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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3.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본문: 13:12-17
요절: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의미를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회심한 자는 매일 자기 죄를 예수님께 가지고 가서 회개할 때에 그분이 용서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또한 그들이 죄를 지을 때에도 이것을 견디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를 짓자마자 회개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 죄를 의식하고 이것을 회개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므로 예수님께서 이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이들의 죄를 지고 계십니다.
죄란 인간의 본성이 생각이나 행동으로 형상을 입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죄에 빠져 멸망하지 않도록 보호하십니다. 죄를 고백하면 이것을 씻어줍니다. 이 모든 것이 발을 씻어주시는 상징적인 행위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발을 씻어주신 후에 제자들에게 그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발을 씻어주신 행동으로써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이 지금까지 제자들에게 하신, 그리고 앞으로 모든 제자에게 하실 사역을 선명한 그림과 같이 보여주시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다른 성도들의 발에서 악취가 난다고 해서 꾸짖을 것이 아니라 이것을 겸손하게 씻어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주제입니다.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12 그들의 발을 씻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예수님은 열두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으셨습니다. 유다의 발까지 모두 씻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상의를 입으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씻어주시고 발을 수건으로 닦으시는 동작을 12번 하셨으므로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발을 씻어주신 것의 의미를 베드로를 통해 가르치셨으므로(„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제자들은 충격 속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아느냐“는 문맥상 „이해하느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한 상징적인 행위의 의미를 깨달았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입니다. 이 질문은 그들이 깨달았음을 전제합니다. 이제 이들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므로, 이것은 이들이 그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13-15에서는 „나“와 „너희“라는 말이 원문에서 강조된 형태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사용하는 „선생“과 „주“라는 말이 사용되어 예수님과 제자들의 지위의 차이가 강조된 것입니다. „선생“은 성경을 올바로 가르치고 하나님 뜻을 아는 사람입니다. „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전권을 하나님에게서 받은 자입니다. 나중 교회 예배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고전 1:2; 16:22). 예수님은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라고 하심으로써 이것이 옳다고 하십니다. 그분만이 올바른 선생이요 주님이시고,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전하실 수 있고, 그분만이 명령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4)고 하십니다. 그러한 분이 이들의 발을 씻어주었으니, 지위가 훨씬 낮은 제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는 것은 인간적인 척도에 따르면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셨다면 그분의 제자들이 그 정도의 일을 한다는 것이 극히 지당합니다. „옳으니라“라는 그리스어(오페일로)는 „…할 의무가 있다“, „해야 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들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자가 다른 제자의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라는 의미입니까? 이것은 한마디로 할 수 없는 포괄적인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많은 것을 해주시고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이에 관련해서 이들에게 하신 일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죄를 씻어주는 일이므로 우선 „용서하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해오시던 일입니다. 그들이 잘못했을지라도 꾸짖거나 책임을 묻지 않으시고 용서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이 전제되지 않으면 아무도 제자가 될 수 없고 구원을 얻지도 못합니다. 죄 용서는 하나님 아들의 가장 중요한 사역이고 또한 품성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배워서 실천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수 없는 것이 명백합니다.
용서에는 „감당한다“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공동체에서 한 사람이라도 일탈한 행위를 하면 다른 지체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그것이 연약한 데에서 오는 것이라면 이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상대방의 죄악된 품성 때문에 겪어야 하는 여러 가지 불쾌한 일도 여기에 포함합니다. 죄에 절어있는 사람은 거듭났다고 할지라도 이것을 벗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며, 그동안에는 주위 사람이 고생해야 하고, 공동체가 잘 감당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모두 감당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마음을 다해 따르지만, 아직은 인간적인 생각과 기대를 버릴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견디셨습니다.
여기에는 „종의 일은 해준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발을 씻어주는 일은 천한 일로서 낮은 사람, 종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실제로 종과 같이 섬기셨습니다(막 10:45). 복음서는 이것을 증거하는 책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것을 배워 빌립보 교인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며 예수님의 예를 보여줍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3-5).
이로써 예수님은 모든 교회에 잊을 수 없는 가르침을 유언적으로 남기셨습니다. 교인은 다른 형제자매를 용서하고, 감당하고 그를 위해 종의 일을 해주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원칙이 웬만큼 지켜지는 것 같습니다. 남을 잘 섬기는 편입니다. 그러나 교인은 그것이 심리적인 압박이나 보상심리, 표면적인 행위가 아닌지를 잘 살펴야 합니다. 이러한 섬김은 인간적이므로 큰 의미가 없고 쉽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남을 섬기려면 다음과 같이 철저하게 예수님의 예를 따라야 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이 이렇게 하셨으므로 하나님이 그분을 높이셨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예수님이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이것을 가르치신 것에는 직접적인 동기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그들 중에서 누가 제일 크냐는 문제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이제 곧 수립될 메시아 나라에서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임명되는가의 질문입니다. 이것은 눅 22:24 이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따르면, 만찬식을 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때에 제자들 사이에서 이 문제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일이 그전에도 있었으므로, 그때 예수님이 인상 깊게 가르치셨으나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마 20:25 이하; 막 10:42 이하).
