. 해안도로는 송지면 산정에서 이어져 땅끝 갈두를 거쳐 북평면 남창까지 이어진다. 이 해안도로 중 특히 사구미 해수욕장과 북평면 남성리 일대는 환상적인 최고의 코스다.
[여름 휴가철 해수욕장 운영]
위 치 : 송지면 통호리
자연여건 : 백사장 2Km, 수심 1~3m, 송림 4,595㎡
편의시설 : 관리사무소 1동, 샤워장 3동, 화장실 4동, 음수대 3개소, 가로등 9등
숙박시설 : 민박 6동
주차시설 : 주차장 2개소/2,500평(380대 수용)
(3) 땅끝조각공원
이곳은 해안도로가 다도해의 절경을 끼고 돌기 때문에 최적의 드라이브코스로도 유명하다. 멀게는 송지면 산정에서 북평면 남창까지 이어지며 주로 송지면 송호리에서 북평면 남성리까지 8Km에 이르는 코스가 일품이다.
10. 기타 가볼 곳
(1) 어란진
새벽 어란진은 어민들이 탄 50여 척의 배들은 요란한 엔진 소리를 뒤로하고 항을 빠져나간다. 두툼한 옷 위에 비옷으로 무장하고 털모자를 눌러쓴 어민들, 손에는 면장갑에 고무장갑을 끼고서 달마산이 푸르스름하게 바다에 떠오를 시간 2∼3명씩 배에 타고 김 양식장으로 향한다. 230여 호에 어촌계원 197명 9개 반으로 구성된 어란진은 단일마을 어촌계로는 전국 최고를 자랑하며, 전국최대의 ‘물김’ 생산지이다.
[고기잡아 번 돈은 색시집에서 날리고]
1400여개의 섬이 바다에 떠있는 전라남도는 고기들에게는 천국의 땅이다. 산란을 해야 하는 봄철이면 추자도 너머의 깊은 바다에서 난류를 따라 북상하면서 바다에서 한바탕 분탕질이 시작된다. 서남해의 대표적 회유성 어종인 조기, 삼치, 멸치, 강달어, 갈치, 고등어 등이 연안에 몰려들면 어민은 물론 육지사람들도 배를 타기 위해 항구로 몰려든다. 어란진은 1960년대까지만 해도 참치어업이 매우 성했던 곳이다. 인근 어불도까지 포함해 지방배가 100여 척이 넘었고, 어란진 만도 50여 척에 이르렀다. 1982년 무렵까지 어란진항에는 일본으로 삼치를 수출하는 수출배가 늘 정박해 있었다. 당시 삼치는 2월에 제주도에서 시작하여 충청도 안면도, 대청도까지 올라와 산란하고, 다시 내려와 외도 위도 흑산도로 내려와서 거차도 추자도 청산도 거문도까지 내려와 다음해 1월에 깊은 바다로 내려간다. 어란의 삼치잡이 배는 7∼10여 명이 탄 10여 톤 규모로 회유하는 길목으로 이동하면서 고기를 잡았다. 선원들은 삼치떼를 따라 이동하며 추자도, 진도 거차도, 흑산도, 법성포, 위도 등에 형성되는 파시에서 필요한 물품도 구입하고, 바람에 조업이 어려울 때면 술과 여자로 욕정을 뱉어냈다. 당시 어란진에서 잡어를 구입해 법성포에서 넘겼던 생선장수를 했던 김씨의 경험이다.
“위도는 400∼500척씩 모으니까, 바람에 출어를 못하면 왁자지껄했제. 우리가 돈 벌어서 거기다 다 없애 부렀거든, 술먹제, 여관에 가제, 색시집에 가제. 정종을 주로 먹었는디 댓병이면 네 순배(주전자)가 나오는디, 한 순배가 4만∼5만원. 안주 하나에 2만∼3만원이여, 아가씨는 많이 먹으면 기본적으로 주제. 미장원에 가라고 돈은 좀 줘야제, 위도 파장금이 아니라 우리는 ‘환장금’이라고 했어. 환장한 놈들만 모았다고 환장금이라고 했어. 여대생들도 많이 들어왔어. 지금으로 말하면 티켓이제. 창살 없는 감옥이여, 낮에는 아가씨들이 나무도 하고 그랬제.”
