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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서
아우구스티누스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다음 이웃을 사랑할 것이니,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첫째가는 계명들이기 때문이다. [1,1]
☕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서』는 매우 짧다. 고딕체로 표시된 부분이 원문이고 그 외의 부분은 줌켈러 신부님의 주석이다. 본문보다 주석이 훨씬 긴 책이다.
수도 공동체의 생활 전체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적 사랑의 살아 있는 표현이다.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의 근본적인 관심은, "영원히 남을 사랑이”(규칙 5,2) 수도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우선적으로 작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27쪽)
이 문장은 사실 『수도원 규정서』의 첫 대목인데, 이 『수도원 규정서』는 수도생활의 일과와 생활 방식을 규정하는 짧은 작품으로서 아주 초기부터 규칙서에 포함되어 전해졌다. (28쪽)
복음의 제일 중요한 계명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서가 시작되는데, 이 규칙서가 지닌 근본 활력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28쪽)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을 진정한 그리스도적 생활의 핵심으로 보고 있다. 더욱이 그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똑같이 강조한다. 우리는 오늘날의 사람들도 아우구스티누스 말씀 중 하나인 "사랑하라, 그런 다음 너희가 뜻하는 바를 행하라!”(『요한 서간 강해』 7,8)를 자주 말하는 것을 듣는다. 이 말은, 사랑이 그리스도적 생활과 노력에 중추적인 관건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사실 이 대목은 매우 뜻밖이고 단도직입적이어서 우선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사랑’은 하느님과 이웃 모두에 대한 깊고 헌신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과 그분의 계명에 아주 밀접하게 결합시키기 때문에 우리가 그 지시를 따르는 한 올바른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28-9쪽)
아우구스티누스는 한결같이 사랑을 수도생활의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그는 회개한 후 즉시 로마에 있는 여러 남녀 수도 공동체를 방문했다. 그는 초기 작품 『가톨릭 교회의 습속』에서 이 방문에 관해 폭넓게 전해 주고 있다.
그는 이 수도원들에서 본 엄격한 참회생활과 헌신적인 노동에 대해 경탄하면서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이 만났던 수도 장상들의 훌륭한 지도력과 지혜를 찬양한다. 그런데 그는 그때 벌써 복음의 이 큰 계명을 수도생활의 근본 법칙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29쪽)
“그곳에서는 모든 것에 앞서 사랑이 실천되고 있다. 사랑은 음식과 대화, 의복과 모든 품행에 대한 규범이 된다. 모두가 하나의 사랑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하나의 사랑을 들이마시고 있다. 사랑을 해치는 일은 하느님을 모욕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사랑에 반대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거부하고 내버린다. 사랑을 해치는 일이라면, 하루라도 묵인해 두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사도들께서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사랑이 있으면 모든 것이 완전해진다고 말할 정도로 사랑을 강조하였음을 그들은 알고 있기 때문이다.”(33,7)(29쪽)
☕ 그리스도교는 한마디로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교가 아니다.
그는 이웃 사랑을 또 다른 형태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본다: “남자나 여자들이 거룩하게 그리고 영적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들 안에 계시는 하느님 외에 달리 무엇을 사랑하겠는가?’(『요한복음 주석』 65,2). (30쪽)
☕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다.
우리에게 헌신과 참을성이 요구되는, 즉 남을 용서하는 문제에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가 어렵게 느껴질 때 특히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서로 얼마나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자주 상기해야 한다. (30쪽)
아우구스티누스는 왜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규칙서의 맨 처음에 두었을까? 이유인즉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첫째가는 계명들이기 때문이다.” (30쪽)
☕ 그리스도교의 첫째 계명은 사랑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적 생활에 사랑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깊이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나타내는 유일하고 확실한 표지로 여긴다. (30쪽)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표지를 가지고 자신을 나타낼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아멘’을 대답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할렐루야’를 노래할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고 교회에 들어올 수 있으나 … 하느님의 자녀들과 사탄의 자식들 사이의 차이는 오직 사랑뿐입니다. 사랑을 지닌 사람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났으나, 사랑을 지니지 않은 사람들은 하느님에게서 나지 않았습니다. … 사랑이 없으면 당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사랑은 그 자체로 충만합니다(『요한 서간 강해』 5,7).
