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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교회용어 총정리
◇교회생활-1 |
* 당회장, 위임목사→담임목사 |
* 예수→예수님, 성령→성령님 |
* 전야제→전야 축하행사 |
* 사모→사모님(통합) 부인(성결) 아내(대신) 사이버교회→사용 제한 |
* 입신(入神)→사용 불가 |
* 하나님의 몸된 교회→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
* 수양회→신앙수련회 |
* 태신자→전도대상자 |
* 안집(‘안수집사’의 줄임 말)→사용불가 |
*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 드립니다→주님 안에서 문안합니다, 주님 안에서 문안 드립니다 |
* 일요일(공일)→주일 |
* 개신교회→개혁교회(대신) |
* 교회→예배당 교회당 |
* 교회 창립→교회 설립 |
* 달란트 시장→사용불가 |
* 부흥사→사용 불가(대신) |
* 성도(개인 지칭시)→신자, 교인, 교우, 그리스도인 |
* 성의(聖衣)→사용 불가 |
* 수석→선임 |
* 애찬식→사용 불가 |
* 유인물→인쇄물 |
* 제단,성전→사용 불가 |
* 제사장→목사,목회자 |
* 제직→직원 |
* ○○주일→○○를 감사하는 예배(대신) |
* 지교회,지성전→사용 불가(대신) |
* 집사/안수집사→구별 |
* 천당→하나님의 나라,천국,하늘나라 |
* 할렐루야→안녕하십니까,평안하십시오 |
* ‘가(可)’하면 ‘예’하시오→옳다고 여기시면 ‘예’라고 하십시오 |
* 초대교회로 돌아가자→성경에로 돌아가자 |
** 당회장, 당회장목사 → 담임목사. 당회장(당회 회의 때에만 사용) |
교회의 주보나 게시판의 교회이름 밑에 당회장 목사라고 쓴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
또 어떤 이는 공예배 기도 때 당회장 목사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적절하지 않다. |
당회장은 노회에서 지교회의 치리권을 위임한 것으로 직무와 관련된 칭호이다. |
원래 당회장이란 영어의 Moderator‘모더레이터’로서 토론이나 회의의 사회자 또는 중재자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
예컨대 성례, 당회, 조직과 임면(任免), 법적 대표권과 직위표현, 회의의 사회와 결재, 교회 부속기관의 지도와 감독, |
권징 등에 관한 사무 또는 정치적 법적 행위자로서 직무를 수행할 때 이 호칭을 쓰게 된다. |
"담임 목사"는 목회 직무와 신분과 관련된 호칭이다. 그 교회의 목회를 책임진 사람이라는데 무게가 실려 있다. |
예컨대 기도, 설교, 심방, 상담, 전도, 인도 등의 직무를 책임진 사람을 말한다. |
따라서 당회장은 행정적 경우에만 쓰는 것이 좋다. 그 외에는 담임 목사라고 함이 옳다. |
담임 목사라도 부목사와 구분해야 할 경우가 아니면 "우리 목사님"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 |
이 호칭이 바로잡아지지 않으면 장로를 언제 어디서나 ‘당회원’으로 불러야하는 모순을 낳게 된다. |
** 예수 → 예수님 성령 → 성령님 |
우리의 언어문화는 윗분들을 호칭할 때 ‘님’자의 사용을 엄격하게 가르친다. |
특히 자신이 섬기는 신의 존재를 호칭할 때는 ’님‘자 또는 그 이상의 존칭어를 사용한다. |
예를 들어 불교의 신도들은 ’부처님‘ ’부처님 오신 날‘과 같이 철저히 ’님‘자를 사용하여 높임의 뜻을 나타낸다. |
우리의 기독교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되 그 위(位)는 성부 성자 성령으로 구분하게 되어있다. |
성삼위가 동격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가지고 한동안 논쟁이 활발히 전개된 바 있다. |
그러나 325년 니케야 공회의에서는 제2 위격 예수님의 신성문제가 확정되었고, |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제3 위이신 성령님의 신성문제를 확정하였다. |
이로써 삼위일체의 교리는 기독교에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이처럼 성삼위는 동격이신데 어느 위에는 ‘님’자를 붙여 호칭을 하고, 어느 위에는 그렇지 아니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예수님’ 뿐만 아니라 ‘성령님’을 호칭할 때도 ‘님’자를 사용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
이제 한국의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희생’ |
‘성령님의 역사’로 언어의 순화를 가져 올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
** 할렐루야! → 조심하여 사용할 것 |
'할렐루야'(HALLELUYAH)는 히브리어 음역으로 |
할렐루(hallelu, 찬양하다)와 예호와(YHWH)의 단축형인 야(YAH)의 합성어로서 |
그 뜻은'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이다. |
이 말은 주로 시편의 처음이나 마지막에 나오며 예배의식에 사용되었다(시 106: 48). |
할렐루야는'예배'에서'하나님'을'찬양'하는'절정의 환호성'이다. |
때문에 할렐루야를 사람들끼리 인사하는 말로 써서는 안 된다. |
할렐루야는 사람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지 사람들끼리 하는 인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
그러면 설교자가 설교도중에 아멘을 유도하기 위해'할렐루야!'하는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
역시 합당하지 않다. 설교는 오직 말씀선포이다. 그리고 찬양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환호적 송축이다. |
따라서 그 전개에 있어서 구분이 되어야 한다. |
말씀이 선포될 때 감화감동을 받은 성도가 자발적으로'아멘'해야 그것이 정상이다. |
설교도중에 할렐루야를 돌발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말씀의 선언적 측면에서 볼 때에도 맞지 않는다. |
** 제단 → 예배당 |
제단'이라는 말 대신에 예배당 또는 교회당이라고 해야 한다. |
신약시대에는'제단'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는다. |
구약시대에도 제단은 성전 뜰에 있었다. |
제단에서 번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 등의 제사를 드렸다. 소제를 제외하고는 모두 짐승을 제물로 드렸다. |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
단번에 (히 10: 10) 영원한 제사(히 10 : 12)를 드리심으로 더 이상'짐승'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다. |
신약시대 성도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들이다(요 4 : 24). |
** 성전 → 예배당 |
사람들이 예배하러 가면서 성전에 간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예배당(교회당) 간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
구약시대에는 예배드리는 곳을 성전이라고 하였다. |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성령께서 내주(內住)해 계시는 성도의 몸이'성전'이다.(고전 3: 16 고전 6: 19) |
신약시대 성도들은 예배드리는 곳, 즉 장소로서의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지 않는다. |
그것은 곧 우리의 몸이 성전이기 때문이다. |