[삼치어업에서 김양식으로]
지금은 김 양식을 하고 있지만 1970년대까지 삼치어업을 했던 성북호 선주 김갑현(61·어란리)씨는 돈도 많이 벌었지만 인건비를 감당할 수 없어 김양식으로 전업했다고 한다. 당시 선주와 선원은 잡은 고기를 짓가림으로 나누었는데 4대 6제가 일반적이었다. 선주가 6 가져가고, 나머지 4로 선원들이 나누는 것이다. 물론 어구를 비롯한 투자비용과 고기잡이 기간 동안 들어가는 생활비(식구미)는 제하고, 능력에 따라 한 짓, 한 짓반, 두 짓(몫)으로 구분하여 등급별로 나누는 것이다. 배들이 많다 보니까 일 잘하는 사람을 끌어오기 위해 선대를 주었는데 도중에 도망가 버리면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 1970년대 참치도 안 잡히기 시작하면서 차츰 김양식으로 전업하기 시작하였다.
완도 바다가 한계에 이르자 일찍 김 양식에 눈을 뜬 어민들은 인근 고흥, 해남, 진도 등지로 새로운 어장을 찾아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란진의 바다에 김을 본격적으로 양식하기 시작한 것은 완도 어민들이 들어와 양식기술을 보급하기 시작한 1970년대 무렵이다. 지금은 물살이 세고 깊은 바다에서도 김양식을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내만에서만 김양식을 할 수 있었다. 포자(씨)를 김발에 붙이는 방법, 양식장을 관리하는 방법, 채취하는 방법 등이 발달하면서 지금은 진도군 수역까지 양식장을 확장해 진도수협에 일년에 1600만원의 행사료(이용료)를 지불하면서 양식을 하고 있다. 9월 중순에 시작하는 김양식은 다음해 4월말까지 계속되며 11월 말경에 수확을 시작해서 한 달에 1회 가량 채취하며, 어란진 수협에서 위판되는 어불도, 동현 등 세 개의 어촌계가 어란진 수협에서 물김을 위판하는데, 일년 100억에 이른다. 전국에서 최고의 물김 생산량이다. 물김 가격이 이곳에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들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녔던 시절]
어란진의 김 양식은 한 줄에 80∼120m로 시설비가 50만 원 정도 투자된다. 김갑현씨의 경우 110m 규모에 50줄을 하고 있는데 2003년에 작황이 좋고 가격도 괜찮아 총 8000만원의 소득을 올렸다. 김발은 한번 설치하면 3년 정도 사용하지만 매년 김발을 보수 관리 해주어야 하고, 3∼4명의 가족 인건비를 빼고 나면 사실 남는 것이 없는 셈이다. 양식규모가 늘어났다고 해서 반드시 소득이 늘어 난 것은 아니다. 초기에 부류식으로 김양식을 시도했던 어란진의 경우 박건수(64)씨는 1970년대에 오히려 지금보다 소득이 좋았다고 기억한다. “그때는 많이 한 사람이 10척(40m)이고 보통 6∼7척이었제. 내가 지주식할 때 조기산을 해서 100속을 해 가지고 5000원을 받았거든. 그 때 나락 시세가 3000원인게, 쌀 한가마니 가격보다 더 낫제. 지금 한 속에 5000원이 없어, 보통 3000원, 백화점용이 4000원이나 될까. 부류식이 생기면서 하기가 쉽고 너나없이 많이 했제.”
김 양식으로 경기가 가장 좋았던 시절에 어란진엔 ‘개들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었다. 과거 삼치잡이의 영화와 호황을 누리던 김 시세 탓인지 지금도 어란진 어민들의 씀씀이는 해남에서는 큰 편에 속한다. 지난 2월13일 어란진 위판에서 최고값은 한 자루에 5만 3000원이었다. 김갑현씨의 경우 5만 2000원에 낙찰되었는데, 보통 물김을 한 배 해 가지고 오면 50자루에 이르기 때문에 250여 만 원에 이른다. 물김 위판은 먼저 샘플로 물김을 내놓으면, 추첨 순서를 제비로 결정하고 위판을 하게 되는데 부안, 고흥 등 다른 지역에서도 많은 공장주인들이 참여한다. 이렇게 살려는 사람이 많게 되면 물김값은 오르게 된다. 어란진의 물김은 무노출 김과 달리 노출김으로 지주식 김과 같은 맛을 내기 때문에 맛이 좋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검은 색깔의 김을 알아줬는데 지금은 색깔보다는 맛으로 결정되고 있다. 약간 붉은 색을 띠는 해남김은 과거부터 ‘홍조’로 알려져 있으며 어란진의 노출김이 대표적이다. 이런 이유로 다른 지역의 김들이 맛을 내기 위해 이곳에서 김을 사서 자기 지역의 김과 섞어서 사용하기도 한다.