☕ 하느님의 자녀와 사탄의 자들과의 차이는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사탄이 자식으로 떨어진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목표이며 완성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점을 고전적 문구로 표현한다: “사랑의 시작은 정의의 시작이며, 사랑의 성장은 정의의 성장이고 … 사랑의 완성은 정의의 완성이다”(『본성과 은총』 70,84). 그는 이 덕성이 지닌 완전한 아름다움과 품위가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라는 사도 요한의 말씀에 계시되어 있다고 본다. 그는 이 구절을 이렇게 주석한다: "이보다 더 흘륭한 사랑의 찬미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 간결하지만, 정말 얼마나 심오한 찬미 입니까!”(『요한 서간 강해』9,1). (31쪽)
우리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극심한 이기주의에 빠져 자기 형제자매들을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주님은 당신 친히 가장 큰 계명으로 제정하신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 사랑 모두를 포함하는 사랑을 우리가 충실히 증거하기를 바라신다. (32쪽)
아우구스티누스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교 예술가들은 그의 문장(紋章)이나 상징에 불타는 심장을 그려 넣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규칙을 지키는 수도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자신의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 보이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32쪽)
☕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하여 사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가 하나로 모여 있는 첫째 목적은 한집안에서 화목하게 살며, 하느님 안에서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이다(사도 4,32 참조) [1,2]
수도생활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 수도자의 소명은 그리스도를 특별한 방법으로 따르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당신 곁으로 모아들인 제자들의 무리가 우리에게 그 모범을 보여 준다. 그분은 젊은이들을 부르셨고, 후에 이들 중에서 열두 사도를 뽑아 당신과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를 이루셨다. 그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증거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과 함께 공동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34-5쪽)
☕ 예수님과 제자들의 공동체도 수도 공동체라 할 수 있다.
주님은 고별사에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백히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그분이 제자들에게 말씀하려고 하신 것은 이렇다: 너희의 일치와 화목, 너희 서로의 사랑은 나를 아직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내 가르침이 참되다는 것을 깨닫게 할 수 있다. 너희는 서로 친교와 사랑을 통해 나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35쪽)
☕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서로 사랑함으로 주님의 증인이 된다.
그는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정말로 한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우리에게 똑똑히 납득시키고자 한다. 이 문장은 마치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수도생활의 윤곽을 말해 주는 듯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목적은 하느님 안에 온전히 뿌리를 둔 공동체, 즉 모든 회원이 살아 있는 총체로서 더욱 긴밀히 결합되는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각 개인이 인격적으로 이 공통의 기초를 추구할 때만 진정한 친교의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또한 깨닫고 있었다. (35-6쪽)
☕ 그리스도 공동체가 서로 미워하고 분열한다면 그곳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아니다. 이미 사탄에게 점령되어 버린 것이다.
하느님께 봉헌된 수도생활에 관해 히포의 신자들에게 행한 한 설교에서 그는 시편의 한 구절인 "보라, 얼마나 좋고 얼마나 즐거운가, 형제들이 함께 사는 것이!”[시편 132(133),1]를 해설한다. 시편 작가의 이 말은 그에게 마치 천국의 음악처럼 들렸고, 마치 온 세상에 두루 울려 퍼져 나가 도처에서 성령이 주시는 사랑의 영감을 받은 남녀들을 수도 공동체로 인도하는 트럼펫 소리처럼 들렸다. (36쪽)
☕ 수도공동체는 세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곳이다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에 의하면, 수도원의 공동생활은 단순한 자연적 선의(善意)에 기초한 생활이 아니다. 수도원에서 함께 사는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 전념하는” 공동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가 계속 강조할 때 바로 이 점을 함축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하느님께 전념하는”이란 말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리스도적 생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역동적 개념의 특징을 나타낸다. 그리스도교의 수도자로서 또 수도 가족들로서 우리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즉 "하느님께 전념하는" 여정에 있다. 하느님은 개인적으로 동시에 공동체로서 우리가 날마다 걸어가야 하는 목표이다. 따라서 ''하느님께 전념하는" 것, 공동으로 하느님을 찾는 것이 바로 수도생활 전체를 특징짓는다. (36-7쪽)
☕ 수도생활은 공동체가 함께 하느님께 전념하는 생활이다.
공동 기도를 할 때와 성찬 전례를 거행할 때 특별히 그분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마태 18,20) 있겠노라 하신 약속을 지키신다. 거룩한 성체를 함께 영하는 것은 "평화와 일치의 신비"(『설교』 272)이니,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나누는 우리의 '친교’는 우리가 그분의 몸의 모든 지체와 나누는 친교를 심도 있게 잘 보여 주는 표상이기 때문이다. (37쪽)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하둣이, 공동체 생활 자체는 우리에게 맡겨진 공동의 사도직 소명과 애덕의 임무들을 수행하기 위해 유리한 조건이 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 안에서 개인은 인격체로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고 그는 확신한다. "나와 함께 한지붕 아래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설교』 355,4,6)라고 그는 감히 말한다. (37쪽)
우리의 공동체 생활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라고 하신 주님의 가르침을 실현해야 한다. (37쪽)
☕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목표는 무엇보다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수도원들의 역할이 중요한 까닭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오롯한 생활을 통해서 동료 인간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의 일면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사랑만이 법을 완성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수도 공동체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 힘 있고 의미심장한 표징에 대해 똑똑히 가르치고 있다: "형제들의 일치는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심을 드러내며, 이 일치 안에서 커다란 사도적 힘이 솟아난다."* (39쪽)
☕ 수도공동체는 하느님 나라가 있음을 삶으로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한다.
