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2008년 중국으로 떠나면서 처음
블러그를 만들면서 올렸던 글입니다.
"좀 까다로운 성질과 달리 나는 종류를 가리지 않고 두루 잘 먹는 편이다. 굳이 맛좋은 곳을 찾아다니지도 않고 술은
좋아하지만 딱히 단골집이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싸고 인심 좋으면 그만이다. 주머니가 가벼우(거의 비어있다고 하는 편이 맞다)니 당연하기도
하겠다.
그런 내가 대구에 살 때 자주 갔던 곳이 도로메기집이라는 대포집이다. (구)대한극장에서 향교쪽으로 한 100미터 가다가
우회전하면 있는, 그 부근에 내 청춘의 열정이 녹아있는 문학운동이 시작된 문화공간 '흙'이 있었고 그 몇걸음 안되는 곳에 그 대포집이 있었다.
일명 도로묵이라는..... 조선시대의 한임금(아마 선조이던가)과 관련된 유래로 더 유명한 그 생선, 예전엔 흔해 별 대접을 못받았으나
지금은 조금 귀한 존재로 책봉된..... 1989년 3월,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청춘의 방황이 가져다주는 외로움이 발동, 문학운동을
한다고 들린 한 단체의 강연회를 마치고 처음 그 곳을 간 기억이 있다. 그리고 97년부터 99년까지 그 부근에서 살 때 비가 오면 종종 들렀던
곳이다. 1000원을 주면 놋사발에 탁주를 한가득 부어주던 그집, 미닫이 유리창을 열고 들어가면 영락없는 60년대 선술집의 모양새를 하고 있던,
돈이 있으면 도루메기를 시키고 없으면 무료로 나오는 잡고기를 먹었던 곳, 그후로 가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곳이 몇년전인가 VJ특공대라는 프로에 전국의 유명한 대포집으로 소개되면서 일대 변신을 했단다. 직접 보지는
못했고 아는 후배가 전해준 말에 의하면 내부와 외부를 최신식으로 치장하고 크기도 확장했단다. 더 가관인 것은 그 집 주위로 또다른 도로메기집들이
간판을 달고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는데 바뀐 풍경이 몹시 궁금하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옛말도 어찌못하던 풍경을 미디어의 몇초가 단번에
바꾸어버리는 현상, 아마 내가 자주 갔던 그 집은 원조라는 딱지를 간판에 크게 붙이고 있으리라... 대구 가면
가보리라....
오늘 이글을 블러그에 올린다고 검색해보니 그 집의 할매가 올해에 간암으로 돌아가셨다네요... 지금은 며느리가 운영하는
모양입니다"
도로메기집, 비에 젖고
어쩌면 한가닥 했을 것도 같다
하루를 공치고
막걸리 한사발로 하루를 위로하는
덩치좋은 저 사십대 아저씨, 그 옆에선
초로의 할아버지들이
정치 이야기로 시끄러운
왕대포 놋주발 가득 부어주는 도로메기집에서
노래처럼 세상을 울리고자 했던
그녀는, 몇 모금 술로도
붉게 달아오르고 나는 그저
삐걱거리는 탁자처럼
기웃기웃, 할아버지들의 얘기를 엿듣고 있다
낡은 탁자며 침침한 형광등 속
젓가락 장단으로 흥겹게 퍼져가던
지난 사랑, 유리창 너머로 나타났다 지워져 가면
지난 영화에나 나올 법한
누추한 풍경을 간직한 채
도로메기집, 봄비에 젖고
추적추적, 세월에 젖어 늙어가는
우리의 청춘도 말짱, 도로묵이던가
지난 열망을 안을 수도 물릴 수도 없어
답답한 가슴으로 취해만 가는데
창 밖으로
웅크린 사람들의 어깨 위
젖은 우산이 비틀비틀, 따라가고 있다
(위 시는 1998년경, 도로메기집을 자주 들리던 시절의 글)
이번 추석연휴에 대구에 들릴일이 있어서
도로메기집에 들러서 그 탁주맛을 보고 왔습니다. 소문의 실상도 파악할 겸해서
말이죠... 원래 도로메기집이 있던 곳의 풍경입니다.
도로메기집이 있던 자리.... 콘테이너
박스같은 무슨 가건물이 서 있습니다.
옮겨간 도로메기집.... 이름도 남산동
도루묵으로 바뀌고 옛날의 풍경은 찾을 길이 없네요... 근데 장사가 아주 잘되어 확장이전을 한것은 아니고 주인이 가게를 비어달래서 이전한
것이랍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며느리가 경영하는 것은 사실이고 그 주위로 새로운 도로메기집이 생겼났다는 것도 사실무근이었습니다.
예전 도로메기집의 풍경입니다.
1961년이라는 이름과 예전 할머니의
모습은 간판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예전 도로메기집의 내부풍경입니다.
지금의 도로메기집 내부풍경....
현대적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예전맛이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VJ특공대에 방영되었던 것이 2003년
12월 12일 인가 봅니다. 저도 우연히 이 프로그램을 보고 눈이 휘둥그려졌더랍니다. 내가 아는 집이 소개되기는 처음이였으니까요...
여전히 놋주발에 부어주는 탁주 한그릇은
1000원이였고요.. 좀 다른점은 주인 아주머니가 탁주를 부을때 양을 신중히 조절하는 것 같았고 안주로 곁들어 나오는 잡고기가 탁주 한그릇에
조기비슷한 고기 1마리로 바뀌었더군요.
도로메기를 따로 시키니 도로메기를 구워
줍니다. 값은 9000원 정도 합니다. 옛날에는 잘 시키지 않았었는데 이날은 한 번
시켜보았습니다.
함께한 후배가 청년문학회 시절,
사무실에 비치한 메모장에 자신이 쓴 단상을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아직도 인권운동단체를 이끌고 있는 고집있는 후배, 만나면 안쓰럽지만 더이상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이날의 안주는 (운동을)꾸준하게 하는게 중요한가? 잘 하는게 중요한가?로 언제나 만나면 의견충돌을 일으키는 해묵은
입씨름입니다. 물론 저는 후자를 중요시하지요.... ㅋㅋㅋ
그 전날 청년문학회 시절의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는 후배 집에서 가져온 노트 몇권도 이날의 안주였답니다. 그 노트의 첫장에 누군가가 베껴쓴 정희성의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란
시가 탁주맛을 더 애틋하게 한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