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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뮌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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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처는 하르츠 산맥의 슈톨베르크에서 한 시민의 아들로 1489년 태어났는데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의 가족은 이단 사상과 관련된 시민 소요 혐의 때문에 슈톨베르크를 떠나야 했던 것 같으며, 그후 아셔스레벤·할버슈타트·크베들린부르크 등지를 전전했는데 뮌처는 크베들린부르크에서 라틴어 학교에 다닌 듯하다. 그의 이름이 1506년 라이프치히대학교 학적부에서 발견되었으며, 1512년 프랑크푸르트대학교에 입학하였고 후에 신학학사와 문학석사 자격을 얻었다. 라틴어·그리스어·히브리어에 능통한 전문적 언어학자로서, 고대문학과 인문주의 문학, 특히 성서에 조예가 깊은 당대 최고의 학식을 갖춘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513년 할레(잘레)에서 조교수로 일했고, 1514, 1515년에는 아셔스레벤에서 성직자와 교사를 겸임하며 교회개혁을 위해 투쟁하는 중간계층을 대변했다. 또한 개혁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여러 비밀결사를 주도했다.
1516~17년 아셔스레벤의 프로제수도원 원장으로 일했고, 1517~18년에는 브라운슈바이크 마르티네움(시의 고등학교)에서 가르쳤으며 1518년에는 마르틴 루터와 그의 개혁사상에 매료 되었다. 1519년 그가 프란체스코수도회,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위계질서, 성인숭배를 규탄하는 발언을 한 뒤 마르틴 루터 추종자라는 호칭이 붙었다. 그는 처음부터 독립적인 사상가였다. 라이프치히에서 벌어진 루터와 독일 신학자 요한 에크(1486~1543) 사이의 논쟁에 수시로 참석한 뒤 바이센펠스의 보이디츠 수도원에서 문헌연구에 몰입했고(1519~20) 그곳에서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기 나름대로의 종교개혁 사상을 발전시켰다. 지방의 시민들과 함께 비밀리에 일을 꾸미는 행동주의자였던 그가 이제는 루터가 출범시킨 종교개혁을 교회와 세속생활의 근본적인 변화, 즉 혁명으로 보는 개혁가로 성장했고 이후 자신의 입장도 이러한 기준에서 평가했다
츠비카우에서는(1520~21) 상류계급과 초기 광산조합 사이의 사회적 긴장 속에서 목회자로 성공했다. 이때 그는 평민편에 섰는데,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법과 뜻을 땅에서 실행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관행뿐만 아니라 루터파의 개혁 이념에도 점점 더 반대하면서 또한 종파주의적 입장을 더욱 강화해 갔는데, 그것은 ' 츠비카우의 예언자들'로 알려진 급진적 종교개혁 집단의 지도자 니콜라우스 슈토르흐의 가르침으로서 진정한 권위란 성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사람들에게 부여한 내면의 빛이라고 보는 입장이었다. 츠비카우에서 추방된 뮌처는 15세기의 개혁자 얀 후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보헤미아 집단인 타보르파(Taborites) 중에서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츠와 프라하를 여행했다(1521). 1522년 노르트하우젠에서 루터 지지자들과 대항해 싸웠고, 그들과 신학적 견해가 다름이 더 분명해져 루터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를 도시에서 추방하도록 맨 처음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들도 루터파였다.
뮌처의 개혁운동
뮌처는 루터의 신학이론에 따라 종교혁명을 시작했지만 곧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는 가르침이 성령으로부터 온다고 믿고, 그 가르침들을 루터의 의인론(義認論: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이나 성서의 권위에 대한 교리(성서는 신적 진리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교리)와 대립시켰다. 루터는 성서의 권위보다 성령의 내면적인 빛을 우위에 두는 뮌처에 대해 성령을 '털까지 통째로' 삼킨 자라고 비난했다. 뮌처 신학의 혁명적 측면은 반그리스도적 세상 권력이 필연적으로 정복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하나님의 도구인 민중 스스로가 이 변혁을 실천해야 한다는 명제를 결합시킨 데 있다. 그는 민중이 가진 것도 없고 지식에 오염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잘 드러낼 것이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