㈜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수도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령(완전한 사랑」 15).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안에서의 심오한 일치와 친교가 모든 그리스도인과 수도생활 공동체의 숭고한 표본일 뿐만 아니라 모든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완덕이다. 그는 이에 관한 문맥 사이에 대사제의 기도 중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2)를 인용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적 형제애로 공동체를 이룰 때 하느님 안에서 생활하는 공동체 생활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여럿인 우리가 단 하나의 마음을 가질 때에만 그분은 우리를 그런 일치에로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설교』 103,3,4)(40-1쪽)
예루살렘 초기 사도 공동체의 특징인 재산 공유와 사랑의 친교는 처음부터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수도생활을 위한 훌륭한 모델이었다: "오순절이 되어 그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성령께서 그들 위에 오셨다. 그분은 하늘에서 보냄을 받아 오셨다. … 이 남녀들은 처음으로 화목하게 함께 산 사람들이었다. ‘화목하게’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들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면서 한마음과 한뜻이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듣는다”('시편 주해: 132,2). (41-2쪽)
☕ 초기 교회의 모습은 수도 생활의 모델이다.
내적으로 수도 공동체 안에 깊이 뿌리내리지 않으면, 또 우리가 생동감 있는 공동체 생활을 하기 위해 계속 진지하게 헌신하지 않으면, 또 하느님께서 우리 이웃으로 주신 수도 형제들에 대한 우리 사랑이 함께하는 공동 전례, 공동 식사, 휴게와 활동에서 잘 구현되지 못하면, 이웃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확실한 기반을 잃게 될 것이다. (43쪽)
☕ 수도 공동체가 사랑으로 일치되지 않는다면 세상에 외치는 소리는 거짓이 되고만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생각하듯이, 우리 수도자들 서로가 첫째가는 형제 중의 형제이며, 자매 중의 자매이다. 우리의 수도생활을 지켜보는 오늘의 젊은이들이 우리 안에서 참으로 인간적인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체험할 정도로 매력을 느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수도원들이야말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통치에 대한 참다운 증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 인류에게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꾸준히 성장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는 희망의 표지가 되는 것이 현시대에 걸맞은 공동체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44쪽)
☕ 수도 생활은 하느님 나라의 살아있는 표징이다.
너희는 아무것도 자기 것이라 말하지 말고 모든 것을 너희의 공유로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 원장이 너희 각자에게 음식과 의복을 나누어 주겠지만, 모든 이가 똑같은 건강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모두에게 똑같이 하지 말고 각자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줄 것이다. 사실 너희가 사도행전에서 읽는 바와 같이 “…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 저마다 필요한 만큼 나누어 받곤 하였다"(사도 4,32.35). [1,3]
☕ 공동 소유의 삶은 수도생활의 백미다.
"너희는 아무것도 자기 것이라 말하지 말고 모든 것을 너희의 공유로 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개인적 가난과 재물의 공동 소유는 수도생활의 전제 조건이자 실제적 근본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서로의 사랑이 비로소 구체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45-6쪽)
☕ 내 것이 없는 삶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도원에서의 복음적 가난을 ‘우리 생활의 법칙’이라 부른다(『설교: 355,2,2). 그는 세속 재산의 포기에 한계를 정하지 않으며, 이에 대해 어떠한 예외도 허용하지 않는다. ‘가난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요구된다. 수도자들은 아무리 하찮은 거라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아무것도 우리 것이라 "말하지”도 말 것을 촉구한다. 그의 수도원들에서는 ‘내 것’과 '네것’이라는 개념 자체가 점점 흐려져 완전히 사라져야 한다. (46쪽)
☕ 수도자란 내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인간이 원래 사유재산의 권리를 갖고 있음을 물론 인정한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후부터 이 권리가 여러 가지 죄악의 원인이 되어 왔음도 알고 있다: ‘형제 여러분, 사유재산이 인간 사이에 얼마나 많은 다툼 · 적의 ·불화 · 전쟁 · 배반 · 분쟁 · 불법 · 죄악 · 사악한 행위 그리고 살인까지 일으키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시편 주해』 131,5).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수도원에서 스스로 의무화하는 재산의 자발적인 나눔은 인간 생활을 위한 차원 높은 이상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46쪽)
☕ 돈이 최고 가치인 세상에서 버림은 얼마나 역설적인가?