[큰아들에게는 어장 분할 안하는 것이 관행]
바다자원이 인간의 필요에 따라 무한정 자원을 공급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한 만큼 이용하고 잘 관리해 줘야 자원은 재생산되고 또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대규모의 양식어장이 형성되기 전에 연안의 바다는 자정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양식어업이 규모화 되면서 바다는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 어란진에서도 김 양식을 하려는 사람은 많아지고 바다는 한정되어 있어 어촌계원들에게 양식규모를 50줄씩 한정했다고 한다. 김의 고장이었던 완도는 대부분 미역과 다시마나 어류양식으로 전업하였다. 특히 미역과 다시마의 경우에는 엽체가 커서 같은 바다에서 김과 먹이 경쟁을 하게 되면 이길 수 없어 자라질 않는다. 어란진 어촌계에서는 마을어장에 마음대로 미역과 다시마 양식을 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게다가 한정된 어장을 골고루 이용할 수 있도록 큰아들에게는 어장을 분할하지 않고 있다. 이는 어촌의 오래된 관행인데 이곳에서는 지금도 그 관행이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큰아들이 어장을 이용하려면 아버지의 어장을 물려받아야 한다. 하지만 작은아들의 경우 결혼해서 같은 마을에 분가하여 집을 마련하면 어장을 분양받을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만약 다른 마을 사람이 어란진 어장을 이용하려면 최소한 10년 이상 마을에 거주해야 하고, 마을총회에서 마을주민으로 인정해야 권리가 주어진다. 김갑현씨의 경우에도 큰아들은 공업사를 하고 있고, 작은아들이 결혼해서 80줄의 김양식을 하고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작은아들이 함께 양식을 하면서 아버지 어장이 끝나면 아들어장에서 김양식을 하고 있다. 물론 위판을 해서 들어오는 통장은 아들과 아버지 통장이 각각 다르다.
어란진에서는 돼기 곱창처럼 생긴 곱창김이 11월에, 노란 돌김의 마루바, 일반 노출김, 자연산 돌김 등 다양한 김이 생산된다. 최근 어란진 ‘김축제’를 해남군이 기획하기도 했다. 11월부터 4월까지 이곳에서는 매일 물김을 매(생산)고 위판하고, 크레인으로 운반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어란진 수협의 김관선(48) 부지점장은 김 양식은 앞으로 점점 규모가 축소될 것인데 대량양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어민들이 스스로 느껴야 하고, 김 양식도 작은 규모로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당장 눈앞의 소득만 생각하면 어란진의 바다도 완도가 그랬듯이 몇 년 안에 김 양식을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완도가 그런 것처럼 어류양식이나 전복양식 등으로 전업하려면 많은 자본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어장도 충분하지 않고 자본의 회수율도 3∼4년에 이르기 때문에 투기성도 강해 영세한 어민들이 투자하기는 어렵다. 60대 부부가 바다에 나가 김 양식으로 8000만원의 소득을 올리는 일을 지속할 수 있도록 마을 공동어장을 잘 지켜내는 일이야말로 어민들의 삶을 지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 한반도지형 닮은 바위
이 바위는 면소재인 일평리에서 1km 지점인 탑동 입구 산비탈에서 발견됐으며 높이 4m, 넓이1m 가량으로 비스듬하게 누워있으며 제주도까지 나타나 있다. 한도 바위를 소개한 탑동리 손종실씨는 “어릴 적 학교에 다닐 때 친구들과 이 바위에서 유명한 지역의 이름을 찾는 지도놀이를 했다”며, “지금은 흙에 묻혀 그 모양이 덜하지만 정비를 한다면 선명한 옛모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바위에는 한반도의 동고서저 형세가 그대로 나타나 있고 금강산의 모습도 형상화돼 있어 한반도 실제 지형과도 닮아 있다. 이 한반도 바위는 지난 74년 전남대 농촌봉사활동단의 제보로 KBS 광주방송에서 소개됐고, 지난 91년에는 현산중학교 교사들이 학생들과 이곳을 찾아 야외학습을 하기도 했다.
