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노인(Beautiful Senior)
미소년·미소녀·미남·미녀라는 단어에는 거부감이 없는데, 아름다운 노인이란 단어는 뭔가 적절치 못한 조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것은 “아름다움은 얼굴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는 한 빛이다.”라는 칼린 지브란 말처럼 외모만 생각한 선입견이고, 인간의 내면까지를 고려해 보면 아름다운 노인·명품 노인이 그리 잘못된 단어는 아니다. 나는 이를 ‘따뜻한 아이스크림’과 동격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스무 살의 얼굴은 자연의 선물이고, 쉰 살의 나이는 당신의 공적”이라고 코코 샤넬이 말했다. 아름다운 노인이란 나이깨나 먹은 사람이 아니라 한마디로 나잇값 하는 존경받는 노인을 지칭하는데, 나는 평소 다음과 같은 언행을 하는 시니어를 가리킨다고 말하고 싶다.
첫째, 온화한 말씨를 구사하는 사람이다. 요즘 선동적인 용어와 과격한 말투를 구사해야 메시지가 강력하게 전달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103세 노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특강을 들을 때마다 나라를 걱정하는 사자후를 온화한 말투로 전달할 수 있음에 화법을 연구한 사람으로 놀라게 된다. 나이가 들면 화법도 다정 화법으로 달라져야 할 것 같다. 정재승도 “다정함이란 진통제이자 치료제이고, 비타민이자 영양제이다.”라고 했다.
둘째, 항상 만면에 자연스러운 미소를 담고 있는 사람이다. 오래전 초파일 때 알현했던 은해사 주지 스님의 부처님 같은 은은한 미소와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눈동자가 4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감정을 억누르고 죽이는 것이란 말이 있다. 그리고 health(건강), happy(행복)의 어원은 hele(웃음)라고도 하니, 기회가 될 때마다 거울 앞에서 미소 연습을 시도해 볼 일이다.
셋째, 여유를 가지고 서두르지 않는 사람이다. 젊은 시절 가정에 우사(憂事)가 생겨 한시름하고 있을 때 초등학교도 못 나온 선비(先妣)께서 “살다 보면 지금 너에게 닥친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 앞으로 더 험한 파도가 닥칠 수도 있다. 새옹지마처럼 길흉이 바뀔 수도 있으니 대범한 마음으로 임하라.”고 조언해 주신 바가 있다. 그래서 머리가 돌아가지 않고 동작이 굼뜬 요즈음 친구들에게 서로 하는 최고의 덕담은 “욕심내지 말고, 서두르지 마라.”이다.
넷째, 겸양지덕의 말을 하는 사람이다.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경험 내에서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러다 보니 외골수가 되기도 하고 독선적인 결정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름대로 탄탄대로를 걸으며 잘 나갔던 사람 중에는 자신만만의 포로가 되어 듣기보단 말하기를 좋아하고, 세상을 꿰뚫어 보는 전지적 화법이나 예언자적 화법을 구사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제는 지적이고 딱 부러지는 싸가지 없는 말투보다 정적이고 겸손하고 다정한 말투로 접근하는 사람에게 더 설득되는 것 같다.
다섯째, 강자에게 비굴하지 않고 약자를 무시하지 않는 사람이다. 논어에 보면 “貧而無諂, 富而無驕”(가난하다고 하여 아첨하지 않고, 부자라고 하여 교만해서는 안 된다.)란 구절이 있다. 이를 빗대어 나는 “下而不能 上而無關”(신분이 낮고 먹고살기 급급하니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고 말하고, 신분이 높았고 이제 살만하니 내가 나설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 마라.)란 말을 만들어 보았다. 이탈리아 까까네 인형 같은 인생, 남녀노소·빈부귀천을 불문하고 모두가 존귀한 존재들이니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을 인격체로 대접하는 공평심을 가져야 한다.
여섯째, 자연스럽게 늙어간 사람이다. 젊은 시절 우리의 혼을 쏙 빼놓은 여성 탤런트를 가끔가다 TV에서 볼 때마다 한결같이 느끼는 점은 대부분 성형을 했고, 또 하나는 나만의 원초적 아름다움은 다 어디로 가고 성형외과 의사가 만든 인위적 아름다움의 평범한 여자로 변했음에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피부관리의 비결은 가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편안하게 다스리는 것임을 수녀나 스님들의 명경지수(明鏡止水)같은 얼굴을 볼 때마다 절감하게 된다. 성형외과 의사의 강력한 반대의견이 있을지 모르지만, 자연미인은 대체로 원초 미인이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일곱째,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베푸는 사람이다. 젊은 시절 고생해서 돈을 많이 번 사람 중에 주변 사람들 덕분에 내가 돈을 많이 벌었기에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주변 사람과 사회적 약자를 위하여 기부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돈은 소유하고 있을 때보다 의미 있게 쓸 때 행복감을 주는 것 같다. 또 우리는 소중한 사람에게 돈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제까지 받은 혜택을 되돌리겠다는 회향(回向)의 마음, 나이 불문하고 먼저 인사하는 사람, 걷거나 뛰면서 쓰레기를 줍는 플로거(plogger), 구세군 냄비에 거금을 넣고 유유히 사라지는 노신사, 그리고 퇴직 후 노병으로 자기가 사는 곳에서 재능기부에 앞장서는 ‘아름다운 육사인상’ 수여자가 많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여덟째, 아름다운 마무리를 한 사람이다. 법정 스님은 불후의 명저 <무소유>와 <아름다운 마무리>란 산문집을 남기셨다. 동기생 손희만 형이 9월 20일 혈액암으로 영면 후 부고 없이 가족장으로 <일산 자연애숲>에 수목장으로 치러져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지난 10월 6일에야 동기회에 전해졌다. 황망하면서도 한편으로 손 형의 숭고한 마무리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국립 소록도병원에서 평생 한센인과 동고동락했던 수녀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평소 “늙어 제대로 일할 수 없고, 또 있는 곳에 부담이 되면 나의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다가, 실로 2005년 건강이 나빠지자 낡은 가방 하나씩 들고 오스트리아로 귀국한 성녀들이다. 그들의 아름다운 일대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영화가 <마리안느와 마가렛>이다.
이상에서 볼 때 아름다운 노인이 되는 것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몇몇 영웅이 세상을 세상답게 만들 듯이, 몇몇 아름다운 노인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또 가치관의 혼돈 속에 흔들리며 살고 있는 후대들에게 “무엇을 향해, 어떻게 살아야 하나”를 저녁노을처럼 안전에 아름답게 펼쳐주는 것이기에 살날이 많지 않은 시니어로서 의미 있는 웰듀잉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마무리 지으며 자격지심에 갑자기 내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하지만 “늙는 것과 나이 드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나도 매일 한 가지씩만이라도 선행하면서 살기를 자신에게 약속해 본다. (2023. 11.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