이 사건이 다른 때에 일어났으나 누가가 그곳에 위치시킨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눅 22:27)라고 질문하신 것은 만찬과 관계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27)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후에 발을 씻으심으로써 섬기시는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큰 자가 되려는 생각은 인간에게서 가장 깊은 죄악의 뿌리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르면서 갖은 고생을 참아온 이유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예수님을 매우 사랑하고 존경하고 신뢰하며 모든 것을 드려서 섬기고자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만이 유일한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온 마음을 들여서 좇던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서, 우리의 꿈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으면,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지 않는다면, 우리가 그분과 함께 부활할 수 없고, 이러한 죄는 치료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바로 몇 시간 전에 이 중요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은 15절에서 자기가 한 일을 예로 드시면서 그것을 기준으로 삼으시고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본은 모범이라는 의미입니다. 서로 경쟁 대상이었던 사도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 서로 동역을 매우 잘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지금 당장은 이 말씀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실천에 옮겼습니다. 사도 중에서 가장 큰 경쟁자인 베드로와 세베대 아들들(막 10:35 이하)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모범적으로 동역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행 3:1 이하).
사도들은 모든 것을 예수님을 따라 했으며, 특히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일에 항상 예수님이 모범이 되었습니다. 교회사를 통해서도 그렇습니다. imitatio Christi(그리스도를 닮는 것)라는 말이 중세에 성행했습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보겠습니다:
벧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요일 2:6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요일 3: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롬 15:1-6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엡 5:1-2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빌 2:4-5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예수님의 사역을 한마디로 축소한다면, 그것은 자기 사람을 종과 같이 섬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너무나 깊은 인상을 주어 이들이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이것을 강조하여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에게는 결코 예수님의 흉내를 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권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시므로 우리에게 경배와 순종을 요구하실 권리가 있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므로 그가 목사요, 심지어 교황이며 사도라고 할지라도 신자들에게 특별하게 순종을 요구할 권리가 없습니다. 인간이 흉내 낼 것은 그분의 겸손과, 사랑, 섬김, 인내, 고난입니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예수님은 종과 주인, 보냄을 받은 자와 보낸 자의 차이점을 드시면서 누구든지 예수님보다 큰 자 행세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종으로 섬기셨으므로, 즉 가장 낮은 자로 행하셨으므로, 섬기는 자는 가장 낮은 자로 섬겨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이로써 복음 사역자는 종의 신분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으로서 다시 한 번 15절 내용을 강조하십니다.
교회에는 항상 큰 자로 자처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의 종은 가장 낮은 자리인데, 가장 높은 자리로 착각하여 이를 통해 권위와 명망을 얻으려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말씀을 어길뿐더러 그들이 교회를 „찢는 늑대“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한국에 교회가 잘못 정착된 것 같습니다. 목사에게 권위가 있는 것은 한 편으로는 옳지만, 다른 편으로는 틀립니다. 교회에서 목사의 역할과 비중이 너무 큽니다. 목사의 낮음과 섬기는 위치가 균형 있게 발전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겸손하게 보이는 목사라고 할지라도 실제로는 그의 기술과 그의 독특한 신학과 강조점, 인간적 겸손, 매력, 카리스마 등으로 교인을 사로잡는 것을 너무나 자주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이와 많이 다릅니다.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 말씀은 다시 한 번 행위를 강조합니다. 아는 것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아는 것에 반드시 행위가 따라야 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이것을 강조합니다. 이것을 행하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마 5:11절과 형식이 같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그리스도인이 이렇게 산다면, 남의 마음을 빼앗아 그를 다스리지 않고, 낮은 자로서 섬기는 삶을 산다면 그는 늘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살게 됩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사실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섬긴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기도 어렵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복음서들을 자세히 연구해야 하고, 사도들의 서신도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말만 들어서는 잘 모르고 조금이라도 깨달은 것을 실행에 옮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혀 배울 수 없습니다. 섬긴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품성을 덧입지 않으면 섬김은 불가능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성경, 특히 복음서를 읽으시기 바랍니다.
정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써 종의 일을 하시고, 자기가 지금까지 제자들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그림과 같이 선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이들을 섬기셨지만, 그 후에도 하늘에서 계속 이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감당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러한 구속사역을 흉내 낼 수 없지만, 형제의 죄를 용서하고 그를 감당하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표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분을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그러한 품성으로 빚어집니다. 교회는 하나의 지체를 이루므로 성도 간에 이러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찢어지고 교회는 하나의 종교 단체로 전락합니다.
교회는 다양한 사람이 모이므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은 사람, 자기 척도와는 전혀 달리 행동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드는 사람끼리 모임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분열됩니다. 교회는 한 몸을 이루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미워하는 자가 있으면 그를 미워할 것이 아니라 자기를 미워하고 자기를 죽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로부터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음에도 상대방의 작은 허물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는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예를 드신 악한 종과 같습니다(18:23–35):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32-33).
그러므로 우리는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실행해야 합니다. 이 일은 단지 자기 죄로부터 구속받은 자, 이것을 알고 늘 감사하는 자만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