현산면 윤주현면장은 “국토순례의 출발지인 땅끝에 이런 바위가 발견돼 의미가 크다”며 “땅끝 한반도공원을 조성해 국토순례단 경유지로 발전시켜가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땅끝은 매년 수많은 이들이 국토순례를 시작하는 곳으로 이곳은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도로와 가까워 공원으로 조성해 홍보할 경우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3) 송평해수욕장
무더운 여름 해수욕은 기본, 백사장에서 게를 잡고, 갯바위에서 낚시를 즐길 수 있는 곳이 화산면 송평해수욕장이다. 송평해수욕장 백사장에서는 게가 들락날락 하는 구멍을 조심스럽게 파 들어가며 게를 잡을 수 있다. 또 얕은 바다 바위 위에서 줄에 고등어 등을 묶어 바닷물에 담그면 쉽고 재미나게 꽃게를 잡을 수 있다. 물이 빠지는 썰물 때는 바닷가에 있는 바위를 들추면 그 아래에 숨어 있는 게들을 잡을 수 있다. 사람의 인기척에 놀라 구멍을 찾아 빠르게 달려가는 게의 모습도 재밌다.
송평해수욕장에서는 그물 체험도 가능하다. 송평리 주민들이 배로 널찍한 그물을 설치하면 관광객들은 그물을 당겨 그 안에 있는 고기랑 게 등을 맛 볼 수 있게 하는 체험이다. 정범수 이장은 "관광객들에게 해수욕뿐만 아니라 체험할 수 있는 재미를 주고자 그물체험을 만들었다"며 "지난주 처음으로 그물 체험을 실시했는데 관광객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다며 관광객 수가 늘어나면 상시적으로 운영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또 "안전선 너머로 통발을 설치해 관광객들이 직접 배를 타고 통발을 걷는 색다른 체험도 준비 중에 있다"고 말했다.
2㎞여 백사장 옆에 있는 갯바위에서는 낚시를 즐길 수 있다. 지금은 민어가 많이 올라오지만 돔과 조기 등도 잡을 수 있다. 송평리는 낚싯대가 없는 관광객들에게는 낚싯대를 대여 해준다. 송평리 주변에는 민박이 운영되고 있으며 해수욕장 내에는 몽골텐트가 설치돼 있다. 주차장을 무료로 개방하고 있는 송평리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마을 자체적으로 평상과 그늘막을 해변가에 설치해 그늘에서 편히 쉴 수 있게 꾸몄다. 또 관광객과 지역 주민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해변 노래방 노래자랑을 열기도 한다. 참가비 없이 누구나 참여 가능한 노래자랑은 노래방기계 점수로 순위를 가리고 텔레비전, 선풍기 등이 상품으로 주어진다. 한편 송평마을은 마을 앞 잔디를 새로 심고 화장실과 샤워장 등의 편의 시설을 갖춰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소나무 숲이 우거진 송평마을은 직장과 학교 등 단합대회와 야유회 장소로 인기가 높다. 송평마을에서는 축구와 족구 등의 체육경기를 즐기고 해수욕장에서 물놀이와 고기잡이 등을 체험할 수 있는 색다른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문의: 정범수 이장(016-600-0800)
(4) 화원관광단지
[동양최대 해수욕장, 36m 수루미 등대 장관]
화원관광단지 블랑코비치 해수욕장, 하지만 이 해수욕장만 찾는다면 서쪽 땅끝 화원면의 진면목을 절반밖에 보지 못한 것이다. 화원면에는 동양최대 인공해수욕장인 블랑코비치와 한국에서 3번째로 큰 수루미 등대가 있다. 이 수루미등대는 100년 된 옛날 등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 평일에도 찾는 이들이 많다. 이 수루미 등대로 가는 해안도로는 시하바다와 다도해를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이기도 하다.
화원면(면장 전성술)은 화원관광단지 해수욕장을 찾는 관광객들이 화원면의 진면목을 잘 보고 갈 수 있도록 안내책자를 만들어 홍보할 계획이다. 시하바다민박 조대웅씨는 "해수욕장을 중심으로 관광객이 갈 수 있는 곳의 동선을 만들어 화원면에 경제적인 이득이 발생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한조선소가 가동되면서 가시적으로 인구가 300여명 늘어나고 상권이 살아나는 효과를 보이고 있는 화원면은 화원관광단지 해수욕장 개장과 함께 지역경기가 활기를 띨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화원면은 그냥 스쳐지나가는 곳이었는데 찾아오는 관광지로 변모하고 있어 볼거리와 먹거리, 체험장 등을 정비해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수용태세를 갖추고 있다.
