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안
김병환
늙으면
눈이 침침해
글자는
잘못 읽지만
세상을
꿰뚫어 보는
천리안
가지고 산다
가족과
대화 할 때는
속마음
알고 있지만
알아도
모르쇠 하며
칭찬을
아끼지 마라
꽃보다
열매의 시대
베풀고
나눔 잘해야
늙은이
소리 안 듣고
천수를
누릴 수 있다
김병환 시인의 <천리안>은 노년(老年)에 이른 인간의 깊은 연륜과 삶의 지혜를 담담하면서도 울림 있게 그려낸 수작(秀作)입니다. 이 작품은 신체적 쇠퇴를 정신적·영적 개안(開眼)으로 승화시키며, 고령화 시대에 노년이 지녀야 할 진정한 태도가 무엇인지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신체적 퇴화와 정신적 개안의 역설
늙으면 눈이 침침해 글자는 잘못 읽지만
세상을 꿰뚫어 보는 천리안 가지고 산다
여기서 시인은 눈이 침침함(신체적 퇴화) 천리안 (정신적 개안) 을 대비시킵니다.
젊은 날의 눈이 활자나 현상 같은 표면을 읽는 눈이었다면, 노년의 눈은 본질과 흐름을 꿰뚫어 보는 심안 (心眼)이자 천리안 이라는 것입니다. 육체의 쇠락을 단순한 상실로 보지 않고, 삶을 통찰하는 영성(靈性)의 획득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긍정적이고 역동적인 세계관이 돋보입니다.
2. 노련한 관계 미학
알아도 모르쇠 천리안 이라는 거창할 수 있는 개념을 '가족'이라는 가장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관계 속으로 끌어내립니다.
알아도 모르쇠 하며 칭찬을 아끼지 마라
상대의 속마음을 다 꿰뚫어 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들추어내거나 지적하지 않고 오히려 모르쇠로 일관하며 칭찬을 건네는 태도는 단순한 무관심이나 기만이 아니라 타인의 허물과 약점까지 포용하는 노년 특유의 유연함과 배려입니다. 시인은 진정한 지혜란 아는 것을 모두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품어주는 침묵과 칭찬의 미학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3. 꽃에서 열매로 삶의 패러다임 전환
노년의 삶이 지향해야 할 실천적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꽃보다 열매의 시대 베풀고 나눔 잘해야
늙은이 소리 안 듣고 천수를 누릴 수 있다
청춘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의 시대라면, 노년은 그동안 축적해 온 결실을 거두고 나누는 열매의 시대입니다. 시인은 노년이 대접받고 대가를 요구하는 자리가 아니라, 오히려 베풂과 나눔을 통해 완성되는 자리임을 명시합니다.
특히 늙은이 소리 안 듣고라는 구절은 나이만 먹은 완고한 노인이 아니라 사회와 가정에 존경을 받는 어른(長老)으로 남는 법을 가리킵니다. 베풂을 통해 삶의 순환을 완성할 때 비로소 육체적 수명을 넘어선 천수(天壽) 즉 복되고 가치 있는 장수를 누릴 수 있다는 선언입니다.
종합평론
김병환의 천리안은 웰에이징(Well-aging) 웰다잉(Well-dying) 가치가 중요해진 현대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시인은 노년을 쓸쓸한 황혼이나 종말의 시간이 아니라 세상을 가장 깊이 있게 볼 수 있고 가장 풍요롭게 나눌 수 있는 인생의 황금기로 재정의합니다.
눈은 어두워졌으나 마음은 오히려 더 넓고 밝아진 노년의 초상을 통해, 독자들에게 나이 듦에 대한 두려움 대신 아름답게 익어가는 삶에 대한 기대를 품게 만드는 따뜻하고 지혜로운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