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을 넘어서}의 서문
프리드리히 니체/ 김훈 역
진리를 여자라고 가정한다면...... 그럼 어떻게 될까? 모든 철학자들이 독단론자들인 한 그들이 여자에 대해 지극히 미숙하다는 의심이 근거 없는 것일까? 이제까지 그들이 진리에 접근할 때 흔히 쓰던 방식, 즉 오싹할 만큼 엄숙한 태도로 서투르게 강요하는 것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법치고는 아주 부적당하고 졸렬하지 않은가? 그녀가 마음을 주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따라서 오늘날 모든 종류의 독단론을 의기소침하고 위축된 상태에 놓여 있다. 설혹 그것이 아직 버티어 서 있다 해도 사람들은 그것이 서서히 무너져가고 있는 중이거나 아니면 탈진상태에 빠져 있다고 조소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모든 철학적 독단이 이제까지 항시 해오던 버릇대로 아주 근엄하고 단정적인 냄새를 풍긴다 해도 결국 그것은 겉보기에만 그럴싸하지 실은 고상한 치기와 미숙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입증할 만한 근거는 충분하다. 이제까지 모든 독단론자들이 구축해 왔던 그 장엄하고도 절대적인 철학적 건물들이 얼마나 빈약한 기초를 가진 것이었는가 하는 것이 뚜렷하게 인식될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 그것이 기초로 삼아 왔던 것이라는 것은 고작해야 태고 적부터 내려온 아주 낡은 통속적 미신(그 때표적인 것은 주관과 자아라는 미신의 형태로서 아직까지도 여전히 말썽을 빚고 있는 영혼에 관한 미신이다)이나, 문법에 의한 말장난이나 현혹, 혹은 매우 협소하고 매우 개인적이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실들의 무모한 일반화 등이다.
독단주의 철학은 아무리 좋게 봐준다 해도 기껏해야 과거 시대의 점성술처럼 수천 년의 앞일에 대한 약속에 불과한 것이다. 아마 이제까지 어떤 참된 학문보다도 점성술에 더 많은 노력과 돈과 예지와 인내 등이 낭비되었을 것이다. 아시아와 이집트의 거대한 건축양식은 점성술과 그것의 ‘초현실적인’ 주장 덕분에 생겨났다. 모든 위대한 것들은 인간의 마음 속에 스스로를 영원히 새겨넣기 위해 우선 그같이 거대하고 위압적인 가장假裝을 하고 지상에 군림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모양이다. 아시아의 베단타 철학과 유럽의 플라톤주의 같은 독단주의 철학은 바로 그같은 가장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과오 가운데서도 가장 고약하고 가장 지속적이고 가장 위험한 것은 한 독단론자의 과오, 즉, 순수정신과 선 자체를 날조해낸 플라톤의 과오였다는 점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에 대해 지나치게 불쾌하게 생각지는 말자. 이제 그 과오는 극복되고 유럽은 악몽에서 깨어나 다시금 자유롭게 숨쉬고 있으며 최소한 보다 더 건강한 잠을 즐길 수가 있으니까. 그러한 과오에 대한 투쟁을 통해 배양된 모든 힘의 상속자인 우리의 사명은 오로지 깨어 있는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플라톤이 그랬던 것처럼 선과 정신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그것은 분명 진실을 호도하고 생의 전망과 근본조건을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리가 의사라면 이렇게 물어야 마땅하리라. “고대의 가장 아름다운 꽃인 플라톤이 어디서 그런 병을 얻었을까? 역시 사악한 소크라테스가 그를 타락시켰을까? 소크라테스는 정말로 청년들을 타락시켜 독배를 마시게 된 게 아닐까?”
그러나 플라톤에 대한 투쟁, 혹은 보다 알기 쉽게 그리고 보다 ‘대중적’으로 말해 수천 년에 걸친 기독교와 교회의 압력에 대한 투쟁----기독교는 ‘대중’을 위한 플라톤주의이므로----은 유럽에 일찍이 본 적이 없는 훌륭한 정신적 긴장을 창조했다. 이제 우리는 그처럼 팽팽한 활을 가졌으니 제아무리 멀리 떨어진 표적이라도 쉽게 맞힐 수가 있다. 물론 유럽인들은 이러한 긴장을 재난과 위기로 받아들여 이미 두 번씩이나 활줄을 늦추려는 시도가 대규모로 행해졌다. 첫 번째는 제주이트주의에 의해서, 그리고 두 번째는 민주주의의 개화開花에 의해서였는데, 민주주의는 출판과신문 구독의 자유의 덕분으로 사실상 정신이 더 이상 쉽사리 ‘위기’ 상황에 빠져들지 않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독일인들은 화약을 발명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해 마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에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인쇄술을 발명했다.) 그러나 우리는 제주이트도 민주주의자도 아니고 완전한 독일인조차 못된다. 우리는 다만 건강한 유럽인들이고 자유로운 극히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우리는 아직도 전면적인 정신의 위기와 활의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감지하고 있을 것이다. 화살과 임무 그리고----누가 알까마는----목표까지도......
