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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에스라 제2강
홀로 건축하리라
말씀 / 에스라 3,4장
요절 / 에스라 4: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우리는 지난 주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땅에서 고국으로 감격 가운데 돌아오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게 귀환한 백성들이 무너진 성전 터 위에 제단을 쌓습니다. 번제를 드리며 초막절을 지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감격적으로 성전 지대를 놓았습니다. 너무나 기쁘고 가슴 벅찬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는 말도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자 하면 꼭 방해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합니까?
3장 1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향 땅에서 여독을 풀고 그리운 친지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일곱째 달에 예루살렘에 일제히 모입니다. ‘일제히’의 문자적인 의미는 ‘한 몸처럼’입니다. 마치 한 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예루살렘으로 모인 것입니다. ‘일곱째 달’에 모인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일곱째 달에는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 등 중요한 절기가 세 개나 몰려 있습니다. 일곱째 달의 첫날은 나팔절입니다. 나팔절의 의미적인 측면을 보면, 우리의 ‘새해 첫날’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각오로 신앙생활과 조국에서의 삶을 시작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제단을 쌓고 그 위에서 번제를 드립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배를 회복한 것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 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그들은 제단을 그 터 위에 세웁니다. 그 터가 중요합니다. 그 터가 어디입니까? 그 터는 풍수지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터는 옛날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고자 한 모리아 산입니다. 또 솔로몬 성전의 번제단이 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지금은 무너져 버린 바로 그 터 위에 다시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과 예배가 무너진 현재 자리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배가 무너질 때 우리 삶의 기초가 무너집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며 참된 예배를 드릴 때 삶의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화려하고 웅장한 솔로몬 성전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런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정착하며 잘살게 되니까, 점점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대신 풍요를 가져다준다는 이방 우상들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말씀을 통해 경고했지만, 그것을 무시하고 오히려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이방 나라들을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성전을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잃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바벨론 문서에 보면, 바벨론의 수많은 신들의 제단은 각기 수백 개, 또는 수천 개나 됩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섬길 제단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파괴된 성전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회당을 만들어 그곳에서 안식일마다 율법을 읽고 기도하는 것으로 성전 제사를 대신합니다. 그들은 포로 생활 동안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통해 비로소 예배에 대한 목마름이 생기고 예배의 본질에 대해 깨닫기 시작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고향에 돌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표면적으로는 성전 재건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참다운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당시는 성전의 기초가 놓여지기 전입니다. 건물 성전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일제히 모여 무너진 성전 터 위에 제단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번제를 드립니다. 그들의 삶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기를 바라는 소원 때문입니다. 과거 출애굽 세대 때도 시내 산에 도착해 제일 먼저 한 것이 바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동일하게 출바벨론하여 제일 먼저 한 것이 바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현재 제대로 된 공동체를 세우지도 못한 상태입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배의 자리로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신 목적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감사하며 예배하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내 삶에 두려움이 있고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예배를 삶의 우선 자리에 두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드립니다. 감격과 흥분 가운데 무질서하게 드리지 않고 율법에 따라 질서 있게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3절을 다시 보십시오. 새번역성경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그들은,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이 두렵기는 하지만, 제단이 서 있던 옛터에 제단을 세우고, 거기에서 아침저녁으로 주님께 번제를 드렸다.” 그들은 주변 나라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두려운 마음이 들었음에도 예배를 드렸습니다. 북한에는 지하 교회가 있습니다. 북한 성도들은 은밀하게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찬송가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잡혀가 수용소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래서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만으로 찬송가를 부른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죽기 전에 찬송가를 한 번 속 시원하게 마음껏 불러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다 보면 예배의 소중함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유롭게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드릴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귀하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주님과 교제하고 주님을 예배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이 바로 우리의 힘입니다. 우리가 예배의 감격을 가지고, 감사와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킵니다. 번제를 첫째 날부터 여덟째 날까지 날마다 드립니다.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를 드립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즐겁게 예물을 드립니다. 하지만 그때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들은 건축 재료를 준비합니다. 석수와 목수를 고용하고, 시돈과 두로 사람을 통해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까지 운송하게 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성전 재건이 시작됩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합니다.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뽑습니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돌들을 골라냅니다. 성전 기둥이 올라갈 주춧돌을 놓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악기소리, 찬양소리, 웃음소리로 가득합니다. “주는 지극히 선하십니다.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악하고 목이 곧은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 대신 바알과 아스다롯 같은 이방 우상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수많은 선지자들의 경고와 책망을 받고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악했습니다. 진작에 심판받아 멸망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인자하신 분이십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강대국을 통해 징계하셨지만, 때가 되자, 자기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예배를 회복하게 하시고, 성전의 기초를 다시 놓게 하셨습니다.
성전 기초공사가 끝났을 때, 그 광경을 보러온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쁨으로 함성을 지릅니다. 무너진 성전이 다시 생기게 될 기대감 때문입니다. 이 성전은 자신들 인생의 최초의 성전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하신 일들과, 그리고 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기뻐합니다. 반면 대성통곡하는 사람들은 과거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옛 성전과 비교해 지금 성전의 초라함 때문입니다. 새번역성경 학개서 2장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 남은 사람들 가운데, 그 옛날 찬란하던 그 성전을 본 사람이 있느냐? 이제 이 성전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는 하찮게 보일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지난 세월 이런 성전도 없어서 예배드리지 못했을 때의 서글픔도 생각이 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사야서 43장 18,19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우리는 과거에 누렸던 하나님의 은혜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됩니다. 지난날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던 하나님은 과거로 끝나버린 하나님이 아니라 그 하나님이 지금의 하나님이십니다.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옛날 일, 과거 일, 지나간 일, 지난 시간들의 하나님의 은혜만 생각하고 있다 보면, 지금 하나님이 하시는 새 일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어르신들, 노인들은 기뻐 소리 지르는 젊은 세대가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세대를 통해 새로운 방법으로 당신의 역사를 친히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국한하고 제한시켜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 일하시는 방법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이루실 새 일들을 기대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광야에 길도 나고, 사막에 강이 생기는, 이전 방식과는 다르고, 이전에는 없었던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새로운 일하심을 바라보고 기대해야겠습니다.
