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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여성적인 것 만이 우리를 구원한다"
구대열
방장님,
지혜 씨 가신 지가 벌써 3년이군요.
건강 잘 챙기세요.
구대열
............................
어머니의 천로역정(天路歷程)
- 남해 금산 보리암(2)
그동안 뒤엉킨 나의 마음을 카타르시스하기 위해 이 글을 썼지만
마음이 여전히 개운치 않군요. 내가 국민학교 4-5 학년 때 어머니는 남해 보리암에 다녔습니다.
방학 중이었을 겁니다. 정천스님이 마구니와 싸우다가 자해하여 입원한 후인데,
어머니도 정진에 좋다는 말을 듣고 가신 듯합니다. 수도 중에는 대부분이 묵언(默言)입니다.
일주일 혹은 길면 한 달간 말을 하지 않고 대부분 시간을 참선, 염불 혹은 불전에 절을 합니다.
뇌염을 피해 문수암에 갔을 때도 어머니가 묵언수도에 들어갔는데 나는 붓글씨만 쓰면서 견뎠지요.
그러나 1주일이 지나자 힘들더군요. 말을 걸어도 벙어리 행세를 하면서 손가락질만 하는데 환장하겠더군요.
추석날 나 혼자 집에 간다면서 청담스님 사리탑 곁 험한 골짜기를 뛰다시피 내려가니
어머니도 부랴부랴 짐을 싸 들고 나서더군요.
서울에서 남해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요.
비행기로 사천비행장에 내려 버스나 택시로 갈 수 있습니다.
사천비행장은 아버지가 오사카에 있는 관서공고(현 오사카 공대 전신)를 졸업한 뒤 토목기사로 일한 곳입니다.
왜 별로 큰 도시가 아닌 사천에 비행장을 만들었을까요?
일본이 대한해협에 가까운 진해 해군기지를 지키는 비행장으로 건설한 것인데
오늘날에도 공군기지와 민간 비행장 공용입니다. 남부터미널에서 시외버스로 남해로 가면 4시간쯤 걸립니다.
남해 버스 터미널에는 아난티(남해 힐턴) 숙소나 금산으로 가는 택시 등 차편이 있습니다.
여수 엑스포 때는 여수 여객선 터미널에서 고속정으로 30분 정도면 힐튼에 닿았습니다.
그러나 고성에서 남해로 가는 길은 지금도 힘든 여정입니다. 우선 직행버스가 없습니다.
대부분 진주로 가서 갈아타야 합니다. 시내버스같이 5-10분 정도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두 시간은 보통입니다.
그렇다면 1950년대 중반 고성-남해 길을 어떠했겠습니까?
고성에서 진주로 간 다음 버스를 바꾸어 타고 노량까지 갔을 겁니다.
남해 섬으로 들어가기 직전인 진교 부근에 내렸을까? 그다음 배편으로 충무공이 마지막 결전을 벌인 노량해협을 건너
남해 본도로 들어갔을 겁니다. 여기서 다시 버스로 섬의 남쪽 끝에 있는 금산으로 행했겠지요.
그리곤 700m가 넘는 금산을 등산하듯 올랐을 겁니다.
이 여정이 며칠 걸렸을까요?
진주 차부에는 할머니와 먼 친척이자 어머니 친구가 있어 하루 쉴 수 있었겠지요.
고성-진주 거리는 고성-마산과 비슷합니다. 지금은 44km로 나오는데 많은 구간이 직선화되었으니
옛날에는 훨씬 멀었겠지요. 고성-마산 간에도 배둔, 진동 고개 등 험한 산길이 있지만
중부 경남인 진주로 가는 길은 더 험했을 겁니다.
우리는 충무공의 若無湖南이면 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없었다.)라는 말만 알고
若無晋州면 是無湖南(약무진주 시무호남)는 잘 모르지요.
1592년 10월에 있은 진주성 방어전에서 승리했기에 호남 곡창지역으로 가는 왜군의 행로를 막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은 험로였던 겁니다. 1950년대 포장되지 않았던 ‘신작로’는 자갈이 깔려있는데
차들이 다녀 움퍽 파인 곳이 많아 버스가 먼지를 풍기면서 퉁퉁거리고 달리면 나는 멀미를 하곤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말입니다. 고성-마산이 두 시간이 넘겨 걸렸지요. 지금은 30분이면 가는 길입니다.
노량해협은 지금은 남해대교나 노량대교가 있지만 당시 나룻배 사정이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그 다음은? 남해는 ‘동백꽃 피고 지는...’ 로맨틱한 작은 섬마을이 아닙니다. 산들이 높아 평지가 별로입니다.
산을 위에서부터 좁게 깎아 논이나 밭으로 일구어 농사를 짓는 다랭이 논이 남아 있는데
지금은 관광자원으로 잘 선전되고 있지요. 옛날에는 어느 곳에서나 야트막한 산을 이런 식으로 개간했습니다.
남해는 특히 심했을 겁니다. 요즘은 워낙 일품이 많이 들고 생산선이 낮아 사라졌지요.
북한은 지금도 산지를 이런 식으로 개간하여 강냉이나 감자를 심고 있습니다.
그러나 큰 비가 오면 농사는 완전히 망가지고 그 아래 개울은 위에서 흘러내린 토사로 꽉 막혀버립니다.
나무를 베어 농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밭이나 논은 물을 저장하지 못합니다.
농지 비율이 낮은 북한으로서는 어쩔 수 없겠지만 사실은 이게 북한 농업에 비료 부족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모택동도 1950년대 산서성 등 북부 산악지대의 개간을 독려하고 이에 앞장선 농부(이름이 陳永貴였던가?)를
공산당 최고기관인 정치국 위원으로 임명하여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열성은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이죠.
