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남정맥이 지리산 영신봉에서 분기하여 삼신봉을 지나 끝자락인 낙동강으로 해달린다.
동으로 해달리던 낙남정맥은 깃대봉에서 북진하며 발산재로 내려가고, 서쪽으로 분기하는 산줄기가 하나 있으니, 진주시와 고성군의 경계를 따라
만수산-나동고개-보잠산을 지나 월아산권으로 들어가는 약30km의 산줄기를 '낙남월아지맥'이라 부른다.
준봉산 직전 갈림길에서 월아지맥은 서쪽으로 분기하고, 낙남정맥은 깃대봉(旗臺峰, 520m)능선으로 이어지다 선동치에서 동쪽으로 살짝 비켜선 곳에
유명한 적석산(積石山)이 솟아있다.
우리는 만수산(萬壽山)과 보잠산(寶岑山)을 찍은 후 보잠산 동봉(441.3m, 삼각점봉)에서 월아지맥을 이탈 작당산(鵲當山)을 거쳐 경남수목원으로 하산을 하게 된다.
말이 나온 김에 산이름을 하나하나 짚어보기로 하자.
우리가 처음 만나는 깃대봉과 발산재 사이에 있는 준봉산은 발산재의 ‘효열공 고종후’ 비석에 준봉산(隼峰山)이란 표현이 있어 그렇게 부른다.
지형도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만한 고증이면 충분하지 않는가?
‘준(隼)봉‘이란 ‘매봉’과 ‘응(鷹)봉’처럼 맹금류인 ‘매’와 관련이 있다.
매가 사냥할 때 도드라진 암봉에서 설치류 등 먹잇감을 노리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만수산(萬壽山)은 말그대로 백수(百壽) 천수(千壽)를 누린다는 뜻일 게다.
보잠산(寶岑山)은 '진양지'에 "발산(鉢山)이 서쪽으로 달려와서 원통산(圓通山)이 되고, 원통산이 서북쪽으로 향하여 월아산이 되었다"라고 수록되어 있다한다.
또한 조선 말기의 문중 재실 기문에 잠산(簪山)으로 나오며, '조선지형도'에는 보잠산으로 표기되어 있다. * ‘잠(簪 비녀)
원통산이 언제 보잠산으로 개칭되었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원통산으로 불렸고, 조선 말기엔 잠산으로 개칭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 보잠산으로 개명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작당산(鵲堂山)은 까치집이 있었대서 지어진 이름일 듯. * 작(鵲 까치)
보잠산성은 보령산성(寶嶺山城)이라고도 하는데, 보잠산의 좌측 봉우리 9부 능선의 테뫼식 석축성으로 규모가 작다.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당항만에서 내륙으로 침략해 오는 적에 대비해서 고려시대에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
보잠(寶岑)이 보령(寶笭)이 된 건 '잠(岑)'자와 '령(岺)'자를 혼동해서 생긴 것으로 추측을 한다.
산행코스: 발산재-준봉산(U턴)-갈림길-만수산-승가사갈림길-368봉갈림길(주의지점)-나동고개-보잠산(U턴)-상남고개갈림길-작당산-경남수목원(13km,6시간)
B코스는 상남고개 조금 못미쳐 안내판이 있는 들머리. 네비 주소: 진주시 일반성면 답천리 산57-2
산행궤적
약 13km를 6시간동안 걸은 셈.(알바한 일행들 때문에 약간의 시간 지체.)
들머리인 발산재가 고도 약 160m, 중간의 나동고개가 약 250m.
국제신문의 가이드. <참고 개념도>
부산일보의 보잠산 참고 개념도
연두색 굵은 선은 낙남정맥, 노란선은 월아지맥.
버스는 동래역에서 100km를 채 달리지 않고 마창대교를 건너 신설된 2번국도의 봉암교차로(봉암육교)에서 빠져나와 수발사 앞에서 멈춘다.
이 지점에서 대형버스가 회차할 수 있는지 고민을 많이 했던 것. * 네비엔 수발사 입력.
이 도로는 새 도로(2번 국도)가 생기기 전의 구 도로.
버스 앞머리 쪽으로 수발사 방향이고, 우측 RV차량 좌측 뒤 포장도로가 들머리.
우측 아래는 신설된 2번 국도.
이 포장 임도는 '효열공 고종후 묘소입구'다.
입구의 이정표엔 깃대봉이 2.6km, 진마대로 봉암육교가 0.9km. 봉암육교는 2번국도에서 내려서는 봉암교차로를 말한다.
입구엔 큼지막한 '준봉산(隼峰山) 효열공 고종후 묘소입구' 빗돌이 세워져 있다.
다시 그 옆엔 '효열공 준봉 고종후 신도비'
널따란 분지에 잘 조성된 가족묘지.
빗돌엔 '장흥고씨자연장추모공원조성기'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조성기의 준봉산 표기가 다르다.
