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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1부 6
훗날 라스콜니코프는 상인 부부가 리자베타를 자기 집에 초대한 이유를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다른 고장에서 이사 와서 살다가 살림이 옹색해진 어떤 가정이 가구와 옷가지와 그 밖의 모든 여자용 소지품을 팔게 되었는데, 시장에 내다 팔면 손해이기 때문에 그것을 팔아줄 여자 상인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 리자베타는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구전을 받고 일을 처리해주곤 했는데, 무척 정직하여 언제나 최대한의 값을 불렀고, 또 한 번 값을 불러놓으면 조금도 깍지 않아서 단골이 많았다. 그녀는 대체로 말수가 적은 데다, 앞에서도 얘기했듯 겁이 많고 온순한 여자였다.
그러나 라스콜니코프는 최근 들어 미신적인 경향이 짙어져 있었다. 그 흔적은 나중에까지 오래도록 남아서 거의 지워버릴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 사건 전체에 관해서도 그는 그 후 언제나 일종의 불가사의함과 신비성 같은 것을 느끼고, 뭔가 특별한 힘과 우연의 일치가 존재한다고 믿고 싶어졌다. 바로 지난 겨울에 친구인 대학생 포코료프가 하리코프로 떠날 때 무슨 얘기 끝에 혹시 전당 잡힐 일이라도 생기면 찾아가보라고 알료나 이바노브나 노파의 주소를 가르쳐주었다. 그때는 가정교사 자리가 있어 그럭저럭 먹고살 수는 있었기에 그는 오랫동안 노파한테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달 반쯤 전에 그 주소가 생각났다. 그에게는 전당 잡힐 만한 물건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낡은 은시계고, 또 하나는 누이동생이 작별할 때 기념으로 준 붉은 빛깔 보석이 세 개 박힌 조그만 금반지였다. 그는 반지를 가지고 가기로 했다. 노파의 집을 찾아갔을 때, 그는 노파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는데도 첫눈에 벌써 참을 수 없는 혐오를 느꼈다. 그는 지폐 두 장을 받아 들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싸구려 음식점에 들렀다. 그는 차를 시키고 자리에 앉아 이내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기괴한 상념이, 마치 달결 껍데기를 깨뜨리는 병아리처럼 그의 머릿속을 콕콕 찌르며 금세 그를 사로잡아버려/ㅆ다.
바로 옆에 나란히 놓은 탁자에는 그가 전혀 모르는 생면부지의 대학생과 젊은 장교가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당구를 치고 나서 차를 마시는 참이었다. 뜻밖에도 그는 대학생이 장교에게 14등관의 미망인인 고리대금업자 알료나 이바노브나 얘기를 하고 그 주소를 가르쳐주는 소리를 들었다. 벌써 그것만으로도 라스콜니코프는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방금 거기서 나오는 길인데 여기서도 그 노파의 얘기를 듣다니. 물론 그것은 우연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몹시 이상한 인상이 머리에 달라붙어 떠나지 않고 있는 터에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도우려는 것 같다고 느꼈다. 대학생은 갑자기 자기 친구에게 알뇨나 이바노브나에 관한 여러 가지 상세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굉장한 노파야"하고 그는 말했다. "그 노파한테 가기만 하면 언제든지 돈을 얻을 수 있거든. 유대인 못지않은 부자야. 한 번에 5천 루블도 빌 수 있는데 1루블짜리 물건도 싫다지 않거든. 우리 친구들도 많이 신세 지고 있다네. 지독한 노파긴 하지만 말야...."
그리고 대학생은 노파가 얼마나 심술궂고 변덕스러운가를 자세히 얘기하기 시작했다. 단 하루라도 기한이 지나면 전당 잡은 물건을 처분해버리고, 돈은 그 물건 값어치의 4분의 1밖에 빌려주지 않으며, 이자는 한 달에 5부에서 7부까지 받는다고 했다. 대학생은 한참 지껄인 끝에, 노파에게는 리자베타라는 동생이 있는데 그 작달막하고 추악한 노파는 늘 동생을 때리곤해서 적어도 다섯 자 여섯 치나 되는 몸집 큰 리자베타를 마치 조그만 어린애 다루듯 완전히 노예 취급을 하고 있다는 얘기까지 했다.