이런 험준한 섬마을에 친척이 없으니 쉬어 갈 곳도 없고
섬의 북부에서 남쪽 끝에 있는 금산까지 어떻게 갔을까요? 섬마을 버스 같은 것은 있었겠지요?
그러나 상당 부분을 걸었을 겁니다. 이 무슨 구도자의 길입니까?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를 스스로 택하신 겁니다.
번연(John Bunyan)은 꿈속에서 구도자의 길을 걷습니다. 아니 자기 마을이 불타 없어질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억지로 길을 나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역경을 견디면서 천국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나섭니다.
주인공은 혼자 집을 나서 구원에 이르고 그 뒤 부인이 남편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적인 신앙이 얕아서인지, 아니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구원(redemption)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인지
번연의 소설을 몇 페이지 보다가 덮어버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도 마찬가지로 읽다가 접고...
다시 억지로 읽다가 중단했습니다. <신곡>에는 모르는 이름도 많이 나오지요.
서양 문학은 히브루-기독교적 신앙이 밑바탕에 깔려있는데
이걸 얼렁뚱땅 알고 있으니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979년 여름 한국일보 김성우 파리특파원과 영국의 문학 여행길에 베드퍼드셔(Bedfordshire)에 있는
번연의 마을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베드포드는 러셀의 향리입니다. 러셀의 가문을 베드포드 공작 작위를 이어가고 있지요.
런던 북쪽 캠브리지 부근입니다. 번연의 생가자리라는 비석이 하나 있고
애들이 한가롭고 노닐고 베드포드 도시 중간에 강이 흐르고 있어 힘든 생활을 한 흔적이라기보다는
천국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한가롭고 번창한 마을이었습니다.
소설에서 ‘아름다운 집(House Beautiful)’이라는 큰 집이 등장하는데
번연의 동네 중심부에 떡 버티고 있는 대저택이 모델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찍은 사진들이 앨범에 없는 걸 보니 별로라고 생각되어
빼버린 것 같네요.(참조, 김성우 저, 세계문학 기행, 1983, 264-269)
구원이라면 나는 오히려 세속적인 것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노량에서 충무공의 전사도 구원으로 해석될 수 없을까요?
한 몸 바쳐 나라를 구한 건 분명히 극적인 구원의 행위이죠. <파우스트>에서와 같이
‘영원, 여성적이 것(Das Ewig, Weibliche...)’이라든지 자신을 던져 자신이 속했던 신들의 세계와 온 세상,
그리고 사랑한 사람을 구원한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에 나오는 브린힐데와 같은
약간 인간 냄새가 나는 사랑과 희생을 통한 구원이 좋습니다.
이보다 한 차원 높은 종교적 구원을 이성적으로 접근하려 한다면, 이건 믿는 마음,
즉 신심의 부족 탓이겠지요.
나의 글은 여기에서 2주 이상 멈추었습니다.
보리암을 찾아 나선 어머니의 구도자적 모습이 상상은 되지만 글로 표현하기 어렵더군요.
지난 수십 년간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탓이기도 하겠습니다. 두루마기는 승복을 입었을까,
등에는 배낭을 메었겠지요. 바릿대라고 하던가요? 문수암으로 가는 길은 버스로 상리초등학교 앞에서 내려
초가을의 햇살을 받으며 야트막한 오르막을 계속 오르면서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었지요.
보리암으로 가는 어머니의 마음도 같았을까요?
익숙지 않은 길을 나선 수도자의 마음에 무슨 즐거움이 있었겠나요?
22일 덕수궁 미술관에서 박수근의 그림들을 보면서 뭔가 어렴풋이 연상되었습니다.
나목(裸木)아래 애를 업고 있는 여인네는 ‘마당에 서 있는 파 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나무’라는
미당(未堂)의 ‘자화상’이 연상되기도 하고....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은 아무리 빨아도 없어지지 않는
털옷의 털 올 하나까지 씻으려 방망이질을 하고 또 하시던 할머니와 같기도 하고....
어머니의 순례 길과 직접 연관되는 건 없지만
그 시대를 열심히 살아가며 무언가를 찾아 스스로 고행길에 나선 어머니의 모습이 겹치더군요.
박수근의 나목아래 두 여인
박수근의 빨래터
연상은 꼭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니겠지요.
한 인간이 살아가며 느끼는 고뇌를 예술작품으로 표현하고 승화시켰다면,
그리고 여기에 제3자인 나의 아릿한 마음이 덮씨워진다면, 그래서 어떤 공명이 일어난다면 되는 것 아닌가요?
현악기의 줄을 퉁긴 뒤 아스라이 사라지는 소리 같은 것 말입니다.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처남 박이소의 유품들의 보면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 들더군요.
미술관으로 올라가는 길에 나의 마음은 정문 부근에 전시된 이소의 작품인 콘크리트로 만든 배로 향했습니다.
얼마나 더 낡았을까? 30여 년 전 이소가 미국에서 이 무거운 걸 돈을 얼마나 들여 가져왔는데....
원래 비스듬히 누운 형태인데 지하 창고에 넣으니 다른 물건을 넣을 자리가 없어 없애라고 얼마나 구박했던가...
새로 만든 작품은 반듯이 누웠는데 틔어져 나온 굵은 철사들은 그동안 또 얼마나 녹이 슬었을까?
앞으로 새로 부임할 어느 원장이 무식하게도 ‘이런 걸 왜 여기에 전시해 두었느냐,
당장 치워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 부근 괜찮은 자리는 없을까 등등....상념이 이어지면서
우리 집 2층에서 멍청히 앉아 노트에 뭘 적고 스케치하던 이소가 보이더군요.
