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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베트남 다낭 여행
세월이 어느새 이렇게 흘러갔을까.
어릴적 큰아들이 중년의 나이로 변신하여 49살이 되어 아버지와 비행기로 4:50분을 구름을 헤치고 달려 베트남 다낭을 4박6일 여행하였는데 가이드없이 비행기, 교통, 숙박, 식사, 관광지 등을 모두 큰아들이 휴대폰으로 예약하고 이동하는 자유여행이었다.
가이드 없이는 움직일수 없는 옛 시절을 떠올리면 세상은 변해도 참 많이 변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을 느꼈도다.
인천국제공항 비행기 이륙전 면세점을 두리번 거리는데 지난시절 익산소장을 엮임하시었던 김광열소장님을 마주쳤는데 딸과 함께 누랑풍선 여행사에서 다낭 단체여행 한다고 했는데 30분 늦은 비행기였다.
다낭 여행시 느낀점은 딸이 친정부모님 아들가족이 부모님를 동반한 가족여행객이 대부분이었으며 해외여행 패턴이 가족여행으로 변해가고 있는 현상을 목격하였다.
조동화는 큰아들가족과 베트남 다낭을 2025/12/29-2026/1/3 4박6일을 여행하며 다낭 한강변에 위치한 864개의 객실로 여행객을 맞이하는 39층으로 세워진 5성급 호텔 “멜리아 빈펄 다낭 리버프런트(Melia Vinpearl Danang Riverfront) 호텔”에 숙소를 예약하여 4일간 묵었다.
Melia Vinpearl Danang Riverfront의 의미는
빈펄(Vinpearl)은 베트남의 대표적인 호텔 및 리조트 체인 브랜드로, 그 이름은 "베트남의 진주(Vietnam Pearl)"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Vin: 베트남(Vietnam)의 약자입니다.
Pearl: 영어로 '진주'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Riverfront(리버프런트)는 강가, 강변을 뜻한다.
“강변에 위치한 베트남의 진주 멜리아 다낭 호텔”이라고 한글로 이름붙이면 될 것 같소이다.
객실의 TV는 한국인이 묵었을때 심심하지 않도록 한국채널 YTN과 KBS 2채널을 등록하여 볼수 있었다.
다낭 관광객의 80%가 한국인인 것을 감안하면 멜리아호텔은 한국인관광객에 대하여 대단한 신경을 쓰고 있다고 할수 있다.
2026년을 맞이하여 베트남 다낭 멜리아 빈펄 리벌프론트 다낭타워 37층에 위치한 루프탑 바에서 다낭 야경을 구경하면서 스테이크(스테이크(Steak)는 소고기를 돌판에 구운 요리)를 먹었던 순간이 사진으로 남아있어 행복한 모습을 올리나이다.
다낭타워하니 특별한 장소 같지만, 사실 다낭 큰아들가족과 여행하며 묵었던 멜리아빈펄 다낭 리버프론트 호텔 37층에 위치한 루프탑 바입니다.
주류는 와인이나 맥주가 기본이며 바지락이 들어간 국물이 나와 한국인 입맛이 제격이었고 우리가족은 스테이크에 맥주로 가볍게 한잔씩 하였다.
멜리아 빈털 루프탑 바 37층에서 다낭시내 야경을 바라보니 베트남의 발전하는 모습을 한눈에 보는 것 같았다.
300만의 도시 다낭시내는 온통 네온사인과 불빛으로 휘황찬란하였고 한강에 떠있는 오색불빛의 유람선단이 볼만하였다.
유람선 선착장에는 대략 10여척의 유람선이 저녁이 되면 오색의 불빛을 밝히며 용다리를 오가며 관광객을 태우고 한강을 아름다운 무지개색갈로 물들인다.
다낭의 한강(Sông Hàn)은 한국의 서울 한강과 이름이 같고, 다낭 시내를 관통하는 강으로 폭이 약 1km 정도되며 다낭의 젖줄이라고 말할수 있다.
다낭을 여행하며 느낀 것은 한국인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하여 신경을 많이 쓰고 있는 것을 간판을 통해 알수 있었다.
식당의 간판과 맛사지업소 간판의 이름이 한국어로 된 것을 많이 볼수 있었다.
도로를 가득 메우는 오토바이는 베트남사람들의 주요 교통수단이다.
도로의 인도에는 오토바이가 주차할수 있도록 주차장소를 만들어 놓았다.
베트남에서 오토바이는 국민의 주요 교통수단으로, 인구수보다 많은 등록 대수를 기록할 만큼 생활의 필수품이다.
오토바이가 하도 많이 달리길래 도대체 베트남이 석유를 어떻게 조달하지 궁금하여 알아볼 정도였도다.
베트남은 석유가 상당히 많이 나오지만 대체로 수입에 많이 의존한다고 보면 되야.
끝이 없이 달리는 오토바이의 행열을 보고 바쁘게 살아가는 베트남의 역동성을 확인하고 저렴한 물가와 행복지수가 높은 베트남인들의 삶을 엿 볼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오랜 외세의 침략과 전쟁속에서도 베트남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은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자부심으로 그들만의 생활습관과 문화로 세계인과 함께 발전할 것이다.
서울인구가 대략 950만명, 부산 350만명을 감안하여
베트남의 4대 도시는 일반적으로 경제와 인구 규모, 정치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하노이(수도) 인구850만명, 호찌민(경제 중심지) 인구 1,400만명(추정), 하이퐁(항구 도시) 인구 약250만명), 다낭(중부 중심 도시) 30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베트남이 남한보다 국토면적이 약 3배 정도 넓으며 인구는 약 1억명으로 한국보다 두배 많다.
베트남의 국토는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남북의 길이는 약 1,650 Km이고 동서의 길이 가운데 가장 좁은 곳은 약 50 Km이다.
남북간의 길이가 서울-부산간 400km의 약 4배가 된다.
조동화의 벗님이시여!
감개무량한 다낭의 자유여행 잘 마치고 돌아와 생각해 보니 발 맛사지 한시간이 새삼 기억에 남는구나.
발바닥에서 물팍까지 한시간(60분) 맛사지하면서 누워있으니 지루하기고 한데 발바닥 굳은살을 깨끗이 소재한 것이 좋았다고나 할까.
병오년(2026년) 희망찬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기쁨과 웃음 행복 가득한 한 해를 기원합니다.
<다낭 한강의 밤 유람선이 오색불빛으로 휘황찬란하다.
다낭 야경을 감상하며 약 45분간의 투어로, 보통 저녁 6시부터 밤 9시 15분까지 운항하며, 미쑤엉 선착장(26 Bạch Đằng)에서 탑승한다.>
<귀염둥이 손녀딸 혜윤이가 일곱살이 되었다.
형철이가 늦게 장가들어 혜윤이를 낳았는데 며누리가 직장에 나가기에 애기때부터 우리부부 손등에서 자랐으며, 내년이면 8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된다.
베트남 다낭 여행중에도 잘 따라다녀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베트남의 국부 호지명의 리더쉽◑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의 리더십은 국민 통합과 결집, 청빈과 헌신, 강력한 비전과 실천력으로 요약되며, '호 할아버지(Bác Hồ)'로 불리며 국민의 무한한 신뢰와 존경을 얻어 프랑스와 미국의 식민지배를 극복하고 베트남 통일을 이끈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는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을 이끌며 단순한 정치인을 넘어 국민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민족주의자 호찌민! 자유와 독립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다산 정약용선생의 목민심서를 읽고 그대로 실천한 국부 통일베트남의 지도자 호지명.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부 모택동이 있다면 베트남에는 호지명이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베트남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인 호찌민(Hồ Chí Minh) 한자는 胡志明(호지명)이다.