"그것 역시 드문 현상이라고나 할지!"
대학생은 이렇게 외치고 큰 소리로 웃어댔다.
그다음 그들은 리자베타에 대한 얘기를 하기 시작햇다. 그녀에 관해서 대학생은 어딘지 만족스런 어조로 얘기하면서 시종 싱글벙글 웃었다. 장교도 자못 흥미를 느낀 듯이 귀를 기울이다가, 그 리자베타에게 속옷 수선을 시키자 자기한테 한번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라스콜니코프는 한마디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것을 즉석에서 이해했다. 리자베타는 노파의 친동생이 아니고 배다른 동생인데, 나이는 이미 서른다섯이었다. 그녀는 언니를 위해 밤낮없이 일을 했는데, 집에서는 부엌일과 빨래를 도맡을 뿐만 아니라 부업으로 삯바느질도 하고 마룻바닥을 닦아주는 삯일까지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번 돈은 죄다 언니에게 주었다. 언니의 승낙 없이는 어떠한 주문이나 일거리도 결코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노파는 이미 유언장을 써놓았는데, 거기에 따르면 가재도구나 의자 따위 말고는 리자베타에게 주지 않기로 되어 있으며, 리자베타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돈은 전부 N현의 어느 수도원에 사후의 영구공양을 위해 기부하기로 정해져 있었다. 리자베타는 관리의 딸이 아니라 장사꾼의 딸이었다. 얼굴도 몸집도 지지리 못생긴 여자로 키만 크고, 길고 굽은 듯한 다리에 늘 닳아빠진 산양 가죽 구두를 신었는데, 그래도 옷차림만은 언제나 깨끗했다. 그러나 대학생이 놀라움을 나타내며 히죽거리는 원인은 리자베타가 늘 애를 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자넨 그 여자가 굉장한 추녀라고 하지 않았나 말야?" 하고 장교가 한마디 했다.
"그렇지, 살결이 거무튀튀한 게 꼭 가장을 한 병정 같은 얼굴이지만, 아주 추녀는 아니야. 그 여자는 무척 선량한 얼굴과 눈을 가지고 있어. 보통 선량한 정도가 아니지. 그 증거로 많은 사람이 그녀를 좋아한단 말이야. 조용하고, 얌전하고, 온순하고, 유순해서 무슨 말이든 고분고분 잘 듣는 여자지. 게다가 그 웃는 모습이 또 멋지거든."
"그럼 자네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그래?"하고 장교는 웃었다.
"색다른 맛이지. 그건 그렇고, 자네에게 한 가지 말할 게 있어. 나는 그 저주받을 노파를 죽이고 돈을 죄다 빼앗는다 해도 절대 양심의 가책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네." 대학생은 열을 올리며 이렇게 덧붙였다.
장교는 또다시 껄껄 웃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건 또 무슨 기괴한 일이냐!
"그래서 나는 자네에게 한 가지 진지한 문제를 제기하고 싶네." 대학생은 더욱더 열을 올렸다. "내가 지금 한 말은 물론 농담이야. 그러나 알겠나, 한편에는 무지하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심술궂고 병든 노파가 있어. 아무에게도 쓸모가 없는, 오히려 모든 사람에게 해로운, 자기 자신도 무엇 때문에 사는지 모르는, 더구나 내일이라도 혼자 죽어갈 노파가 있단 말이야. 알겠나? 알아듣겠나?"
"그래, 알겠어." 열띤 친구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장교는 대답했다.