** 장로님 사모님 → (직분에 따라)권사님, 집사님 |
장로 부인의 경우 그의 직분을 따라 호칭해야 한다. |
집사이면 '아무개 집사님'이라고 하고 권사이면 '아무개 권사님'이라고 해야 한다. |
'장로님 사모님'이라는 말은 맞지 않는다. |
'사모'(師母)라고 하는 말은 '스승의 부인'이라고 하는 뜻이다. |
교회에서는 이 호칭이 교역자의 부인에게만 적용되어야 한다. |
교인들이 목사의 부인을 부를 때는 '사모님'으로 호칭하는 것이 좋다. |
그러나 목사 자신이 자기 아내를 '사모'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
목사 당사자에게는 다만 아내일 뿐이지 사모가 아니기 때문이다. |
** 수석 부목사 → 선임 부목사, 수석 장로 → 선임 장로 |
개혁교회 특히 장로교회는 직분의 계급과 서열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수석'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모순이다. |
수석(首席)이라는 말은'맨 윗자리'라는 뜻이고 그 반대말은 말석(末席)이다. |
따라서'수석' 이라는 말을 쓰게 되면 서열을 매김 하여 계급화 하는 것이 되게 된다. |
그러므로 수석 부목사, 수석 장로 등의 표현은 합당치 않다. 대신 선임 부목사, 선임 장로라고 해야 한다. |
이때의 선임은 물론 임직의 선후를 따라 지칭한 것이다. |
더러는 교회 안에서 영향력 있고 사회적으로 지위와 명망이 잇는 장로를 임직 선후와 관계없이 |
수석 장로로 지명하는 사레가 없지 않으나 이것은 더더욱 부당한 것이다. |
** 평신도 → 성도 |
"집사님이세요?" 이런 질문에, "아니에요. 평신도예요." 하고 대답하는 경우를 흔히 본다. |
요즈음 '평신도를 깨운다'느니, '평신도 훈련'이니 하여 '평신도'라는 말을 보편화하여 쓰고 있는데 |
과연 여기에 문제는 없는 것일까? |
평신도라는 말은 주후 2세기 경 클레멘스가 처음 사용했다고 한다. |
그는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서 처음으로 장로, 집사, 평신도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
성직자와 평교인을 갈라놓았는데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에서는 지금도 성직자와 평신도를 엄히 구분하고 있다. |
교회에서 평신도의 위치를 되찾으려는 노력이 1954년 WCC 에반스턴 회의에서 제기되었으며 1958년 |
헨드릭 크래머가 'A Theology of Laity'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평신도신학'이라는 전문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
'평신도신학'은 성직자의 개념을 없앨 뿐 아니라 |
성직자를 평신도의 위치로 끌어내리려고 시도하였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우리 개신교에서는 만인제사장설에 근거하여 기능상 직분자와 평교인을 구분하고 있을 뿐 |
계급상의 구분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굳이 평신도신학을 도입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
평신도'란 말 자체가 성직자라는 개념과 구분을 지으려는 의도에서 생긴 말이기 때문에 |
바람직한 표현은 아니라 하겠다. '평신도' 대신 그냥 '성도'라는 말을 사용하면 무난하지 않을까? |
혹'일반성도'로 쓰자는 의견이 있으나'일반성도'는'특별성도'를 전제로 한 말이어서 합당해 보이지 않는다. |
** 종님 → 종 |
더러 기도인도자 가운데 - 기도하면서"오늘도 주의 종님께서"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된다. |
그러나 문법상'종'다음에'님'자를 붙이는 것은 모순이다. 그냥 '종'이라고 해야 한다. |
성경에 보면 우리를 '종'으로 표현한 곳이 여러 군데 있음을 보게 된다. |
특별히 마 25: 14-31절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에 우리가'종'인 사실이 강조되어 있다. |
성경에 우리를 종이라고 한 것은 |
①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해야 할 자라는 뜻이고 |
② 모든 것(생명을 포함한 모든 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
③ 우리는 다만 맡은 자요 관리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데 있다. |
** 사모 → 사모님 |
예로부터 스승을 높여 사부님이라 했으며 이에 걸맞게 스승의 부인을 높이어서 사모님이라 불렀다. |
그런데 요즈음 교회 안에서는 목사 부인도 사모님이라 부르고 있다. |
선생이 자신을 사부라 부를 수 없듯이 선생이나 목사도 자기 부인을 사모라 부를 수 없다. |
그러므로 어느 목사가 자기 부인을 가리켜 사모라고 한 다음과 같은 표현은 잘못 된 것이다. |
“우리 집 사모는 다녀왔지요” 또한 선생 부인이나 목사 부인들도 자신을 사모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
그런데 최근 목사 부인들이 모여서 “사모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는데 이 “사모회”는 |
바람직한 용어가 아니다. 왜냐하면 목사 부인들이 자신을 사모라 지칭했기 때문이다. |
이 “사모”는 주로 제자나 평신도들이 선생 부인이나 목사 부인을 높여 불러 주는 말이기 때문에 실제 |
사용 될 때는 “사모님”이 될 수밖에 없다. |
** 성서 → 성경 |
성경은 "성서"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성경"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요 5 : 39, 딤후 3 : 16). |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스스로를 나타내신 문자 계시이고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다. |
'성서'라는 말에 이러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
그러나 '성서'는 분해적이며 주석적이고 설명적인 내용을 문서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
속(俗) 문자에 대한 대칭적인 종교 문헌적 총칭이다. 광의적으로 주석류와 설교문도 성서라고 할 수 있다. |
이처럼'書(서)'는 ① 책 ② 글 ③ 편지 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문자로 쓰여진 책이라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
성령님께서는 글자 한 자 한 자 감동하시어서 성경을 기록하도록 하시었다. |
그러므로 성경은 글자 하나 하나가 다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
따라서 성서는 신적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성경'과는 구분된다. |
성경을 어원적으로 보면'기록된 문서'라는 뜻을 가진 헬라어의 '비블로스'에서'책'이라는 |
뜻을 가진'비블리아'가 유래되고 이로부터 영어의 '바이블'로 표현되고 있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바이블'을 거룩한 정경(正經, Canon)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
성경은'영감'(유기적, 완전축자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딤후 3: 16, 벧후 1: 21) |
무오하고(시 119: 140) 하고 불변하는(마 5: 18) 진리이다. |
말씀을 사모하고 진리파수를 생명으로 하는 교회라면 반드시 '성서'대신에 '성경'이라고 해야 한다. |
<< 회의 관련 용어는 이런 말이 있나 싶을 정도로 생소합니다.