이 재산 공유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결합시켜 주는 친교의 결과이자 반영이다. 덧없는 지상의 것을 서로 나누어 가짐으로써 우리는 이미 영원한 영광의 삶을 어느 정도 앞당겨 맛보게 된다. 그곳에서 우리는 영원한 축복, 즉 기쁨과 영원한 생명 그리고 모든 이 안에 모든 것이 되시는 하느님을 완전히 공동으로 누리게 될 것이다(『신국론』 22,30 참조). (47쪽)
☕ 하느님 나라를 앞당겨 사는 삶이 수도자의 삶이다.
복음적 가난과 재산 공유 문제에 있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제자들에게 흠잡을 데 없는 모범이 되었다. 주교가 되어서도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47쪽)
그의 친구이자 최초의 전기 작가인 포시디우스는, 그는 "의복과 신발과 침구는 검소했으나, 그의 신분에 맞추어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지나치게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전기』 22,1) (47쪽)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칙적으로 다른 수도 형제들보다 더 좋은 옷을 입으려 하지 않았다. 교구 신자들에게 한 설교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러분들이 나 혼자 쓸 선물들을 가져오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것이 나의 신분에 아마 더 어울릴 것 같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나에게 값비싼 예복을 선물할 수도 있습니다. 그 옷은 주교에게 적합할지 모르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가난한 서민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곧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었거나 세속적인 직업을 가졌더라면 지닐 수 없었던 값비싼 옷을 입고 다닌다고 말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내 형제가 옷이 없다면 내가 그에게 줄 수 있을 만한 그런 옷을 내가 입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제가 입을 수 있는 종류의 옷, 부제나 차부제에게 적합한 옷을 나는 기꺼이 입겠는데, 그런 옷들은 내가 공동체에게 허락한 옷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가 나에게 질 좋은 옷을 준다면, 나는 그것을 팔겠습니다. 이것은 나의 습관인데, 왜냐하면 그런 의복은 공동으로 소유할 수 없지만, 그것을 판 수익금은 공동으로 나누어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값비싼 옷은 나를 오히려 부끄럽게 만듭니다. 그것은 나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으며,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들은 가르침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 체구에 어울리지 않으며, 나의 백발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설교』 356,13)
(48-9쪽).
☕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이자, 수도자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따르면, 수도생활의 가난과 재산 공유는 공동체의 모든 회원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49쪽)
☕ 수도생활은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삶이다.
아무도 넘치게 소유하지 말아야 하지만 필수적인 것도 없이 지내는 사람이 있어서도 안 된다. 특별한 요구들, 특히 건강의 악화와 오랜 생활 습관 때문에 생기는 요구들은 배려해야 한다. 상냥함과 신중함은 『아우구스티누스 규칙서』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모두에게 똑같이 하지 말고"라는 말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여기에 규정하고 있는 음식과 의복에 관한 문제에서뿐 아니라 각기 다른 개성들을 대하는 모든 점에서 일반적으로 지켜지기를 바라는 원칙이다. 그는 미리 정해진 어떤 틀에 맞추어 수도자들을 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49-50쪽)
☕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또한 한 가지 틀에만 갇힌 사람은 아니었다. 모든 상황에 열려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적인 재산 공유는 그리스도적 사랑과, 개인의 이익을 찾지 않고 공동 이익을 추구하는 헌신에 기초를 두고 있다. 재산 공유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러한 이념은, 돈과 재산에 혈안이 되어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이웃들을 이기적이고 냉혹한 마음으로 대하는 수많은 현대인들을 크게 각성시키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남녀 수도자들이 재산 공유를 확고히 실천하며 살 때, 그들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 정신 안에서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이 시대의 물질 만능적 소비문화에 맞서 살도록 도와주는 증표가 될 것이다. (50쪽)
☕ 수도자들의 공유의 삶은 이기적인 현대인에게 경종이 된다.
이곳 주교관에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읽어 익히 아는 성도들을 최선을 다하여 본받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사도 4,32)하였습니다. 내가 이 보잘것없는 가난한 사람의 재산을 팔아서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듯이, 나와 함께 살기를 원한 모든 사람도 그렇게 했고, 그래서 우리는 공동으로 소유한 것만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의 위대하고 풍성한 재산을 갖고 있으니, 바로 하느님입니다. …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보십시오. 우리 공동체에서는 아무도 어떠한 것이라도 자기 것을 갖고 있을 수 없습니다. … 나와 같이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느님의 교회를 통해서 그분에 의해 식생활을 얻으려 하며,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거나 또는 그것을 모든 이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자기 소유라 하지
않는다면, 나와 함께 살 수 있습니다(『설교』 355,1,2; 355,2,2; 355,4,6). (51-52쪽)
☕ 진정한 부자는 하느님만을 소유한 사람이다.