그가 죽을 당시 유산으로는 옷 몇 벌과 낡은 구두가 전부였다니 존경의 대상이었다.
☞호지명(胡志明 호찌민)의 생애 및 투쟁사
호찌민(호치민. 베트남어: Hồ Chí Minh/ 胡志明 듣기 (도움말·정보)), 1890년 5월 19일 ~ 1969년 9월 2일)은 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원래 이름은 응우옌신꿍(베트남어: Nguyễn Sinh Cung/ 阮生恭)이며 자(字)는 땃타인(베트남어: Tất Thành/ 必成), 호(號)는 아이꾸옥(베트남어: Ái Quốc/ 愛國), 츄옹(베트남어: thu Weng/ 秋翁)이다. 가명으로는 응우옌 아이꾸옥(베트남어: Nguyễn Ái Quốc/ 阮愛國), 리떠이(베트남어: Lý Thụy/ 李瑞) 등을 사용하였다.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호 아저씨(베트남어: Bác Hồ/ 伯胡)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호찌민이라는 이름은 깨우치는 자라는 뜻을 지녔다. 호치민은 가명과 필명이 160여 개 이상 되었다.
호찌민은 베트남 독립 운동의 주요 인물로 베트남 공산당, 베트남 독립연맹 등을 창건하였고, 1945년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고 총리(1946-1955)와 대통령(1955~1969)을 지냈다.
호찌민은 1920년 대 초 사이공에서 프랑스 선적의 배에 선원으로 취직하여 미국을 거쳐 프랑스로 가 유학하던 중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30년에는 중국에서 베트남 공산당(현 베트남 노동당의 전신)을 창건하여 이끌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베트남으로 돌아가 항일 독립 전쟁을 하였다. 전쟁이 종결된 1945년 9월 2일 프랑스 의 괴뢰로 전락한 응우옌 왕조의 황제 바오다이를 폐위시키고 독립을 선언하였다. 1946년, 프랑스와 독립 협상을 추진하였으나 프랑스가 협상 전에 베트남 남부에 임시 정부를 설치한 뒤 이를 코친차이나 공화국으로 발전시키자 이에 반발, 협상을 결렬시킨 뒤 반프랑스 전쟁을 감행하였다.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최종 승리하여 프랑스군을 몰아냈다. 그러나 미국, 소련 등이 가담하면서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면서 북베트남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전쟁을 지속하였다.
호찌민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9월 2일 베트남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였다. 호찌민은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피식민지 국가의 정치지도자의 한 사람이자 저명한 사회주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베트남어뿐만 아니라 영어, 중국어의 여러 방언과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였으며 타이어, 스페인어, 독일어, 러시아어에도 능했다.
호찌민은 프랑스가 식민 지배를 하던 시기인 1890년 5월 19일 베트남 북중부 지방의 응에안 성 호앙쭈(Hoàng Trù)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응우옌신삭(Nguyễn Sinh Sắc, 阮生色)은 가난한 유학자였고, 어머니 호앙띠로안(Hoàng Thị Loan)역시 농사를 짓고 서당 훈장도 하였던 유학자의 딸 이었다. 세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누나의 이름은 밧리엔(Bạch Liên 白蓮, 후일 응우옌띠탄(Nguyễn Thị Thanh)으로 개명)이었고 프랑스 육군의 사무원으로 일하였다. 형 응우옌신키엠(Nguyễn Sinh Khiêm, 후일 응우옌땃닷(Nguyễn Tất Đạt0으로 개명)은 흙점도 치고 전통 의학으로 진료도 하였다. 또 다른 형 응우옌신뉘언(Nguyễn Sinh Nhuận)은 어려서 죽었다. 호찌민의 아명은 신꿍(Sinh Cung)이었다.[1]
호찌민은 아버지 밑에서 한자와 유학을 공부하였고, 일상에서 베트남어 구어(口語)를 표기하기 위해 널리 사용되었던 꾸옥응으도 익혔다.[2]
1900년 8월 아버지가 후에의 말단 공무원이 되었지만, 1901년 2월 어머니가 병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아버지도 관직에서 오래 가지 못하고 얼마 뒤 면직되었다. 호찌민은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려서부터 많은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인 탓에 정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는데도 역사와 고전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였다.
호찌민은 베트남인 관리를 양성하는 프랑스-베트남학교에 입학했지만, 재학 중 반프랑스 민족주의적 사상을 가졌다고 하여 퇴학당하였다. 1904년 휴에 있는 프랑스어 문법학교에 입학하여 1908년 봄에 졸업했다. 그 뒤에 판티에트에서 소학교 교사로 부임했으나 월급이 박봉이라서 곧 그만두고 사이공으로 올라가 기술훈련원 견습생이 되었다. 그 후 1911년 응우옌 바(Nguyễn Ba)라는 가명으로 가명을 프랑스의 6000톤급 증기선(船)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 호의 견습 요리사로 승선, 프랑스에 건너갔다. 그러나 곧 그만두고, 선원으로 아프리카의 여러 항구와 프랑스와 알제리, 튀니지, 콩고 등의 프랑스 식민지와 미국, 유럽 제국을 돌았다.
►호지명 미국 생활과 프랑스 생활
1912년에 선박 요리사 보조로 일하며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1912년과 1913년에 뉴욕의 할렘과 보스턴에서 살았다. 파커 하우스 호텔(the Parker House Hotel)에서 빵 굽는 일을 했다. 1914년에는 배편으로 영국에 건너가, 영국 런던에서 하인, 견습공 등으로 생활하였고, 런던에서 생활하다 1917년 다시 프랑스 마르세유로 건너갔다. 그 뒤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정원사, 청소부, 노동자, 웨이터, 댄서, 사진 수정자, 요리집의 화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였다. 1918년에는 다시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밑바닥 인생을 전전했지만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정치적 시야와 사회 부조리에 대한 비판 의식은 갈수록 성장하였다. 미천한 직업을 전전하면서 1917년과 1918년 사이에 브루클린의 부유한 가정에서 일했고, 제너럴 모터스에서 생산라인 관리자로 일했다고 그는 말했다. 이 기간 동안 할렘에서 마커스 가비의 영향을 받았으며, 한국의 민족주의자들과 만나서 정치적 전망을 넓힌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현재의 런던 칼튼 호텔 주방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페이스트리 쉐프의 견습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쉐프인 오거스트 에스코피에(Georges Auguste Escoffier)에게 배운 적도 있다. 1917년 파리로 옮겨갔지만 그 해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은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9년에는 프랑스 사회당에 입당하여 정치활동에 나선다. 1919년 1월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파리 강화회의에 베트남의 독립을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했다. 파리 체류 시절 그는 응우옌 아이꾸옥(阮愛國)이라는 가명을 썼다. 이때 쓴 아이꾸옥이라는 이름은 후일 그의 호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 사는 베트남인들을 조직화했고, 청결함과 신뢰를 쌓을 것, 집 주변 청소 정리 등을 하고 질서의식을 가질 것을 호소하였다. 1919년 6월 베르사유 회의에 베트남대표로 출석하여 '베트남 인민의 8항목의 요구'를 제출하였는데, 이때 언론에 조명되면서 일약 유명해졌다.