그만큼 회의가 일방통행식으로 진행되는 것을 은혜롭다고 하면서
정상적으로 회의를 진행하는 훈련이 안되었다는 증거죠
쓰지 말고 고쳐서 사용해야 한다는 용어 해설의 취지에서 벗어나
오히려 회의 용어에 이런 것들이 있으니 알고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글이 될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회의를 바르게 진행하고
회의를 통하여 교회가 회복되는 일을 기대한다면 너무 과한 민주화일까요?>>
◇회의 용어 | |
* 자벽→지명 임명 | |
* 휘장분배→꽃 증정 | |
** 고퇴 → 고퇴 또는 의사봉 (의사 결정 과정에서 의장이 맟치로 책상을 두드리며 결정을 선포하는 것) | |
한국의 장로교회는 정규 회의에 사용하는 의사봉(議事棒)을 ‘고퇴’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 |
이 용어는 국가나 사회 기관에서 전혀 사용하지 않는 명칭이며, 한국 교회 가운데서도 장로교회에서만 | |
제한적으로 쓰고 있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재 교회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노회를 창설하는 회의가 열렸던 때의 일이다. | |
절차위원장이 은으로 십자를 면에 새기고 청홍으로 태극을 머리에 그리고 광채 있는 은으로 띠를 띤 | |
견고한 ‘마치(망치)’를 마삼열 회장에게 전달했다. | |
회장은 이 물건이 영원토록 대한 장로교 노회의 마치(망치)가 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 |
그런데 이 ‘마치’란 이름이 속되다는 의견이 있어 회장은 기일, 한석진 두 사람에게 이름을 개정하도록 | |
임무를 맡겼다. 두 위원은 이틀 후 회의에서 ‘나무마치 퇴(槌)’자와 ‘고두’라 할 때 쓰는 ‘두드릴 고(叩)’자를 | |
합하여 ‘고퇴’라 정했음을 보고하였고, 이것을 길선주 회원의 동의로 받아들였다. | |
이처럼 ‘고퇴’라는 명칭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 노회에서 작명되어 결의 과정을 거친 것이므로 공식적 효력을 | |
가진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용어가 노회 창설 때 제작된 의사봉에 대한 개별 명칭으로 지어졌고, | |
기독교적 의미를 포함하지 않은 이름이며, 장로교회 밖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특수용어임을 고려하여, | |
장로회 총회의 상징적 의사봉 만을 ‘고퇴’라 부르고 | |
그 외에는 ‘의사봉’이나 ‘사회봉(司會棒)’이라는 현대적 용어로 바꾸어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 |
자벽 → 지명, 임명 (임원을 선출할 때 회장, 서기, 총무 정도를 공개 선출하고 나머지 임원을 회장이나 회장단에서 알아서 지명하여 임명하는 것) | |
교회 회의록에 종종 ‘회장 자벽’이라는 기록이 보이고, 심지어 ‘자백’이라고 잘못 써 놓은 사례까지 발견되는 | |
경우가 있다. 고어에 유래를 두고 있어 현대에 와서 거의 세력을 잃어버린 말을 교회가 고수하다보니 이처럼 | |
생소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 |
자벽(自?)이란, 장관이 자기 뜻대로 관원을 추천하여 벼슬을 시키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 |
이는 <수교집록(受敎輯錄)> <조선철종실록(朝鮮哲宗實錄)>에서 용례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 |
자벽 행위는 각 관아의 우두머리가 아무런 기준도 없이 자기 사람들을 특정한 자리에 대거 기용함으로써 | |
심각한 폐단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이 용어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의미나 정서가 결코 긍정적일 수 없었다. | |
이 말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의장이 임의로 어떤 임원을 임명하는 일’로 바뀌었으나 어감은 여전히 부정적으로 | |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각종 회의에서 굳이 이 용어를 사용하는 예가 있다. | |
대체로 회의 벽두에 특별위원을 선정하는 경우에 국한하여 사용되고 있는데, | |
회장의 자의임명이 불가피한 형편이라면 ‘회장 자벽’이라는 용어 대신에 ‘회장 임명’또는 ‘회장 지명’으로 | |
고쳐 쓰는 것이 좋겠다. | |
증경 → 전(前) (전 회기에 역임하였던 임원을 높여부르는 뜻으로 잘못 사용되는 용어) | |
‘증경(曾經)’이란 용어는 우리나라에서는 사용하지 않았고, 중국의 고대시가에 기원을 둔 특수한 말이다. | |
증(曾)은 ‘일찍이’라는 뜻이고, 경(經)은 ‘지내다’라는 훈을 가지고 있으므로 ‘일찍이 지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 |
있다. | |
고대 중국 당나라의 시인이었던 노조린(盧照隣)이라는 사람의 작품 <장안고의(長安古意)>에서 ‘증경’이라는 | |
시어가 나오는데, ‘증경학무도방년(曾經學舞度芳年)’ -일찍이 춤 배우느라고 젊은 시절을 보내었다네- 정도이므로 | |
그다지 심오한 뜻을 갖고 있지 않다. | |
한자어를 전통적으로 존중하며 차용하기 좋아했던 선비들이 이런 희귀한 용어를 우리나라에 들여왔고, | |
한국 교회도 교단을 위하여 일한 경력이 있는 분들에게 경의를 표시하고자 이 단어를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 |
그러나, 교회 바깥에서는 이 용어를 전혀 쓰지 않고 있어 ‘증경대통령’ ‘증경총장’ ‘증경사장’이라는 호칭을 | |
이해하지 못한다. 오직 교회에서만 ‘증경총회장’ ‘증경노회장’으로 부르며 심지어 ‘증경청년회장’이라고까지 하여 | |
이 단어를 남용하는 실정이다. | |
신분을 존중하기 위해 중국의 고대어를 써야 할 이유는 없다. | |
‘전총회장’이라고 하여 존대의 정도가 손상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 |
** 휘장분배 → 꽃 달아드리기, 꽃 증정 (회의나 행사에서 중요한 일을 맡았거나 진행을 담담하는 사람에게 표시나도록 꽃을 달아 주는것) | |
흔히'꽃을 달아드는 것'을 휘장분배라고 표현하고 있다. | |
그러나 휘장(徽章)은 신분이나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 모자나 의복에 붙이는 표를 가리킨다. | |
그리고 분배(分配)는'고르게 나누어 준다'는 뜻이기 때문에 이 말 역시 축하받는 사람에게 적용하기에는 | |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따라서 '꽃 달아 드리기'라고 순수한 우리말을 쓰는 것이 좋다. |
<< 용어와 관련하여 글을 올리다 보니
용어 중에는 우리교단 총회에서 결정한 용어도 있고,
타 교단에서 결정한 용어도 있습니다.
그리고 총회 차원은 아니고 교계의 덕망있는 목사님들이
정리하신 내용들도 있습니다.
용어를 표시한 문자색을 청색으로 표기한 것이 우리교단 총회에서 결정한 용어이며,
타 교단에서 정리한 내용은 ( )내에 교단명을 표기하였습니다.
