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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곤(1907. 10. 18~1992. 9. 13)
사회과학 서적을 접하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갖게 됐다. 1931년 12월 광양읍 도월리 에서 박경래의 지도로 전남적색농민조합을 결성하고 조직적 항일운동을 펴나갔다. 이 조합은 새로운 단계의 농민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된 비밀결사다.
1933년 5월 1일 광양면 용인리에서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이로 인해 동년 9월 체포, 1935년 7월 19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5년을 받기까지 1년 9개월여 옥고를 치렀다. 2005년 뒤늦게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김지태(1911. 7. 27-1937. 5. 21)
광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경 사회주의 사상에 몰입했다. 그해 12월 인동리에서 노동계를 조직, 노동자들에게 항일의식과 계급의식을 고취시켰다. 1933년 8월 28일 조선공산당 전남재건광양지부 일명 ‘전남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고 책임비서가 됐다.
이 단체는 비밀결사로, 실업청년회를 내세워 자금을 조달하고, 소작쟁의를 지도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그는 1933년 9월 2일 일경에 조직이 발각, 체포됐다. 이로 인해 1년 9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다시 1935년 7월 징역 2년을 받았다. 2005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김희곤(1915. 4. 12-1943. 8. 30)
김갑곤의 동생이다. 1929년 3월 광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에 종사하던 그는 1931년 11월 형 김갑곤의 소개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했다. 그해 12월 전남적색농민조합을 결성하고 조직적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33년 5월 1일 시위운동을 전개하다 9·10월경 체포돼 1935년 7월 19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2005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신명준(1894. 7. 30-1933. 4. 19)
조선일보 광양지국과 미곡상회를 운영하면서 광양지역 노농운동의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1922년에 광양청년회 결성에 앞장 집행위원을 맡았고,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집행위원, 광양노동청년회 서무부위원, 광양노동회 위원장, 광양노동연맹 집행위원 등을 맡으며, 청년운동 및 노동운동 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다.
1925년 9월 전라남도 동부지역의 광양·순천·고흥·구례·보성·여수 6개 군 청년단체들이 연합해 전남동부청년연맹을 결성할 때, 여수지역 출장위원으로 선정, 이 지역 가맹단체 모집을 담당했다.
1926년 제2차 조선공산당의 전남도당 집행위원으로 선임된 후, 경상남도 위원인 김명규 등과 함께 전남·경남 양도위원회를 개최하며 조직 구성과 회원 확보 등에 힘을 쏟았다.
이 위원회는 조직을 교양·비서·책임부로 구성,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했다.1926년 6월 ‘제2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 1928년, 2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9년 8월 신간회 광양지회 집행위원장으로 사회운동을 전개했다. 2005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
▲정진무(1883. 6. 22-1960. 10. 15)
국내항일 건국포장(2005) 광양 농민운동 지도자로 활동하던 그는 1924년 4월 조선노총총동맹 창립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됐다.
또 전라노농연맹회 광양노동청년회, 광양노농연합회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순천, 광양지역의 인사들을 규합해 항일비밀결사를 조직했다. 1925년 2월에는 전 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 5월에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가입해 밀양지역 책임자가 됐다.
1926년 일경에 검거돼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인 1929년에는 신간회 광양지회 검사위원으로 활동했다.2005년 건국포장이 추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