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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에서 8월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을 꼽아보라고 한다면 대부분 사람들은 광복을 꼽고 광복절을 정확히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나 8월달에 일어난 사건으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우리는 8월 29일에 일어난 ‘경술국치’ 즉 ‘한일강제병합’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기억하며 ‘경술국치’라는 단어를 씁니다. 경술년에 일어난 ‘경술년에 일어난 치욕스러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나라의 주권을 완전히 일본제국에 넘긴 날입니다. 이미 일제는 무력을 앞세워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며 외교권을 빼앗았고 1907년에는 정미조약이라고 불리는 한일 신협약을 통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켜 방위권을 빼앗고 군대를 지배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일본이 1910년 일본 육군 대신이었던 데라우치가 식민지 조선의 3대 통감으로 취임함과 동시에 경찰업무를 일본 군인이 장악하면서 통감의 허락없이는 신문과 잡지도 제대로 발행할 수 없도록 하며 신문·잡지의 엄중한 검열이 진행되었습니다. 이 시기 친일파인 총리대신 이완용과 데라우치는 창덕궁의 대조전에서 데라우치의 합병조약을 체결했는데 그 조약의 내용은 우리나라의 통치권을 일왕에게 가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경술국치’입니다. 한 나라의 대신이 다른 나라의 왕에게 나라의 통치권을 맡겼으니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지.. 당시 조선 백성은 나라가 무너진 고통속에서 얼마나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목놓아 울었을지 감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오늘 본문은 선지자 아모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치는 암담한 현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할 여호와의 날을 아모스는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날’이라고 한다면 대체로 회복의 날, 부흥의 날, 기쁨의 날, 영광의 날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여호와의 날’은 대체로 기적의 날, 회복의 날, 구원의 날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의 ‘여호와의 날’은 암담한 날입니다. 멸망의 날입니다. 완전한 패망의 날, 역사가 끝이 난 날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을 잠시 버리셔야만 했던 하나님의 심정을 살펴보고 우리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삶속의 우리를 보며 얼마나 한탄하시는지 깨닫고 이스라엘처럼 끝까지 깨닫지 못해 멸망까지 경험하는 인생이 아닌 정말 하나님께서 회복하시기를 소망하며 이런 강한 말씀을 주시는 참된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의 회복, 인생의 구원, 참 생명의 삶을 경험하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멸망의 길의 첫 단계는 슬픔의 날입니다.
아모스 5장 17절입니다.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전에서 애가를 지어서 불러주었습니다. 이런 슬픈 노래를 들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연 어떠한 감정을 느꼈을까요? 이런 노래속에서 회개하고 깨닫고 돌이켰을까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마음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마치 우리의 보편적인 느낌처럼 이스라엘도 아모스를 대하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상황에 한 번 대입해서 생각해볼까요? 어떤 사람이 갑자기 저와 여러분 앞에 나타났습니다. 아직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괜찮은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저와 여러분 앞에서 우리가 이제 죽었다고 장송곡을 처량하고 구슬프게 부른다면 저와 여러분의 기분은 어떻겠습니까? 좋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저놈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내가 사지가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데 별 문제가 없는데. 내가 죽었다고 장송곡을 불러? 저런 미친 놈.”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들은 아모스를 오히려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주 우리가 살펴본 본문 아모스 5장 14절 하반부에 있는 말씀과 같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기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증거로서 지금 이스라엘은 “번영과 부유함, 물질적인 축복을 누리고 있으며, 또한 군사적인 강성을 누리고 있지 않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아모스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아모스 5장 16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슬프도다 슬프도다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이름이 한꺼번에 사용되어 아모스의 선포가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절대적이며 변치 아니하시는 진실되고 확실한 말씀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속에서 사람들이 징계를 받으며 울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광장’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레호브’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모든 사회적, 행정적, 상업적 장소로 쓰이는 장소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폴리스라는 영역에서 ‘광장’에 모여 모든 정치적 결정, 사회적 결정, 상업적 행위를 이루었던 것을 세계사에서 배웠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사회에서 이 ‘광장’에 모여 정치적 행위와 사법적 행위와 상업적 행위가 다 이뤄졌습니다. 이 곳에서 백성들이 다 모여 울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운다’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미쓰페드”인데 “비탄, 통곡, 울부짖음, 애도, 한탄”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의 칼을 빼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심판하시며 징계하시기 위해 임하셨습니다. 우리가 흔히 마지막 때의 심판은 영원한 멸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마지막 때에 우리 주님 재림하시면서 우리에게 행하시는 심판은 멸망당할 자는 완전한 멸망이 될 것입니다. 지옥불에 떨어질 자가 다시 기회를 얻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어쩌면 사랑의 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사랑하기 때문에 드는 매, 깨닫지 못하는 자녀에게 이 방법을 써서라도 깨닫게 하려고 어쩔 수 없이 드는 매 정말 가슴 아프지만 이렇게 하지 않고는 부모도 몰라보고 가족도 몰라보고 심지어 자기가 얼마나 잘못된 길로 갈지 깨닫지 못할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이 아픔을 느끼게 해서라도 깨닫게 만드려는 최후의 수단으로 잠깐의 국가 멸망이라는 과정을 징계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아모스 5장 17절입니다. 다시 읽겠습니다.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성경의 내용속에 등장하는 포도원은 대체로 즐거움을 주는 장소입니다. 소득을 상징하는 곳이며 풍요를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징계를 우리가 당할 때 우리에겐 슬픔이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슬픔속에서도 은혜를 발견하는 자가 복된 사람입니다. 아픔속에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가 은혜를 체험하는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12장 28,29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징계를 느끼며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의 화나심을 일상생활속에서 체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속에 슬픔이 찾아오고 아픔이 찾아올 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십니까? 그것이 바로 회복할 기회가 있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사람입니다. 저와 여러분, 최근에 어떤 슬픔, 어떤 아픔을 느끼셨습니까? 그런 상황속에서 절대 하나님을 원망하고 떨어져나가는 사람이 되지 마시고 오히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멸망의 길의 둘째 단계는 절망의 날입니다.