"자, 그다음 말을 들어봐. 다른 한편에는 뒷받침이 없어서 무참히 쓰러져가는 젊고 싱싱한 힘이 있어. 그것도 도처에 수없이 많단 말이야! 수도원에 기부하기로 한 그 노파의 돈만 있다면, 건설하고 복구할 수 있는 몇백 몇천 가지의 훌륭한 계획과 사업이 있단 말이야! 그것으로 몇백 몇천 생명이 올바른 길로 되돌아올 수도 있고, 또 몇십 가정이 빈곤, 부패, 파멸, 타락, 성병환자 수용소 등에서 구원받을 수도 있을거야. 게다가 이 모든 것이 그 노파의 돈으로 가능하단 말이야. 노파를 죽이고 그 돈을 빼앗는 거야. 그러나 이후에 그 돈을 가지고 전 인류에 대한 봉사, 공공사업에 대한 봉사에 몸을 바친다는 조건하에서지. 자넨 어떻게 생각하나, 조그만 범죄가 몇천의 좋은 일로 보상될 수는 없을까? 단 한 생명으로 몇 천 생명이 부패와 타락에서 구제되는 거야. 하나의 죽음이 백의 생명을 탄생시키는 거야. 이건 간단한 산수 문제가 아니냐 말야! 게다가 그 무지하고 간악한 폐병쟁이 노파 하나의 목숨이 사회 전체의 묵ㅔ에 대해서 도대체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나? 이나 바퀴의 목숨과 다를 게 뭐냐 말야. 아니, 그만한 값어치조차 없어. 왜냐하면 그 노파는 해로운 존재니까. 그 노파는 남의 생명을 뜯어 먹고 사는 거야. 요전에도 홧김에 리자베타의 손가락을 물어뜯어 하마터면 잘릴 뻔 했지!"
"물론 그런 ㄱ건 살아 있을 가치가 없지"하고 장교는 말했다. "그러나 그게 자연의 법칙이라는 거야."
"아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인간은 자연을 수정하면서 그 방향을 제시하고 있잖나 말야. 그렇지 않다면 영영 편견 속에 빠져버릴 수밖에 없지. 그렇지 않고서는 위대한 인물이 한 사람도 나오지 못할 거야. 사람은 흔히 '의무'니 '양심'이니 하지만 -나는 구태여 의무나 양심에 대해 말하려는 건 아니야-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잠깐, 자네한테 또 한 가지 문제를 제기하겠네. 들어봐!"
"아니, 기다려, 내가 먼저 자네한테 문제를 내야겠어 들어보게!"
"좋아!"
"자네는 지금 열변을 토했는데, 어떤가, 자네는 자기 손으로 노파를 죽일 수 있겠나?"
"물론 그럴 수는 없어! 나는 그저 정의를 위해서 말하는 거야...그건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거든........"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자네가 스스로 결행하지 않는 이상 정의고 뭐고 있을 수 없어! 자, 가서 게임이나 다시 하세!"
라스콜니코프는 극도로 흥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물론 이런 말은 그 형식이나 제목이 다르긴 하지만, 그도 여러 번 들어본 적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흔해빠진 청년들의 의논이며 의견이었다. 그러나 그 자신의 머릿속에도 똑같은 생각이 떠오른 바로 이때, 왜 하필이면 여기서 그 노파의 얘기를 듣게 되었을까? .....이 우연의 일치가 그에게는 언제나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이 싸구려 음식점에서의 대화가 장차 사건 발전에 비상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마치 거기에 일종의 숙명, 일종의 계시라도 있었던 것처럼......
센나야 광장에서 돌아오자 그는 소파에 몸을 던진 채 한 시간 동안이나 꼼짝도 않고 앉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에 날이 어두워졌다. 초도 없었거니와 불을 켤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는 그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 후에도 좀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아까와 같은 열과 오한을 느꼈다. 그리고 소파에 드러누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기쁘기까지 했다. 이윽고 무서운 납덩이같은 졸음이 엄습해왔다.
그는 여느 때와는 달리 꿈도 꾸지 않고 오랫동안 깊이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10시에 그의 방으로 들어온 나스타시야가 간신히 그를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차와 빵을 가지고 왔으나, 차는 역시 재탕이었고 찻잔 역시 그녀의 것이었다.
"잘도 주무시네!" 그녀는 화가 난다는 듯이 이렇게 소리쳤다. "밤낮 잠만 자고 있으니!"
그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쿡쿡 쑤셨다. 그는 몸을 일으키려고 좁은 방에서 빙그르 몸을 돌렸으나 또다시 소파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또 주무시는 거예요?" 하고 나스타시약는 외쳤다.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에요, 네?"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차라도 마시지 그래요?"
"이따가." 그는 다시 눈을 감고 벽 쪽으로 돌아누우며 겨우 이렇게 말했다. 나스타시야는 잠시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정말 병이 났나 보군요."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홱 돌아서 나가버렸다.
