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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후 제2주(20240602)
“네 손을 내밀라”
마가복음 2:23~3:6
오늘은 성령강림 후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마가복음의 말씀은 네 번째 계명인 ‘안식일 법’과 관련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법의 본래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셨지만, 그 일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이들이 협력하여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하게 하는 계기를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아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길을 가십니다. 아니, 그 길을 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걸어가야만 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 안식일 법을 어기심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곡식이 무르익은 밭 사이를 걷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길을 가다 곡식 이삭을 땄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어기고 있습니다.”라고 항의하며, 제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묵살하고 오히려 다윗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십니다.
이스라엘은 430년 노예 살이 경험이 있고, 40년 동안의 광야, 나그네 생활을 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적인 약자들과 나그네들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에 대한 규정들을 세세하게 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율법은 큰 틀에서 ‘사회적인 약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이었습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보호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즉 ‘이웃 사랑을 통해 하나님 사랑을 확증하는’ 것이 율법의 기본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곡식이 무르익은 밭 사이를 걸어갈 때, 낫이나 기구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낱알을 따서 먹는 행위는 안식일이 아니었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안식일이었고, 그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만든 세칙에 따르면 ‘곡식을 따서 먹은 행위’는 ‘일하지 말라’는 안식일 법을 어긴 것입니다. 이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항의를 한 것인데 예수님은 이를 논쟁으로 비화시키고 계신 것입니다.
■ 대제사장 아비아달
예수님은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할 때 성소에서 대제사장 아비아달이 보는 앞에서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빵’을 먹었던 일을 예로 듭니다. 성경을 잘 아시는 분들에게 이 이야기는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리를 하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언급하신 이야기는 사무엘상 21장에 등장합니다. 그 이야기를 보면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피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내어달라고 하는데 거룩한 떡밖에는 없다고 합니다. 레위기 24장 9절에 의하면,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떡, 진설병입니다. 그러나 제사장 아히멜렉은 다윗의 요청에 그 떡을 나눠주고, 골리앗의 칼도 다윗에게 줍니다.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여 죽이려한다는 소문이 파다한 데 제사장 아히멜렉이 이런 행위를 했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은 사울의 목자장 도엑이 보았고, 사울에게 보고합니다. 그러자 사울은 대노하여 놉의 제사장을 모두 불러 모아 전부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신하들이 제사장을 죽이는 것을 꺼려하니 도엑을 시켜 제사장들을 죽였는데 무려 85명을 죽였습니다. 그때,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은 다윗에게 피하여 목숨을 건집니다. 여기서부터 헛갈리는 겁니다. ‘빵은 제사장 아히멜렉이 주었는데 왜 예수님은 대제사장 아비아달이 주었다고 했지?’ 그 답은 사무엘하 9장 17절에 있습니다.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입니다. 사무엘상에서는 아히멜렉의 아들이라더니, 사무엘하에서는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헛갈립니다. 그러나 잘 보시면 예수님께서 그냥 이름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직책 ‘대제사장’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에게 빵을 준 것은 제사장 아히멜렉이었고 그것을 대제사장 아비아달도 그가 보는 앞에서 먹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손주가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에게 피한 아비아달의 할아버지 이름도 아비아달이었던 것이고, 사울 당시 놉의 대제사장이었을 것이고, 사울이 도엑을 통하여 제사장들을 학살할 때 죽임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비아달’에 관한 궁금증이 해소되었길 바랍니다.
■ 율법이냐, 정신이냐?
