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상실한 자는 인간 이야기에 감동받는다
1994년 4월 6일 르완다 대통령이 암살되었다. 르완다의 다수족인 후투족은 소수인 투치족의 소행이라며 투치족의 인종청소에 나섰다. 이것이 르완다의 내전이다. 이 내전으로 투치족은 수십만 명이 학살당했다.
내전 당시 “국경없는의사회” 소속이었던 제임스 오르빈스키는 수많은 부상자를 치료하기에 여념이 없었다.(그는 훗날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부상자들이 너무나 많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그는 부상자들의 이마에 1, 2, 3이라고 쓴 테이프를 붙였다. 1은 즉시 수술, 2는 24시간 이내에 수술, 3은 응급실 맞은편 길가로 옮겨 담요로 덮어주고 숨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만일 여러분이 그곳에 있었다면 “이게 인간이 할 짓입니까!”라며 항의하겠는가! 설교시간에 교인들에게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고 설교하겠는가! 여러분 같으면 복잡한 수술을 통해 1명을 살리는 쪽을 지지하겠는가? 아니면 1명을 포기하고 간단한 수술로 5명을 살리 쪽을 지지하겠는가?
보건 전문가들은 이런 윤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연구했다. 그리한 후 그들은 더욱더 윤리적으로 해결할 QALY(Quality-Adjusted Life Year)라는 지수를 개발했다.
한 환자의 QALY 지수는 20이고, 다른 환자의 QALY 지수는 30이라면 의사들은 당연히 높은 지수를 가진 사람부터 수술한다. 목사들의 윤리적인 설교는 의료인들이 개발한 QALY 지수보다 높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불교의 금강경을 읽다가 놀란 적이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너무나 유사한 가르침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위복승(無爲福勝)이란 “복을 받겠다는 생각 없이 하는 선행은 어떤 선행보다 뛰어나다”는 뜻이다. 불수불탐(不受不貪)이란 “받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는다”는 뜻으로 주기만 할 뿐 부족한 것을 모른다는 뜻이다.
휴머니즘(人本主義)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중요시한다. 모든 종교에는 사람을 중요시하는 윤리와 휴머니즘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의 본질이 아니다.
목사가 윤리와 휴머니즘을 강조할 때 사람들은 교회에 나갈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 그 이유는 교회 밖에도 그에 못지않은 윤리와 휴머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보다 “사람”을 앞세우는 교회는 반드시 쇠락한다. 지금 서구 교회가 그런 상황이다. 신학자들이 종교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동안 교회는 無神論者들에게 얻어맞고 그로기(groggy) 상태에 빠져있다.
몇 년 전 장신대 신학춘추에 두 개의 특집기사가 실렸다. <무지개가 있는 풍경> 동성애에 관한 기사와 <하늘과 땅을 잇는 사람 ‘무당’ 정순덕을 만나다>였다. 하늘과 땅을 잇는 것은 원래 목사의 역할이 아니었나? 이제 그 역할을 무당에게 배우려 하는가?
동성애와 종교다원주의는 휴머니즘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보다 인간을 중요시하는 그런 종교는 반드시 자신의 종교 Identity를 약화시킨다. 몇 년 전 영국 교회의 출석률은 3% 미만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영국에서 이슬람교는 4.8%였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자신들의 종교 Identity가 매우 강하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라. 30년 후 우리 교단은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없겠지.
하나님을 상실한 자는 인간 이야기에 감동받는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동받은 자는 그 이상의 삶을 산다.
첫댓글 아멘~~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無所求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