그녀는 2시에 다시 수프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는 여전히 그대로 누워 있었다. 차도 그대로였다. 나스타시야는 화가 치밀어 그를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왜 잠만 자는 거죠?" 밉살스러운 듯이 그를 흘겨보면서 그녀는 소리쳤다. 그는 일어나 앉았으나 그녀에게는 아무 말도 없이 방바닥만 바라다보았다.
"어디 편찮으셔요?" 하고 나스타시야는 물었으나 이번에도 아무 대꾸가 없었다.
"밖에라도 좀 나가보면 어때요"하고 잠시 잠자코 있다가 그녀는 말했다. "바람이라도 좀 쐬면 좋을 거예요. 그건 그렇고 뭐 좀 드셔야죠?"
"이따가." 그는 힘없는 소리로 말했다. "나가줘!"하고는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얼마 동안 그대로 서서 딱한 듯이 그를 보다가 나가버렸다.
몇 분 후 그는 눈을 들어 오랫동안 차와 수프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빵을 집고 숟가락을 들어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식욕이 없어서 마지못해 서너 숟갈을 기계적으로 먹었다. 두통은 조금 가셨다. 식사를 마치자 그는 다시 소파 위에 누웠으나, 이제는 잘 수도 없어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엎드린 채 꼼짝도 않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쉴 새 없이 환상이 어른거렸다. 모두가 이상한 환상이었다. 제일 많이 본 것은 어딘지 먼 아프리카나 이집트의 오아시스 같은 곳에 가 있는 환상이었다. 대상이 쉬고 있고, 낙타들이 조용히 엎드려 있다. 주위에는 무성한 야자수가 둥글게 원을 그리며 있다. 모두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는 옆을 졸졸 흐르는 시냇물에 엎드려 물만 마시고 있다. 말할 수 없이 상쾌한 기분이다. 그리고 멋진 코발트 빛깔의 차가운 물이 갖가지 돌과 금가루를 뿌린 듯한 모래 위를 흐르고 있다.......
갑자기 시계 치는 소리가 똑똑히 들려왔다. 그는 부르르 몸을 떨고 정신을 차렸다. 머리를 들어 찿문을 보면서 시간을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완전히 정신이 들어, 마치 누구한테 쫓기기라도 하듯이 벌떡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는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문께로 가서 살그머니 방문을 열고 아래층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의 심장은 무섭게 고동치고 있었다. 그러나 층계는 죽은 듯이 조용했다.....그는 어제부터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잠만 자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또한 아무 준비도 안 하고 있었던 것이 이상하게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생각되었다. .....아니, 그건 그렇고 시계는 벌써 6시를 쳤는지도 모른다......그러자 갑자기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그 어떤 어수선한 초조감이 졸음과 자기 망각을 대신하여 그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준비라고 해도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만사를 잘 생각하여 무엇 하나 잊은 것이 없도록 모든 힘을 긴장시켰다. 심장은 여전히 세차게 고동쳐서 숨을 쉬기가 괴로울 정도였다. 우선 올가미를 만들어 그것을 외투 속에 꿰매 달아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1분이면 될 일이다. 그는 베개 밑에 손을 넣어 거기 처박은 속옷들 중에서 몹시 해지고 세탁도 하지 않은 낡은 셔츠를 하나 꺼냈다. 그 누더기에서 한 치 폭에 길이 여덟 치쯤 되는 헝겊을 찢어내어 그것을 두 겹으로 해서, 두꺼운 무명으로 만든 튼튼하고 헐렁한 여름 외투(그가 가진 단 하나의 코트다)를 벗어서 안의 왼쪽 겨드랑이 밑에 그 헝겊 양쪽 끝을 꿰매기 시작했다. 꿰매면서 그의 손은 덜덜 떨렸으나, 그는 스스로를 극복해냈다. 그래서 다시 외투를 입었을 때는 겉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할 수 있었다. 바늘과 실은 훨씬 전부터 준비해 종이에 싼 채 탁자 서랍 속에 간직해 두었던 것이다. 올가미로 말하면 매우 교묘한 그의 착상으로, 도끼를 숨기기 위해서 고안해냈다. 도끼를 손에 들고 거리를 거닐 수도 없거니와, 외투 속에 감추려 해도 역시 겉에서 손으로 눌러야만 했다. 그러면 남의 눈에 띄기가 쉽다. 그런데 지금은 끈으로 이렇게 올가미를 달았으니, 거기에 도끼를 걸면 가는 길에 도끼는 안쪽 겨드랑이 밑에 안전하게 꽂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손을 바깥 주머니에 넣으면 흔들리지 않게 도낏자루를 누를 수도 있다. 게다가 외투가 마치 부대처럼 헐렁했기 때문에, 호주머니 속에서 무엇을 누르고 있어도 밖에는 알려질 리가 없었다. 이 올가미 역시 이미 두 주일 전에 그가 고안해낸 것이었다.
