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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태양의 제국(Empire of the Sun) ]
원작은 SF작가인 제임스 G. 발라드의 동명의 소설로, 작가 자신의 2차대전 때의 경험담이 일부 녹아 있습니다. 작가는 중국에서 일본군이 설치한 포로 수용소에서 가족들과 같이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주연은 크리스천 베일이 맡았습니다. 베일이 1974년생이니 정말로 어릴 때 찍은건 데 감탄할 정도의 명연기를 보여줍니다. 배우로서의 떡잎을 유감없이 보여준 걸작이죠.
이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가 만든 2차 대전 당시 중국을 무대로 한 이색적인 역사물이었습니다. 영국 소년과 일본인 소년 항공병과의 우정을 너무 강조해 일본이 중국에서 저지른 만행을 외면했다고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앨런 대비오의 카메라가 잡은 완벽한 화면과 존 윌리암스의 유려한 음악, 밸러드의 자전적 원작 소설이 지니는 깊이가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평이 이어졌습니다.
* 스필버그와 어린 크리스찬 베일
이 영화는 여러 명의 중국인 하인을 거느리고 부유하게 살던 어느 영국인 가정의 한 소년을 주인공으로 강한 반전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단지 어느 특정한 전쟁에 대한 혐오라기 보다는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전쟁에 대한 강한 거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감수성이 예민한 어린이에게 전쟁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며 삶의 좌표를 왜곡되게 결정지워 주는가를 섬세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침공함으로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합니다. <태양의 제국>은 그 개전 직전부터 1945년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됨으로서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는 직후까지가 그 배경이 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잃고 살벌한 살육의 현장 속에서도 소년다운 천진난만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 짐. 바로 일본군의 제로 전투기를 동경하는 마음입니다. 소년은 꿈에 그리던 제로기와 미군의 무스탕기와의 공중전 광경에 흥분하고 맙니다.
<태양의 제국>은 이렇게 어린 소년 짐의 순진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화려하게 영상을 가한 반전 영화입니다. 아울러 혹독한 전쟁기를 겪으며 오직 살아남기 위해 교활한 생존의 지혜를 터득하는 한편, 어린이다운 순진성을 잃어가는 소년의 증언을 아름다운 영상 속에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전쟁이 성장기에 있는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그리고 그 소년은 전쟁 속에서 생존을 위해 어떠한 행동을 하는가? 어떻든 그는 살아남았고 그래서 영웅이며 그래서 이 영화는 어린 영웅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이 영화에서 2차대전이라는 암흑기를 개성있는 창작 음악으로 잘 표현한 작곡가 존 윌리엄스는 전쟁 전의 평화로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영국 민요 한 곡과 쇼팽의 피아노 소품 한곡을 빌려쓰고 있습니다.
먼저 타이틀에 흐르는 "수오 강(Suo Gan)"이란 곡은 주인공이 13살 짐의 내면 세계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노래는 웨일즈 지방의 민요로 암브로시안 주니어 합창단의 노래와 더불어 영화 전편에 잔잔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쇼팽의 피아노 소품은 바로 마주르카 Op.17-4로 주인공 짐의 어머니가 상하이 저택에서 한가롭게 연주하는 곡입니다.
쇼팽은 조국인 폴란드 민속 무곡의 형식을 빌어 마주르카를 여러 곡 완성했는데, 같은 시기에 선보인 폴로네이즈풍의 소품이 다소 귀족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면 마주르카는 향토색이 짙고 목가적인 느낌을 줍니다.
당시 꽤 공을 들인 <컬러 퍼플>이 아카데미로부터 무시를 당한 스필버그는 이 영화에 거는 기대는 정말 대단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시상식장에 나온 스필버그는 감독상 수상자로 <마지막 황제>의 베르나르도 베로톨루치가 불러지자 상심 끝에 고개를 푹 숙이는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때부터 헐리우드가 스필버그를 질투한다라는 얘기가 나돌았고 스필버그는 <인디아나 존스>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이듬해 와신상담한 스필버그는 <신들러 리스트>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거머 쥡니다.