[일몰과 일출 한눈에 시하바다민박]-해수풀장, 바다골프연습, 갯벌체험 마련
수루미 등대를 찾아가는 매개 마을 바다가에 그림 같은 다도해의 파노라마를 한눈에 맞춤한 시하바다민박이 있다. 오는 과정은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들지만, 일단 하룻밤을 자고 나면 행복해지는 곳이 바로 시하바다민박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너머로 펼쳐지는 다도해의 바다산맥들과 그 앞을 유유히 떠가는 화물선들과 여객선들의 모습이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에서는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감상 할 수 있고 바닷가에서 주먹만한 소라를 잡는 것은 덤이다. 그래서 시하바다민박은 주로 중소기업체들의 워크숍이나 간부단합대회, 그리고 해를 관찰하려는 대학교수들과 학생들이 찾는다. 황토방과 해수풀장, 바다골프연습장 등을 갖춘 이 민박은 수루미등대가 7분 거리에 있고, 그 정상에서 시하바다를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매봉산을 뒤로 하고 있다.
이 민박집 주인 조대웅씨와의 만남도 즐거운 일이다. 서쪽땅끝 홍보대사인 조대웅씨는 일출과 낙조사진, 화원면 볼거리들을 한데 모아 동영상으로 만들어 지인들에게 보내주고, 인터넷에 올리는데 열심이다. 그가 찍어 놓은 시하바다와 해와 구름과 빛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낙조 사진을 감상하는 것도 이 민박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기쁨이다. 문의 537-1487, 010-2604-3503, 인터넷 검색창에 '시하바다민박'.
[36m 초대형 등대 오는 이 발길 붙잡아]-서북쪽 땅끝 월래마을 해안도로
서쪽 땅끝 해남은 숨겨져 있어 보배로운 땅이다. 그중 화원면 월래마을 수루미 등대를 찾아가는 해안도로는 그림 같은 다도해가 바다산맥처럼 뻗어있고 그 사이로 목포항을 들락거리는 배가 장관을 이룬 황홀한 곳이다. 남쪽 땅끝인 갈두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서북쪽 땅끝 매월리 해안도로는 미지의 세계를 열어가는 듯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푸른 시하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손에 닿을 듯 말듯한 거리에 암태, 장산, 하의, 안좌, 팔금 등 신안의 섬들이 마치 바다 산맥처럼 길게 늘어져 그림 같은 다도해를 연출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온덕마을을 지나 매개와 월래를 잇는 구불구불한 해안도로를 십여 리쯤 가다보면 한국에서 3번째로 높은 수루미 등대를 만날 수 있다.
목포항에서 시하바다로 빠져 나와 우수영, 제주도, 흑산도, 부산항 등으로 향하는 배들은 모두 월래마을과 목포 달리도 사이의 물목을 지나야 한다. 바로 이 수로 가장자리에 걸려있는 등대가 수루미 등대다. 1908년 세워진 이 등대는 이제 높이 36.5m의 매끈한 등대에 밀려 그 소임을 마쳤다. 이곳에서는 일제시대에 손으로 만든 옛날 등대와 현대식 등대를 한 곳에서 볼 수 있는 산교육장이기도 하다. 목포의 수문장인 수류미 등대는 일반인들에게 개방돼 꼭대기에 올라 다도해의 비경을 볼 수 있어 평일에도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다. 이 등대 꼭대기에 서면 최근 대한조선이나 현대삼호조선에서 건조한 대형 배들이 시험 운항하는 광경도 볼 수 있다.