20권에 이르는 이런 스케치북이 이제 영구보존용으로 처리되고
낡은 실물 그대로 복사본도 만들었다는 연락을 받고 보려 가는 길이었습니다.
올라오는 길에 전시된 많은 작품들이 모두 삐까뻔쩍한데 초라한 모습을 한 이소의 배가 오히려 돋보였습니다.
‘씰데없는 짓 고만하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고 하던 무식한 나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또 다른 페이소스가 밀려들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집사람도 이 배를 옮길만한 장소를 주변에서 찾아보았는데 몇 군데 좋은 곳이 보이더라고 하더군요.
10살 차이로 어릴 때 이소를 업고 줄넘기 놀이를 하면서 키운 집사람의 이소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겹쳐
더욱 애틋한 마음이 우러났습니다.
이소의 콘크리트 배. 뒤에 보이는 화려한 작품도 유명합니다.
콘크리트로 만들어 물어 뜨지 못하는 이소의 배는 박용철의 시 ‘떠나가는 배’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노량을 건너 남해 섬에서 어머니가 버스로 혹은 걸어서 금산 자락에 닿았을 즈음엔
이미 오후가 되었을 것이고 여기서 보리암으로 순례 길을 오를 때쯤 서산에 저녁별 금성이 나타나
길을 안내하였겠지요. 바그너의 <탄호이저(Tannhäuser)>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순례자의 합창’과 ‘새벽별’ 그대로일 겁니다.
물론 완전히 다른 상황이죠. 탄호이저는 비너스의 성에서 주지육림에 빠져 살다가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와서
죗값을 치루기 위해 순례자의 길에 나서지만 그의 죄는 교황의 지팡이에 새 순이 돋아나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라는 말을 듣고 절망합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며 기다리던 애인 엘리자베드는 첫 순례자들이 돌아왔을 때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죽습니다.
돌아오지 않을 애인을 그리며 ‘죽음을 예시하는 저녁노을이 대지를 뒤엎을 때’ ‘가장 빛나는 당신, 가장 아름다운 별이여’
‘천사가 되어 대지를 비추어다오’라고 기도합니다. 탄호이저는 두 번째 순례자들과 함께 돌아오지요.
교황의 지팡이에 새순이 돋았다고 합니다. 구원을 받은 것이지요.
어머니는 속세에서 무슨 죄를 지었던가요?
어머니는 나를 포함한 주변 모든 사람들의 불행을 자신이 전생에 지은 업보 탓으로 돌립니다.
얼마나 큰 죄악이 쌓였으면 남편을 일찍 잃고 바로 그날 저녁 아들을 낳아 이토록 고된 나날을 살아야 하는가?
이 속죄의 길을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가, 스스로 물었겠지요. 영국에서 귀국한 뒤 어머니를 모시고
고성 문수암으로 갔습니다. 여행도 겸해 여수로 가서 하루 놀았습니다.
이때 남해 보리암은 지나쳤습니다. 어머니가 한마디만 했어도 갔을 것인데 아마도 애써 피했는지 모릅니다.
여수에서 에인젤 호라는 고속정을 타고 통영으로 갔지요.
우리는 영국 도버에서 비슷한 고무보트를 타고 영불해협을 건너 프랑스 칼레에 닿아 파리까지 기차로 간 적이 있습니다.
2차 대전 중 상륙정으로 개발된 것이라는 데 제트 엔진으로 배가 물보라를 치면서 수면 위로 나르더군요.
그리곤 모래사장에 사뿐히 앉더군요. 에인절 호는 이보다는 빠르지 않고 또 작았는데
어머니는 배가 속도를 내자 마음속으로 기도하더군요.
그런데 삼천포 부근에서 안개가 짙어 앞이 보이지 않자 옆에서 들릴 정도로 기도소리가 높아지더군요.
배는 통영까지 가지 못하고 삼천포로 빠져 우리는 버스로 사천, 고성을 거쳐 통영으로 갔습니다.
어머니는 이후 다시는 우리와 여행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서울에 새집을 지을 때 우리와 간섭받지 않고
따로 생활할 수 있도록 완전히 분리된 방을 만들었지만 결코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구요.
지금은 내가 잘 쓰고 있습니다.
나의 이 같은 기분을 우리 일행들이 알 리가 없지요.
일행은 여기저기 구경하고 동행인 아들의 부인이자 건축가 지어 ‘아름다운 집’으로 남해군청이 선정한
‘소솔집’을 찾았습니다. 주인이 서울 올라가 빈집이지만 대문이 걸려있지 않아
마당에서 놀다가 집주인에게 전화를 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집 문 같은데 손대지 마세요.
비상벨 걸어 놓아 경찰이 출동해요.’하더군요.
깜짝 놀라 집을 나와 숙소로 돌아왔습니다.(2022.2.25.) <계속>
소솔집
<이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국제정치학 박사(런던정치경제大/LSE)/한국일보 사회~외신부 기자(견습22기)역임/近著: "Korea 1905~1945"
(From Japanese Colonialism To Liberation And Independence), "삼국통일의 정치학", "제국주의와 언론"/
부산고~서울대 문리대 영문학과 졸/고성 産>
다인종사회에서 같은 생김새가 갖는 힘
권정희
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이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 “연방대법원에 여성법관은
몇 명이면 충분할까?” 긴즈버그의 답은 “9명”이었다. 연방대법을 여성이 독차지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백년 차별로 벌어진 격차와 뇌리에 박힌 불공정을 바로잡으려면
여성법관 몇 명으로는 턱도 없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가 어수선하던 지난달 25일 조 바이든 대통령은 연방대법관 후보를 지명했다.