[ 간략한 줄거리 ]
중국과 일본이 피의 전쟁을 벌이고 있던 1941년 중국 상하이에는 수 천 명의 서양인들이 국제거주에 관한 외교 조약의 보호 아래 조계지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영국의 도시처럼 상하이의 거리를 그들의 문명의 이기로 채워 놓고 모국과 다름없이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의 침공에 의해 평안한 삶의 파국을 맞게 됩니다.
중국 상하이에 사는 부유한 영국인 가정의 아들 짐은 늘 비행기를 동경하는 꿈 많은 소년입니다. 일본의 진주만 습격이 현실화 되고 상하이 점령 작전이 개시되자 상하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불안을 느낀 짐의 가족은 피난을 결심합니다.
거리로 뛰어나온 피난 인파 속에서 짐은 어머니 손을 놓치고 맙니다. 짐은 우여곡절 끝에 일본군에 체포되어 외국인 포로수용소에 갇히고 포로수용소에서의 참담한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포로수용소에서의 짐은 다재다능하고 노약자와 병든 사람들에게 약을 공급하는 정많 은 소년으로 통합니다. 특히 생존을 위한 그의 투지는 포로수용소에서 절망의 나날을 보내는 이들에게 희망의 불씨가 됩니다. 힘든 생활 속에서도 짐은 비행기를 동경하는 짐의 어린 꿈은 여전히 시들지 않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일본 가미카제 파일럿들의 모습을 보며 동경심을 느끼고 가미가제 대원인 한 일본 소년과의 우정역시 그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합니다.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된 날 하늘로 떠오르는 원자폭탄 역시 하늘을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영혼의 모습으로 느낍니다. 일본의 패전과 함께 일본군과의 이동을 중단하고 짐은 자신이 생활하던 수용소로 돌아와 홀로 생활을 시작합니다.
포로수용소에 도착한 미군을 맞이하는 건 전쟁의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 꿈 많은 소년 짐이었습니다. 결국 미군에 의해 짐은 다른 곳으로 보내지고 그곳에서 짐은 부모님과 재회하게 됩니다.
[ 중-일 전쟁의 도화선, 노구교 사건 ]
* 달빛 어린 노구교
* 북경 인근 남서쪽에 위치하고 있는 노구교
굴욕적인 당고협정 체결로 청조의 수도였던 북평(지금의 북경)은 거의 무방비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일본군은 만리장성부터 북평 동북지역을 죄다 장악하여 이로써 옛 북경인 북평은 동쪽과 남쪽, 북쪽의 삼면에서 일본군의 위협을 받게 됩니다.
* 당고 협정
1933년 5월 31일, 천진의 외항인 당고에서 일본군과 중국 구민정부군 사이에 체결된 협정으로 이 협정으로 중국은 만주의 현실(일본의 점령)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게 됐고, 일본군은 화북 침략의 첫 단추를 끼우게 됩니다.
당고협정이 체결된 후 광활한 화북 평원 일대는 일본군의 연병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일본군의 실전 훈련 장소는 1936년 10월부터 북편 서남쪽의 풍대와 노구교 일대, 북녕선 철로 주변까지 확대됐습니다.
북평 주민들은 시도 때도 없이 울려 퍼지는 일본군의 총소리에 단잠에서 놀라 깨어나기 일쑤였고, 영정하를 사이에 두고 일본군과 전선을 맞대고 있던 중국 수비군도 신경이 쓰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37년 7월7일 오후, 풍대에 주둔한 일본군의 한 중대가 노구교 북쪽에 있는 용왕묘 사당 근처로 다가왔습니다. 밤 10시께 용왕묘 일대에서 총소리가 크게 들렸습니다. 완평성의 중국군은 일본근이 기척에서 실전에 가까운 군사훈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즉시 훈련 부대의 움직임을 치밀하게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 노구교로 진입하는 일본군
밤 11시 40분 일본군 특무기관장 마츠이가 죽국의 화북정무위원회 외교 부서에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그는 “일본군 1개 중대가 군사훈련을 하던 중 중국군 제29군의 공격을 받았고, 이 와중에 일본군 한명이 납치당해 완평성 안으로 끌려갔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부대를 파견해 수색하겠다”라고 무리한 요구를 했습니다.
