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최초의 야학은
양청우대종사의 안국사였다”
우리나라 불교계 최초로 사찰에 야학(夜學)을 열었던 인물은 양청우(楊聽雨)대종사(1912-1971)이고 절은 평안남도 평성의 안국사(安國寺)였음이 밝혀졌다. 이 같은 사실은 이번에 새로 발간된 <양청우대종사 문집(門集)>에서 확인되었다.
청우경운(聽雨景雲)스님은 1935년 일제 강점기 시절, 24세의 나이로 평안남도 평성 안국사 주지로 부임해 사찰 안에 야학을 개설, 인근의 어린이들을 가르쳤으며, 주민들의 의식과 생활향상을 위해 농촌소비조합을 결성하기도 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당시 신문들의 1936년 1월 16일자 보도에 따르면 스님은 ‘배워야 산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사찰을 배움의 터전으로 개방하면서 사재를 털어 백명 가까운 아동들에게 한글과 산술 등을 가르치고 학용품 일체도 제공해 그의 장거와 투지를 누구나 감사히 생각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청우당 경운대종사>
청우스님은 1912년 평남 성천출신으로 속명은 양경수(楊景洙)다.
12세에 당대 석학명사들의 태두(泰斗)로 불리던 석전 박한영(石顚 朴漢永)스님을 은사로 전북 순창 구암사(龜岩寺)에서 출가했다.
동명학교와 개운사 대원불교강원을 졸업하고 만암(曼庵), 한암(漢岩), 효봉(曉峰)선사 문하에서 참선정진후 설파(雪坡), 백파(白坡)선사의 법을 계승한 석전스님의 적손(嫡孫)이 되어 법통을 이었다.
1954년부터는 청담(靑潭), 탄허(呑虛), 경산(慶山)스님 등과 함께 불교정화운동에 앞장섰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총무·교무·재무부장, 중앙종회의원과 직할교구본사인 서울 조계사, 제3교구본사인 간성 건봉사, 제22교구본사인 해남 대흥사와 강릉 법왕사 등의 주지를 역임했다.
스님은 1971년 10월 3일 해남 대흥사에서 입적했다. 다비후 사리 43과가 나와 법왕사, 대흥사, 선운사에 부도와 사리탑을 건립했다.
이번에 청우문도회(문도대표: 순창 강천사주지 在德스님)에서 발간한 <양청우대종사 문집>은 제1장 청우대종사의 생애/ 제2장 비문(碑文)/ 제3장 행장(行狀)을 통해 본 사상/ 제4장 법어(法語)/ 제5장 대덕, 명사가 기억하는 청우스님/ 제6장 나의 스승, 청우대종사를 기리며/ 제7장 편지 모음/ 제8장 법통을 이어주신 선사(先師)들/ 제9장 영호(映湖)문도회와 사형제들/ 제10장 ‘남은 돌 모듬회’ 도반들/ 제11장 제자들로 구성되었으며 불조원류(佛祖源流)를 부록으로 실었다.
책임편저 은산도수(隱山道守)스님.
(비매품/세종출판사)
<평안남도 평성 안국사 전경>
다음은 1936년 1월 16일자 조선일보 3면에 난 기사.
‘사원을 교실 삼아 무산아 교육 진력,
안국사 주지 양경수씨 열성’
(사인) 배움에 굶주린 어린이들을 그저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사재를 희생하여 가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르치는 스님이 있다.
그는 현재 평남 순천군 사인면에 있는 안국사의 주지 양경수(楊景洙)씨로서 그는 작년 봄 그 절 주지로 취임한 이래 매주 2회씩 정기집회로서 불교정신을 심어주는 설교회를 개최하여 영적 수양을 힘쓰는 한편, 부근 농민들에게 부업과 저축을 장려하며 또 농촌소비조합 등을 조직하여 열심 지도하여 오던 중, 지난해 11월경부터는 무산아동의 문맹을 불쌍히 여겨 우선 야학을 개최하고 수 십명의 청소년에게 한글 산술 등 필요한 몇 과목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그 동리 아동들은 기쁨으로 모이기를 나날이 더하여감으로 이에 열심을 가한 전기 양씨는 낮과 밤 2부로 나누어서 그 절의 크나큰 방을 아직은 교실삼아 가르치고 있다는 바, 특히 그는 넉넉지 못한 불전을 털어 학용품의 일체와 기타 비품대 등을 독담하여 가면서 ‘배워야 산다’란 슬로건 밑에서 열심지도하고 있음으로 벌써 학생은 사 오십명이나 되어 백명에 가까운 아동들이 날마다 배우고 있음으로 그의 장거와 투지에는 누구나 감사히 생각한다고 한다.
이 기사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청우스님은 안국사주지 취임 후 매주 2회씩 법회를 열었으며 지역농민들에게 부업과 저축을 장려하며 농촌소비조합을 결성해 지도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한국불교 최초로 배움을 갈구하는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해 야학을 열었고 학생들이 늘어나자 낮에도 가르쳐 하루 100여명의 어린이들이 안국사 절 큰방을 교실 삼아 한글, 산술 등을 공부하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스님은 더욱이 넉넉지 못한 불전을 털어 학용품 일체와 비품대까지 홀로 전담해가며 ‘배워야 산다’고 어린 학생들을 독려했던 것이다
스님은 이 해 12월에는 안국리 전 동민들이 동민대회를 열고 모두 합심해 안국사에 사립학원을 설립키로 하고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는데, 이때 스님은 실제 주역이면서도 위원장직을 동민대표에게 맡기고 스스로는 부위원장을 맡는 미덕을 보이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사월초파일 같은 불교명절에는 지역의 남녀노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으며 연극과 무용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축제잔치를 벌이기까지 했다.
1930년대에 청우대종사에 의해 안국사에서 야학이 열렸다는 사실은 불교계 내부에서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다.
<1936년 안국사의 사월초파일. 야학의 어린이들도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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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그분들로 하여금 오늘이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각각의 장에서 청우대종사님이 계실것을 믿습니다 현재에도 미래에도 계실 그분들께도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