이 일을 끝내자 그는 터키식 소파와 마룻바닥 사이의 작은 틈바구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는, 왼쪽 구석을 더듬어서 전부터 준비해 숨겨두었던 저당물을 꺼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저당물도 아무것도 아니고, 은제 담뱃갑만 한 크기와 두께로 매끄럽게 깎은 널빤지 조각에 불과했다. 그 널빤지 조각은 그가 산책하는 길에 이웃 골목의 어느 뒤뜰 한 공장 딴채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 뒤에 역시나 언젠가 길에서 발견한 매끈매끈하고 얇은 철판을, 아마도 어떤 물건의 한 조각인 철판을 그 널빤지에 붙였다. 철판이 널빤지보다 약간 작았으나 그는 그것을 실로 열십자 모양을 내어 묶었다. 그리고 정성껏 깨끗한 흰 종이로 보기 좋게 싼 다음, 풀기 힘들게 다시 그 위를 실로 묶어놓았다. 그것은 노파가 매듭을 풀기 시작했을 때 잠시 그녀의 주의를 그쪽으로 돌리게 하고, 그사이에 기회를 노리기 위해서였다. 철판 조각은 노파가 처음 한순간만이라도 '물건'이 나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무게를 주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모든 것을 때가 오기까지 소파 밑에 숨겨놓았던 것이다. 그가 저당물을 꺼냈을 때, 갑자기 뒤뜰 어디선지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렀다.
"6시는 벌써 지났어!"
"벌써! 이거 큰일났군!"
그는 문 옆으로 달려가 귀를 기울여보고는, 모자를 움켜쥐고 고양이처럼 조심스레 발소리를 죽여가며 열세 단 층계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일, 부엌에서 도끼를 훔쳐내는 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도끼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은 훨씬 전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그는 접었다 폈다 하는 원예용 나이프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그만 나이프에는, 특히 자기 힘에는 기대를 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도끼를 쓰기로 낙착한 셈이었다. 여기서 말이 나온 김에 이 문제에서 그가 취한 모든 최종결심에 관한 한 가지 특수성을 지적해두겠다. 그의 결심에는 이상한 특질이 있었다. 다름 아니라 그의 계획이 단호한 성질을 띠면 띨수록 그의 눈에는 그것이 점점 추악하고 불합리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토록 괴로운 내적 투쟁을 계속해왔는데도 그는 그동안 단 한순간이라도 자기 계획의 실현성을 결코 믿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설사 언젠가 모든 것이 최후의 한 점까지 분석되고 최종적인 결정을 본다음 더는 아무런 의혹도 남지 않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때가 되어서도 그는 전체 계획을 불합리하고 추악하고 불가능한 일이라 해서 단념해버리고 말았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해결이 안 된 점과 의혹은 아직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도끼를 어디서 구하느냐 따위는 전혀 문제도 되지 않는 사소한 일이었다. 이것만큼 쉬운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스타시야는 곧잘 집을 비우고, 특히 저녁에는 이웃집이나 가게에 잘 갔다. 그리고 문은 늘 열려 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그것만으로도 곧잘 그녀와 싸우곤 했다. 그러므로 때가 오면 살그머니 부엌으로 들어가 도끼를 가지고 나갔다가 한 시간쯤 지나서(이미 만사가 끝났을 때) 다시 부엌에 갖다 두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걱정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가령 한 시간쯤 지나 그가 도끼를 가지고 돌아왔을 때 마침 나스타시야가 돌아와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물론 모르는체하고 지나쳤다가 다시 그녀가 나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만약 그사이에 도끼가 없어진 것을 알고 찾고 떠들기라도 한다면 영락없이 혐의를 받게 된다. 적어도 혐의를 받게 될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런 것을 생각해보려고도 하지 않았거니와, 또 그럴 겨를도 없었다. 그는 가장 중요한 점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자질구레한 점은 자신이 만사에 확신을 얻을 때까지 내버려두기로 했다. 