►호지명 공산당 활동
1920년 프랑스 사회당 투르대회에서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지지파에 가담하였다. 러시아 공산혁명의 성공과 레닌의 반제국주의 정책에 자극을 받은 그는 1920년 12월 프랑스 사회당을 탈당하고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0년 호찌민은 마르크스주의를 배워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고, 재프랑스 베트남인 애국자단을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응우옌 아이 꾸옥》(阮愛國)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호찌민은 파리 강화 회의가 열리고 있는 베르사유 사무국에 애국단을 대표해 출석하였다.[3] 그는 "베트남인과 프랑스인을 법적으로 동등하게 대우할 것, 프랑스 의회에 베트남 대표가 참석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할 것" 등 8개 항으로 이루어진 《베트남 인민의 요구서》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다.[3] 그러나 조선의 대표단이 그랬던 것처럼 이 요구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호찌민은 회담장 복도에서 쫓겨났다.[3] 그러나, 이 사건으로 그는 유명해졌다. 이때, 그는 제국주의자들은 절대 스스로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고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소련에 호의를 가지게 되었다.[3](→파리 강화 회의)
1921년 프랑스 공산당의 지원으로 프랑스 식민지 인민연맹을 결성하고, 인민연맹의 기관지 《르 파리아(Le Paria[4])》를 편집·발행의 책임을 맡았다. 《르 파리아》에서 그는 프랑스, 독일, 영국의 식민지 정책의 부당성과, 프랑스의 베트남인 차별의 해악을 고발하였다. 호치민은 프랑스에서 노동자 계층의 많은 지도자들과 사귀었는데, 수년간 프랑스에서 반제국주의, 반식민지 투쟁활동을 벌이고나서 1923년말 모스크바로 갔다.
1923년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아시아 담당 상임위원에 선출되었다. 1924년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 출석, 동아시아 담당 상임위원이 되었고, 1925년까지 코민테른의 학교에서 공산주의 혁명사상을 익혔다.
►공산주의 운동과 혁명 활동
1924년 1월 블라디미르 레닌이 병으로 죽은 뒤 그는 러시아의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 Pravda>지에 레닌에 대한 고별사를 실었는데 그 내용은 당원들을 깊이 감동시키면서 주목받았다. 1924년 6월 17일부터 7월 8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제5차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회에 적극 참여했다. 이 회의에서 그는 발표문에서 프랑스 공산당이 식민주의 정책을 좀더 맹렬히 반대, 비판하지 않는다며 비판했다.
1924년 12월 호치민은 중국 광둥 성 광저우(廣州)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리 투이(Ly Thuy)라는 가명을 썼다. 12월 그는 광저우에서 베트남 혁명청년협회(약칭은 탄 니엔(Thanh Nien))를 조직하고 사회주의적 민족운동가들에 대한 교육을 시작했다. 이 협회의 회원들은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한 반감을 가진 인사들, 식민지하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은 인사들, 정치적 신념 때문에 인도차이나에서 추방되었던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그는 광저우를 중심으로 인도차이나 민족주의의 근거지를 마련했다. 그는 다시 소련으로 되돌아갔고 코민테른의 학교에서 사회주의 혁명 사상에 대한 공부를 계속했다.
1925년 다시 광저우로 돌아와 혁명청년협회의 일을 맡아보았다. 그러나 1926년부터 중국 국민당 군대의 사령관이었던 장제스(蔣介石)가 1927년 4월 광저우에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추방하자 호치민은 다시 소련으로 피신하였다. 1928년 브뤼셀과 파리를 거쳐 타이의 사이암으로 갔다. 사이암에서 체류하며 그는 태국의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활동, 이때는 소련에서 그를 동남아시아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표로 임명하여 2년 동안 이 직함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은 중국 남부에 남아서 활동을 전개했고 그 근거지를 윈난성 쪽으로 서서히 이동해갔다. 1928년 베트남 혁명청년협회의 단원들은 1929년 5월 홍콩에 모여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는 하노이나 휴, 사이공 같은 베트남의 대도시에 청년 운동가들을 파견, 적극적인 조직활동을 펴기 시작했으나 호치민의 부관들 가운데 몇 사람은 지도자의 부재 속에 소극적으로 임했다. 이때 호치민은 모스크바로부터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으나, 자금의 부족과 중국 국민당, 일본군, 프랑스 총독부 행정기관 등의 단속과 방해로 활동은 순조롭지 않았다.
당초 그는 서신과 편지로 홍콩에 체류중이던 베트남 혁명청년협회 회원들과 공산당 결성을 추진하였으나, 자금과 인력, 여건의 어려움으로 뒤로 미루게 된다.
►인도차이나 공산당 설립
혁명가로서 자질을 배운 그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중국 남부 및 타이로 파견되었으며 베트남의 주변에서 혁명운동을 계속하였다. 중화민국에서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되어 북벌이 시작되면서, 그도 광둥 성으로 가서, 《베트남 청년혁명동지회》를 창립했다. 1930년 1월 호치민은 사이암에서 베트남으로 돌아온 후 공산당 창당을 주관했다.
1930년 2월 3일 에 영국령 홍콩에서 그때까지 조직되었던 3개의 공산주의 조직의 대표를 모아 하나로 묶어 《베트남 공산당》을 창립했다. (곧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개칭) 홍콩 체류 시절 그는 '리 투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베트남 공산당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지나치게 소시민적이고 민족주의적이라는 스탈린의 충고를 받아들여 당 이름을 1930년 10월 인도차이나 공산당(PCI)으로 고쳤다. 그가 스탈린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은 베트남 공산당이라는 이전 이름에 내포된 소시민계급 민족주의의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였으며, 국제적으로 더 폭넓게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PCI는 베트남의 폭력적인 반란운동과 동시에 발족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탄압은 잔인했고, 공산당 인사들에 대한 무차별 사살과 고문 등의 행위를 가했고, 무력 충돌과 인력 손실이 계속되었다. 홍콩 체류 중 그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로부터 폭력 혁명분자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해 말 코민테른에 의하여 권한을 부여받고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개칭하였다. 중국 서남부에서 베트남 혁명청년동지회를 결성하였고 중국 서남부와 베트남 북부지역까지 근거지와 연락소를 두었다. 《청년》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면서 조직을 홍보, 프랑스 식민통치 하에서 가난에 찌든 젊은이들이 동조하면서 이들을 포섭, 점점 당의 세력을 강화해 나갔다. 중국 서남부의 본부에서 훈련받은 베트남인들을 인도차이나 지하조직으로 파견하였다. 1931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검거 탄압을 피해 홍콩으로 피신하였다. 1931년 6월 6일 홍콩 체류 중 영국 경찰에게 체포되었다가 1933년 그곳 프랑스 경찰이 도망범 인도에 대한 승인을 영국 정부로부터 받자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곳을 빠져나와 상하이(上海)로 도망쳤다. 1933년 여름 오랫동안 은신해 있다가 그해 가을 열차편으로 소련의 모스크바로 갔다.