용어표기 문자 색이 검정인 것은 총회 차원에서 결정한 용어가 아니라
교계의 덕망있는 목사님들이 정리한 내용들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장례 |
무속신앙과 불교 사상을 담은 용어가 장례에 많이 쓰이고 있다. |
기독교의 장례는 하나님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부활의 신앙’을 따른 예식인 만큼 용어를 주의해서 써야 한다. |
* 소천하셨다→별세하셨다,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숨을 거두었다 |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
* 미망인→부인,유족 |
* 칠성판(七星板)→고정판 시정판 |
* 영결식,고별식→장례예식 |
* 삼우제(三虞祭)→첫 성묘(省墓) |
* 추도식→추모식 |
* 추도예배→추모일 예배(대신) |
** 소천(召天)하셨다 →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숨을 거두었다. |
최근에 한국 교회 어느 지도자의 죽음을 알리는 광고에서 “고 000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소천하셨다”는 |
문장을 보게 되었다. |
한국 교회의 역사와 전통에서 대표적으로 손꼽히는 교회에서 발표한 이러한 광고는 |
매우 부끄러운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소천(召天)이라는 어휘는 우리말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로서 교회에서 |
흔히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
이해한다. 이러한 의미의 표현이라면 이 어휘는 능동형으로 사용할 수 없고 수동형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
소명(召命)이나 소집(召集)이란 단어의 경우 능동형일 때 그 주체는 부르는 존재를 말한다. |
예를 들면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교를 찾은 학생이 “나는 소명했다”고 말하지 않고 “나는 소명을 받았다”고 |
표현한다. 비록 사전에도 없는 어휘이지만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하고자 하는 경우 “소천을 받았다”로 해야 한다. |
그러나 이토록 실수가 많은 용어를 사용하는 것보다 한국 교회가 지금까지 불러온 대로 죽음을 알리고자 하는 |
경우는 “별세(別世)하셨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로 사용함이 적절하다고 본다. |
** 운명(運命)하셨다 → 돌아가셨다 |
'타계하셨다'라든지'운명하셨다'는 말 대신에'돌아가셨다'라고 해야 한다. 타계(他界)라는 말은 불교 용어이다. |
불교의 십계(十界) 가운데 인간계 이외의 세계를 말한다. 그러므로'돌아가셨다'라고 해야 한다. |
'돌아가셨다'는 말이야말로 매우 성경적인 말이다. |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는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한 성경적인 용어이기 때문이다. |
이 땅의 생명이 다하여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는 말이니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가? |
소천(召天)하셨다 또는 하늘나라 가셨다가 좋고 별세(別世)라는 말이 없는 것은 아니나 |
별세보다 더 좋은 말은 돌아가셨다 이다. |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
고인의 명복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장례문화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용어이다. |
그런 까닭에 누구나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의 교회에서도 흔히 사용하고 있는 현장을 보게 된다. |
예를 들면 어느 장례예식에서 목사가 “이제 침묵으로 고인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드립시다” 하는 경우도 있었고, |
조문객이 문상을 하면서 유족들에게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고 인사를 한다. |
그러나 '명복(冥福)'이라는 용어는 우리 기독교에서 사용하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
이 말은 불교의 전용어로서 불교 신자가 죽은 후에 가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곳을 명부(冥府)라 하는데 |
거기서 받게 되는 복을 가리킨 말이다. 곧, 죽은 자들이 복된 심판을 받아 극락에 가게 되기를 바란다는 |
불교의 내세관에서 통용되는 용어이다. 이러한 용어가 지금껏 교회에서 종종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매우 |
부끄러운 일이다. |
우리의 교회에서는 그러한 용어 대신 순수하게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든지, |
또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와 같은 말로 유족을 위로함이 타당하다. |
** 미망인 → 고인의 부인, 고인의 유족 |
미망인(未亡人)이라는 용어는 순장(殉葬)제도에서 유래된 말이다. |
순장이란 어떤 특정한 사람의 죽음을 뒤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
강제로 죽여서 먼저 죽은 시신과 함께 묻는 장례 풍속을 말한다. |
이러한 풍속은 고대 중국의 은나라와 이집트를 비롯하여 아프리카 지역에서 성행하였다. |
특히 인도에서는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따라 분신 자살하여 순장되는 ‘사티?라는 풍습이 |
1829년 법으로써 금지되기까지 존속하였다. |
우리나라에서도 신라의 22대 지증왕 3년(주후 502년)에 왕명에 의하여 순장 금지되기까지 이러한 제도가 |
존속되었다. 이런 순장제도가 성행할 때나 쓰일 수 있었던 ‘미망인’ 이라는 용어의 뜻을 풀어 보면 |
“남편이 죽었기에 마땅히 죽어야 할 몸인데 아직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여인”이라는 뜻이 된다. |
이러한 용어의 뜻을 알았을 때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말임을 깨닫게 된다. |
** 칠성판(七星板) → 고정판 또는 시정판 |
우리의 장례문화에 변화가 일고 있으나 아직껏 가정에서 죽음을 맞은 경우가 많으며 그 때마다 목회자가 |
직접 시신을 다루는 일이 많다. 이때 시신이 반듯하게 굳어지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널빤지를 시신 밑에 깔고 |
손발의 위치를 반듯이 잡아 준다. 여기에 사용되는 널빤지 사용의 전통적인 관례가 이 널빤지에 북두칠성을 |
본 따서 일곱 개의 구멍을 뚫었다 하여 ‘칠성판’이라 부른다. 흔히 우리 교회에서도 적당한 이름을 못 찾아 |
‘칠성판’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다. |
그 유래는 별이 인간의 길흉화복과 수명을 지배한다는 도교의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
우리의 교회가 이러한 토속 신앙의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
그러므로 시신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기에 순수하게 ‘고정판(固定板)’ 또는 ‘시정판(屍定板)’으로 부름이 타당하다. |
** 영결식, 고별식 → 장례예식 |
인간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진행하는 예식을 칭하는 용어로서 ‘영결식’. ‘고별식’. ‘발인식’ 등 다양한 명칭이 있다. |
그러나 그 이름이 담고 있는 뜻이 우리의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
영결식은 ‘영원히 이별한다’는 뜻이며 고별식은 ‘작별을 고한다’라는 뜻이다. |
'영결식'이라는 말은 영원히 이별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성경적이 아니고, |
'고별식'역시 작별을 고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적합하지 않다. 장례식이라고 해야 한다. |
기독교에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교리와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있기에 |
이러한 표현은 적당하지 못하다. 그리고 발인식은 시신을 담은 상여가 집에서 떠남을 뜻하기에 별다른 의미를 |
주지 못한다. 이러한 용어의 문제점을 바로잡기 위하여 본 교단 총회에서는 표준 예식서를 통하여 이미 |
장례예식으로 정리하였기에 이제는 모두가 ‘장례예식’이라는 용어로 통일하여 사용해야 한다. |
** 삼우제(三虞祭) → 첫 성묘(省墓) |
'삼우제'(三虞祭)라고 하는 말 대신에'첫 성묘'(첫省墓)라고 해야 한다. |
우제(虞祭)란 장례를 마친 뒤에 지내는 제사로서 우리의 장례문화에 오랫동안 자리잡고 있었다. |
이 때의 제사는 세 번 갖게 되는데 그것을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라 한다. |
이 중에 아직도 삼우제라는 이름은 교회 안팎에서 사용되고 있는 현실이다. |
최근의 삼우제는 장사 지낸 뒤 3일 만에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고 성묘를 하는 관례로 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
성묘란 시체를 묻고 뫼를 만드는 일, 즉 산역(山役)이 잘 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주목적이다. |