그러나 확신을 얻는다는 것은 절대로 실현될 것 같지가 않았다. 적어도 그 자신에게는 그렇게 생각되었다. 이를테면 그는 어느 때건 자기가 생각하기를 끝내고 일어나서, 태연히 그곳으로 갈 수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얼마 전의 시험(즉 철저히 현장을 조사할 작정으로 방문했던 일)만 하더라도 그는 그저 한번 시험해보았을 뿐이지 실제 행동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어디 한번 가서 시험해봐야지. 공상만 해서 뭘 한담!'하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곧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그런 일을 한 자기 자신에게 분노가 치밀어올라 침을 탁 뱉고 그냥 도망쳐 나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아무튼 문제의 도덕적 해결이라는 의미에서는 모든 분석이 이미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그의 옳고 그름 판단력은 면도날같이 날카로워서, 이미 자기 내부의 의식적인 반박론은 발견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최후 단계에 접어들면 그는 점점 자기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무언가가 그를 강제로 그쪽으로 끌고 가기라도 하는 듯이 노예 같은 비굴한 태도로 모든 것에 끈덕지게 반론을 찾아 헤맸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찾아와서 만사를 금방 해결해버리고 만 최후의 날은, 그야말로 기계적으로 그에게 작용한 것이다. 마치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고 무조건 맹목적으로, 초자연적인 힘으로 강제로 끌고 가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흡사 옷자락이 기계 바퀴에 걸려서 그 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것과도 비슷했다.
처음에는, 하긴 이미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왜 거의 모든 범죄는 그처럼 쉽사리 발견되고 그 정체를 폭로당하고 마는 걸까? 그리고 또 왜 거의 모든 범죄의 발자취는 그토록 명료하게 남는 걸까? 그는 차츰 여러가지 흥미 있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의견에 따르면, 가장 중요한 원인은 범죄를 은폐하는 물질적 불가능성이라기보다 오히려 범죄자 자신 속에 있다는 것이다. 즉 범죄자 자신은 거의 누구나 예외 없이 범죄를 저지르려는 순간 의지와 이성의 상실 상태에 빠질 뿐만 아니라 어린애 같은 경솔에 사로잡히고 말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것은 이성과 세심함을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이다. 그의 신념에 따르면, 이 이성의 혼미와 의지의 상실은 병마와도 같이 사람을 엄습하여 차차 강대해져서 범죄 수행 직전에 최고조에 달한다. 그리고 그대로의 상태가 범죄 순간까지, 사람에 따라서는 범죄 후에도 얼마 동안 계속된다. 하지만 병이 낫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윽고 그 상태가 지나버리고 만다. 그러나 병이 범죄를 낳는 것인지, 아니면 범죄 그 자체에 그 비슷한 특질이 있어서 늘 병과 유사한 무엇을 동반하는 것인지....하는 의문에 이르러서는 자기도 아직 해결할 힘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그는 적어도 자기 자신에게는 이러한 병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했다. 계획을 수행하는 동안 이성과 의지는 조금도 흐려짐 없이 유지될 것이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의 계획은 '범죄가 아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가 이런 최후 결심에 도달하기까지의 전 과정은 생략하기로 하자. 그렇지 않아도 우리는 너무나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으니까......다만 한 가지 덧붙여둘 것은, 이 일에 따르는 실제의 물질적 곤란은 그의 머릿속에서 대체로 2차적인 역할밖에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만한 곤란쯤은 자기 의지와 이성을 완전히 보유하고만 있으면, 일의 모든 데이터를 세밀하게 연구해가는 동안 자연히 극복될 것이다......' 그러나 일은 좀처럼 시작될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최후 결심을 여전히 믿지 않고 있었으므로 막상 때가 이르자 모든 것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뜻밖의 일처럼 생각되었다.