반프랑스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대 운동 [편집]1935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7차 공산당 인터내셔널 대회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이 대회에서는 1930년대 초부터 호치민이 오랫동안 주장, 요구했던 프랑스 인민전선(Popular Front, 파시즘에 대항하는 비공산당 좌파와의 동맹)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원들에게 민족 해방을 위해서는 비공산당 좌파, 개량주의자들과도 연대해야 하고 온건 성향의 우파들까지도 끌어들여야 된다고 주장했다. 그가 직접 키우고 훈련시킨 당원들로부터도 의심과 오해를 샀으나 결국 1936년 인도차이나의 공산당원들은 호찌민의 설득과 권고를 받아들여 자신들의 반식민주의 입장과 강경 투쟁론에서 한발 물러나 비공산당 좌파는 물론 온건 우파를 포함한 '반파시즘 식민주의자들'과의 협력을 고려했다.
1936년 프랑스 총리인 레옹 블룸(Léon Blum)의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있는 좌파 세력들이 좀더 자유롭고 적극적인 활동을 벌일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러나 호치민은 1930년에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법정에서 받은 사형선고 때문에 베트남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망명생활을 하였다. 1937년 중순에 귀환을 계획했으나 1937년 블룸의 인민전선 정부가 무너지자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인도차이나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이 되살아났다. 1938년에 이르러 인민전선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악조건에서 싸우게 되었다.
1938년 호치민은 중국으로 돌아가 화북 지방으로 가, 옌안(延安)에서 마오쩌둥(毛澤東) 등과 2개월 정도 같이 생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편집]베트남 독립 운동 [편집] 베트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39년 프랑스와 독일이 전쟁 중일 때, 프랑스의 패배를 예상, 호치민과 그의 부하인 보 구엔 지아프, 팜 반 동은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상을 진척시킬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고 프랑스가 독일에 패하였다.
1940년부터 중국 윈난성 쿤밍에서 중국 공산당 조직과 함께 활동하며 본국을 향해 홍보, 선전 전술을 활용하였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기 때문에, 프랑스의 식민지인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독일 정부와 손잡은 일본 정부는 남방진출의 일환으로 1940년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북부에, 1941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에 진주했다. 친독일 비시 정권과의 좋은 관계 유지를 위해 그는 기존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와 공동 통치 체제를 폈다.
호찌민은 1941년 1월 3인조·5인조 동지들을 국경을 넘어 베트남으로 파견하여 지하 조직을 구성하고, 각 지역의 청년 당원들을 모집하게 하고, 한편 지식인들을 포섭하게 하였다. 호찌민은 홍콩, 모스크바, 옌안(중화민국), 윈난 성 등에서 활동하고 있었지만 인도차이나 정세의 급변으로 1941년 2월, 윈난 성에서 국경을 넘어 조국 베트남의 까오방 성으로 들어왔다. 5월 그는 여기서,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중심으로 베트남 독립을 위한 통일전선 조직인 《베트남 독립동맹》(월맹, 통칭 비엣민[5])을 조직하고, 즉시 일본군에 대한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어 민족해방을 위한 독립 총봉기(總蜂起)를 목표로 단원을 모집하고 세력을 키웠다. 그는 이때부터 응우옌 아이 꾸옥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호치민이라는 필명을 정식 이름을 사용하였다. 베트민이 결성되면서 베트남 고유의 민족주의가 다시 강조되었다.
중국과 미국의 승인 획득 [편집]그러나 프랑스와 영국, 일본 등 제국주의 세력과의 전쟁을 위해 부득이 무장세력을 많이 보유한 중국 장제스 정부의 도움, 지원을 받아야 되었다. 2차 대전 후반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보고 일본의 패배를 예상한 그는 사회주의 성향을 철저히 숨기고, 중국과 미국에 전략적으로 접근하여 지원을 받아낸다. 1942년 중국 국민당의 간부를 만나기 위해 중국 쓰촨 성 충칭을 방문하였다가 프랑스와 일본의 스파이로 오인되어 중국 국민당 특무대에 의해 체포, 감금되었다. 장제스는 공산주의자인 호찌민을 믿지 않았고 그는 18개월간 구금당한다. 수감 시절 그는 매일 일기를 쓰는 한편, 〈옥중 서신 (Notebook from Prison)〉이라는 책을 집필했는데, 이것은 전통적인 한문 단편 시들의 모음집으로 우울한 단상, 금욕적인 사고, 혁명을 주창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한문에도 능했던 그는 혁명활동의 차질을 받았으나 침착하게 대응, 중국 국민당 측을 설득했다.그는 동료들이 중국 남부의 최고 사령관인 장 파쿠에이와의 타협을 통해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에 반대하고 장 파쿠에이의 권익을 지지하겠다는 조건에 동의해 그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장 파쿠에이는 장졔스를 설득했고 그는 1943년 9월에 석방되었고, 이때 그는 베트민이 단순히 프랑스나 일본과 싸우는 독립운동 단체가 아니라 임시 과도정부이며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프랑스와 영국,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한편 민주주의에 입각한 정부 수립을 약속, 그의 설득이 통하여 그는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월맹이 임시과도정부임을 승인받았다.
미국의 극동군 사령부에서는 특별히 낙하산 부대까지 투입하여 월맹의 활동을 지원하였는데 이는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호치민은 미국이 프랑스, 스페인과 갈등하고 있다는 상황을 잘 이용하였고 미국의 지원으로 독립 전쟁을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되었다. 1944년말 그는 미국 군대와 접촉하여 일본에 대항하는 미국의 첩보기관 미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약칭 OSS)와도 협력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의 베트남 독립동맹의 게릴라들이 중국 남부 산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했다. 그러나 1945년 프랑스 측에서 미국측과 교섭, 그가 공산주의자임을 들어 후원 중단을 요청하자 미국은 베트민의 지원을 중단한다.
독립 선언과 투쟁 [편집]독립 선언 [편집]1945년 1월부터 호찌민은 보 구엔 지아프의 요원들로 구성된 특별 기습부대를 지휘하며 서서히 베트남과 중국의 국경지대를 넘어 1945년 봄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 비밀리에 잠입하였다.
군사적으로 일본에 비해 열세인 편이었기 때문에 1942년, 중국 국민당군의 지원을 요구하려고 중화민국에 들어갔지만 공산당의 세력 확대를 싫어하는 국민당의 지방 군벌 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13개월간 각지 감옥을 전전하다가 석방되어 1944년말에 간신히 근거지로 돌아갔다. 그러나 일본군이 인도차이나를 점령하면서 모든 프랑스 관리들을 투옥하거나 처형했다. 그는 다시 기회를 찾기 위해 노력하며 전황과 동태를 수시로 파악하였다.
1945년 8월초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호치민은 자신을 의장으로 하는 민족해방위원회가 결성하고 일본, 프랑스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고 궐기하였다. 1945년 8월 10일 일본의 패전으로 태평양전쟁이 끝나자 민족해방위원회는 지상으로 올라와 총봉기하였다. 하노이, 훼에서 연일 시위가 일어났으며 월맹은 베트남 중부와 북부 지역을 빠르게 장악하였다.