이번 회기를 끝으로 물러나는 스티븐 브라이어 대법관의 후임으로 바이든은 흑인여성 케탄지 브라운 잭슨(51)
연방항소법원 판사를 지명했다. 흑인여성이 대법관에 지명된 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이다.
이로써 바이든은 대선 캠페인 때의 약속을 지켰고, 흑인사회와 여성 및 진보진영은 이정표적 사건이라며 환영했다.
후보를 ‘흑인여성’으로 못 박은 것과 관련, 공화당 일각에서는 차별적 비아냥이 있었다.
왜 ‘흑인’이고 ‘여성’이어야 하는가. 미국은 다인종 사회이지만 다양한 인종이 온전하게 공존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력이 거주지역을 가르고, 기득권 집단이 변화에 소극적이면서 사회의 상층부로 갈수록 하얗다.
최고권위의 상징인 연방대법은 특히 하얗다.
“오래도록 연방대법원은 미국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바이든은 잭슨 판사 지명 발표 중 말했다.
남녀 반반에 인종이 다양한 게 미국의 모습이지만 현재 연방대법은 남성 6명 여성 3명, 백인 7명 유색인종 2명이다.
대법 233년 역사를 돌아보면 역대 대법관 115명 중 거의 전부(108명)가 백인남성이다.
여성은 5명 비백인은 3명뿐이었다. 투표권, 교육, 취업, 거주지 등 미국민들의 삶은 백인남성의 관점에서
재단되었다는 말이 된다. 다양성 반영을 위해 바이든은 인종과 성별, 이중으로 소수계인 흑인여성을 지명했다.
인종이 다양하고, 인종편견이 엄존하는 사회에서 같은 생김새가 갖는 힘은 크다.
이민초기 한인학부모들이 낯선 미국학교에서 한인교사를 만났을 때의 안도감이 좋은 예이다.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각 인종과 민족을 대표하는 정치인 혹은 판사가 필요한 것은 공정성 때문이다.
집단이나 개인이 억울한 일 당하지 않고 공정하게 대우받으려면 경험과 정서가 비슷해서 그 집단/개인을
대변할 수 있는, 같은 생김새의 대표가 필요하다. 흑인여성 대법관의 상징적 의미는 크다.
소수계가 판사석에 앉으면 재판은 달라질까. 답은 예스이자 노우이다.
연방법원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보면 판사의 인종이나 성별은 재판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미국 최초의 여성대법관인 샌드라 데이 오코너가 한 말이 있다.
“나이든 현명한 여성과 나이든 현명한 남성이 도달하는 결론은 같을 것”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그러하다.
하지만 성차별이나 인종차별 케이스는 다르다. 판사의 정체성이 영향을 미친다.
성차별 소송에서 여성판사는 남성에 비해 15%, 인종차별 소송에서 흑인판사는 백인에 비해
38% 더 피해자 승소판결을 내린다. 3인 합의부 재판에서는 여성/흑인 판사가 한명만 배석해도
차별 관련 판결이 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9년 봄 연방대법에는 애리조나 학교 대 13세 소녀 케이스가 올라왔다.
소녀가 아이뷰프로펜을 팬티 속에 감췄다며 교직원들이 양호실에서 옷을 홀딱 벗기고
몸수색한 것이 헌법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가리는 재판이었다. 당시 브라이어 대법관은 이런 말로 좌중을 웃겼다.
“내 어릴 적 경험으로 볼 때, 아이들은 체육복 갈아입느라 하루에 한번은 학교에서 옷을 벗었고,
그때면 누군가가 팬티 속에 뭔가를 찔러 넣곤 했다.” 법정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때 웃지 않는 한사람이 있었다. 당시 유일한 여성대법관이던 긴즈버그였다. 그는 말했다.
“그들 누구도 13세 소녀가 되어본 경험이 없다. 여자아이에게 얼마나 예민한 나이인지 그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이후 긴즈버그와 남성동료들 사이에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해 여름 연방대법은 소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여성법관의 존재가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했다.
지난해 3월에는 연방하원에서 사법부의 다양성 관련 청문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 에드워드 첸 연방지법 판사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연방정부 대 코레마추’ 케이스를 예로 들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후 미국은 2차 대전에 참전하면서 서부해안을 군사지대로 선포하고
일본계 주민들을 강제추방, 집단수용했다. 스파이 활동으로 국가안보를 해칠 위험이 있다는 논리였다.
이에 23세 일본계 남성 프레드 코레마추가 소송을 제기했다. 똑같이 적국인 독일계와 이탈리아계는 그대로 두고
일본계만 추방한 조치를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연방대법은 일본계가 더 위험한 경향이 있다며 연방정부의 결정을 옹호했다.
첸 판사는 물었다. “당시 법정에 일본계 판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다인종 사회에서 우리와 생김새가 같은 지도자들의 존재는 중요하다.
그들이 있어 우리의 권익이 지켜지고, 그들을 보며 우리의 후손은 꿈을 키운다.
흑인여성 대법관은 소녀들과 유색인종 아이들에게 롤 모델이 될 것이다.
조만간 우리와 같은 생김새의 연방대법관도 보게 되기를 바란다.
<권정희/미주한국일보 논설위원/서울본사 외신부 기자(견습31기) 역임/
숙명여고-서울대 사대 불어교육과 졸/LA거주>
구대열
방장님,
지혜 씨 가신 지가 벌써 3년이군요.
건강 잘 챙기세요.
구대열
............................
