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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陳) 씨 할머니의 기이한 이야기
2009년 1월 24일
작자: 신련(新蓮)
【정견망 2007년 6월 23일】
1. 꽃다운 나이에 병으로 고통
나의 본명은 진월하(陳月霞)로 현재 71세이다. 사람들은 내가 정말이지 얼마나 많은 병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릴 때 우리는 집이 가난했고 게다가 나는 또 태어날 때부터 몸이 허약해 많은 병이 따라다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자라서 이십대가 되었을 때 인연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은 대를 이어 공업에 종사하던 사람인데 나는 크고 작은 만성병으로 체질이 너무 형편없어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또 집안일이나 요리도 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내 사람을 불러 일을 시켜야 했다. 나는 당시 자궁염, 난소염, 위염, 부인과 질환, 빈혈, 신경쇠약, 잦은 감기, 심한 편두통, 위장장애, 변비, 습관성 요추염좌, 좌골신경통, 치질, 혈뇨, 방광염 등이 있었다.
비록 이들 병이 어느 하나도 치명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잘 지내지 못했다. 어떻게 말할까? 나는 산다는 것이 정말 매우 고생스러웠다! 화장을 아름답게 하면 남편이 보고 기뻐했지만, 자신의 진정한 상심, 한탄, 피로 등을 감히 표현할 수 없었다. 사실 진정한 나의 내심은 하루도 명랑한 적이 없었다.
2. 중년의 외로운 신세
하지만 원래 병이 없고 쾌활한 남편은 일찍이 반 농담으로 웃으면서 대만 사투리로 내게 말했다. “우리 마누라는 두 가지 특색이 있는데 하나는 온몸에 약냄새이고 또 하나는 엉덩이가 단단한 것이다!” 왜 그런가? 매달 수많은 주사를 맞았는데 진통제, 소염제, 감기약, 보혈제, 변비약 등 모든 종류의 주사를 맞았다.
약의 이름이 너무 많아 다 헤아릴 수 없었고 장기적으로 늘 주사를 맞자 두 엉덩이에 어혈이 생겨 고통스럽고 부스럼이 생겼는데 날이 지나면 단단한 상태로 변해버렸다!
물론 인연이 있어서였겠지만 우리 부부는 완전한 가족의 정을 원했기 때문에 젊을 때 딸 하나를 입양했다. 내 기억에 그 아이가 만 15세 쯤 되었을까, 늘 명랑하던 남편이 의외로 쓰러져 중풍 증상이 나타났다. 침상에서 누워 지낸 지 1년 만에 남편은 우리 모녀를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나는 남편이 남겨놓은 사업을 유지해야 했고 아직 채 성인이 되지 않은 딸도 양육해야했기 때문에 하루 종일 바쁘게 보냈으며, 밤에는 침상에 누워 천천히 모든 병고의 어려움을 감수해야 했다.
사실 나는 젊을 때부터 시작해서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때맞춰 관음사에 가서 향을 올리고, 제를 올리며 향유 값을 내는 습관이 있었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에게 2,30년간 절을 했으며 신체가 좀 건강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또 나는 매년 사람을 찾아가 운명을 바꾸고 운명을 보완하려고 했다.
이외에도 나는 생활에서 크고 작은 일을 만나면 집에 모시는 관세음보살상에 가르침을 청했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나는 반드시 직접 차를 따르고 향을 올리며 매우 성심껏 관세음보살에게 오체투지로 큰 절을 올렸다. 이렇게 수십년을 했음에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남편이 떠난 후 친구가 계속 중매하러 왔을 때 관세음보살이 매우 영험하게 나의 청을 응답해주었는데 나더러 혼자 사는 것이 가장 낫다고 했다. 당시 40이 안된 나는 이렇게 하여 혼자 살기로 결정했다.
3. 평안을 구하다
생활은 계속되었고 병의 통증도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비록 매일 약을 먹어도 소용이 없는 것을 알았지만 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다량의 약물에 의지하여 일체 생활의 질을 제고하려 했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 방법이 없어서 한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인생이 원래 이런 것이고 세상 사람들도 이렇다고 여기면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사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6, 7년이 지나자 딸은 성년이 되었고 얼마 후 결혼했다. 나도 이때는 남편이 남긴 가게를 더 이상 경영하지 않게 되었다.
사업을 일단락하자 2년 후 나는 건강을 목적으로 공원에 가서 운동을 시작했다. 당시 거의 오십이 다 된 나는 우선 “외단공(外丹功)”을 선택했는데 끈기 있게 7,8년 했다.