일본군이 항복한 1945년 8월 13일 호찌민은 전국민에 총봉기를 호소했다. 4일 후 8월 17일에는 비엣민 주도하에 전국적인 민중봉기(베트남 8월 혁명)가 일어나 비엣민 군이 하노이에 입성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가 항복문서에 조인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그 해 9월 2일, 호찌민은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신께서는 인간에게 신성 불가침의 권리들과 생명, 자유, 행복을 누릴 자유를 주었다. ”
그러나 베트남의 중부와 남부에는 프랑스의 세력이 강했고, 이들은 독자적으로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수립한다.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바오다이 황제의 폐위와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하고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선포하였으며, 바로 호치민은 정부의 국가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베트남의 분단
그러나 연합군의 협정조항 중에는 중국의 장졔스의 중국 국민당 군대가 일본군을 대신하여 16°선 북쪽을 장악하고, 남부는 프랑스가 혼란을 수습할 때까지 당분간 맡는 조항이 있었다. 그는 이에 반발하였지만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하자 고민하기 시작했다. 샤를 드골 장군이 집권한 프랑스는 베트남의 독립을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베트남의 지배권을 다시 주장하였다. 10월 6일 드골은 자크 르클레르 장군을 사이공에 급히 파견, 10월 2일부터 8일까지 지나자 중무장한 프랑스군 기갑사단이 코친차이나 지역에 도착했다. 45년 12월 그는 남베트남을 장악했으나 프랑스 기갑사단의 출현으로 퇴각했다. 호치민은 계속 싸우는가 협상하는가를 두고 고민했다. 결국 협상하기로 결정했으나, 한편으로 군사 훈련을 계속하여 언젠가는 싸워야 할 것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였다.
호치민의 전략은 프랑스 군대를 이용, 북쪽에 있는 중국 군대를 퇴각시키게 하고 나서 독립의 승인, 르 클레르 군대의 철수, 베트남의 재통일을 보증할 프랑스와의 협약을 맺는 데 주력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부 사회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그럼에도 협상을 강행, 1945년 10월 말부터 대표단을 보내 프랑스와의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프랑스 군대가 독립에 대한 대화를 거절하자 호치민과 프랑스 군대 양측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1946년 3월에 가서야 교착상태가 풀리면서 협상을 다시 진행하였다.
►독립 협상 결렬
1957년, 호찌민그러나 프랑스 정부가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정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군을 증파하자 호찌민은 프랑스 정부와 끈질긴 교섭을 통해 1946년 3월 하노이 협정을 성립시켜며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받게 되었다. 본 협정 조인을 위해 프랑스로 간 그는 프랑스 정부가 코친차이나를 분리하고 그곳에 친프랑스적인 정권을 수립시킨 사실을 알고 타결 직전에 교섭을 결렬시켰다.
1946년 3월 대치 상태가 다소 풀리자 호치민 편에서는 프랑스군에 제시한 요구에 대해 보다 폭넓은 지지기반을 얻으려는 생각에서 베트남 독립동맹 이외의 당들도 새로운 정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 쪽에서는 중국 군대의 철수를 얻어내기 위해 외교사절단을 중국에 보냈다. 중국 국민당군이 베트남 북부에서 철수하자 르클레르 군대 일부도 북쪽 하이퐁에서 물러났다. 호치민은 3월 6일 중국 군대의 철수가 확정된 뒤 프랑스군과의 협정에 조인했다. 협정조항에 따르면 베트남은 '자치정부·군대·재원(財源)을 가진 자유국'으로 인정되었으나, 계속해서 파리 시에 있는 프랑스 정부가 주도적인 역할을 행사하는 프랑스 연방에 통합되어 있었다. 3월 18일 르클레르는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하노이로 들어갔고 군대는 제한구역에서만 활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퇴각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러나 베트남과 프랑스의 극단주의자들과 베트남의 민족주의자들은 그 협정에 대해 불만스럽게 생각했고, 호찌민이 식민통치를 연장하려 한다 또는 사적인 욕심으로 음모를 꾸민다는 등의 비방이 계속되었다.
1946년 6월부터 9월의 프랑스 정부에서 주재한 2차 협정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고 파리에서 프랑스 정부와 2차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20일부터 11월 23일 우연히 하이퐁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사고로 결렬되었다. 그해 11월 하이퐁에서 프랑스 군대와 베트남 군대 사이에 충돌이 있은 후 프랑스 순양함은 하이퐁에 포격을 가했다. 거의 6천~8천 명의 베트남인이 포격으로 죽는 바람에 우호적인 화해에 대한 기대도 무너졌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희생 현장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 하이퐁을 방문한 호찌민은 분개했다. 이 무렵부터 심장질환 등으로 고생하던 그는 병든 몸에 환멸을 느끼면서 좀더 호전적으로 보복하자고 나서는 추종자들의 요구를 즉각 수용한다. 12월 19일 그는 전쟁을 선언했고 이로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1946년 12월 퐁텐블로 회의가 결렬되자 프랑스에 대한 항전(抗戰)을 직접 지휘하였으며, 코친차이나 공화국과 그 후신인 베트남국이 프랑스의 괴뢰 정권임을 강조,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협력, 협조를 요청하였다.
프랑스군은 하이퐁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으므로, 12월 19일 호찌민은 《전국민에 항전을 호소한다!》라는 담화문을 발표하고 철저한 항전에 돌입하였다. 이것이 7년간에 걸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이다. 베트남군은 평야에서 철수하여 북부 산악 지대에 틀어박여 저항을 계속하였고 보응우옌잡이 인솔하는 게릴라 부대는 장비가 우수한 프랑스군을 압도하였다. 그는 북베트남의 산악 지대에서 은신하면서 전쟁을 지휘하였다. 1947년 중반 북베트남의 어느 야산에 피신해 있던 호치민은 다시 파리와 접촉, 일시적으로 휴전하였으나 파리에서 제시한 조건은 황실의 복원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의 코친차이나 공화국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고, 그 후신인 베트남국을 지원했다.
1948년 프랑스 정부는 1945년 8월에 혁명을 지지하여 사임했던 전 응우옌 왕조 안남 제국의 황제 바오다이를 다시 안남의 황제에 앉혀주겠다고 제안했다. 프랑스가 바오다이의 복위를 조건으로 낸 것은 베트남의 전통 지배계층을 지지하여 월맹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황제와 귀족들의 복귀와 신분제 사회는 있을 수 없다며 호찌민은 반발했고, 그는 3차 협상은 전면 백지화했다. 이어 지압의 지휘를 받는 베트민 군대에 유격 게릴라 전쟁을 명령, 게릴라 전법과 테러 행위를 동원해 프랑스군과 바오다이의 군대를 봉쇄하거나 기습작전으로 승리하였다.
1953년말 베트남의 중부와 북부 지방 대부분은 베트민에게 장악되었고 좀더 큰 도시들도 사실상 포위상태에 있었다. 또한 베트남 남부에도 베트민이 심어둔 첩자들이 암약하면서 프랑스의 정책을 방해, 교란했다. 프랑스군은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에서 교전한다.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기습공격으로 승리, 프랑스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그 결과 제네바 협정이 체결되고 프랑스군이 철수함으로써 베트남은 80년에 걸친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과 중공의 내정 간섭과 프랑스, 미국의 막후 개입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다. 결국 제네바 회담에서 베트남은 17도 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분할되었다. 그는 이에 반발하였으나 소련과 중공이 개입한 것을 알게 되면서 침묵하였다. 이후 그는 '우리는 폭격 위험 아래서는 절대로 협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결사 항전의 뜻을 밝혔다.