어머니의 천로역정(天路歷程)
- 남해 금산 보리암(2)
그동안 뒤엉킨 나의 마음을 카타르시스하기 위해 이 글을 썼지만
마음이 여전히 개운치 않군요. 내가 국민학교 4-5 학년 때 어머니는 남해 보리암에 다녔습니다.
방학 중이었을 겁니다. 정천스님이 마구니와 싸우다가 자해하여 입원한 후인데,
어머니도 정진에 좋다는 말을 듣고 가신 듯합니다. 수도 중에는 대부분이 묵언(默言)입니다.
일주일 혹은 길면 한 달간 말을 하지 않고 대부분 시간을 참선, 염불 혹은 불전에 절을 합니다.
뇌염을 피해 문수암에 갔을 때도 어머니가 묵언수도에 들어갔는데 나는 붓글씨만 쓰면서 견뎠지요.
그러나 1주일이 지나자 힘들더군요. 말을 걸어도 벙어리 행세를 하면서 손가락질만 하는데 환장하겠더군요.
추석날 나 혼자 집에 간다면서 청담스님 사리탑 곁 험한 골짜기를 뛰다시피 내려가니
어머니도 부랴부랴 짐을 싸 들고 나서더군요.
서울에서 남해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지요.
비행기로 사천비행장에 내려 버스나 택시로 갈 수 있습니다.
사천비행장은 아버지가 오사카에 있는 관서공고(현 오사카 공대 전신)를 졸업한 뒤 토목기사로 일한 곳입니다.
왜 별로 큰 도시가 아닌 사천에 비행장을 만들었을까요?
일본이 대한해협에 가까운 진해 해군기지를 지키는 비행장으로 건설한 것인데
오늘날에도 공군기지와 민간 비행장 공용입니다. 남부터미널에서 시외버스로 남해로 가면 4시간쯤 걸립니다.
남해 버스 터미널에는 아난티(남해 힐턴) 숙소나 금산으로 가는 택시 등 차편이 있습니다.
여수 엑스포 때는 여수 여객선 터미널에서 고속정으로 30분 정도면 힐튼에 닿았습니다.
그러나 고성에서 남해로 가는 길은 지금도 힘든 여정입니다. 우선 직행버스가 없습니다.
대부분 진주로 가서 갈아타야 합니다. 시내버스같이 5-10분 정도 기다리는 게 아니라 한두 시간은 보통입니다.
그렇다면 1950년대 중반 고성-남해 길을 어떠했겠습니까?
고성에서 진주로 간 다음 버스를 바꾸어 타고 노량까지 갔을 겁니다.
남해 섬으로 들어가기 직전인 진교 부근에 내렸을까? 그다음 배편으로 충무공이 마지막 결전을 벌인 노량해협을 건너
남해 본도로 들어갔을 겁니다. 여기서 다시 버스로 섬의 남쪽 끝에 있는 금산으로 행했겠지요.
그리곤 700m가 넘는 금산을 등산하듯 올랐을 겁니다.
이 여정이 며칠 걸렸을까요?
진주 차부에는 할머니와 먼 친척이자 어머니 친구가 있어 하루 쉴 수 있었겠지요.
고성-진주 거리는 고성-마산과 비슷합니다. 지금은 44km로 나오는데 많은 구간이 직선화되었으니
옛날에는 훨씬 멀었겠지요. 고성-마산 간에도 배둔, 진동 고개 등 험한 산길이 있지만
중부 경남인 진주로 가는 길은 더 험했을 겁니다.
우리는 충무공의 若無湖南이면 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없었다.)라는 말만 알고
若無晋州면 是無湖南(약무진주 시무호남)는 잘 모르지요.
1592년 10월에 있은 진주성 방어전에서 승리했기에 호남 곡창지역으로 가는 왜군의 행로를 막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가는 길은 험로였던 겁니다. 1950년대 포장되지 않았던 ‘신작로’는 자갈이 깔려있는데
차들이 다녀 움퍽 파인 곳이 많아 버스가 먼지를 풍기면서 퉁퉁거리고 달리면 나는 멀미를 하곤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말입니다. 고성-마산이 두 시간이 넘겨 걸렸지요. 지금은 30분이면 가는 길입니다.
노량해협은 지금은 남해대교나 노량대교가 있지만 당시 나룻배 사정이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그 다음은? 남해는 ‘동백꽃 피고 지는...’ 로맨틱한 작은 섬마을이 아닙니다. 산들이 높아 평지가 별로입니다.
산을 위에서부터 좁게 깎아 논이나 밭으로 일구어 농사를 짓는 다랭이 논이 남아 있는데
지금은 관광자원으로 잘 선전되고 있지요. 옛날에는 어느 곳에서나 야트막한 산을 이런 식으로 개간했습니다.
남해는 특히 심했을 겁니다. 요즘은 워낙 일품이 많이 들고 생산선이 낮아 사라졌지요.
북한은 지금도 산지를 이런 식으로 개간하여 강냉이나 감자를 심고 있습니다.
그러나 큰 비가 오면 농사는 완전히 망가지고 그 아래 개울은 위에서 흘러내린 토사로 꽉 막혀버립니다.
나무를 베어 농지로 만들었기 때문에 밭이나 논은 물을 저장하지 못합니다.
농지 비율이 낮은 북한으로서는 어쩔 수 없겠지만 사실은 이게 북한 농업에 비료 부족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모택동도 1950년대 산서성 등 북부 산악지대의 개간을 독려하고 이에 앞장선 농부(이름이 陳永貴였던가?)를
공산당 최고기관인 정치국 위원으로 임명하여 국민적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열성은 비극으로 끝나기 마련이죠.