실스 마리아 어페 엔가딘에서
1885년 6월
가장 높은 수준의 통찰력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가질 만한 자질도 능력도 없는 사람들이 무단히 배워서 사용하게 되면 어리석음이 되어버리고 때로 범죄가 되기도 한다. 통속적인 것과 비교적秘敎的인 것----과거, 인도, 그리스, 페르시아, 이슬람교 지역 등의 철학자들, 간단히 말해서 계급 질서를 인정하고 평등이나 평등한 권리를 용납지 않았던 지역의 철학자들 사이에서만 알려졌던----과의 차이는 통속적인 접근방식이 아니라 밖에서 온 것이고, 밖으로부터 보고 평가하고 측정하고 판단하는 것이라는 점 때문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차이점은 통속적 접근 방식이 사물을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데 반해 비교적 방식은 위에서 내려다 본다는 데 있다. 비극조차도 더 이상 비극적으로 보이지 않으며 모든 세상 괴로움을 한눈에 조감할 수 있는 정신의 극치라는 것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높은 데서 내려다보면 반드시 어쩔 수 없는 연민을 느끼게 되고 따라서 고민을 더하게 된다고 누가 감히 단정지을 수가 있단 말인가?
높은 수준의 인간에게는 즐거움이 되고 자양분이 되는 것도 이들과 전혀 성질을 달리하는 저열한 인간에게는 독이 된다. 평범한 인간의 미덕이 철학자에게는 악덕과 결점이 될 수도 있다. 높은 수준의 인간이 타락하고 전락하게 될 경우, 그는 바로 그러한 전락상태로 인해 자신이 새로 끼어들게 된 하층권의 사람들로부터 성자처럼 숭배를 받을 수도 있다. 정신과 건강상태에 따라 상반되는 가치를 갖는 책들이 있다. 즉, 그 책들은 저급한 정신과 빈약한 생명력을 가진 인간이 읽느냐, 아니면 높은 정신과 힘찬 생명력을 가진 인간이 읽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전자의 경우에는 이 책들은 위험한 것이 되고 파괴와 분열로 인도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에는 용감한 자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선도자의 외침이 된다. 만인을 위한 책은 항시 좋지 않은 냄새를 피운다. 거기에는 하찮은 인간들의 체취가 배어 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숭배하는 곳에서는 언제나 악취가 풍긴다. 만일 순수한 공기를 마시고 싶어한다면 교회에는 안 가는 것이 좋다.
----{선악을 넘어서}에서
인간은 자신이 홀로 설 수 있는 능력과 스스로를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 났는지 알기 위해 적절한 때를 골라 자신을 시험해 봐야 한다. 그 시험이 비록 가장 위험한 게임이고 종국에는 자기 자신 밖에는 증인이 돼주고 재판관이 돼 줄 사람이 없는 그런 시험일지라도 그것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타인에게 매여서는 안 된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모든 인간은 감옥이며 밀실密室이다. 조국에 매여서는 안 된다. 조국이 혹독한 시련에 처해 있고 절실히 도움을 필요로 한다 하더라도. 부강한 조국으로부터 마음을 떼어놓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연민에 매여서는 안 된다. 우연히 고귀한 인간이 보기 드문 고통과 곤경에 처해 있는 것을 보게 됐을 지라도. 학문에 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 쌓아 둔 듯한 가장 귀중한 발견들로 우리를 유혹한다 할지라도. 자기초월에 매여서는 안 된다. 눈 아래로 더 먼 곳을, 좀 더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 더 높이 비상하려는 욕심을 부리는 새처럼 비상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 자신의 미덕에 매여서는 안 된다. 훌륭하고 뛰어난 인간이 겪는 위험 중의 위험은 친절함이라는 부분적 미덕 때문에 자신의 전체를 희생하는 일이다. 그는 거의 아무렇게나 낭비하듯 스스로를 소모해 버리고 관용의 미덕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악덕에 가까운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은 스스로를 보존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독립성에 대한 가장 어려운 시험이다.
----{선악을 넘어서}에서
*이 글은 김훈 역의 {선악을 넘어서}(청하, 1982년)의 서문이며, 독자 여러분들은 이 책을 꼭 구입해서 정독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