사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규칙서에서 요구하는 개인적 가난은 사도행전에 상술되어 있는 그 이상(理想)을 능가한다. 사도행전에서 각 개인은 강요받지 않고 자진해서 재산을 바쳤다(사도 5,4 참조). 그러나 수도원에서는 각자가 하느님에게 바친 서약 때문에 이 재산 양도가 의무화되어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개인 재산의 몫을 원하면 정당하게 되돌려 받을 수 있었으나, 수도원에서는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자들은 하느님과 공동체를 거슬러 죄를 짓게 된다. (52쪽)
아우구스티누스는 복음적 가난을 그리스도적 사랑 그리고 공동체를 튼튼히 하는 방법으로 본다. 사유재산의 포기는 우리가 온갖 이기심에서 자유로워지는 데 도움이 되며, 그래서 우리는 공동체를 위한 봉사와 그 소명에 헌신적인 사랑으로 전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복음적 가난은 어떤 의미에서 진정한 사랑으로 통하는 문이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1코린 13,5)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하는데,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에 덧붙여 "사랑은 개인의 것을 공동의 것보다 더 중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공동의 것을 개인의 것보다 더 중히 여긴다"(규칙 5,2)라고 말한다. (52-3쪽)
☕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자신을 버림으로써 시작된다.
세속에서 재산을 갖고 있던 자는 수도원에 입회할 때 그 재산을 공동소유로 할 것을 기꺼이 원해야 한다(사도 4,32.35). [1,4]
☕ 수도자의 삶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삶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복음적 가난은 단순히 외적 포기의 문제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 생활 태도 전반에 영항을 준다. 가난이 진실로 마음에서 우러나온 덕성이어야 하느님의 눈에 가치가 있다. (55쪽)
☕ 가난도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가치가 있다.
언젠가 대중에게 행한 한 설교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여러분의 마음이 탐욕으로 가득 차 있다면, 빈손으로 있다는 것 자체가 여러분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시편 주해』 51,14). 이 말씀은 주교좌 도시의 많은 가난한 사람에게 하신 훈계지만, 수도자들에게 오히려 더 적합한 말이다. 수도원의 가난을 찬미하는 사람들은 개인소유에 대한 욕망을 단호히 버려야 한다. (55쪽)
☕ 탐욕마저 끊어 버릴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난한 사람이 된다.
복음적 가난의 목적은 분명히 하느님을 위해 또 그분께 봉사하기 위해 우리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상의 재물에 대한 자발적 포기가 하느님과 천상의 것들을 향해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게 한다는 점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 깊이 확신하고 있었다: "돈에 대한 욕망을 비운 사람은 하느님으로 충만해집니다”(『설교』 177,4) (56쪽)
☕ 복음적 가난이란 탐욕을 비운 마음의 자리에 하느님으로 채우는 것이다.
히포의 가난한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를 알고 그들을 고통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강구했던 그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대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가난한 여러분은 제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하느님을 모시고 있을 때 여러분이 갖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부자인 여러분은 제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을 때 여러분이 갖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설교』 311,15). (56쪽)
☕ 진정한 소유는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이다.