이런 험준한 섬마을에 친척이 없으니 쉬어 갈 곳도 없고
섬의 북부에서 남쪽 끝에 있는 금산까지 어떻게 갔을까요? 섬마을 버스 같은 것은 있었겠지요?
그러나 상당 부분을 걸었을 겁니다. 이 무슨 구도자의 길입니까?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를 스스로 택하신 겁니다.
번연(John Bunyan)은 꿈속에서 구도자의 길을 걷습니다. 아니 자기 마을이 불타 없어질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억지로 길을 나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역경을 견디면서 천국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나섭니다.
주인공은 혼자 집을 나서 구원에 이르고 그 뒤 부인이 남편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적인 신앙이 얕아서인지, 아니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구원(redemption)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인지
번연의 소설을 몇 페이지 보다가 덮어버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단테의 <신곡>도 마찬가지로 읽다가 접고...
다시 억지로 읽다가 중단했습니다. <신곡>에는 모르는 이름도 많이 나오지요.
서양 문학은 히브루-기독교적 신앙이 밑바탕에 깔려있는데
이걸 얼렁뚱땅 알고 있으니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979년 여름 한국일보 김성우 파리특파원과 영국의 문학 여행길에 베드퍼드셔(Bedfordshire)에 있는
번연의 마을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베드포드는 러셀의 향리입니다. 러셀의 가문을 베드포드 공작 작위를 이어가고 있지요.
런던 북쪽 캠브리지 부근입니다. 번연의 생가자리라는 비석이 하나 있고
애들이 한가롭고 노닐고 베드포드 도시 중간에 강이 흐르고 있어 힘든 생활을 한 흔적이라기보다는
천국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한가롭고 번창한 마을이었습니다.
소설에서 ‘아름다운 집(House Beautiful)’이라는 큰 집이 등장하는데
번연의 동네 중심부에 떡 버티고 있는 대저택이 모델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찍은 사진들이 앨범에 없는 걸 보니 별로라고 생각되어
빼버린 것 같네요.(참조, 김성우 저, 세계문학 기행, 1983, 264-269)
구원이라면 나는 오히려 세속적인 것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노량에서 충무공의 전사도 구원으로 해석될 수 없을까요?
한 몸 바쳐 나라를 구한 건 분명히 극적인 구원의 행위이죠. <파우스트>에서와 같이
‘영원, 여성적이 것(Das Ewig, Weibliche...)’이라든지 자신을 던져 자신이 속했던 신들의 세계와 온 세상,
그리고 사랑한 사람을 구원한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에 나오는 브린힐데와 같은
약간 인간 냄새가 나는 사랑과 희생을 통한 구원이 좋습니다.
이보다 한 차원 높은 종교적 구원을 이성적으로 접근하려 한다면, 이건 믿는 마음,
즉 신심의 부족 탓이겠지요.
나의 글은 여기에서 2주 이상 멈추었습니다.
보리암을 찾아 나선 어머니의 구도자적 모습이 상상은 되지만 글로 표현하기 어렵더군요.
지난 수십 년간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탓이기도 하겠습니다. 두루마기는 승복을 입었을까,
등에는 배낭을 메었겠지요. 바릿대라고 하던가요? 문수암으로 가는 길은 버스로 상리초등학교 앞에서 내려
초가을의 햇살을 받으며 야트막한 오르막을 계속 오르면서 주변 풍경을 즐길 수 있었지요.
보리암으로 가는 어머니의 마음도 같았을까요?
익숙지 않은 길을 나선 수도자의 마음에 무슨 즐거움이 있었겠나요?
22일 덕수궁 미술관에서 박수근의 그림들을 보면서 뭔가 어렴풋이 연상되었습니다.
나목(裸木)아래 애를 업고 있는 여인네는 ‘마당에 서 있는 파 뿌리 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나무’라는
미당(未堂)의 ‘자화상’이 연상되기도 하고.... 개울가에서 빨래하는 여인들은 아무리 빨아도 없어지지 않는
털옷의 털 올 하나까지 씻으려 방망이질을 하고 또 하시던 할머니와 같기도 하고....
어머니의 순례 길과 직접 연관되는 건 없지만
그 시대를 열심히 살아가며 무언가를 찾아 스스로 고행길에 나선 어머니의 모습이 겹치더군요.
박수근의 나목아래 두 여인
박수근의 빨래터
연상은 꼭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만은 아니겠지요.
한 인간이 살아가며 느끼는 고뇌를 예술작품으로 표현하고 승화시켰다면,
그리고 여기에 제3자인 나의 아릿한 마음이 덮씨워진다면, 그래서 어떤 공명이 일어난다면 되는 것 아닌가요?
현악기의 줄을 퉁긴 뒤 아스라이 사라지는 소리 같은 것 말입니다.
과천 현대미술관에서 처남 박이소의 유품들의 보면서도 이와 비슷한 생각이 들더군요.
미술관으로 올라가는 길에 나의 마음은 정문 부근에 전시된 이소의 작품인 콘크리트로 만든 배로 향했습니다.
얼마나 더 낡았을까? 30여 년 전 이소가 미국에서 이 무거운 걸 돈을 얼마나 들여 가져왔는데....
원래 비스듬히 누운 형태인데 지하 창고에 넣으니 다른 물건을 넣을 자리가 없어 없애라고 얼마나 구박했던가...
새로 만든 작품은 반듯이 누웠는데 틔어져 나온 굵은 철사들은 그동안 또 얼마나 녹이 슬었을까?
앞으로 새로 부임할 어느 원장이 무식하게도 ‘이런 걸 왜 여기에 전시해 두었느냐,
당장 치워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까? 부근 괜찮은 자리는 없을까 등등....상념이 이어지면서
우리 집 2층에서 멍청히 앉아 노트에 뭘 적고 스케치하던 이소가 보이더군요.