나중에는 보통 수련생에서 외단공 사범이 되었다. 그러나 운동은 운동이고, 병은 병이라 나의 온 전신에는 크고 작은 병이 조금도 낫지 않았다. 감기가 걸리면 눈앞이 어찔했고, 두통이 오면 쓰러질 것 같았다. 아, 이런 고통은 정말이지 삶의 의욕을 잃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또 “태극기공”으로 바꾸어 그것을 2년을 배웠는데 역시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았고 또 “향공(香功)”의 행렬로 들어서 사람들을 따라 2년을 소비했다.
나중에 친구가 나를 불러 “원극무(元極舞)”를 같이 추었다. 나는 이렇게 펄쩍 펄쩍 뛰는 것이 즐거웠고 그러다 보니 눈 깜짝할 사이에 또 4년이 지났다.
그때 우리를 데리고 원극무를 가르치던 선생이 다른 공원에 가서 수업을 개설하는 바람에 뜻이 있으면 나더러 접수하라고 했다. 당시 내 나이는 이미 65세였는데 남을 가르치려면 내가 다시 훈련을 받고 그들 원극무 위원회에 참가해 1천5백원 입회비를 낸 후에 비로소 강의를 열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것은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니 집에 가서 관세음보살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4. 바른 신의 보호 하에 귀로에 올라
뜻밖에 일체의 변화는 이때부터 시작했는데 이는 정말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우선 나는 차를 올리고, 향을 피우고, 절한 후 공경하게 괘를 던졌다. 결과적으로 관세음보살은 내가 원극무를 가르치는 사범이 되는 것을 부정했고 심지어 내가 계속 원극무를 하는 것조차도 부정했다.
나는 속으로 매우 궁금해서 이왕 관세음이 내가 원극무하는 것조차도 못하게 하니 설마 내가 다시 외단공, 향공 아니면 태극기공으로 돌아가란 말인가? 뜻밖에도 이러한 것을 계속해서 물어보아도 답은 모두 부정적이었다.
이는 정말 당황스러운 것이었는데 나는 정말 알 수 없었다. 더욱이 내 몸이 이렇게 약한데 관세음보살은 내가 운동 좀 하는 것을 부정하니 도저히 나는 어떻게 하라는 걸까?
별 방법이 없어 나는 여전히 원극무를 계속했다. 물론 이 기간에 나는 공원에서 묵묵히 연공하는 또 다른 무리의 사람을 주의 깊게 보았다. 그들은 통상 모두 앉아서 움직이지 않고 파룬궁(法輪功)을 연공하고 있었다.
매번 우리가 원극무를 추고 나면 몇 명의 친구들은 궁금해서 속삭였다. “이게 어디에 좋은 거야? 이렇게 앉아서 움직이지 않으면 신체의 기혈이 순환하지 않을 것이고 운동하지 않는 것 같은데, 이런 것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몇 번을 보았지만 전혀 배울 마음이 없었다.
아마 연분이 되었으리라. 뜻밖에 반년 후 파룬궁을 널리 알리는 활동이 열렸다. 나는 호기심으로 때마침 공원에 뛰어가 보았는데 당시 내가 본 것은 큰 플랭카드에 『논어(論語)』라고 쓴 문장이었다.
나는 보자마자 불가(佛家)의 공법임을 알았고 간략한 소개를 집으로 가지고 돌아와 마음속으로 평온하지 못한 상태로 또 관음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파룬궁이 불가의 것입니까?” (그렇다!)
“그들의 이것이 원극무보다 낫습니까?” (그렇다!)
“그럼 당신의 뜻은 내가 파룬궁을 연마하라는 것입니까?” (그렇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데 이것이 좋은 것입니까?” (그렇다!)
“저는 이것을 좋아하지 않고 여전히 원극무를 추고 싶습니다!”(안 된다!)
“그러나 나더러 가라고 하는데 나는 다리를 틀 방법이 있습니까?”(있을 것이다)
“나는 반드시 이것을 연마해야 합니까?” (그렇다!)
“이것은 내가 이전에 연마했던 어떤 것보다 좋은 것입니까?” (그렇다!)
“그럼 나중에 다시 가겠습니다!” (안 된다!)
5. 할머니가 새로운 삶을 맞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하루를 지낸 후 파룬궁 연공장에 나갔다. 나는 속으로 관세음 보살이 가라고 해서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기왕 왔으면 편안히 여겨야지, 하며 정말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사람들을 따라 함께 가부좌를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첫날 가부좌 하는 재미가 괜찮아 한 시간이나 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나를 격려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가부좌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앉아서 있을 수 있으니 정말 관세음보살이 말한 대로였다.