아모스 5장 20절입니다.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대적이 바로 여호와의 적이 됨으로써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 날이 곧 “여호와의 승리의 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날에는 완전한 구원을 이루고 찬란하게 빛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이런 기대를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아모스는 공격의 화살을 퍼붓기 시작합니다. 한 마디로 꿈깨라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세 가지 분야에서 이스라엘의 그릇된 기대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기대입니다. 오늘 본문 아모스 5장 18절에서 20절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둘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식주의 종교행위입니다. 가식적이며 외식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께서 정해주신 절기와 성일을 잘 지키고, 하나님께 많은 제물을 드리고 있기 때문에 자기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선지자 아모스는 분명히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 외식적인 제물은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을 뿐더러 돌아보시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이스라엘의 군사적, 경제적 부강으로 인한 현실적 만족입니다. 사실 어쩌면 이스라엘에게 있어 문제의 시작은 어쩌면 하나님앞에 바르지 못한 예배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제사는 눈가리고 아웅이었습니다. 진실이 사라진 예배였습니다. 공의와 정의는 다 사라지고 그냥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왕과 제사장, 백성에 이르기까지 온갖 비리와 악행, 음란과 퇴폐, 사기와 살인등이 만연하지만 제사하는 날이 되면 제사는 거창하게 반듯하게 바른 형식대로 지냈습니다. 이런 겉과 속이 다른 신앙의 행위가 정말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것입니다.
지난 번 살펴본 아모스 2장 7,8절 말씀을 한 번 같이 다시 보겠습니다.
“힘 없는 자의 머리를 티끌 먼지 속에 발로 밟고 연약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 모든 제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그들의 신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하나님앞에서 바르게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이 이렇게 음란, 퇴폐의 생활과 도덕의 문란과 사회적 질타를 받는 삶을 살아가면서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드리야 할 곳에서 마저 악한 일을 저지르니 어떻게 진노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희망을 주어야 할 곳이 희망을 주지 못하고 절망을 주니 이제는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를 보며 절망을 느끼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앞에 거룩하고 바르게 서야 할 한국교회가 많이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니 저도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제 다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고 새롭게 재생하는 역사가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이제 도무지 회생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어진 이스라엘을 향해서도 절망이라고 이제는 너무 캄캄해서 대책이 없다고 말하는 이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면서도 기대를 외치고 있습니다.
아모스 5장 24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도무지 희망이 없다고 이야기하며 이젠 세상 어디서도 부흥을 기대하기 힘들 것이라는 절망의 소리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면 안될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사실 우리가 미국이라는 사회가 기독교로 세워진 나라라고 하지만 이젠 기독교에 대한 인정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나라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 나라에서는 이제 기독교적인 어떤 부흥은 이룰 수 없을 것이라는 자조섞인 말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미국에서 1970년대 부흥의 역사가 나타났던 애즈베리에서 다시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고 있다고 합니다. 애즈베리부흥은 2023년 2월 8일 수요일에 채플 후 현장에 남아 있던 19명의 학생들의 찬양과 기도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번 애즈베리 부흥은 학교가 기획하거나 주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채플시간 은혜받은 학생들이 예배당에 앉아서 기도하고 찬양하다가 뜨거운 성령임재를 경험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며 말씀읽고 기도하며 찬양하는 가운데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도 찬양을 통해 뜨거움을 느낀 학생들이 학교밖 도시로 달려나가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찬양하고 기도하며 은혜받은 다른 사람들이 함께 말씀을 듣는 예배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자발적인 대각성운동이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1970년대 애즈베리 1차 부흥운동 때처럼 2차 부흥운동도 인근 대학과 지역으로 부흥운동이 확산되면서 점차 미국전역까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미국의 목회자들이 유튜브나 각종 SNS에 올리는 내용을 제가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분명 멸망의 상황에는 절망이 찾아옵니다. 이젠 다 포기하고 절망하며 생명을 스스로 버리며 낙담하여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는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께서 임해도 어둠과 같다고 말할 때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모스는 분명 하나님의 때가 어둠과 같다고 캄캄함이라고 이스라엘백성에게 예언하지만 이건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영적인 회복이 없는 이스라엘백성의 상황속에서 어둠과 캄캄함입니다. 다시 정의와 공의를 회복하고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에게는 분명한 광명, 생명,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절망이 있다고 느낀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삶으로의 회복으로 나아가며 그 때 부어주시는 부흥과 광명을 체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멸망의 길의 마지막 단계는 버림받는 날입니다.