1954년 5월 말부터 7월 21일까지 8개국 대표들이 베트남 독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베트남 대표들과 함께 제네바에 모였다. 이때 베트남 대표는 2개 대표단이 파견되었는데 호찌민 지지자들로 구성된 팜반동의 북베트남의 대표단과 바오다이와 그 지지자들로 구성된 남베트남의 대표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남베트남은 이미 1945년부터 프랑스의 지원으로 코친차이나 공화국이 수립된 이래 프랑스와 미국의 영향력하에 사실상의 정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54년 5월부터 2개월간의 회의 끝에 8개국 대표들은 베트남이 따르기로 되어 있는 1가지 협정을 체결하고서 회의를 끝냈다. 협정에서 1956년에 실시하기로 예정된 선거 전까지는 베트남을 17°선의 경계로 나누었다가 선거 후에는 베트남인들이 통일된 정부를 세우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팜반동 등은 즉시 독립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바오다이의 지지자들도 공산 정부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함으로써 통일 정부에 대한 결론을 보지 못한다.
또한 이 조약에서는 1946년 프랑스와의 협정에 조인했던 호치민이 이 조약을 받아들이고 프랑스나 미국, 일본 등 어느 나라에 대해서든 저항을 중단해야 된다는 조건부가 달렸다. 그러나 협상 막판에 베트남 총선거에 대해 바오다이의 지지자들과 미국, 프랑스는 부정적이었고, 결국 미국과 남베트남의 선거기한 연기 주장이 관철되면서 그의 뜻은 관철되지 못한다.
►농지 개혁과 외교 활동
1945년과 1946년, 1947년 그는 베트남 공산당 내부의 트로츠키 주의자들에 대한 숙청을 감행하였고,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고 친일파, 친프랑스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과 항일, 항프랑스 전쟁에 가담했던 민족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공개비판을 가한 뒤 무자비한 숙청과 처형을 지시했다. 호찌민과 그의 동료들이 장악한 북베트남은 남쪽의 광대한 농업지역과는 단절된 지역이었고, 수산업 외에는 자원이나 유산이 빈약하였다. 경제 건설을 목적으로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호찌민은 중국과 소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소련에서도 소극적이었고, 중국에서도 다소 소극적이었다. 불리한 상황에서 호치민은 더욱 탄압적이고 철저히 전체주의적인 통치를 계속해 나가게 되었다.
1955년부터 1956년 농지 개혁을 통해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면서 다시 탄압과 숙청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인들에게 '호 아저씨'로 알려진 것처럼 이미지 홍보 효과와 독립운동을 통해서 인심을 얻은 호치민은 마음만 먹으면 대단한 인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경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그는 부득이 지주와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구 왕당파까지 숙청하는 등의 공포정치를 감행한다.
그는 소련과의 관계가 긴밀했지만 아시아 혁명 당시 중국이 맡았던 초기 역할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시아에서 중공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소련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는 한편, 소련과의 관계를 활용하는 일에 몰두하였으며, 베트남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였다. 강대한 공산주의 두 동맹국 사이에서 능숙하게 균형을 유지하면서 1955년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방문하는 한편 1958년에는 중립국이던 인도의 뉴델리와 자카르타를 방문하여 외교 관계를 형성하였다. 중국과 소련과의 갈등이 계속되자 호치민은 1960년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과 중국 사이의 중재를 하기도 했다.
또한 한쪽 편을 들지 않고 중, 소 양쪽을 중재하는 한편 양쪽 모두를 지지한다고 하는 등 협상을 시도하였다. 또한 주변의 인도, 캄보디아 등과의 외교에도 각별히 신경 썼다. 결국 그는 두 공산주의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결과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을 때 그는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원조를 받았다.
►베트남 전쟁
1959년 북베트남에서 다시 전쟁에 개입했고 남 베트남에서도 고 딘 디엠 정권에 대한 게릴라(베트콩)들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미 프랑스가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에서 철수했지만, 당시 프랑스와 일본에 이어 베트남에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제네바 협정에 서명하는 대신 남부 베트남에 친미적인 정권인 베트남 공화국을 수립, 적극적인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시작했다. 그러나 베트남 공화국 정부가 제네바 협정에 따라 정해진 통일 선거를 보이콧하면서 반대파에 가혹한 탄압을 가하자,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독재 정치에 대한 저항이 확산되어 1960년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이 결성되었다. 해방전선은 베트남 노동당의 지원 아래 부패한 남베트남 정부와 격렬한 싸움을 시작했다.
남베트남의 정치적 불안정과 계속되는 해방전선의 투쟁에 베트남이 공산화가 될 것을 우려한 미국은 1964년 8월 2일에 발생한 통킹 만 사건을 구실로, 1965년 2월 7일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개시하며 베트남 전쟁을 시작했다. 전쟁 기간을 통틀어 미군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군에 비해 우세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당시 남베트남 정부의 독재와 부패로 베트남 공화국의 정치적 지지도가 추락하면서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남베트남 해방민족전선이 지지를 얻기 시작했고,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바탕으로 해방민족전선은 주요 도시와 간선도로를 제외한 농촌 지대를 거의 완전하게 그 세력하에 두어 베트남 공화국군과 베트남에 주둔해 있는 미군에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여기에 소련과 중국의 군사적 지원, 특히 케싼 전투와 1968년 구정 공세를 계기로 사실상 미군이 전쟁에서 주도권을 잃자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존슨의 지지도는 급감했고 결국 닉슨에게 후임을 내주었다. 이어서 1969년 제37대 대통령에 취임한 리처드 닉슨은 베트남에서의 철수를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베트남 민주공화국과 본격적으로 협상하기 시작했다.
►죽음과 그 이후
1966년 7월 17일 그가 발표한 성명서 가운데 '베트남 국민의 가슴에 독립과 자유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라는 구절은 북베트남인들의 통일전쟁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는 주제, 구호가 되었다. 만년의 그는 심장병으로 1940년대 중반부터 오래도록 고생하였고 제대로 된 진료를 받지 못했다. 호찌민은 생전에 남베트남을 정복하고 통일을 달성하는 데 최소한 3~5년 이상은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그가 죽은지 7년만에 1976년 남베트남은 몰락하고 만다.
미군이 베트남과 협상을 시작하면서 전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즈음인 1969년 9월 2일, 24번째 독립선언 기념일을 앞두고 호찌민은 갑작스런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79세가 되던 해였다.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고, 재를 3등분하여 도자기 상자에 담아 북부, 중부, 남부에 뿌려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으나, 그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어 거대한 묘에 전시되었고,[6] 베트남 국민은 4일부터 11일까지 7일간을 전국민 애도 기간을 정하고 그를 추모했다.[7]
그가 죽을 당시 유산으로는 옷 몇 벌과 낡은 구두가 전부였으며 사적으로 재산을 축재하지 않았다. 그가 죽은 지 6년 후인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1976년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 성립되었고 남베트남의 수도였던 사이공은 호찌민 시로 개칭되었다.
☞베트남 전쟁
제 1차 베트남 전쟁 1946년 ~ 1954년 - 프랑스와의 독립전쟁
제 2차 베트남 전쟁 1959년 ~ 1975년 - 미국과의 독립전쟁
베트남에서는 30년 전쟁이라고도 부릅니다.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간첩, 빨갱이들 때문에 자유월남이 망한 전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건 틀린 말입니다.
