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5장>
자녀를 기다림
가르침을 통해 자녀는 나의 삶을 이어서 살아갈 존재라는 것을 배웠다. 우리 부부에게도 자녀를 주시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녀가 살아갈 환경을 능동적으로 고민하고, 준비해야하는 때이다.
성을 쌓음
가인을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 공평, 정의를 뛰어넘어 자비로우시다. 오히려 가인이 그 자비로우심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성을 쌓는다. 가인은 하나님의 약속을 잊고 두려웠을까?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고 교만한 것일까?
나는 오늘날 시스템이 가져다주는 힘? 편안함? 안정감?을 경험한 적 있다.
장인어른께서는 거짓말처럼 작년 봄 만우절에 돌아가셨다. 장인어른은 20년 동안 의정부의 한 교회를 섬겼다. 평생 목사로 사시면서 청렴하고 소박하게 지내셨다. 성도들의 부족함을 인내와 사랑으로 보듬고 말씀을 가르치셨다고 한다. 공동체 구성원이 모든 분쟁과 삶의 고민은 목사님께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 모든 이야기는 지난 2년 동안 의정부 교회에서 생활하며 끊임없이 들었다. 장인어른을 1년 밖에 뵙지 못했던 젊은 사위에게 많은 분들이 '장인께서 얼마나 훌륭한 분이셨는지' 설명해주신다. 그와 함께 지낸 십수년을 회상하며. 나도 장인어른과 더 오래 교제했으면 좋았을텐데.. 나눔을 쓰면서도 아쉽고 슬프다.
성인 60~70명 정도의 교회 공동체는 경제적으로 여유있지 않았다. 오히려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가정이 훨씬 많았다. 그럼에도 성도들은 성실히 목사님을 부양했다. 감사하게도 그들의 헌신으로 인해 20년 동안 아내의 가정은 배고프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평소 몸이 약하셨던 장인어른은 보험을 들어두셨다. 갑자기 아프더라도 남은 가족들의 생계가 유지될 수 있도록 말이다. 물론 그 보험을 쓸 일이 없길 바라셨다. 갑작스러운 뇌 림프종으로 쓰러지시고 8개월간 투병할 때.. 보험은 힘을 발휘했다. 갑작스럽게 암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보험회사는 우리들에게 목돈을 마련해주었다. 치료를 위해 사용하기 충분한 액수였다.
장례 후 장모님은 장인어른의 사망 보험금 또한 받으셨다. 당장의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다. 홀로 살아계신 것이 고통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공동체를 통해 위로하시고.. 그녀의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셨다. 우리 부부는 임금 노동을 통해 생활비를 마련한다. 이 중 일부는 장모님의 생활비에 보탠다. 장모님은 일을 하지 않고도 보험금과 자녀들의 지원으로 생활을 이어가신다. 고통가운데 함께 하시고 은혜주셔서 감사함을 느낀다.
SFC에서 자본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참 많이 들었다. 보험에 대해서도 많은 설명을 들었다. 사고, 질병 등 각종 고통의 문제로 불안을 조장하여 우리의 삶을 제약하는 것이 보험이라고. 그런데 지금은 그러한 시스템 안에서 장모님께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있다. 배운 것과 경험한 것이 다르니 혼란하여 이러한 상황에 대해 판단을 유보한다.
자본은 우리를 제약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흠뻑 젖은 이들은 그 시스템이 만들어낸 상품으로 성을 쌓는다. 많은 믿는 이들도 그러하다. 어디까지가 적절한가? 사는 위치, 모양에 따라 어떤 것은 괜찮고 어떤 것은 괜찮지 않은가? 정도의 문제인가, 옳고 그름의 문제인가? 아니면 우리 마음의 문제로 해석하면 되는 것인가? 질문은 잔뜩 남았다.
부활을 믿는 삶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예수가 부활했다고 그 누구도 증명하지 못한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부활을 증거할만한 삶을 살도록 말씀을 마음에 품고, 서로 비추며 사는 것이 중요하겠다. 특히 공동체 안에서 드러난 사건들을 섬세하게 들여다보고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다음주 나눔을 위한 질문- 만나는 형제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질문>
- 나의 연약함은? 지체들 앞에서 나의 연약함을 드러내는지?
- 공동체 안에서 경험했던 갈등은? 갈등을 해소할 수 있었던 계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