어떤 사소한 사건이 층계를 다 내려가기도 전에 그를 당황하게 했다. 여느 때처럼 활짝 열려 있는 부엌문까지 오자 그는 슬쩍 곁눈질을 해서 나스타시야는 없더라도 혹시 주인아주머니가 거기 있지 않은지, 설사 없다고 하더라도 도끼를 가지러 들어갈 때 어쩌다 그녀가 내다보지 않을지, 그리고 그녀의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잘 닫혀 있는지 어떤지를 미리 살피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스타시야는 부엌에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빨래를 광주리에서 꺼내어 줄에 너는 참이었다. 라스콜니코프를 보자 그녀는 일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그가 지나갈 때까지 지켜보았다. 그는 외면을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대로 지나쳤다. 모든 것은 끝났다. 도끼가 없으니! 그가 받은 충격은 무엇운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무엇을 보고 그런 계산을 했던 것일까?' 출입구 쪽으로 내려오면서 그는 생각했다. '나는 어째서 저 여가자 지금쯤 틀림없이 집에 없으리라는 결정을 내리고 있었을까? 어째서, 어째서 나는 그렇게 결정한 것일까?' 그는 호되게 한 대 얻어맞고 모욕까지 당한 기분이었다. 그는 홧김에 자기 자신을 비웃고 싶었다........우둔한 야수 같은 분노가 가슴속에서 끓어올랐다.
그는 생각에 잠기면서 문간에 멈춰 섰다. 산책이라도 하듯이 보이기 위해 거리로 나가고도 싶었지만, 그러기가 싫었다. 그렇다고 방으로 되돌아가기는 더욱 싫었다. '모처럼의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마는구나!' 문간에서 그는 역시 열려 있는 어두운 문지기 방을 마주 보고 서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 두 걸음쯤 떨어진 문지기 방 걸상 밑에 무엇인지 번쩍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살금살금 발소리를 죽여가며 문지기 방으로 다가가서 나직한 소리로 문지기를 불러보았다. '기대했던 대로 집에 없구나. 그러나 문이 열려 있는 걸 보니 어딘가 이 뜰 근처에 있겠지.' 그는 얼른 도끼에 덤벼들었다(그것은 도끼였다). 장작개비 두 개 사이에 뒹굴고 있는 도끼를 걸상 밑에서 꺼내 들고, 밖으로 나가기 전에 그것을 외투의 올가미에 꽂고는 양손을 호주머니에 넣고 그곳을 나왔다. 아무도 본 사람은 없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악마의 짓이야!' 하고 그는 기묘한 웃음을 띠며 생각했다. 이 우연은 그에게 크나큰 원기를 돋우어주었다.
그는 어떤 혐의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침착한 걸음걸이로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걸어갔다. 그는 별로 통행인을 보지 않았다.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남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갑자기 모자 생각이 났다. '아차! 사흘 전 돈이 있을 때 학생모로 바꿔두는 걸 잊었구나!' 저주의 말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우연히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거기 벽시계는 벌써 7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그렇지만 길을 우회해 반대쪽에서 그 집으로 접근해야 한다.......
전에, 이런 것을 아직 상상만 하던 그때는 정작 닥치면 몹시 무서울 것만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별로 무섭지가 않았다. 아니, 조금도 무섭지가 않았다. 이 순간의 그는 도리어 아무 관계도 없는 딴생각에 마음을 쏟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단편적인 상념들뿐이었다. 유스포프공원 옆을 지날 때, 그는 모든 광장마다 높다란 분수를 설치하면 얼마나 공기를 상쾌하게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거의 몰두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레트니 사드(여름공원)을 마르조보 폴레 연병장까지 확장해서 미하일롭스키 왕실 유원지와 합친다면, 거리를 위해서도 매우 유익한 시설이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공상을 펼쳐갔다. 그때 문득 모든 대도시에서 인간은 단지 필요에 쫓겨서만 아니라, 특히 그 어떤 이유로 공원도 없고 분수도 없고, 더러움과 악취와 그 밖의 온갖 추악한 일에 가득 찬 부분에 살거나 자리를 잡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하는 문제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러자 센나야 광장을 중심으로 하는 자기 자신의 산책 코스가 생각나서, 그는 퍼뜩 제정신이 들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하고 그는 생각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게 좋겠다!'