베트남 전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베트남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베트남은 왕조국가였는데 프랑스의 침략을 받아 1885년 베트남 전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속하게 됩니다. 1940년 프랑스는 독일 나치에 패해서 베트남에서의 프랑스 입김은 약해졌는데 이 틈을 타서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호치민은 베트민(베트남 민주공화국, 월맹)을 세우고 독립운동을 전개합니다.
베트민은 1945년 8월 혁명을 통해 프랑스를 쫓아냈지만, 양아치같은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났으니 베트남은 다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며 극동원정군을 파견합니다. 프랑스 극동원정군은 사이공에 베트남 괴뢰국을 세워 다시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려 했고, 호치민은 이에 맞서 하노이에 북베트남을 세워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됩니다. 그리하여 1954년 제네바 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양측은 치열하게 싸웁니다. 북베트남은 민족의 독립을 주장했고, 토지개혁을 통해 지주제를 폐지하고 국민들에게 공평하게 토지를 분배했습니다. 자신의 땅을 갖게 된 베트남 국민들은 북베트남을 절대적으로 지지했고, 그 결과로 프랑스가 쫓겨남으로써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인도차이나는 공식적으로 해체됩니다.
제 1차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제네바 협정에 따라 총선거를 통해 베트남 정부를 탄생시키기로 했는데, 프랑스 앞잡이 노릇을 하던 남베트남의 고 딘 디엠 장군은 총선거를 거부하고 스스로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됩니다. 그리고 토지개혁으로 땅을 분배받은 농민들로부터 다시 땅을 빼앗고, 남베트남의 민족주의 운동가들과 공산당원들을 대학살합니다. 고 딘 디엠 정권의 이러한 횡포는 미국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남베트남 국민들은 고 딘 디엠 정권에 저항하면서 제네바 협정에서 약속한 대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며 무장투쟁을 벌입니다. 1963년 사이공에서 불교 승려가 고 딘 디엠 정권에 항의하며 분신자살을 하였고, 미국 내에서도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것에 대한 반대여론이 높아집니다.
미국의 지원이 약해지자 고 딘 디엠은 군부에게 살해되고 새로 집권한 남베트남의 군사정권이 북베트남과 유화분위기를 조성하자 베트남을 잃을 것을 염려한 미국은 1964년 8월 통킹만 사건을 일으켜 베트남에 대규모 군사력을 투입합니다.
( * 통킹만 사건 : 남지나해를 거쳐 통킹만에 접근한 미 해군 구축함을 북베트남군이 공격했다고 미국이 날조한 사건. 미국은 베트남에 대한 직접적 대규모 군사개입을 위한 구실을 얻기 위해 이 사건을 날조했다. 1971년 미국 뉴욕타임스가 1945년부터 미국이 베트남에서 정치군사적인 공작을 벌여왔음을 기록한 기밀문서인 펜타곤 보고서를 폭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
미국은 북베트남에 100만톤이 넘는 폭탄을 투하하고, 55만명이 넘는 군대를 파견했지만, 베트남 국민들의 게릴라 전술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미국내에서는 미국은 베트남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닌 단순한 침략자라는 것과 왜 싸우는지도 모르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분노해 반전여론이 높아졌습니다.
결국 미국과 베트남이 정전협정에 합의하면서 베트남 전쟁은 1975년 끝나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은 6만명이 넘는 군인이 목숨을 잃었고, 베트남은 민간인을 포함해 20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우리나라 군인들도 5천여 명이 전사했습니다.
☞호지명!
인민의 마음에 영원한 둥지를 틀다!
호찌민은 베트남의 현대사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도 탁월한 정치적 지도력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왜소하고 염소 수염에 색이 바란 노동복에 낡은 타이어를 잘라 만든 샌들을 끌고 다닌다. 외모 만 보면 아무런 특징이 없는 평범한 시골 영감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바로 식민지로 피폐한 약소국가를 지도하여 60여년의 긴 투쟁 끝에 조국의 통일을 이끌어 낸, 베트남 인민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호찌민이다. 그는 민족해방과 민족통일에 대한 불굴의 의지와 인내, 그리고 보편적이고 가장 현실적인 방안을 적절하게 채택하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분단되어 있는 양측의 인민들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권력자로서 머물지 않았으며 조정자로서, 소수자로서, 세상의 저변에 흐르는 인민들의 마음과 함께하였다. 그는 죽어서도 베트남의 인민들에게 “호아저씨‘라는 애칭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인물로 남아있다. 앞으로 벌어질지 모르는 갈등과 분열이 일어났을 때 베트남 인민들은 정신적으로 돌아갈 수 있는 원천인 호치민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호찌민의 리더십은 어디에서 오는가?
베트남 사람들의 호찌민에 대한 존경심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리고 그 존경의 정체는 무엇인가?
민족주의자 호지명!
과거 남북 베트남인들에게 ‘호 아저씨’라고 불리우고 존경을 받았던 호찌민은 베트남의 현대사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도 탁월한 정치적 지도력으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합니다. 그는 주석이 된 후에도 왜소하고 염소수염에 색이 바란 노동복에 낡은 타이어를 잘라 만든 샌들을 끌고 다닌 관계로 그의 외모만 보면 평범한 시골 영감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바로 프랑스, 일본, 미국 등의 식민지로 피폐한 약소국가인 베트남을 잘 지도하여 60여년의 긴 투쟁 끝에 조국 베트남의 통일을 이끌어 낸, 그리고 역사상 베트남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호찌민이라고 합니다.
<베트남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은 호찌민>
한번은 어느 외신기자가 그에게 “당신은 공산주의자인가?”하고 묻자 “나는 민족주의자이다. 나는 다만 공산주의를 지금 우리 민족을 해방시켜줄 비상구 중의 하나로 채택하고 있을 뿐이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다른 외세를 견제하기 위해 그동안 베트남을 지배했던 프랑스와 때론 연대하기도 하는 지혜를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그는 베트남 민족해방과 민족통일에 대한 불굴의 의지와 인내, 그리고 보편적이고 가장 현실적인 방안을 적절하게 채택하는 분별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분단되어 있는 남북 베트남 양측의 국민들에게 열광적이고 지속적인 존경과 신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권력자로서 머물지 않았으며 조정자로서, 소수자로서, 세상의 저변에 흐르는 국민들의 마음과 함께 하면서 진정 ‘코끼리를 이긴 호랑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주 국민들의 일치와 단합을 위해 ‘호 아저씨’로서 늘 뜨거운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아마 그래서 그는 죽어서도 베트남의 국민들에게 ‘호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사랑과 존경을 받는 불멸의 인물로 남아있는가 봅니다.
아무튼 평소 다산의 ‘목민심서’를 탐독하며 정치 지도자라기보다 철학자요 구도자처럼 살아간 베트남의 위대한 지도자 호찌민의 뜻을 받들어 베트남인들이 이제는 단합하여 강대국들 사이에 자기 나라를 잘 지켜가길 바라면서 아직도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불쌍한 우리 백성들의 눈에서 눈물을 거두어주고 또 그들을 대신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려줄 그리고 ‘호 아저씨’와 같이 국민들에게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는 한반도의 위대한 지도자를 기다려봅니다.