이렇게 4,5일을 연공하자 이상한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파룬이 내 머리 위에서 내내 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는 큰 의혹이 일어 연공장 동수에게 물었다. 그들은 웃으면서 그것은 나의 신체를 정화하는 것을 돕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설명은 나를 약간 망연하게 했으며 내가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며칠이 지나 동네에서 열린 9일학습반에 참가해 진정하게 법리로부터 일부 함의를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기적은 이렇게 천천히 발생하였다. 내가 파룬궁으로 바꾼 지 얼마 안되어 원래 매달 걸렸던 감기에 걸리지 않았으며 십년이나 괴롭히던 좌골신경통도 없어졌다.
그전에 나는 오래 앉아 있지 못하여 침대에 누워야 했으며 쉽게 피로를 느끼고 대퇴부가 저리고 마비가 왔으며 매주 두 번씩 병원에 가서 매번 두 시간 동안 신경을 견인하는 재활운동을 했는데 지금은 모두 필요 없게 되었다.
더욱이 내게는 아직 많은 의사들이 속수무책인 질병이 있었다. 약 20년 동안 진통주사로 고통을 완화해야 하는 괴상한 병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매우 심한 신경통으로 평균 한달 정도마다 온 몸이 바스러지는 고통이 며칠씩 지속되었으며 심지어 일주일이나 끌어도 좋아지지 않았다.
그것은 대퇴내측이나 윗팔 안쪽과 같이 신체피부의 비교적 유연한 곳에 잘 나타났다. 일단 아프기 시작하면 바늘로 찌르고 칼을 연속적으로 후비는 듯했는데 극심한 고통으로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했다.
게다가 환부는 손을 댈 수 없어(피부가 벗겨진 것이 부딪히는 것 같은 통증) 대낮부터 밤까지 나는 고통스럽게 냉기를 들이켰고 이빨을 꽉 물고 눈물을 머금으며 행동거지가 뻣뻣해 졌다.
현대의학은 결코 원인을 검사해 내지 못했고 단지 대량의 진통제에 의지하여 이런 고통을 없앨 수 있었다. 또 그것이 잠시 끝났다고 여기면 죽은 이의 영혼이 사라지지 않듯 괴병은 또 1개월 후에 다시 나타났다. 그것은 이렇게 반복적으로 내 몸에 돌아와 나를 괴롭히고 학대하여 지속적으로 “살며 고통을 받는” 맛을 보게 하였다.
이 병은 기어이 일, 이십년 지속되었는데 사라졌다, 나타났다 했으며 사실 너무나 고통스럽게 나의 의지를 고험하여, 정말 “살아도 미련이 없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하게 하였다.
6. 신기한 경(經)
어쩌면 이것이 바로 파룬궁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유심연공, 무심득공”처럼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연속적으로 3개월 동안 매일 연공을 빠지지 않았는데 내내 나의 목숨을 괴롭혔던 “신경통”이 뜻밖에도 이 몇달동안 발작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기묘적인 것은 치질도 좋아졌다.
본래 전에 수술 후 일정한 간격으로 한바탕 부정기적으로 발작하고 혈변이 나오던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 약물에 의지하여 배변이 좋아졌지만 화장실을 가는 일이 편안하지 않았는데 혈뇨조차 보이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이전에 소변을 볼 때 쓰리고 배변의 고통 때문에 매번 “화장실 가는” 것은 매번 피를 흘리는 같은 공포였는데 전부 멀리 달아나 버렸다.
나는 매우 놀랐다. 온갖 병이란 병은 일생 동안 나를 괴롭혔고 그간 한의, 양의의 각종 약을 다 먹었고 안 써본 방법이 없었다. 나는 정말 어떻게 파룬궁을 연마하여 이렇게 될 수 있을까 감히 믿지 못했다. 나는 마치 신체가 바뀌고 심정, 머리가 모두 바뀐 것 같았다.
나는 이 공법이 너무 좋고 너무나 신령하게 느꼈다. 나를 수련인으로 여기기만 하면 내 일생의 병이 조금씩 떨어져 소실되었고 내재적인 심령은 한걸음씩 제고되었다.
파룬궁 말고 또 무엇이 있어 나의 이런 “재생의 은혜”에 감사할 수 있는가? 나는 황혼의 나이에 수련의 길을 걸어 진정하게 나의 여생을 구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대기원에서 전재)
발표시간 : 2007년 6월 23일
정견문장 :
http://zhengjian.org/zj/articles/2007/6/23/4450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