4장 1,2절을 보십시오.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성전 건축을 막 시작하고 있을 때,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옵니다.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듣던 중 반가운 소리입니다. 자금도 부족하고 일손도 부족한데 제 발로 일꾼들과 자금줄들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와 족장들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정말 필요할 때 잘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 성전을 건축합시다.” 이랬습니까? 4장 3절을 보십시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당신들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오. 우리의 하나님께 성전을 지어드리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오.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한 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할 일이오.” 이런 말입니다. 대적들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합니다.
왜 그럴까요? 4장 1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섬기고 동시에 이방 신도 섬기는 혼합주의자들입니다. 사마리아는 강대국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북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앗수르 왕 에살핫돈은 사마리아 사람 일부를 강제로 앗수르로 끌고 가고, 또 앗수르 제국 내 여러 민족들을 사마리아 땅에 이주시켰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 민족 사이의 혼혈이 생겨났습니다. 섞인 것은 혈통만이 아니었습니다. 열왕기하 17장 33절은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그들이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사마리아는 여호와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신들도 함께 섬기는 혼합주의의 본산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성전 건축에 함께 참여하면 어떻게 될까요? 여호와의 성전 안으로 여러 우상들이 따라 들어오게 됩니다. 유다가 왜 멸망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말씀을 저버리고 이방 우상을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겨우 회복의 역사가 시작되려 하는데, 여기서 또 우상숭배에 빠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과는 불보듯 뻔합니다. 그러므로 현실은 손해를 보더라도 혼합주의 종교가 비집고 들어올 틈을 결코 열어주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길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제 막 시작된 신앙 회복의 역사가 또다시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와 족장들은 단호히 거부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홀로 건축하리라’는 것은 독불장군이 되어 혼자 성전을 짓겠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순수 복음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조상들과 똑같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고별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수아서 24장 14,15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혼합주의는 사마리아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혼합주의’의 의미는 ‘결합하다, 섞다’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종교의 좋은 요소들을 연구하고 종합하여 혼합하자는 이론입니다. 모든 종교를 포용하며 수용하는 자세를 일컫습니다. 일종의 ‘절충’입니다. 오늘날 혼합주의는 종교다원주의를 꼽을 수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는 역사와 문화의 갈림과 변천 가운데 ‘신’이 각기 다른 종교에서 다양한 형태와 이름으로 나타났을 뿐, 모든 종교가 결국에는 하나로 만난다는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또 오늘날 한국교회에 뿌리 깊은 혼합주의는 물질만능주의입니다. 물질만능주의는 오늘날 전 세계를 사로잡고 있는 일종의 유사종교입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겸하여 재물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나를 잘 먹고 잘살게 해 주는 분으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또 하나님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의 인본주의와 공동체를 도외시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개인주의라는 혼합이 신앙의 순수성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대판 사마리아 사람들과 기독교라는 큰 우산 속에서 같이 잘 지내자 하다 보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점차 말씀에 대해 상대적인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가 타락하게 될 것입니다. 예배와 영혼 구원의 열정이 사그라들게 될 것입니다. 결국 순수 복음, 신앙의 순수성을 다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혼합주의 세력에 대해 단호히 말해야 합니다.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우리가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4장 4,5절을 보십시오. 이같은 거부의 결과는 참혹합니다. 무서운 방해가 들어옵니다. 손을 약하게 한다는 말은 의욕을 잃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굴착기 소리 때문에 낮잠을 잘 수 없다며 구청에 민원을 넣습니다. 공사 차량이 지나가야 할 도로에 드러누워 날마다 ‘성전 재건 결사 반대’를 외칩니다. 뒤로는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성전공사를 막습니다. 그 결과 고레스 왕 시대부터 다리오 왕이 즉위할 때까지 무려 16년 동안이나 성전공사가 중단됩니다. 4장 6-23절은 성벽재건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4장 6절의 아하수에로 왕은 왕비 에스더의 남편입니다. 그리고 4장에 나오는 아닥사스다 왕은 성벽 재건을 위해 느헤미야를 예루살렘에 보내준 왕입니다. 성전 건축을 시작하는 지금 시점에서 약 90년 정도 후의 일입니다. 이처럼 에스라서의 저자인 에스라가 성전 건축 훨씬 뒤의 사건까지 함께 기록한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데 반대자들은 언제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반드시 사탄의 방해가 있습니다. 그 방해는 집요하고 끈질깁니다.
대적자들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상소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패역하고 악한 성읍, 반역을 일삼던 악한 도시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완성하고 나면, 저들 무리는 다시는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바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세금과 반역에 민감한 왕은 그들의 말을 받아들여 공사를 중단시키도록 명령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과 신앙의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고 만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여러 대적들과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으로 감당할 때 언젠가는 열매를 맺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홀로 건축하리라.” 세상 사람들은 어떠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꿋꿋하게 믿음의 길을 가고자 분명하게 결단해야겠습니다. 무엇보다 종교다원주의, 물질만능주의, 인본주의, 개인주의와 세상 쾌락의 거대한 도전과 싸우며,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사랑하며 예배하며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