수도원에서도 온갖 사회계층의 사람들이 있었다. 전직 원로원 의원과 거대 지주들, 부유하고 지체 높은 가문의 후예들도 더러 있었지만, "주로 노예와 자유인 … 그리고 농부, 노동자, 그 밖에 단순한 상인 계층 출신”(『수도자들의 노동』 22,25; 25,33)이 대다수였다. 이 때문에 생활수준과 관습의 격차가 오늘날보다 더 심했다. 그리스도적 사랑에 기초를 둔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수도원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골을 메우고 서로를 이어 주도록 노력하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대단한 이상주의로 여겨졌다. 그의 ‘성직자 수도원’에서는 공동체에 입회한 가난한 사람들과 재산을 가지고 온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차등이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사랑으로 이루어진 일치의 공동체에서는 세속적인 유산 때문에 저절로 갖게 된 계급을 극복해야 합니다”(『설교』 356,8). (56-7쪽)
☕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
가난의 정신은 우리가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에 갖고 있었던 것 또는 우리가 취득하거나 소유할지도 모르는 모든 것을 스스로 기쁘게 포기하는 그 자체에서 드러난다고 그는 말한다. 가난의 정신은 또한 우리가 "밖에서 가질 수 없었던 것을 수도원에서 얻으려” 하지 않으면서 만족하는 데서 드러난다. (57쪽)
☕ 가난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복음적 가난의 정신과 맞지 않는다. 그것은 마음이 세속적인 것들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음을 명백히 드러내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해하듯이, 개인적으로 안락한 생활을 추구하고 갈구하며, “밖에서 얻을 수 없었던 음식과 의복을 이제 얻게" 되었다고 해서 행복해하는 것 또한 복음적 가난과 맞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느님을 섬기려는 뜻이 없고 다만 가난한 생활과 힘든 노동을 피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음식과 의복을 얻기 위해서” 수도원에 입회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한다(『수도자들의 노동』 22,25). (58쪽)
아우구스티누스는 수도생활의 가난을 예수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따르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름에 결정적인 요인은 외적 행동이 아니라 내적 자세다. 하느님은 사람이 얼마만큼 포기하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속적인 것을 초월하는 마음에 관심이 있으시다. (59쪽)
☕ 진정한 가난은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초월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더 가까이 함에 있다
자기가 가진 것뿐 아니라 갖고 싶어 했던 것까지 모두 포기한 사람은 많은 것을 버린 사람입니다. 자기 재산을 매일 늘리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 욕망을 이제 끊어 버린 것입니다. 한없던 그 욕망은 이제 제한되기 시작했습니다. (60쪽)
☕ 욕망마저 버릴 때 진정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온 세상을 버렸지만, 그는 또한 온 세상을 얻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2코린 6,10)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60쪽)
☕ 베드로는 세상을 버림으로 하느님 나라를 가질 수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주님께서 산상설교에서 "행복하여라”(마태 5,3)라고 말씀하신 ‘마음의 가난’이다. 어떤 기회에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음이 가난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라고 묻는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단순히 물질적 수단이 아닌 사고방식의 가난을 뜻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겸손합니다. 그들은 비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그들의 탄원을 묵과하지 않습니다”(『설교』 53,A,2). (60쪽)
☕ 마음이 가난한 이는 비천한 이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는다. 재물이 아니라 마음까지 비운 사람이다.
현대적인 표현으로 말하면,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가난한 사람들과 하나가 되게 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절실한 요구를 그들의 마음에 와 닿게 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마음의 가난은 어떠한 명예나 승리욕도 포기함을 뜻한다. (61쪽)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명예나 승부욕마저 버린 사람이다. 말 그대로 바음마저 비운 사람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다른 곳에서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을 겸손한 사람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를 "진실로 가난한 사람"의 표본으로 제시할 때도 그는 그분을 겸손하고 자신을 비우신 분으로 부각시킨다.
“그분은 부유한 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해서 가난한 자 되셨습니다. … 그분의 재산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요한 1,3). … 그분의 가난을 보십시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습니다”(요한 1,14). … 그분은 동정녀의 모태에 잉태되시어 어머니의 몸 안에 갇혀 계셨습니다. 놀라운 가난이여! 그분은 작은 마구간에서 태어나시고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우셨습니다. …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고 천사들을 무에서 창조하셨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께서 젖을 먹으시고 우시고 양육되시고 자라시고 나이 드시고 당신의 위엄을 감추셨습니다. 마침내 그분은 체포되시어 멸시당하시고 채찍질을 당하시고 조롱당하시고 침 뱉음을 당하시고 빰을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리시고 창에 찔리셨습니다. 얼마나 가난한 분이셨습니까! 이분이 바로 제가 찾던 가난한 사람들의 으뜸이 되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가난한 몸에서 우리는 참으로 가난한 분을 만나게 됩니다.“(『설교』 14,9) (61-2쪽)
☕ 예수님은 가난한 이의 모범을 보여주신다.
다른 모든 악습은 악한 짓들을 행하도록 하지만, 교만은 착한 행위까지도 손상시켜 없애 버린다.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줌으로써 가난한 자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영혼이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을 때보다 오히려 그 부귀를 경멸하면서 불쌍하게도 더 교만해진다면 그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1,7]
그는 자만과 오만을 수도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화합을 위태롭게 하는 더없이 나쁜 태도로 여긴다. (64쪽)
교만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자신할 사람은 수도원에서 아무도 없다. 이 악습이 생겨날 수 있는 요인은 얼마든지 있으며 다채로운 모양으로 나타난다. (64쪽)
☕ 본질적으로 교만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끊임없이 이를 경계해야 한다.