매개 월래 마을은 치매환자가 없기로 유명하다. 그 이유에 대한 마을주민들은 시원한 풍광과 밀려온 파도가 부서질 때 발생하는 산소가 충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도로가 나고 사람들의 손이 닿으면서 매개와 월래마을에도 별장같은 집들이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이 풍광을 즐기려는 목포사람들이 이곳에 주택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화원관광단지가 제대로 가동된다면 이곳은 펜션이나 민박단지로 변할 가능성이 큰 곳이다. 목포 달리도에서 양화리를 잇는 국도 77호선이 개통된다면 이곳은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바로 넘어올 수 있는 곳이 되기 때문이다. 화원면을 찾는다면 이 매개월래마을 해안도로와 수루미 등대는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시하바다에 눈을 씻고, 수루미 등대에서 다도해를 감상하는 맛이야 말로 일품이기 때문이다. 이 수루미 등대 사이로 떨어지는 낙조와 외달도를 비롯한 해중산맥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찾아보려면 일단 서해안 고속도로의 종착지인 목포에서 49번 도로를 타고 영암방조제와 금호방조제를 차례로 지나 만나는 별암을 기점으로 삼는 게 편리하다. 별암리 회타운을 지나 직진하면 이내 77번 국도와 만나는 구지리. 여기서 화원농협 김치공장을 끼고 우회전해 길을 잡아가다 월호리에서 좌회전, 다시 온덕리에서 월내 이정표를 보고 오른쪽으로 진입하면 매개∼월내 가는 길이다.
["겨울배추 주산지서 김치 맛 보세요"]-화원농협김치공장 이 맑은 김치
화원면을 찾았다면 김치맛을 보고 가야한다. 해남은 전국 겨울배추의 70%를 생산하는 배추주산지다. 해풍을 맞고 자란 화원면에서 생산되는 겨울배추는 그 맛이 뛰어나다. 803번 지방도를 타고 방조제를 넘어서 국도 77호선과 만나는 인근에 화원농협이 운영하는 이맑은 김치 가공공장이 있다. 이 공장에서는 김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견학할 수 있으며 여러가지 김치를 직접 구입할 수 있다. 정영호 공장장은 "올해 500g 들이 상품을 개발해 현재 판매중에 있다"며 "화원관광단지 해수욕장을 찾은 관광객들에게는 더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원한 숲속에서 닭요리를]-화원면 매월리 '닭천지'
해남 서쪽 땅끝 화원면 수류미등대로 가는 길목 온덕리에 닭천지가 있다. 마을 입구 간판을 보고 숲길로 들어서면 소나무들 사이로 3대째 살고 있다는 박승규·임영순씨 부부가 운영하는 닭전문요리점 닭천지가 보인다. 산속 1만5000평에서 5000마리 닭들이 뛰어노는 이곳은 백숙과 닭도리탕을 전문으로 한다. 방목한 토종닭을 바로 잡아 주기 때문에 맛도 좋고, 오막살이 흙집을 보면서 마당 동백나무 아래 평상에서 먹는 멋도 더했다. 또한 토굴에 저장한 김치도 별미다. 좀 특이한 이곳은 화원면 사람들뿐만 아니라 알음알음으로 목포에서도 찾아 온 이들이 많다. 닭도리탕과 백숙은 3만원, 옺닭은 3만5000원이다. 문의 532-0777, 532-0778.
[바닷가에서 갓 잡은 활어회 맛]-아는 사람은 다 아는 월래마을 김성호씨
화원면 후산리 김성호·마즈바라 가나씨 부부는 월래마을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다. 덤장에서 바로 잡은 여러 가지 물고기들은 모두 그날 맞춤한 사람들 몫이다. 전화로 예약을 하고 가면 덤장 안에 들어있는 고기들을 월래마을 바닷가 평상에서 바로 썰어서 회로, 탕으로 내어준다. 월래마을 선창과 군부대 옆에 있는 김 씨의 덤장에는 요즘 갑오징어와 한치가 주로 들고, 여름철이면 숭어와 농어, 광어, 비드락 등이 주로 잡힌다. 주인에게 말만 잘하면 월래마을 집에서 하룻밤 묵어 갈 수도 있다. 그래서 친구들 모임, 가족모임, 작은 직장 단합대회를 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아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곳이다. 사람 좋은 김성호씨와 시집 온 지 12년 된 안주인 마즈바라 가나(일본)씨의 맛깔스런 손맛과 싱싱한 자연산 회를 맛보려면 017-631-0171, 010-6331-0171으로 전화하고 가면 된다.