아직도 매장 문화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한국 교회에서는 가족들이 3일만에 성묘를 하는 일이 보편적이다. |
이러한 실정을 감안하여 본 교단의 표준 예식서에는 삼우제라는 이름을 ‘첫 성묘’로 부르도록 하였는데, |
매우 적절한 용어라고 본다. |
◇예배·예식 |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공적인 행위다. 예배와 관련한 용어는 특별히 정제돼야 하며 |
일반사회에서 쓰는 용어와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예배와 예식의 구분도 중요하다. 돌 회갑 졸업 결혼 등은 예배가 아닌 예식으로 표현해야 한다. |
* 사회자→인도자(예배시:통합) 집례자(성결) |
* 성가대→찬양대(성가대는 일본어 ‘세이카다이’에서 따온 말) |
*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사용불가(설교시) |
* 대예배→주일예배(통합) 주일낮예배(성결·대신) 주일공동예배(성결) 저녁예배(대신) |
* 열린예배→열린집회(통합) 사용 불가(대신) |
* 예배 봐준다→사용 불가 |
* 준비찬송→사용 불가(통합) 예배전 찬송(성결·대신) |
* 예배/예식/기도회→구별사용 |
* 삼일예배→수요일 저녁예배 |
* 결혼식→혼인예식 |
* 헌금→봉헌 |
* 축제→잔치(때에 따라 절기행사,축하행사) |
* 하나님의 축복→하나님이 주신 복 |
*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하나님! 복을 주시옵소서 |
* 룻기서 욥기서 잠언서 아가서→룻기 욥기 잠언 아가 |
* 시편 ○장 ○절→시편 ○편 ○절 |
*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설교용어)→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 사랑하시는 하나님(기도용어)→사랑하는 하나님 |
* 주기도문 외우겠습니다→주님 가르쳐주신 대로 기도하겠습니다 |
* 제사,제단,제물→예배,성단,예물 |
* 영(0)시예배,자정예배→송구영신예배 |
* 기도로 폐회합니다→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기도로 기도회를 마칩니다 |
* 예배의 시종을 의탁하옵고→주장하시고,인도하시고 |
* 송영→찬송 |
* 안식일→주일(성결·대신) |
* 특송→찬송 |
* 갈음합니다→그렇게 하시기를 권면합니다,진심으로 축하합니다 |
* 받들어 봉독하겠습니다→받들어 읽겠습니다,봉독하겠습니다 |
* 사도신경 외우겠습니다→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겠습니다 |
* 예배를 드려주다→사용불가 |
* 예배보다→예배한다(대신) |
** 사회자 → 인도자(예배시) |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
사회(司會)라는 말은 회의나 의식을 진행하는 일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
우리의 문화권에서는 사회자라고 하면 마땅히 일반 회의의 진행자를 의미한다. |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예배가 아닌 결혼예식이나 임직식 같은 인간 중심의 의식에서는 |
진행을 맡은 사람을 사회자라 부를 수 있다. |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예배의 현장에서 사회자라는 명칭은 경건성의 결여를 느끼게 하므로 |
단순한 사회자(presider)의 개념을 넘어 예배 인도자(Worship Leader)로 부름이 타당하다. |
인도(引導)의 사전적 의미는 “알려주며 이끄는 일”이므로 예배 인도라는 말을 회의에서의 사회와 |
구분지음이 타당하다고 본다. |
본 교단 1998년 총회에서 통과된 표준 예식서에는 모든 예배의 진행자는 인도자(引導者)로, |
성례전과 같은 예전의 경우는 집례자로 표기하였음을 밝힌다. |
** 성가대 → 찬양대 |
성가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을 표현하는 노래이고, 성가를 예배에서 부르면 찬송 또는 찬양이다. |
'찬양대원'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하는 예배위원이다. |
따라서 성가대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 찬양대라고 불러야 한다. 성경(특히 시편)에도 보면 모두'찬양하라'고 하였다. |
한국교회는 1960년대 전까지'찬양대'라고 불렀었다. |
그러던 것이 출판사들이 흑인영가와 복음송을 합하여 출판하는 과정에서 |
일본의 세이카다이(성가대, 聖歌隊)를 그대로 직수입하여 표현한데서 영향을 받아 |
오늘날'성가대'라고 호칭하는 곳이 많아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고쳐져야 한다. |
**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사용불가(설교시) |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는 한 인간이 특정한 개인이나 단체를 위하여 어떤 사실이나 바람을 주님의 |
이름으로 빌고 원하는 뜻을 표현한 말이다. 이러한 표현이 설교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 타당한가를 연구 |
검토시킨 바 있는 본 교단 총회는 1981년 65회 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연구보고서를 채택한 바 있다. |
먼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기에 설교에 인간의 기도식 기원이나 기도 등의 형식을 개입하는 것은 |
바람직하지 않다. 둘째, 설교는 설교대로, 기도는 기도대로, 축도는 축도대로 하는 것이 좋다. |
셋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의 사용은 회중에게 자극을 주고 흥분시켜 “아멘”으로 응답하지 않고는 |
안 되게 만들어 설교의 질서를 문란케 하고 미신적 기복 사상을 키워 줄 우려가 있다. |
넷째, 설교의 근본 목적이 흐려지고 회중들에게는 설교의 내용과는 관계없이 “아멘”을 하게 하는 식으로 |
유혹되기 쉽다. |
연구위원회는 이상과 같은 내용을 보고하면서 설교시에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를 하지 않도록 |
건의하였고 총회는 이를 아무 이의 없이 통과시킨 바 있다. 이러한 결정은 매우 적절한 것으로서 한국교회의 |
설교 사역을 바로잡는 일이라 보아 설교시에 이 말의 사용을 억제함이 타당하다고 본다. |
** 대예배 → 주일 예배 |
예배는 하나님께서 창세 이후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속의 크신 사랑을 깨달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
감사함으로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는데 있어서 큰 예배가 있고 |
작은 예배가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응답의 행위가 예배일진대, 거기에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다고 말할 |
수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에서는 언제부터인지 주일 낮에 드리는 예배를 지칭하여 대예배라고 부르고 있다. |
이것은 아마도 많은 교회들이 주일 낮에 드리는 예배 때에 가장 많은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
자연스럽게 나온 말인 것 같다. 그러나 분명히 대예배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논리적으로 대예배가 있다면 |
소예배도 있다는 말인데, 어떠한 예배도 하나님 앞에서 소예배일 수가 없다. 그 예배가 하나님 앞에 신령과 |
진리로 드리는 한에 있어서, 어떤 예배도 소예배일 수가 없다. 다만 예배일뿐이다. 물론 시간별로 예배를 |
구분할 수는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일 예배라든지, 주일 저녁(오후) 찬양 예배라든지, 혹은 시간에 따라 |
1부 예배, 2부 예배라고 부르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러나 “대예배”라는 용어는 합당한 말이 아니다. |
** 열린 예배 → 열린 집회 |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1990년대 이후에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
원래 이 예배는 “구도자 예배”(Seeker's Service)로 알려진 집회의 형태로, 서울의 한 대형교회를 통하여 |
소개되면서 한국 교회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
그러므로 본래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구도자”라는 부자연스러운 번역 대신에 1990년대 초에 유행하던 |
“열린”이라는 단어로 의역한 것으로 “구도자의 집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열린 예배는 믿지 않는 |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예배의 자리에 나아올 수 있도록 배려하는 형식과 접근 방법을 택한 구도자의 집회를 |
말한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가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엄밀하게 따져서 |
예배라기보다는 “전도집회”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
대한 응답이기 때문이다. 불신자들, 혹은 구도자들은 아직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도 맺지 않은 사람들이요, |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셨는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