"여러분이 선하다 할지라도 자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자신의 선함을 자랑할 때 그 자체가 악습이 되기 때문입니다"(『시편 주해』 25,2,11). "나쁜 짓을 했더라도 겸손해한다면 선한 일을 하고서 교만해하는 것보다” 하느님께서는 더 기뻐하신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감히 단언한다. 그는 교만한 바리사이와 겸손한 세리에 관한 주님의 비유에 이 단언의 근거를 두고 있다(『시편 주해』 93,15 참조). 그 바리사이가 그랬던 것처럼, 교만한 남녀 수도자들도 스스로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자들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을 마무리 지어야 할 때가 오면, 그들은 하느님 면전에서 빈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생전에 행한 '선행’은 결국 따지고 보면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 즉 자기만족과 명예를 위한 것이었
기 때문이다. (65-6쪽)
☕ 자신의 선함을 자랑하기 시작할 때 교만은 싹트게 된다.
이전에 가난했던 사람들이 수도원에서 이따금 거만해지고 많은 요구를 하는 반면, 세속에서 부와 명예를 누렸던 사람들은 차츰 겸손해지는 것을 그는 체험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수도원에 입회한 동기가, 하느님을 섬기겠다는 결심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과거에 자기들을 억압하고 멸시했던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 위해서인지 구별하기가 때때로 심히 어렵다”(『수도자들의 노동』 22,25)고 그는 말한다. (66-7쪽)
☕ 성직자, 수도자는 그 신분상 평신도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위치이기에 자칫하면 교만에 빠질 수 있다.
"지상의 헛된 것들을 추구하지” 말고 하늘의 축복들을 찾도록 “마음을 드높여”야 한다. 세속 명예를 추구할수록 참된 구원은 위태로워진다. 왜냐하면 여기서 교만이 부자 출신 수도자들의 경우와 같은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교만은 그들의 수도생활을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67쪽)
☕ 교만은 공든 탑도 할 아침에 무너트린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은 지상의 헛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여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만을 인류에게 엄청난 비참을 초래한 원죄로 본다. 반대로 겸손은 구원된 인간의 기본 태도이며, 바로 주님께서 그 모범이 되신다. 겸손은 우리 자신의 노력의 결과라기보다는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선물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겸손을 그리스도적 완덕의 구성 요소로 보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를 권장한다. 그는 사랑이 더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고 실제로 확신하는 한편, 하느님께 대한 진정한 사랑은 겸손의 토양에서만 꽃필 수 있음을 또한 깨닫고 있다. 그는 이전 신학자들보다 겸손에 대해서 더 깊이 통찰하고 더 훌륭하게 설명하였다. 그는 한 설교에서 “당신은 위대한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넓고 높은 집을 지으려고 합니까? 겸손이라는 토대를 먼저 놓으십시오”(『설교』 69,12)라고 말하였다. 또 “우리의 완덕은 확실히 겸손에서 찾을 수 있다”(『시편 주해』 130,14)고 대담하게 말하기도 했다. (68쪽)
☕ 완덕은 겸손에서부터 시작된다.
주님은 겸손에 대해 우리의 스승이자 모범이시다. 우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으로 강생하셨다는 사실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기 비움, 또는 그가 즐겨 사용하는 말처럼, ‘하느님의 겸손’의 행위를 본다. 강생의 신비는 그를 감동시켰다. (68-9쪽)
☕ 주님은 겸손의 스승이자 모범이시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고 그분을 깨닫고 그분을 찾아 모시기를 진실로 원한다면, 그분의 겸손과 낮추심의 모범을 본받아야 한다고 그는 힘주어 강조한다: "비신자들은 이런 지혜에 그들의 마음의 문을 닫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기’(마태 11,25) 때문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하느님의 겸손을 가까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면 그 겸손의 강한 도움으로 하느님이 계신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됩니다”(『설교』 184,1,1).
☕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주님을 본받아 무엇보다도 먼저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는 교만은 교활한 죄라고 지적하는데, 왜냐하면 교만은 우리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면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싸한 일을 이루어 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는 벤시라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경고한다: "네가 높아질수록 자신을 더욱 낮추어라. 그러면 주님 앞에서 총애를 받으리라”(집회 3,18) (70쪽)
☕ 교만은 사탄이 심어놓은 교활한 덫이다. 걸려 넘어지지 말아야 한다.
