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 지인인자
내맘대로 살아볼 용기의 저자이신
이종미 작가의 감상평입니다.
허락을 구하고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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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서칭 포 슈가맨>이 있고 쿠바에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이 있다면 한국엔 <아치의 노래>가 있다. 칠레에 빅토르 하라가 있고 아르헨티나에 메르세데스 소사가 있다면 한국엔 정태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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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세상에서 되지도 않은 소리를 많이 들을 땐 귀가 닫혔으면 싶고 못 볼 꼴을 자꾸 보게 될 땐 눈이 닫혔으면 좋겠다는 생각. 반면 반대로 눈이 안 보이는 게 덜 힘들까, 귀가 안 들리는 게 덜 힘들까? 눈이 보이는 게 자립적 생활엔 더 좋을 거 같고 타인과의 대화, 의사소통엔 귀가 들리는 게 더 좋을 거 같다는 생각도 했다.
오늘은 귀가 들리는 게 더 낫다 싶었다가 아니야 눈까지 보이니 더 좋구나 싶은 날이었다.
음악 다큐멘터리 정태춘, <아치의 노래>를 봤기 때문이다. 음악 영화라 더 신경 쓴 것 같은데 음향이 아주 좋아 소극장 콘서트 관람하는 것 같았다. 주인공 정&박이 시사회에 참석했고 영화 방식도 공연 전후 과정의 모습 뿐 아니라 음악적 대화, 인터뷰가 근접 촬영된 방식이라 토크 음악 콘서트 보는 감상이 들었다.
감독은 다큐 영화 <워낭소리>의 제작자 고영재다. 감독 자신이 정태춘의 오랜 팬이고 사적으로도 친한 만큼 영화는 좋아하고 존경하는 한 음악가에 대한 헌정사적 시선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다. 서사적인 그의 삶을 애정이 어린 서정적 묘사로 투사, 사상가로서의 모습뿐 아니라 개인, 예술가의 모습을 잦은 클로즈업으로 좀 더 밀접하게 들여다보고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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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널리 읽히고 모범이 될 만한 문학이나 예술 작품>을 우리는 '고전'이라고 한다. 나는 여기 덧붙여 그저 유미적이기만 한 예술 말고 오래전 얘기가 지금 시대, 오늘 읽어도 그 시대성을 읽지 않고 오히려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 고전, 좋은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수 십 년 전 나온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수백 년 전 나온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제기하는 여러 문제는 지금 읽어도 오늘의 문제로 환원할 수 있지 않은가. 정태춘의 음악이 내게는 그런 의미의 고전이다. 한 음악가의 팬으로서뿐 아니라 한국 음악계에서도 정태춘, 정태춘의 음악들은 살아있는 고전이라기에 큰 무리 없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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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가수, 좋은 음악은 많고 저마다 좋아하는 가수와 이유도 다 제각각이다. 나 또한 좋아하는 가수, 음악은 많지만 대중음악가에게 시인, 사상가, 투사, 실천가라는 이름을 한꺼번에 붙일 수 있는 사람은 정태춘 말고 쉽게 떠오르진 않는다. 호칭에 인색한 내게서 선생님, 어른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음악가이기도 하다.
공연장에서 받은 영화 팜플렛 표지엔 '스스로 장르가 된 뮤지션'이라 했는데 정태춘을 지칭한 가장 정확한 문장 같다. 어떤 분야의 예술가를 어떤 장르로 정의하긴 쉽고 예술과 삶은 구분해서 보라는 말도 흔하지만, 삶 자체가 장르인 예인, 예술과 삶의 장르 사이의 격차가 적은 이는 귀하지 않은가.