그러므로 그들은 아직 예배드릴 자격도 없고, 예배드릴 마음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예배드리기 위해서는 |
무엇보다 먼저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은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의 구원의 |
은혜와 사랑에 응답하는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된다. 또 한 가지 예배의 기본 정신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에 대해 감사로 응답하는 드림에 있지, 예배를 통해서 무엇을 받거나 추구하는 데 있지 |
않다. 그런데 이런 면에서 볼 때 열린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
문제가 있다. 예배는 하나님을 향한 응답의 행위여야 하지, 인간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
만약에 예배가 회중지향적이 되고, 예배의 근본적인 목적이 드림에 있지 아니하고, 무엇인가 그 예배를 |
통해서 얻어내는데 목적이 있다면 --비록 그것이 영혼구원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인간을 위한 집회이지 |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아니다. 그러므로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차라리 “열린 집회”로 부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
그런데 1990년대 후반 이후에 많은 교회에서는 불신자들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한 “구도자의 집회”와는 별도로 |
신자 중심의 “열린 예배”를 드리고 있다. 즉 구도자를 중심으로 하는 전도 집회로서의 열린 예배의 개념보다는 |
기존 신자들에게 새로운 생동감을 주는 예배로서의 열린 예배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
이런 예배는 주로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형식적이고 딱딱한 전통적인 예배를 벗어나서 잔치적이고 시각적 |
이며 회중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많이 격려하는 생동감 넘치는 예배인데, 이를 가리켜서 “열린 예배”라고 부르고 |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한대로 “열린 예배”라는 용어 자체가 몇 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능하면 |
“열린 예배”라는 용어의 사용은 삼가는 좋겠다. 의미상으로도 “열린 예배”가 있다면 “닫힌 예배”도 있다는 말인데, |
무엇이 열린 예배이고, 무엇이 닫힌 예배인가? 또 무엇에 대해서 열려있고, 무엇에 대해서 닫혀있다는 말인가? |
그러므로 굳이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활기 있는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열린” 이라는 용어보다는 |
“젊은이 예배” 혹은 “찬양 예배” 등으로 사용하고, 열린 예배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
** 예배 봐준다. → 함께 예배한다. |
구역예배와 같은 때에 오늘 목사님이 오셔서 예배 봐주기로 했다는 말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
예배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받은 성도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예물을 드리며 말씀을 듣고 헌신과 |
고백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나를 누가 대신해서 예배를 봐 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
예배를 봐준다는 말 대신'함께 예배한다'라고 해야 한다. |
** 준비 찬송하겠습니다. → 찬송하겠습니다. |
찬송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영광과 사랑을 구체화하신 구속역사를 찬미하는 것이다. |
따라서 찬송은 어느 곡이든지, 언제 부르든지, 어디서 부르든지 그것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다. |
그런데'준비 찬송하겠습니다'하게 되면 그것은 찬송의 목적을'준비'로 한정하는 것이 된다. |
찬송이 마치 시간을 메우기 위해 하는 것처럼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이 말은 합당치 않다. |
찬송은 그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경배요 곡조 있는 기도이기 때문에 '준비 찬송'이라는 말을 쓰게 되면 |
찬송의 목적이 변질 된다. 따라서 예배를 시작하기 전에 찬송을 부르고자 할 때에는"예배를 시작하기에 앞서 |
찬송(몇곡)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좋다. |
예배시간에는 복음성가보다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좋다. |
왜냐하면 복음성가는 예배의 의미보다는 신앙적 감성과 자기 치유적 기대심리가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
** 예배/예식/기도회 → 구별사용 |
한국교회는 어느 나라의 교회보다 모이기에 힘쓰는 교회이다. 그래서 예배와 각종 기도회로 한 주일에 여러 차례 |
모인다. 주일 낮을 비롯하여 주일 저녁, 수요일 저녁, 금요일 밤, 그리고 매일 새벽 등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열심은 |
세계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모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혼란스럽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모임에 예배라는 |
명칭을 붙여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돌, 회갑, 추모 등의 모임에도 예배라는 명칭을 붙임으로써 |
진정한 예배의 의미를 희석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배와 예식과 기도회를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주신 창조의 은총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구속의 은총을 깨닫고 감격하여 드리는 |
하나님의 백성들의 응답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결코 인간을 위한 모임이거나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일이 |
되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예배와 예식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
예를 들어 돌, 회갑, 추도, 입학, 졸업, 결혼, 입당, 임직, 교회 창립 등의 행사를 할 경우에는 예식으로 표현하고, |
예배와 혼동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
그리고 기도를 목적으로 모이는 수요 저녁 모임과 금요 철야 혹은 심야 모임 그리고 매일 새벽 모임 등은 |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그리고 새벽기도회 등으로 명시해야 한다. |
이러한 현실을 바로잡기 위하여 본 교단 총회를 통과한 "표준예식서"의 정신을 따라 다음과 같이 정리함이 |
타당하다고 본다. |
주일예배, 주일 저녁 찬양예배, 주일학교 예배, 수요기도회, 철야기도회, 경건회(각종 회의 시작 전) |
** 헌금 → 봉헌 |
한국 교회의 예배 순서 가운데 “헌금”이라는 용어를 쓰는 경우가 있다. |
이 순서는 원래 봉헌을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 예배 속에서 봉헌의 순서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
역사적으로 볼 때 봉헌의 의미는 단순히 돈이나 예물을 드리는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
봉헌은 하나님의 은총 앞에 성도들이 드리는 응답적 행위를 총칭하는 말이다. |
즉 봉헌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정성을 다하여 경청한 무리들이 스스로 우러나는 감사의 응답으로 |
내어놓는 모든 마음과 정성의 표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순서를 “헌금”이라는 용어로, |
즉 단순히 돈을 바치는 행위로 지칭하는 것은 봉헌의 의미를 아주 축소시키는 것이다. |
그러므로 교회는 “헌금”이라는 용어보다는 “봉헌”이라는 용어를 사용함이 마땅하다. |
** 축제 → 잔치 (때에 따라 절기행사, 축하행사...) |
우리말 큰 사전에서는 '축제'를 “축하하고 제사지냄”이라고 단순하게 풀이하여 실어 놓았으나 |
이가원과 임창순의 "東亞漢韓中辭典"에서는 "축제란 제사 이름이니, 묘문(廟門) 안과 밖에서 이틀에 걸쳐서 드리는 |
묘문제로서 조상을 사당 안에서 제사지내고, 그 다음날 사당 밖에서 지내는 제사이다“라고 정의해 놓았다. |
그리고 일본인들은 마을 제사를 영어의 Celebration 과 Festival 같은 축하행사를 보면서 자신들이 제사에서 마음 |
놓고 떠들고 소리지르면서 춤추는 고유한 행사와 모양새가 비슷함을 알고, 1928년에 '축제'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
그들의 사전에 도입한 바 있다. |