그는 우리가 지녀야 할 덕들로써 영적인 오만과 자만(自慢)을 거슬러 싸우도록 권한다: ‘나는 여러분이 자기 공적들을 거만하게 자랑한 바리사이처럼 처신하지나 않을까 걱정됩니다. … 여러분이 용서를 빌어야 할 필요가 거의 없다고 생각하여 사랑도 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거룩한 동정성』 37,38). (70쪽)
아우구스티누스는 영적 교만을 이겨 내는 데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표양보다 더 강력한 무기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는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의 짐을 너무 많이 지고 있어서 하늘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는 그 사람을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대신 무한한 사랑 때문에 하늘에서부터 내려오신 분에게로 가십시오. 또 여러분은, 자기의 대죄들을 용서받기 위해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신 그 여자를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 대신 모든 이의 죄를 용서해 주신 구속자로서 당신 종들의 발을 씻어 주신 분에게 가십시오”(『거룩한 동정성』 37,38). (70-1쪽)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 자신과 우리 생활 안에 있는 좋은 점을 간과하거나 부인하지 말도록 당부한다.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정직하지도 진실하지도 못한 태도일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좋은 점에 대해 교만하지 말고 오히려 모두 하느님의 은혜로 돌려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보다 여러분에게 더 많이 베풀어 주신 분을 덜 사랑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거륵한 동정성」 40,41). (71-2쪽)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여러분에게 아직 부족한 것에 더 유의하십시오. … 왜냐하면 여러분이 아직 얼마나 부족한 자인지를 생각한다면 이 사실을 슬퍼할 것이고, 여러분이 이를 슬퍼한다면 치유되어 겸손하게 되고 교만과 오만에서 벗어나 안전하게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설교』 354,5,5). (72쪽)
"겸손하고, 다른 사람들을 여러분 자신보다 더 존경하십시오.” 이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다른 사람들에 앞서는 좋은 점이 우리에게는 감추어져 있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 앞서는 은사들을 감추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83 명제 자유 토론』 71,5)(72쪽)
아우구스티누스가 규칙서 이 장과 기타 다른 저서에서 권고하는 겸손의 태도는, 자신의 수도생활과 당시의 노력에 관해 이야기하는 『고백록』에 잘 나타나 있듯이, 그의 영혼의 근본 심성이었다. 그는 자신 안에 불완전함과 불확실성과 불안정이 여전히 많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자신이 여전히 나약하고 죄 많은 자임을 느낀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기도한다: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희망, 유일한 믿음, 유일한 굳은 약속은 당신의 자비입니다”(『고백록』 10,32,48). 한편 그는 사도와 같이,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필리 4,13)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기도한다: "오 주님, 나도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힘을 돋우어 주시옵소서. … 이 모든 것이 분명하오니, 오 거룩하신 하느님, 당신의 계명들이 지켜질 때, 우리가 그 계명들을 따를 수 있는 힘을 받는 것은 당신이옵니다”(『고백록』 10,31,45). (72-3쪽)
그러므로 너희 모두는 한마음으로 화목하게 살며, 너희는 하느님의 성전이니 너희 안에 계시는 하느님을 서로 공경할 것이다. [1,8]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앞서 거론한,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함께 살아야 한다는 수도생활의 기본 문제로 되돌아간다. 문장 첫머리에 나오는 단어 "그러므로”는 저자가 바로 앞에서 교만과 오만으로 인해 수도 공동체가 맞게 되는 위험들에 관해 언급했던 내용에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낸다는 뜻이다. 그 요지는 수도 공동체의 회원들이 교만을 경계할 때만 진실로 “하느님 안에 한마음 한 뜻이”(규칙 1,2) 된다는 것이다. (74쪽)
☕ 교만은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독이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와 함께 사는 모든 이는, 앞에서 언급한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하는 한 가지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성전”(1코린 3,16)이니, 다시 말해 그들은 마음속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에게 표시하는 존경과 경의는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께 직접 이르는 길이고, 반대로 그들을 무시하는 것은 하느님을 무시하는 것이다. (75쪽)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 하느님께서 은총을 통해 거처하신다고 종종 말한다. 세례 때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당신의 가장 거룩한 성전으로 만드셨다”(『서간 187,12,35). 이 거처하심을 알아볼 수 있는 표지는 사랑이다: "사랑하기 시작하시오. … 그리고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처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께서 이 점에 대해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 5,5)‘(『요한 1서 주석』 8,12). (75-6쪽)
☕ 우리가 사랑할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심을 알 수 있다.
타가스테 수도원과 히포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Deo gratias!”(하느님께 감사!)라는 말로 인사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인사말에 담긴 깊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수도 형제가 다른 수도 형제를 만날 때 하느님께 감사할 훌륭한 이유가 없는지 자문에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기쁘게 감사할 훌륭한 이유가 되지 않습니까?(『시편 주해』 132,6) (76쪽)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러한 그리스도적 상호 존경에 수도생활적 우정의 근거를 분명히 두고 있기 때문에, 공동체와 각 개인 사이의 화목한 관계를 보장한다. 그는 수도 공동체를 단순한 집단적인 한 모임이 아니라 개인들이 “하
느님의 성전’으로 존중되는 영적 가족으로 보고 있다. (76쪽)
☕ 이웃을 하느님이 계신 성전으로 인식할 때 그를 존중할 수 있다.
첫댓글 자신의 선함을 자랑하기 시작할 때 교만은 싹트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