준봉산(準峰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안둔산(安屯山)으로도 부른다고 하였다.
무덤군으로 오르지 말고 옆으로 탐방안내하는 비석.
조금 오르다 뒤돌아 보았더니 가까이에 인성산(仁星山)이 손에 잡힐 듯하다.
유방백세(流芳百世)비석. '향기로운 이름을 백세까지 흘려보내다'라는 뜻이니 훌륭한 명성이 후세에 영원히 전해지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낙남정맥의 중앙에 '효열공 고종후(孝烈公 高從厚 1553~1593)'의 묘소가 있다.
공은 '충열공 고경명(1533~1592 忠烈公 高敬命)'의 장남으로 진주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하였다.
아버지 '충렬공 고경명'은 임진왜란 때 6,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묘소안으로 조금 들어가서...
비석을 살펴본다.
첫머리의 유명조선(有明朝鮮)은 ‘밝은 조선’이라고 번역될 수도 있고 ‘명나라에 있는 조선’이나 ‘명나라에 속한 조선’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명나라에 있는 조선’이나 ‘명나라에 속한 조선’으로 번역되면 수치스러운 사대(事大)의 역사를 입증하는 자료로 보여진다.
그러나 유명조선은 청나라의 동아시아 패권에 대한 도전의 논리를 담은 것이었다.
이 표현은 명나라가 존속할 때에는 등장하지 않다가 명나라가 멸망(1644년)한 뒤인 17세기 이후의 비문에 비로소 등장하기 시작한 표현이다.
청나라가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상황에서 ‘조선은 명나라에 속해 있다’는 표현은 ‘우리 조선은 청나라의 패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항거의 표현이었던 것.
청나라를 최상위에 둔 동아시아의 위계적 국제질서에 편입된 조선의 양반 지배층들은 조상의 묘비에 ‘명나라에 속한 조선’이란 표현을 씀으로써
‘우리는 청나라에 속하지 않았다’는 반청감정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 비석은 위의 오래된 비석을 그대로 새로 만든 것이다.
<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익효열행통선랑임파현령준봉고공/종후지 묘>
앞을 가로막고선 바위를 우회하여 올랐더니...
WOW! unbelievable~ 멀리 낙남정맥의 여항산과 서북산의 헌걸찬 모습.
펼쳐지는 산그리메. 우리는 이곳에서 그만 넋을 놓을 수밖에...
오늘내내 보조를 맞추며 걸은 박고문님도 넋을 빼앗기고 있다.
역광으로 솟은 봉우리의 중앙이 준봉산(?)
떠나기 못내 아쉬워 다시 한 번 내 눈에 그대를~~
월아지맥 갈림길 암봉에 섰다.
정면 철탑능선으로 이어가야할 우리의 트랙은 준봉산에서 U턴하여 이 갈림길 좌측(일행이 내려서는 곳)으로 내려서야 한다.
철탑 뒤로 만수산, 그 뒤로 어린애 엉덩이를 닮은 보잠산, 보잠산 좌측으로 볼록 솟은 선유산,
살짝 당겨본 보잠산과 선유산.
만수산 우측 구름위로 아스라이 하늘에 맞닿아 있는 산맥은 지리산인 듯.
금방 준봉산에 올랐다.
준봉산에서 바라보는 모습.
준봉(隼峰)은 '효열공 고종후'의 호이기도 하다.
누군가 정상 표석을 파손하여 숲속에 던져 놓았다. 주워서 살짝 맞추어 놓았지만 건드리면 다시 떨어져 나간다.
무슨 억하심정(抑何心情)이 있어서일까?
10분 만에 갈림길에 돌아왔다. 내려서는 길은 경사진 등로에 낙엽으로 인하여 미끄러운 길이지만...
금세 솔숲길이다.
올라선 바위 암봉. 이 봉우리가 지형도상의 만수산이다.
조망또한 시원하여 뒤로 보잠산이 다가왔다.
낙남정맥과 여항산의 헌걸찬 산세.
살작 당겨 보았다.
100여m 더 진행하여 만난 표석. 진행로는 표석 앞에서 좌측으로 꺾어야 한다.
아직까지 산길은 그저 수더분한 길로 안부에 내려서면...
승가사 갈림길이 있는 사거리지만 등로는 희미.
이제부터 산길은 더욱 거칠어져 조심스럽게 진행을 해야한다.
엉킨 잡목가지 사이로 끊어질 듯 이어지던 산길을 따라 국제신문 시그널과 헤어져야하는 368.1m봉에 올랐다.
중요지점이다.
앞에 보이는 노란 국제신문 시그널 두 개(흰색 화살표)는 나선리 선동저수지로 내려가는 국제신문 가이드의 원점회귀 코스로 빨간 화살표로 내려서야 한다.
우리는 368.1m봉 직전에서 이 봉을 오르지 않고 우회하는 길을 찾아 보았지만 잡목으로 인하여 그만 이 봉우리까지 올라오고 말았다.