[15년 전통의 별암리 회타운]-푸짐한 밑반찬 가격도 저렴
서해안고속도로에서 목포를 지나 영암방조제를 지나 화원면으로 접어들면 낚시꾼들이 몰리는 금호방조제 끝에 별암리 회타운이 있다. 1993년 간척공사로 터전을 잃은 어민들이 생계수단으로 방조제 인근에 횟집을 만들어 운영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금호방조제의 시원한 풍광을 배경으로 목포와 해남사람들이 주로 찾는 별암리 회타운은 화원 바다에서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푸짐하게 내놓아 입맛을 돋궈준다. 김성옥 이장은 "목포에 비해 가격도 더 저렴하고 갓 잡은 싱싱한 해산물을 맛볼 수 있다"며 많이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또한 갈치낚시로 유명한 금호호 방조제에서는 여름철에 숭어와 갯장어, 비드락 등이 잡힌다.
11. 해남에 와서 놓쳐서는 안될 음식들
(1) 묵은지
묵은지란 묵은 김치를 말한다. 해남에는 김장담그는 일이 좀처럼 없다. 김장이란 한겨울 배추가 나지 않으므로 늦가을 한꺼번에 봄까지 먹을 것까지 담그는 것을 김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해남에는 한겨울에도 얼마든지 배추를 구할 수 있다. 이름하여 월동배추의 90%가 해남에서 출하되기 때문이다. 눈이 내리는 한겨울에도 해남의 들녘은 배추로 인해 푸르다. 그러니 해남에선 김장을 담글 이유가 없다. 따라서 해남은 김치의 천국이다. 여기서 비롯된 식도락의 김치가 바로 묵은지이다.
김치를 담궈서 먹다가 시어버리는 것은 묵은지가 아니다. 해남의 묵은지란, 김치를 담궈 바로 김치독에 넣어 땅속에 파묻고 이 김치를 2,3년 그대로 방치한다. 그 김치를 묵은지라고 한다. 항아리는 잘 알려져 있듯이 공기가 통한다. 속칭 숨쉬는 용기이다. 땅속 항아리에서 2,3년을 묵은 후 꺼내먹는 김치가 바로 묵은지이다. 신김치와는 차원이 틀리다. 3년된 묵은지를 상품으로 친다. 잘 삭혀진 묵은지는 그 맛이 깔끔하고 어쩔 때는 볶은 김치 맛이 나기도 한다. 해남 대부분의 식당에서는 그 묵은지의 맛으로 승부를 걸기도 한다. 소문나기로는 대흥사 전주식당의 묵은지가 유명하다.
(2) 매생이국
매생이. 이름조차 낯설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음식은 전남서남부지방에서만 나기 때문이다. 겨울 바다에서 자란다. 김발을 바다에 꽂으면 제일 윗쪽에 김이 붙고, 그 밑으로 파래가 붙는다. 그리고 제일 마지막으로 이 매생이가 붙는데...이것을 따로 떼어낸 것이 매생이다. 매생이는 요즈음 서울에서 별미로 한두군데 식당에서도 판다고 한다. 해남에서도 모든 식당에서 이 매생이국을 취급하는 것은 아니다. 주로 한정식 집에서 주로 나오는데 반드시 그 식당에서 이 국이 나오나 확인을 하고 먹어야 한다. 매생이를 물과 함께 적당한 온도에서 덥힌 후 이에 굴(석화)을 넣고 다시 덥히는데, 팔팔 끓이게 되면 매생이가 녹아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니 이 국을 끓이는데도 기술이 필요하단다.
(3) 전주식당 동동주
전주식당의 동동주는 그 맛이 별스럽다. 물론 전주식당에서 파는 것만이 아니고 다른 식당에서도 종종 이 동동주를 맛볼 수 있으나 전주식당에서는 이 술을 받은 후 좀더 숙성시킨 후 손님에게 내어놓는다. 대부분의 동동주를 마신 이들은 그 뒷맛이 개운치 않고 머리가 아프다는 불평을 종종 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술을 완전히 숙성시키지 않은 것을 마시게 되어 그렇다. 숙성되지 않은 막걸리는 일단 맛이 쓰고, 텁텁하며, 뒷끝이 매우 좋지 않다.
전주식당의 동동주는 일단 달다. 그렇다고 해서 설탕맛이 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맛이 다른 막걸리에 비해 순하다는 말이다. 동동주에 쌀알이 띄어 있어야 정상이지만, 이곳의 술 위에는 붉은 구기자와 대추가 떠다닌다. 이 재료 외에도 감초 등 몇 가지 더 첨부된 한약재가 들어간다. 그리고 적당한 온도에서 완전히 숙성시켜 내어놓기 때문에 그 뒷끝이 매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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