진설병은 안식일마다 누룩을 넣지 않고 밀가루로만 만들어 하나님 앞에 바쳤던 일곱 덩어리의 떡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거룩한 빵은 이것으로, 더운 떡으로 교체된 후에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떡을 다윗은 요구했고, 아히멜렉은 준 것이고, 대제사장 아비아달은 용인한 것입니다. 율법은 있었지만, 이렇게 처신하는 것이 옳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이 있다. 그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의 종이 아니라 주인이다.” 그러니 법보다 정신, 문자보다는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 것은 안식일의 주인인 하나님과 자신이 동등하다고 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이 볼 때에 예수님은 율법만 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모독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 사건의 확대
여기에서 사건이 일단락되었으면 모르겠지만, 사건은 점점 커집니다. 회당에 들어가서 한 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고발하려고 예수님의 행동 하나하나를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실리 없는 예수님이신데, 그를 가운데로 나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적대자들에게 질문합니다.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그러자 아무도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보시고 탄식하십니다. 탄식하셨다는 번역은 ‘노하셨다’고 번역하는 것이 더 분명한 번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비정한 종교에 대해 탄식하고, 분노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겠다고, 안식일 법을 잘 지키겠다고 만든 법이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니 분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의 손이 새 손처럼 회복이 되었습니다. 굳은 마음과 부드러운 새 손이 대조됩니다. 굳은 마음, 굳은 종교는 사람을 죽이고, 부드러운 마음, 부드러운 종교는 사람을 살립니다.
■ 예수님이라는 창(窓)
마가복음 3잘 6절을 보십시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 당시 헤롯당은 소수의 정치적 당파로 헤롯이 계속 집권하기를 바라는 세력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을 반대하는 바리새인들과는 적대적인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연합합니다. 의로운 일뿐 아니라 불의한 일로도 사람들은 연합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파와 헤롯 당원들은 어떻게 예수님을 파멸시킬 것인가 골몰합니다. 이후에는 여기에 사두개파도 연대하고, 빌라도의 법정에서는 군중까지 가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의 간극을 알게 된 이들은 이후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마다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비극입니다. 색안경을 끼면, 진실을 볼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문자에 갇힌 율법이라는 안경 너머로 사람들을 판단합니다.
우리도 저마다의 안경을 끼고 있습니다. 안경은 창(窓)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라는 창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창을 통해서 세상을 보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할지가 분명하게 보입니다.
■ 손 마른 사람
말씀을 정리하면서 안식일 회당에 있었던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집중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손 마른 사람에게 두 가지 요구를 하십니다. 먼저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는 것이고 다음은 “네 손을 내밀라”는 것입니다.
손 마른 사람은 왜 회당에 와있을까요? 회당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구걸을 하러 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면, 한 쪽 손만 말랐으니 무슨 물건을 팔러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손 마른 사람은 ‘죄인 취급’을 당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육체적인 질병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이해를 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에 대하여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러니 손 마른 사람 역시도 ‘죄인 취급’을 당했을 것이고, 주변부 삶을 살아가는 이였을 것입니다.
■ “네 손을 내밀라”
예수님은 그를 한 가운데 세우십니다. 저는 이것을 주변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중심에 세우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마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바로 주변부, 땅의 사람들을 중심에 세우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네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만일, 그 말씀에 “마른 손을 어떻게 내밉니까?”했다면 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적인 순종은 기적의 삶을 만든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중심에서 밀려나 주변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바로 세우시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에게 기적을 행하시길 원하십니다. 어쩌면 우리들이 바로 손 마른 사람들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세상의 주변부, 변두리에 사는 것과 같은 우리를 세상 중심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네 손을 내밀라”고 하십니다. 아픈 상처,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주님 앞에 내미십시오. 주님께서 고쳐주실 것입니다. 그런 기적의 삶을 살아가는 분들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 기도]
주님,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손 마른 사람처럼 신앙의 주변부만 기웃거리며 산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게 하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시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신앙이 구부러진 손과 같이 굳어버린 신앙이 되지 말게 하시고, 아이의 손과 같이 부드러운 신앙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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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전 설교를 복기를 합니다.
좀 더 깊이 전개시키고 싶은 이야기들도 많지만, 한정된 시간에 메시지를 전해야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내가 바로 손 내밀어야 하는 그 사람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춰여 했는데, 배경 설명이 없으면 또 말씀의 본뜻을 간과할 수 있으니 이 또한 고민입니다.
첫댓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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