우회길을 놓친 산꾼들이 368.1봉에서 쓸고 내려간 거친길을 조금 내려서면 금세 풋풋한 솔숲 평이한 길을 만난다.
훼손된 장흥고씨 무덤을 만나고...
잡목 엉킨 선답자들의 희미한 흔적을 따라 내려서노라니 잡목사이로 보잠산이 올려다 보인다.
그러다 만난 무덤 한 기 직전에서 우측 사면으로 둘러가면...
양지바른 무덤을 만나 이곳에서 식사를 한다.
재령 이씨와 경주 정씨 부부묘. "할배 할매요, 좀 시끄러워도 이해해 주소이~"
식사를 마친 후 나동고개에 내려선다.
나동고개는 진주와 고성의 경계. 내려선 지점은 고개마루에서 고성쪽 100여m 아래.
2차선 아스팔트를 가로질러 도로턱을 올라선다.
필자는 이 지점으로 B팀을 올리려 하였지만 길찾기도 애매하고 거칠기도하여 상남고개로 선택하였다. * 나동고개 주소:고성군 개천면 나선리 산313-3
도로를 올라서서 내려다본 모습.
보잠산으로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잡목이 아무렇게나 뒤엉켜 있었지만 그리 험하지 않아...
금세 삼각점이 있는 보잠산 동봉(441.3m)에 올라선다.
보잠산 삼각점봉엔 아주 요상하게 생긴 말안장 나무가 길게 뻗어있는데, 어릴적 말타기 놀이를 한다면 칠팔 명은 족히 탈 수 있을 것이다.
작은 안부에 살작 내려섰다 금방 올라선 보잠산.
펑퍼짐한 정상엔 아주 그럴듯한 표석이 자리잡고 있다.
잡목 사이로 드러나는 주변 산세.
북쪽으로 당겨보니 방어산과 괘방산인 듯하고...
그 우측으로 한덤님이 한사코 오봉산을 짚어댄다. 함안 오봉산은 진주와 함안의 경계에 있으며 백이산과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보잠산을 떠나며 다시 한 번 돌아본 정상.
삼각점이 있는 보잠산 동봉에 돌아왔다.
이제부터 산길은 그저 유순하기 짝이없고...
마주보이는 작당산을...
살짝 당겨보니 뒤에 진을 치고 있는 산은 방어산인 듯.
유순한 솔숲길을 따르면...
우리 B팀들이 올라온 상남고개 갈림길이 나오고...
한차례 작은 오르막을 치고 오르면...
돌탑들이 무리지어 있는 작당산에 오른다.
보잠산에서 3.2km 떨어진 지점.
맨발 등산로 표시점을 지나...
편백나무 식재된 내리막을 내려서면...
세족장이 나오지만 물은 나오지 않아.
안내도
나가는 곳(매표소) 1500m를 따라...
초록색 휀스를 어깨에 짊어지고...
내려가다 만난 이정표에서 우측으로 올라...
이 지점의 이정표.
휀스를 따라 돌았더니 잠신긴문으로 나왔다.
이정표를 카메라에 담았지만 그리 유용하진 않았고...
전망대라 표시된 곳으로...
갔더니 전망은 별게 아닌 세멘트 구조물로 만든 육각정자.
다시 넓은 시설에 미로처럼 갈래진 길을...
이정표와...
폭포가는 길을 따라 최단거리를 선택...
누운 주목이 아름다운 폭포에 이르지만 인공폭포는 인공으로 물줄기를 막아 놓았다.
수목원 산책길을 따라...
무궁화홍보관을 지나 화장실에서 대강의 씻기를 마친 뒤...
우리 버스가 보이는 지점으로 나왔지만 울타리가 있어 매표소 입구로 돌아야만 한다.
입구 정문 맞은편에 있는 산림박물관을 돌아보며...
수목원 정문을 벗어난다.
겨울철이라 탐방객이 없어 무료입장인가?
입장료는 1,500원인데...
널따란 공용 주차장 역시 썰렁한데...
우리 버스는 대형 주차장 한켠에 대있다.
경상남도수목원의 관람안내.
최고조로 얼어붙었던 북한과의 관계가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풀리고 있다.
공갈 협박으로 가슴에 피멍이 든 우리들에게 유화 제스처는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다.
-새날 아침으로 오거라-
마침내 와야 할 것은
우리 희망의 빛줄기 쏟아지는
새날 아침으로 오거라
가야 할 것이 사라져버린 자리에
남는 고요함, 거기 물밀듯
사랑이 들어와 넘치듯이
마침내 와야 할 것은
우리 통일의 목맨 울음소리
온 천하 뒤흔드는 그 소리로 오거라!
모든 바다가 뭍으로 기어올라
사람과 어깨동무,
모든 우리나라 山들 일어나
벌이는 한 판 큰 굿소리,
마침내 와야 할 것은
새날 아침으로
그 벅찬 가슴으로 오거라
<이 성 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