이상과 같은 축제의 문제점을 보면서 이제는 성경대로 잔치, 또는 때에 따라 절기행사, 축하행사 등으로 사용할 |
것을 권장한다. |
예를 들어 성령 축제→성령 잔치, 부활절 축제→부활절 절기 행사, 성탄 축제→성탄 축하 행사 등이다. |
참고로 공동번역에서는 57회, 표준 새번역에서는 13회에 걸쳐 무분별하게 축제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으나 개역 |
성경과 개역 개정판에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
찬양축제','체육축제','전야제'등의 표현은 옳지 않다. |
'축제'라는 단어 자체가 이방종교의'제사'또는 제의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
국어사전에도 보면 축제(祝祭)란,"축하하고 제사하는 것"을 말한다고 되어있다. |
'축제'라는 말 대신에 '잔치', '대회', 또는 '축하행사'라는 말을 쓰는 것이 좋다. |
찬양축제는 성가대회로, 체육축제는 체육대회로, 전야제는 전야잔치로 하는 것이 옳다. |
** 하나님의 축복 → 하나님이 주신 복 |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
한국 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복에 관한 표현들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축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
"하나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저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이다" |
"하나님의 축복된 성도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상과 같은 표현들을 볼 때 |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복을 비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
그러나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라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이다. |
다음의 성구에서는 하나님이 복을 비는[祝福] 분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降福] 분임을 잘 밝히고 있다. |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 지라"(개역 한글판 창 12:3) |
"그가(멜기세덱)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
복을 주옵소서"(개역 한글판 창 14:19) |
그러므로 이제는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하나님! 축복하여 주시옵소서”는 |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 또는 “복 내려(베풀어) 주시옵소서"로 바로잡음이 타당하다. |
** 시편 장 절 → 시편 편 절 |
몇 장과 몇 절은 산문에서 쓸 수 있다. 다른 모든 성경은 장 절이라고 함이 마땅하다. |
그러나 시편은 다르다. 시편의 경우는 몇 장, 몇 절이라고 하는 것이 옳지 않다. |
편 절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편은 처음부터 각각 단편 형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
** 룻기서, 욥기서, 잠언서, 아가서 → 룻기, 욥기, 잠언, 아가 |
자체에 記, 言, 歌등이 이미 포함되어 있어 ‘書’자를 덧붙이는 것은 의미상 과잉표현이 되므로 그렇게 쓸 수가 없다. |
** 다 같이 주기도문을 외우겠습니다. →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겠습니다. |
'다같이 주기도문을 외우겠습니다'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
왜냐하면 이런 암송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주문으로 만들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성도들은 단순히 주기도문을 외우고 예배를 끝내서는 안 된다. |
한 구절, 한 구절 뜻을 생각하며 간구할 수 있어야 한다. |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너무 빨리 끝내서도 안 되고, 무슨 모임이 끝났다는 표식처럼 되게 해서도 안 된다. |
또'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고 해야 하는 대목에서 아직도'시험에 들지 말게 마옵시고'라고 하는 이들이 많은데 |
이것도 고쳐야 한다. 사도신경 역시 진지하게 뜻을 생각하면서 신앙고백으로 토해 낼 수 있어야 한다. |
** 영시(0시)예배, 자정예배 → 송구영신예배 |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일을 가리켜 ‘송구영신’또는‘송영’이라 한다. |
이 의미가 예배의 성격 및 냉용과 일치하므로 ‘송구영신예배’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
‘송영’은 ‘송구영신’의 준말이지만, |
찬양에서의 ‘송영’과 동음이어서 혼란을 가져올 우려가 있으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
** ...기도로 폐회합니다 → ...기도로 예배를 마칩니다, ...기도로 기도회를 마칩니다. |
'폐회합니다'는 교회 안의각종 회의에서 끝날 무렵 사용하는 것으로 예배에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
** 예배의 시종을 의탁하옵고 → 주장하시고, 인도하시고 |
의탁은 ‘어떤 것에 몸이나 마음을 의지하여 맡긴다’는 의미이다. |
내가 주도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할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서 거의 ‘그가 대신 한다’는 의미를 |
가지고 있다. |
우리가 예배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
돌려드리는 응답의 행위인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할 이 예배를 도리어 하나님께 |
맡기고 나는 방관자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
그러므로 필요할 시는 “이 예배를 주장하시고”또는 “이 예배를 성령님께서 인도하시고”로 쓸 수 있다. |
<<몇회에 걸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용어에 대하여
그동안 수집하였던 자료들을 올리고자 합니다.
잘못 수집된 내용이 있으면 지적하시고 고쳐주시기 바랍니다.
혹 잘못 사용하시던 용어가 발견되면 "→" 이후의 표현으로 바르게 적용하도록
노력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바로잡기
그 동안 우리들이 분별없이 입에 익숙해진 용어들이 적절하지 못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기도 |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이란 호칭이나 ‘주여’ ‘하나님이시여’ 등 2인칭 존칭에 호격조사를 붙인 표현 등은 좋지 않다. |
과거시제를 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기도에서 다른 대상을 높이는 일도 삼가야 한다. |
* 당신→하나님, 하나님 아버지(예장통합),주님(성결) |
* 기도 드렸습니다(기도하였습니다)→기도 드립니다(기도합니다) |
*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주님, 하나님 아버지 |
* 우리 성도님들이→저희들이,교회의 권속들이 |
* 대표기도→기도인도 |
* 사랑의 예수님→사랑의 하나님 |
* 참 좋으신 하나님→거룩하신,은혜로우신,전능하신,진실하신,자비로우신 하나님 |
* 사랑하시는 하나님→사랑하는 하나님(통합),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성결) |
* 예수공로 의지하여 기도합니다→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 지금은 처음 시간이오니→지금 예배하고 있사오니 |
* 축복하여 주옵소서→복 내려 주옵소서 |
* 중보기도→중보적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 |
* 기도 받는다. → 함께 기도한다. |
* 지금도 살아 계신 하나님→사용 불가 |
** 당신 →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또는 주님 |
기도할 때 하나님을'당신'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당신은 존대어가 아니다. |
우리말의 2인칭으로서 당신은 결코 존대어가 될 수 없다. |
기도할 때의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직접 들으시는 분으로서 2인칭이다. |
예를 들어 아들이 육신의 아버지께 '당신'이라고 하면 안 되지 않는가? |
성도는 하나님께 대하여 언제나 극존칭 화법을 써야한다. |
당신이라는 말을, 말하는 주객(主客) 당사자가 어떤 제 3자를 3인칭 격으로 지칭할 때는 |
웃어른을 높여 일컫는 말이 되기도 한다. |
그러나 피조물인 인간이"하오"체의 예사 높임말인'당신'이라는 말을 하나님께 사용할 수는 없다. |
그러므로 존재론적 대명사로 당신이라고 호칭해서는 안 되며 언제나 관계적 극존칭을 써야한다. |
** 기도드렸습니다(~하였습니다, ~했습니다) → 기도드립니다(기도합니다) |
시제상 "기도했습니다"는 과거형이고, "기도합니다"는 현재형이다. |
기도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 현재 시제(時制)로 해야 한다. |