아모스 5장 27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오늘 본문에서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드신 매, 징계의 결과는 “다메섹 밖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다메섹은 앗수르의 수도이죠.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포로로 끌려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로잡혀”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갈라’라는 단어인데 “벗기다, 드러내다, 사로잡혀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 같은 예언을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죠.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 “그의 이름”이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셈”입니다. 이 단어는 “표시하다”라는 의미이고 “이름”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의미는 이름을 소유한 자의 인격, 본질, 속성, 영예 등을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은 단지 그냥 부르기 좋은 이름이 아니라 그 특성, 성질 등을 자세히 설명하는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알 듯이 이 예언을 만드시고 가르쳐주시며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엘로힘”이죠. 헬라어식으로 옮기면 “데오스”입니다. 영어로는 첫글자를 꼭 대문자로 써야하는 영어 단어 God입니다. 참된 하나님, 왕, 절대자 등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라고 하고 있죠. 히브리어식 발음으로는 ‘예호바’라고 발음하는 것이 맞을 듯 한데 영어로는 그냥 ‘LORD’라고 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요드헤바브헤’라는 히브리어 알파벳 자음 4글자만 쓰고 발음은 그냥 ‘아도나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십계명중 제 3계명인 하나님의 이름으로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하나님의 이름 자체를 부르는 것을 금기시했습니다. 그래서 피치 못해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할 경우는 “주님” ‘아도나이’라고 부르고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이다’라고 생각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특별하게 하나님을 따랐던 이스라엘이지만 결국은 버려짐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앞에서 버려진다는 것은 이젠 완전한 멸망이 찾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버려두셨다고 할지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참 사랑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
역대하 30장 7,8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조상들과 너희 형제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멸망하도록 버려 두신 것을 너희가 똑똑히 보는 바니라 / 그런즉 너희 조상들 같이 목을 곧게 하지 말고 여호와께 돌아와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전에 들어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겨 그의 진노가 너희에게서 떠나게 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멸망의 단계에서 진짜 멸망당하는 사람들은 버려두는 것입니다. 진짜 내팽개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나쁜 짓을 하고 악한 존재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구원받을 백성이라면 깨닫고 돌아오도록 하나님께서 만드십니다. 그리고 버려두시고 모른 척 하셔도 그것이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고 완전히 모른 척 하신 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떤 때는 정말 하나님의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는 사건이 생긴다고 할지라도 정말 택함 받은 자손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부르시고 회복시키시는 은혜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우리가 복받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삶속에 정의와 공의가 흘러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정직과 공의와 윤리 도덕적인 삶을 100% 제대로 살아서 의인이 될 수는 절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른 사회,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공의가 바로서고 정직한 세상이 되어지고 아름다운 윤리를 바탕으로 서로가 참 인간으로서의 바른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 우리 나라는 어떻습니까? 정치인으로부터 시작해서 교육기관, 행정기관, 사법기관, 언론기관 모두 부정과 부패가 난무하고 뭔가 청탁이 되어져야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냥 열심히 정직하게 살면 잘 사는 사회가 되어야 할텐데 정직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성실하게 살면 오히려 바보가 된다고 가르치는 곳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아닙니까? 불법, 편법, 비리가 난무하고 뭔가 질서를 지키고 법을 지켜서는 멍청이가 되는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사회를 바로 잡고 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우리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좀 더 현실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그리스도인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살아서 임재하고 있는 참 그리스도인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멸망하는 사회, 어쩔 수 없이 패망할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에게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의 삶, 우리의 가정, 우리의 직장과 우리의 사회, 이 나라 이 민족이 망하지 않고 다시 부흥하는 것을 꿈꿀 때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이 임한 거룩한 존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영으로 우리의 인생의 모습이 바뀌고 정직한 삶, 공정한 삶, 성실한 삶으로 살아갈 때 우리 주위부터 정말 회복되어지는 위대한 변화의 역사, 위대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