►호찌민의 유언
1. 나의 무덤을 만들지 말고 화장하며, 동상을 만들지 말라.
- 매장하여 무덤을 만들면 인민들에게 폐를 끼칠것이며,
- 동상을 만들면 우상화되거나 신격화될 위험이 있다.
2. 이 전쟁이 끝이나더라도 남월남의 누구에게라도 보복하지 말라.
-모두가 한 시대에 살아남기 위하여 처신한 것이며, 모든 남월남의 인민들을 새로운 통일 베트남의 새 국민으로 새출발을 하자.
3. 전쟁중에 전사한 군인들의 아내나 가족에게 국력을 다하여 성심성의껏 지원하고 돌봐줄것이며, 상이군인들 역시 국가가 최대한 우대하여라.
평생을 인민들과 함께한 호치민, 다산 정약용선생의 목민심서를 그대로 실천한 베트남의 호아저씨.
아니 통일 베트남의 국부일 것이다.
혁명은 우선 가슴으로 해야 한다.
사회를 개조 하려면 우선 자기자신을
주의 깊게 개조해야 한다.
자신의 속마음을 엄숙하게 검열해야 한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스스로 수행해야 한다.
우선 자기자신을 갈고 닦아야
그 다음에 조직내부의 교화가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대중을 감응 시킬수 있다.
-호찌민-
한국과 베트남 수교(1992년)
대한민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1956년 대한민국과 베트남 공화국의 수교로 시작되었으며, 1975년 단교하였으나 1992년 재수교하였다. 베트남 전쟁 이전에는 베트남 공화국은 대한민국과,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단독으로 수교하고 있었으나, 사이공 함락 이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수교만 유지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베트남 정부가 사회주의에 입각한 경제 정책을 과감하게 자본주의 기반 정책으로 고쳐나가면서 많은 발전을 하고 있는데, 특히 아시아에서 커다란 발전을 이룩해낸 대한민국을 그 모델로 삼고 있다. 때문에 현재의 대한민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21세기 포괄적 동반자 관계"로 불리고 있으며 특히 유전개발과 CDMA 이동통신 분야에서의 교류협력등에서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베트남은 대한민국을 모델로 한 경제개발을 추구하고 있어서, 베트남과 대한민국 간에 활발한 경제적 협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對)베트남 수출은 96억52,07만 USD, 베트남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33억3081만USD(각 2010년)에 달하여, 베트남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9위의 수출국, 제28위의 수입국이다. [1]
1945년 베트남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부터 독립하였으며, 북위 17도를 경계로 베트남 민주 공화국과 베트남국으로 나뉘었다. 베트남국은 응오딘지엠의 정변으로 무너지고, 베트남 공화국이 세워진다. 베트남 공화국은 공산주의를 경계하는 미국과 프랑스 제4공화국에 의해 자유 진영에 편입되었으며, 대한민국은 1956년에 정식으로 베트남 공화국과 수교하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대한민국은 미국의 요청으로 남베트남과 자유 진영으로 전쟁에 참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기도 하였으며, 여전히 고엽제 피행 등 후유증을 안고 있다. 한편 대한민국의 여러 대통령들이 베트남을 방문하였으며, 베트남 전쟁에 대한 사과를 표명하였다.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은 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친 박정희 정부 하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민국 군을 파병한 사건을 말한다. 미국의 요청 등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전세가 치열해지기 시작한 1965년부터 휴접협정이 조인된 1973년까지 파병하였고 1965년 의무중대 등 후방지원부대 파병을 시작으로 육군 맹호부대와 해병 청룡부대가 파병되었고, 1966년에는 "브라운 각서"의 조인으로 백마부대가 추가 파병되어 베트남전 참전 8년간 총 31만 2천853명(최대 5만 명)의 병력이 파견되었다. 외화획득 등 많은 경제적 이익과 전투 경험을 얻은 반면, 대한민국군 32만명이 파병되어 5천명이 전사하고 31만명이 생존 귀국하였으며, 고엽제(2만여 명의 피해) 및 화공약품 후유증으로 귀국후 병사자가 다수 발생하였다. 이 파병기간 도중 미군의 밀라이 학살사건과 비슷한 파월 한국(남한)군에 의한 빈호아사 커우 마을 학살사건(1966년 12월 6일, 131명 사망) 등의 민간인 학살들이 있었다. 월남전 참전의 대가로 대한민국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자금을 지원받았고,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으로 일부 충당되었다. 베트남 전쟁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베트남 파병이 국군의 목숨을 담보로 한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는 비판도 있다.[6] 2005년 8월 26일 정부가 베트남전 관련 문서를 공개하면서 좀 더 정확한 역사적 검증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 문서에는 브라운 각서의 이행 상황과 1970년 2월 24일부터 26일까지 열린 미상원 사이밍턴 청문회에서 주한 미국 대사인 포터의 증언 내용과 한국의 대응과정이 자세히 담겨 있었다.[7] 한편 이대용 공사(公使)는 사이공 함락 직전 먼저 탈출한 대사를 대신해 국군 장병과 건설인력의 안전한 철수 귀국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남아서 애쓰다가 탈출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공산군에 붙들려 투옥된 후, 갖은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북한행을 거부하며 5년간 복역하다가 석방되어 귀국하였다.[8]
1992년 4월 2일 연락대표부의 상호개설 양해각서에 서명하고, 1992년 8월 17일 주(駐)베트남 연락대표부 공식업무가 개시되었으며, 1992년 12월 22일에 외교 관계가 (재)수립되었다. [9]현재 하노이에 상주 대사관이 설치되어 있으며 호찌민 시에는 총영사관이 설치되어있다. 1993년 포 반 키엣 수상이 방한하였으며, 1996년에는 김영삼 대통령, 1998년 김대중 대통령,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였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였을때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유감 발언을 하였으며 2001년 8월에 트란 득 루엉 베트남 국가주석의 방한 방문에서는 "우리는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라고 공식 사과 하였다.[10] 이에 대한 대한민국의 베트남참전전우회에서는 "망언"이라고 반발하였으며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에서는 경솔한 말이라고 비판하였다. 한편 대한민국의 인권단체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범죄라는 과거사에 대해 솔직하게 사과한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어떤 고통을 주었는지에 대한 규명과 범국민적 사과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하였을 때 "우리 국민들은 마음의 빚이 있다. 그만큼 베트남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고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4년 10월 10일 오후 한·베트남 정상회담에 이어 판 반 카이 총리와 농 득 마잉 당서기장을 잇따라 만나 경제협력 증진과 양국관계에 대해 환담했다. 노 대통령과 카이 총리는 이날 베트남 투자여건 개선 자원, 에너지, 정보통신 분야의 협력 등 경제협력을 증대하는 방안에 대해 주로 협의했다. 노 대통령은 이어 베트남 공산당사를 방문해 농 득 마잉 당서기장을 만나 한반도 평화와 양국의 협력관계 증진을 위한 당의 지원과 협조를 요청했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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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초가을날씨로 여행하기 좋았다.
바쁘게 움직이는 오토바이를 보고 베트남사람들은 부지런 해 보였으며 행복지수가 높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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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문이 막히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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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개무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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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며 기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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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월이 흘러가는구나. 무정한 세월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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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날이 밝아오다.옛날의 금잔디
아름다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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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없는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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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다 행복이 별것이여.
그냥 내가 하고싶은것 하면 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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