20권에 이르는 이런 스케치북이 이제 영구보존용으로 처리되고
낡은 실물 그대로 복사본도 만들었다는 연락을 받고 보려 가는 길이었습니다.
올라오는 길에 전시된 많은 작품들이 모두 삐까뻔쩍한데 초라한 모습을 한 이소의 배가 오히려 돋보였습니다.
‘씰데없는 짓 고만하고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고 하던 무식한 나의 모습이 겹쳐지면서
또 다른 페이소스가 밀려들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집사람도 이 배를 옮길만한 장소를 주변에서 찾아보았는데 몇 군데 좋은 곳이 보이더라고 하더군요.
10살 차이로 어릴 때 이소를 업고 줄넘기 놀이를 하면서 키운 집사람의 이소에 대한 각별한 사랑이 겹쳐
더욱 애틋한 마음이 우러났습니다.
이소의 콘크리트 배. 뒤에 보이는 화려한 작품도 유명합니다.
콘크리트로 만들어 물어 뜨지 못하는 이소의 배는 박용철의 시 ‘떠나가는 배’를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노량을 건너 남해 섬에서 어머니가 버스로 혹은 걸어서 금산 자락에 닿았을 즈음엔
이미 오후가 되었을 것이고 여기서 보리암으로 순례 길을 오를 때쯤 서산에 저녁별 금성이 나타나
길을 안내하였겠지요. 바그너의 <탄호이저(Tannhäuser)>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순례자의 합창’과 ‘새벽별’ 그대로일 겁니다.
물론 완전히 다른 상황이죠. 탄호이저는 비너스의 성에서 주지육림에 빠져 살다가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와서
죗값을 치루기 위해 순례자의 길에 나서지만 그의 죄는 교황의 지팡이에 새 순이 돋아나야 구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라는 말을 듣고 절망합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며 기다리던 애인 엘리자베드는 첫 순례자들이 돌아왔을 때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죽습니다.
돌아오지 않을 애인을 그리며 ‘죽음을 예시하는 저녁노을이 대지를 뒤엎을 때’ ‘가장 빛나는 당신, 가장 아름다운 별이여’
‘천사가 되어 대지를 비추어다오’라고 기도합니다. 탄호이저는 두 번째 순례자들과 함께 돌아오지요.
교황의 지팡이에 새순이 돋았다고 합니다. 구원을 받은 것이지요.
어머니는 속세에서 무슨 죄를 지었던가요?
어머니는 나를 포함한 주변 모든 사람들의 불행을 자신이 전생에 지은 업보 탓으로 돌립니다.
얼마나 큰 죄악이 쌓였으면 남편을 일찍 잃고 바로 그날 저녁 아들을 낳아 이토록 고된 나날을 살아야 하는가?
이 속죄의 길을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가, 스스로 물었겠지요. 영국에서 귀국한 뒤 어머니를 모시고
고성 문수암으로 갔습니다. 여행도 겸해 여수로 가서 하루 놀았습니다.
이때 남해 보리암은 지나쳤습니다. 어머니가 한마디만 했어도 갔을 것인데 아마도 애써 피했는지 모릅니다.
여수에서 에인젤 호라는 고속정을 타고 통영으로 갔지요.
우리는 영국 도버에서 비슷한 고무보트를 타고 영불해협을 건너 프랑스 칼레에 닿아 파리까지 기차로 간 적이 있습니다.
2차 대전 중 상륙정으로 개발된 것이라는 데 제트 엔진으로 배가 물보라를 치면서 수면 위로 나르더군요.
그리곤 모래사장에 사뿐히 앉더군요. 에인절 호는 이보다는 빠르지 않고 또 작았는데
어머니는 배가 속도를 내자 마음속으로 기도하더군요.
그런데 삼천포 부근에서 안개가 짙어 앞이 보이지 않자 옆에서 들릴 정도로 기도소리가 높아지더군요.
배는 통영까지 가지 못하고 삼천포로 빠져 우리는 버스로 사천, 고성을 거쳐 통영으로 갔습니다.
어머니는 이후 다시는 우리와 여행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서울에 새집을 지을 때 우리와 간섭받지 않고
따로 생활할 수 있도록 완전히 분리된 방을 만들었지만 결코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구요.
지금은 내가 잘 쓰고 있습니다.
나의 이 같은 기분을 우리 일행들이 알 리가 없지요.
일행은 여기저기 구경하고 동행인 아들의 부인이자 건축가 지어 ‘아름다운 집’으로 남해군청이 선정한
‘소솔집’을 찾았습니다. 주인이 서울 올라가 빈집이지만 대문이 걸려있지 않아
마당에서 놀다가 집주인에게 전화를 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집 문 같은데 손대지 마세요.
비상벨 걸어 놓아 경찰이 출동해요.’하더군요.
깜짝 놀라 집을 나와 숙소로 돌아왔습니다.(2022.2.25.) <계속>
소솔집
<이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국제정치학 박사(런던정치경제大/LSE)/한국일보 사회~외신부 기자(견습22기)역임/近著: "Korea 1905~1945"
(From Japanese Colonialism To Liberation And Independence), "삼국통일의 정치학", "제국주의와 언론"/
부산고~서울대 문리대 영문학과 졸/고성 産>
다인종사회에서 같은 생김새가 갖는 힘
권정희
고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이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 “연방대법원에 여성법관은
몇 명이면 충분할까?” 긴즈버그의 답은 “9명”이었다. 연방대법을 여성이 독차지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수백년 차별로 벌어진 격차와 뇌리에 박힌 불공정을 바로잡으려면
여성법관 몇 명으로는 턱도 없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가 어수선하던 지난달 25일 조 바이든 대통령은 연방대법관 후보를 지명했다.