사실 오늘 본 다큐멘터리의 내용 중 내가 모르는 새로운 것, 새삼스러운 것은 거의 없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그의 공연과 음악을 자주 봐 와서 그의 음악 변천사에서 중요한 무대나 현장에서도 자주 봤고 기사나 책으로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나 뿐 아니라 그의 오래된 팬들도 대부분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그럼에도 2년 전 본 40주년 공연 못지않게, 어느 면에선 더 좋았다. 한 음악가의 일생과 음악사적 변화를 같이 보는 의미 외에도 한 시대를 연대의 감정으로 파노라마로 공유한 감상이 들어서였다. 한 음악가, 음악사에 대한 정리나 헌정과 더불어 한 시대에 대한 헌정으로도 다가왔다. 이제는 살만해진 자의 '추억'이 아니라 아직도 회상하기 아픈 '기억'의 공유와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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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요즘 노래들에선 옛 노래들만큼 깊은 감동이나 공명을 받기 힘든가를 자문하다가 내 정서가 이미 너무 어려서부터 꼰대화 돼 있어서 그렇겠거니 자답한 적이 종종 있었다. 오늘 영화를 보면서 요즘 음악에서는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감동이 잘 일지 않는 것은 저릿함과 불끈함이라는 요소가 없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란한 고음과 춤사위를 갖춘 가수는 많고 눈물 시큰하게 하는 노래도 많지만, 가슴이 뜨겁고 눈시울이 저릿하고 두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이 삼박자를 다 갖춘 음악을 만나긴 힘드니까. 서정과 서사 한쪽만 있거나, 메시지와 음악성, 시대성과 예술성 한쪽에만 치우치거나, 예술과 삶을 분리하라는 경우는 많지만, 그 사이의 균형이 비슷하고 예술과 삶의 실천성이 오래도록 근접, 일치한 이는 잘 없으니까.
글이든 음악이든 예술 그 자체에 감동하고 노곤한 현실에서 잠시 일탈해 위로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가치가 있지만 읽고 들으며 나, 사회에 대한 자문을 계속하게 하는 게 내겐 좋은 예술의 중요 기준 중 하나였다. 나는, 우리는 과연 잘살고 있는가? 여긴 살 만한 곳이고 우린 제대로 서 있는가?를 자문하게 하는.
정태춘의 노래와 오늘 영화가 그랬다. 시사회니 음악회니 미술관 나들이하며 나도 이만하면 살만하지 않은가,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 살아가는 낙이지라며 제법 흐뭇하게 자족하고 중산층인 듯 착각하다가 정태춘의 노래를 듣거나 공연을 보면 이런 위장된 도피 같은 자족감들을 각성하는 것이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호출하게 하는 노래, 영화였다.
* 오늘 영화 중 인상적인 컷
청소년 인권 운동가인 이수경의 인터뷰,
수중 발레 선수 유나미의 경기 출전 선곡,
광주 공연에서의 관객 반응과 퇴장,
사람들이 나를 이상주의자로 칭하지만 나는 과거 지향 주의라는 정태춘의 인터뷰,
-부연하자면 이 과거 지향은 단순한 과거 회기나 향수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적 태도다.
남편이 아닌 동료로서의 정태춘을 말하던 박은옥,
눈에서 세상에 대한 독기와 비관의 서릿발 만땅이던 젊은 시절의 정태춘이 나오는 TV 영상,
영화는 시간 순서상으로 주로 전개되는데 시적, 서정적인 <촛불>, 불가적인 <도솔천>, 저항적인 <우리들의 죽음>, 비관적인 <정동진>을 거슬러 와서 다시 한 페이지를 정리하고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 또 다른 시도의 최근 <정동진3> 등이 콘서트와 연습 장면으로 보여 주면서 그의 음악적 변모를 자연스럽고 좀 더 세심하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음악 애호가로서 좋았다.
사회에 관한 관심, 세상에 대한 비관, 음악적 회의 속에서도 음악을 놓지 않은 한 장인의 모습과 그게 옛것, 옛 스타일을 답습하고 반복 재생하며 흘러간 옛 히트곡만 하릴없이 부르는 게 아니라 계속 새로운 걸 만들고 변주하고 창조해내는 법고창신의 정신, 음악적 태도를 여길 수 있게 하는 구성이었다.
영화는 의도적 날짜인 듯한 5.18에 개봉하고 공연 제작부는 시사회 사은품으로 5.18의 악보를 나눠 줬다.
개봉하면 많이들 보러 가세요. 비슷한 시기를 살아온, 살아가는 이들에겐 연대의 공감을, 그의 음악 일부분만 알거나 좋아하는 이에겐 전 음악사를 압축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음악으로 보는 사회사를 보거나 알려주고 싶은 선생님과 학생들에겐 좋은 공부 재료로 좋은 감상의 기회로 장담합니다.^^
#아치의노래
#정태춘박은옥
#고영재
#음악다큐
첫댓글 영화가 끝난뒤까지 남으셔서 관객들과 사진촬영해 주시던 두분의 따뜻하신 모습 ..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