'아마 형장으로 끌려가는 자도 틀림없이 이렇게 도중에 만나는 모든 것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다.' 이러한 상념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것은 번갯불과도 같이 그저 번뜩였을 뿐이다. 그는 서둘러 이 상념을 지워버렸다.......그러나 벌써 목적지는 다가왔다. 벌써 그 집이다, 저기 문이 보인다. 어디선가 갑자기 시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벌써 7시 반이란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아마 시계가 빠른 게지!'
다행히 이곳 문도 역시 무사히 통과했다. 뿐만 아니라 때마침 커다란 건초 마차가 먼저 출입문에 닿아 있어서, 그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완전히 가려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마차가 문에서 뜰로 들어가자, 그는 재빨리 오른쪽으로 빠져 들어갔다. 마차 저쪽에서 몇 사람이 고함을 지르며 다투는 소리가 들렸으나, 아무도 그를 본 사람은 없었고 누구 하나 마주친 사람도 없었다. 이 커다란 사각형의 안뜰을 향한 많은 창문은 이때 모두 열려 있었지만, 그는 머리를 들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기력이 없었던 것이다. 노파의 방으로 통하는 층계는 출입문에서 바로 오른쪽에 있었다. 그는 벌써 층계 위에 와 있었다.......
숨을 크게 몰아쉬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누른 다음, 잠깐 도끼를 만져보고는 다시 한 번 위치를 바로잡은 후 조심스레 끊임없이 귀 기울이며 그는 살금살금 층계를 올라갔다. 이때 층계는 텅 비어 있었고, 문이란 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마주친 사람도 없었다. 2층에 빈방이 하나 있어서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안에서 칠장이 몇 사람이 일을 하고 있었으나, 그들도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잠깐 걸음을 멈추고 생각하고는 다시 올라갔다. '물론 여기 저놈들이 없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아직 두 층이나 떨어져 있으니까.'
하지만 벌써 4층이었다. 저기 문이 보인다. 맞은편 아파트 역시 빈방이다. 3층에도 노파가 사는 방 바로 밑 아파트는 비어있는 모양이었다. 문에 붙었던 명함이 떼어져 있었으니까. 이사를 간 게지!....그는 숨이 막혔다. '그냥 돌아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각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노파의 방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쥐죽은 듯 조용했다. 이번에는 다시 층계 아래쪽에 귀 기울였다. 오랫동안 주의 깊게 귀 기울였다........그것이 끝나자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 신경을 도사리고 자기 몸을 한 번 만져보았다. '너무 흥분하지나 않았는지? 노파는 의심이 많으니까....좀 더 기다리는 게 좋겠다.....심장 고동이 멎을 때까지.....'
그러나 심장 고동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도리어 반대로, 마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듯이 시간이 갈수록 더욱더 심하게 고동칠 뿐이었다. ......그는 더 참지를 못하고 천천히 손을 뻗쳐 초인종을 울렸다. 30초쯤 지나서 다시 한 번 울렸다, 이번에는 좀 더 강하게.
대답이 없다. 마구 울려봐도 소용이 없을 테고, 게다가 지금의 그에게는 어울리지도 않는 일이다. 노파는 물론 집에 있겠지만, 그녀는 의심이 많은 데다 지금은 혼자뿐이다. 그도 그녀의 버릇을 조금은 알고 있었다......그래서 다시 한 번 귀를 문에 바짝 갖다 붙였다. 그러자 그의 감각이 그토록 예민해져 있었는지(그렇게 상상하기는 대체로 곤란한 일이지만), 아니면 실제로 잘 들렸는지 아무튼 그는 손잡이를 조심스레 쥐는 소리와 문짝에 옷자락 스치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가 바로 문 앞에 서서, 그가 이쪽에서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숨을 죽이고 엿듣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역시 문에다 귀를 대고 그 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일부러 몸을 움직여 자기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무언가 큰 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이윽고 그는 세 번째로 초인종을 울렸으나, 그것은 조금도 초조한 빛이 보이지 않는 침착하고도 조용한 태도였다. 훗날 이 일을 생각할 때마다 이 순간은 똑똑하고 선명하게, 그리고 영원히 그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사고력이 때때로 순간적으로 흐려져 자신의 육체조차 느낄 수 없었던 그때 도대체 어디서 그런 교활한 지혜가 생겼는지, 그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잠시 후 방문 빗장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