이번 회기를 끝으로 물러나는 스티븐 브라이어 대법관의 후임으로 바이든은 흑인여성 케탄지 브라운 잭슨(51)
연방항소법원 판사를 지명했다. 흑인여성이 대법관에 지명된 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이다.
이로써 바이든은 대선 캠페인 때의 약속을 지켰고, 흑인사회와 여성 및 진보진영은 이정표적 사건이라며 환영했다.
후보를 ‘흑인여성’으로 못 박은 것과 관련, 공화당 일각에서는 차별적 비아냥이 있었다.
왜 ‘흑인’이고 ‘여성’이어야 하는가. 미국은 다인종 사회이지만 다양한 인종이 온전하게 공존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력이 거주지역을 가르고, 기득권 집단이 변화에 소극적이면서 사회의 상층부로 갈수록 하얗다.
최고권위의 상징인 연방대법은 특히 하얗다.
“오래도록 연방대법원은 미국처럼 보이지 않았다”고 바이든은 잭슨 판사 지명 발표 중 말했다.
남녀 반반에 인종이 다양한 게 미국의 모습이지만 현재 연방대법은 남성 6명 여성 3명, 백인 7명 유색인종 2명이다.
대법 233년 역사를 돌아보면 역대 대법관 115명 중 거의 전부(108명)가 백인남성이다.
여성은 5명 비백인은 3명뿐이었다. 투표권, 교육, 취업, 거주지 등 미국민들의 삶은 백인남성의 관점에서
재단되었다는 말이 된다. 다양성 반영을 위해 바이든은 인종과 성별, 이중으로 소수계인 흑인여성을 지명했다.
인종이 다양하고, 인종편견이 엄존하는 사회에서 같은 생김새가 갖는 힘은 크다.
이민초기 한인학부모들이 낯선 미국학교에서 한인교사를 만났을 때의 안도감이 좋은 예이다.
대의민주주의 사회에서 각 인종과 민족을 대표하는 정치인 혹은 판사가 필요한 것은 공정성 때문이다.
집단이나 개인이 억울한 일 당하지 않고 공정하게 대우받으려면 경험과 정서가 비슷해서 그 집단/개인을
대변할 수 있는, 같은 생김새의 대표가 필요하다. 흑인여성 대법관의 상징적 의미는 크다.
소수계가 판사석에 앉으면 재판은 달라질까. 답은 예스이자 노우이다.
연방법원을 대상으로 한 조사를 보면 판사의 인종이나 성별은 재판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미국 최초의 여성대법관인 샌드라 데이 오코너가 한 말이 있다.
“나이든 현명한 여성과 나이든 현명한 남성이 도달하는 결론은 같을 것”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그러하다.
하지만 성차별이나 인종차별 케이스는 다르다. 판사의 정체성이 영향을 미친다.
성차별 소송에서 여성판사는 남성에 비해 15%, 인종차별 소송에서 흑인판사는 백인에 비해
38% 더 피해자 승소판결을 내린다. 3인 합의부 재판에서는 여성/흑인 판사가 한명만 배석해도
차별 관련 판결이 달라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9년 봄 연방대법에는 애리조나 학교 대 13세 소녀 케이스가 올라왔다.
소녀가 아이뷰프로펜을 팬티 속에 감췄다며 교직원들이 양호실에서 옷을 홀딱 벗기고
몸수색한 것이 헌법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가리는 재판이었다. 당시 브라이어 대법관은 이런 말로 좌중을 웃겼다.
“내 어릴 적 경험으로 볼 때, 아이들은 체육복 갈아입느라 하루에 한번은 학교에서 옷을 벗었고,
그때면 누군가가 팬티 속에 뭔가를 찔러 넣곤 했다.” 법정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때 웃지 않는 한사람이 있었다. 당시 유일한 여성대법관이던 긴즈버그였다. 그는 말했다.
“그들 누구도 13세 소녀가 되어본 경험이 없다. 여자아이에게 얼마나 예민한 나이인지 그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이후 긴즈버그와 남성동료들 사이에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해 여름 연방대법은 소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여성법관의 존재가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했다.
지난해 3월에는 연방하원에서 사법부의 다양성 관련 청문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 에드워드 첸 연방지법 판사가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는 ‘연방정부 대 코레마추’ 케이스를 예로 들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후 미국은 2차 대전에 참전하면서 서부해안을 군사지대로 선포하고
일본계 주민들을 강제추방, 집단수용했다. 스파이 활동으로 국가안보를 해칠 위험이 있다는 논리였다.
이에 23세 일본계 남성 프레드 코레마추가 소송을 제기했다. 똑같이 적국인 독일계와 이탈리아계는 그대로 두고
일본계만 추방한 조치를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연방대법은 일본계가 더 위험한 경향이 있다며 연방정부의 결정을 옹호했다.
첸 판사는 물었다. “당시 법정에 일본계 판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다인종 사회에서 우리와 생김새가 같은 지도자들의 존재는 중요하다.
그들이 있어 우리의 권익이 지켜지고, 그들을 보며 우리의 후손은 꿈을 키운다.
흑인여성 대법관은 소녀들과 유색인종 아이들에게 롤 모델이 될 것이다.
조만간 우리와 같은 생김새의 연방대법관도 보게 되기를 바란다.
<권정희/미주한국일보 논설위원/서울본사 외신부 기자(견습31기) 역임/
숙명여고-서울대 사대 불어교육과 졸/LA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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