"기도했습니다"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분명히 과거시제의 표현이다. |
기도의 핵심인 간구는 곧 '소원'이기 때문에 이 '소원'은 언제나 미래지향적이라야 한다. |
기도를 끝낼 때'현재형'으로 말하게 되면 이는 간구한 내용에 대하여 계속 소원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
그러므로 기도의 종결을 나타내는 어미(語尾)는 '기도합니다' 또는 '기도드립니다'가 되어야 한다. |
** 주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 주님. 하나님 아버지 |
기도할 때 하나님을 향해 ‘주여’, ‘주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하나님 아버지시여’ 라 부르는 것을 많이 |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어법상의 문제가 있다. 즉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
현대 국어에서는 2인칭 존칭 명사에 호격 조사가 붙지 못한다. |
2인칭에는 존칭이 아닌 경우에 한하여 호격 조사 ‘-아’나 ‘-야’가 붙을 수 있다. |
예를 들자면 친구 사이나 아랫사람에게는 “복동아.” “철수야.” 와 같이 부를 수 있지만 손윗사람에게는 |
호격 조사를 붙일 수 없기 때문에 “아버님이시여.” “할아버님이시여.” 라 부르는 것은 불가하다. |
그러므로 기도할 때 하나님은 존칭의 2인칭이 되기 때문에 이미 사어가 된 ‘-이여’, ‘-이시여’를 붙여서는 |
안되고 그저 ‘주님’,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로 해야 옳다. |
** 우리 성도님들이 → 저희들이, 교회의 권속들이… 등등 |
국어 존대법에서는 청자(聽者)가 최상위자일 경우 다른 어떤 인물에게도 존대를 쓸 수 없다. |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말은 바른 표현이 못된다. “할아버지. 형님이 가셨어요.” “아버지. 누님이 오셨어요.” |
첫째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자인 ‘할아버지‘와 주어인 ‘형님’ 및 화자(話者)인 손자 ‘나’다. |
여기서 청자인 ‘할아버지’가 최상위자이므로 ‘형님’과 ‘나’는 존대를 받을 수 없다. |
둘째 문장에 등장하는 인물은 청자인 ‘아버지’와 주어인 ‘누님’과 화자인 ‘나’다. 여기서도 청자인 ‘아버지’가 |
최상위자이기 때문에 ‘누님’과 ‘나’는 존대를 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위의 문장들은 다음과 같이 고쳐야 한다. |
“할아버지. 형이 갔어요.” “아버지. 누나가 왔어요.” |
공중기도에서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동일한 입장, 동일한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즉 기도 인도자는 회중과 |
동격이다. 그러므로 지존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회중을 가리켜 ‘우리 성도님들’이라 존대를 해서는 |
안 된다. 이것은 단순히 ‘저희들’, ‘교회의 권속들’ 등으로 바꾸어야 한다. |
** 대표 기도 → 기도 인도 |
예배 순서 가운데 기도 시간이 되면 예배 인도자가 “우리를 대표해서 ooo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
“우리를 대신해서 ooo님이 기도하시겠습니다” “ooo님이 대표 기도를 하시겠습니다” 와 같은 안내를 하는 것을 |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 못된다. |
온 회중이 머리를 숙여 무언의 기도를 할 때 한 사람이 소리를 내어 기도를 할 경우 우리는 이를 ‘기도 인도’라 |
부르는 것이 좋다. 기도 인도자는 기도의 대표자가 아니다. |
이 기도 인도자는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다른 사람들과 분리될 수 없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또는 생각까지도 |
그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기도 인도자는 대표로 뽑힌 어느 운동 선수와는 다르다. |
그는 대표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것이 아니며 그와 함께 머리를 숙인 온 회중의 생각을, 즉 그들의 소원을 보다 |
깊게, 보다 하나님 뜻에 맞게 아울러 그 절차를 정리해 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다. |
기도 인도자가 기도할 때 회중은 결코 방관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
사람들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에게는 대표성이 인정될 수 없다. |
만인제사장의 사상은 하나님 앞에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는 신학사상이다. |
이러한 관점에서도 기도에 있어서 ‘대표’, ‘대신’은 불가하다. |
그러므로 ‘대표기도’, ‘대신하여 기도…’는 ‘기도 인도’로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 |
** 사랑의 예수님 → 사랑의 하나님 |
기도 서두에 ‘…하나님’ 대신에 ‘사랑의 예수님’, ‘고마우신 예수님’ 등으로 하나님 아버지가 아닌 예수님을 |
호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를 끝낼 때 반드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
하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에게 우리의 소원을 아뢴 후 다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 하는 것은 |
논리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이다. |
우리 기도는 일차적으로 성부 되신 하나님 아버지께 성자 되신 예수님 이름으로 아뢰는 것이다. |
이는 예수님이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6)고 하신 말씀에 근거를 둔다. |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도 그 서두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되어 있다. |
역시 이 속에도 성부 하나님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우리 기도의 본임을 알아야 한다. |
** 참 좋으신 하나님 → 거룩하신, 은혜로우신, 전능하신, 진실하신, 자비로우신…하나님 |
기도 서두에 하나님을 부르면서 그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가 많다. |
그런데 이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요즈음 ‘참 좋으신’과 같은 말이 사용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
이것은 재고를 요하는 말이라 하겠다. |
즉 성경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수식어로 쓰인 말들을 보면 ‘거룩하신’, ‘만유의’, ‘생명의’, ‘신실하신’, |
‘의로우신’, ‘자비하신’, ‘영원하신’, ‘위에 계신’, ‘능력이신’, ‘진실하신’, ‘구원하시는’, ‘하늘에 계신’, ‘사유하시는’, |
‘은혜로우신’, ‘보수하시는’, ‘지극히 높으신’, ‘홀로 하나이신’, ‘천지를 지으신’… 등과 같이 |
대부분 객관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말들이 수식어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그런데 ‘참 좋으신’은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수식어가 된다. |
즉 ‘참 좋으신’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의 주관적인 감정, 정서로 느끼는 바대로 표현한 말이다. |
우리가 하나님을 나의 얄팍한 주관적인 감정으로 그 속성을 표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
이를 과장하여 발전시킨다면 ‘사랑스러운 하나님’(‘사랑의 하나님’과는 판이한 뜻이 된다.), ‘미운 하나님’, |
‘야속한 하나님’, ‘귀찮은 하나님’… 등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
**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 → 사용불가 |
영원히 존재하시고 능력 있으신 하나님에 대한 존재와 능력을 극히 제한하는 표현이 된다. |
** 중보기도 → 중보적 기도, 이웃을 위한 기도 |
기독교에서 “중보”라는 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단 한분의 중보자이시다(딤전2:5). |
그러므로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 이 말을 사용하는 것은 성경의 내용과 다를 뿐 아니라, |
그리스도의 영광을 훼손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중보적 기도는 중보자의 기도(중보기도)와는 다른 “나”아닌“남”을 위한 기도로 사용되어져야 한다. |
** 기도 받는다. → 함께 기도한다. |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하는 것이지 - 누구(어떤 사람)에게 받는 것이 아니다. |
따라서 나보다 신앙적으로 앞서 있는 사람과 같이 기도하더라도 그것은 함께 기도하는 것이지 |
누구에게 기도를 받는 것은 아니다. 기도를 받는다는 말은 써서는 안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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