이같은 마츠이의 요구에 중국 수비군 사령부는 일본군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날이 밝은 후 현지 군경들을 동원해 실종된 일본 병사를 찾도록 조치하고, 실종된 병사를 발견하는 즉시 일본군에 송환할 것이라고 응답했습니다.
* 일본군의 진격
실제 상황을 이랬습니다. 7월 7일 밤 10시 40분. 야간훈련 중이던 제8중대를 향해 몇 발의 총성이 들립니다. 중대장인 시미즈대위가 급히 병사들을 집결시켜 점호했는데 이등병 한명이 빈 것을 발견하자 이것이 중국군의 공격 때문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하고 풍대의 본대로 무전을 때려 이치키 소좌에게 "노구교에서 중국군이 선제공격하여 아군 1명이 실종되었다"라고 보고하고 병사들에게 실종된 병사를 수색할 것을 명령합니다.
* 북경에 입성하는 일본군
보고를 받은 이치키도 8일 새벽 0시 연대장인 무다구치 렌야 대좌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죠. 무다구치는 병력을 즉시 출동시키고 완평현성에 주둔한 중국군과의 교섭을 명령합니다. 새벽 4시 완평현장 왕냉제와 일본측 특무기관장 마쓰이 다쿠로가 만나 실종된 병사를 찾기 위해 완평현성을 합동 수색키로 합의합니다.
그러나 어이없는 것은 그 실종되었다는 병사는 설사 때문에 무단으로 자리를 비웠을 뿐이고 20분후 자기 자리로 복귀했다는 것입니다. 중대장은 그 사실을 나중에 알았지만 이미 연대장까지 보고가 올라가 국제 문제로 비화된 상황에서 이제 와서 도로 대대장한테 "착각했다"라고 보고하는 것은 체면 문제였기에 깔아 뭉개 버립니다.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을 세우면서 중국 본토에 대하여 호시탐탐 침략을 노리고 있던 일본군은 이를 기화로 노구교 일대로 병력을 대거 이동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완평성 안에 있던 중국군 장병들도 즉시 노구교로 긴급 출동했습니다.
* 일본군
하늘에는 새벽달이 희미하게 걸려있었습니다. 부드러운 달빛이 800년의 역사를 가진 다리를 쓰다듬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새벽이었습니다. 8일 새벽 6시께 일본군이 먼저 완평을 포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새벽 달빛이 흘러내리던 노구교의 아름다운 풍경은 풍비박살이 났습니다.
* 점령 직후의 노구교
한 병사의 설사가 8년간의 전쟁으로 이어지고 무려 2천만명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이 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일본의 구실일 뿐이고 어차피 일본군은 무엇을 꼬투리로 잡던 간에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겠지요. 언제가 되었건 전쟁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 광둥성에서 이동하는 중국군
< 중일 전쟁 >
* 일본의 점령지역
노구교에서 시작된 일본의 공격은 속전속결로 3개월 안에 중국을 점령한다는 계획 하에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옵니다. 이후 베이징 ·톈진을 점령하고 일본은 전쟁을 상하이로 확대시킵니다. 이어서 1937년 12월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여 무고한 시민 수십만을 잔인하게 살육하고 여성들을 강간하고 약탈하였습니다.
그 뒤 우한을 공략하고 광둥에서 산시에 이르는 남북 10개 성과 주요 도시의 대부분을 점령하였습니다. 한편, 중국 측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혼란을 거듭하였으나, 일본의 공격을 먼저 막아내는 것이 우선이라는 국공합작을 이루면서 항일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여 본격적인 항전을 시작하였습니다.
* 중국 공산당군(팔로군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웠습니다)
중국군의 유격전에 따라 일본군은 광범한 전선에서 ‘점(도시)과 선(도로)’을 유지하는 데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중에도 일본군은 삼광작전(三光作戰:殺光 ·燒光 ·搶光) 등 잔학행위로 전쟁 전기간(全期間)에 걸쳐 중국인 2,000만 명을 죽였으며, 중국 민족 그 자체를 적으로 여기는 전쟁처럼 많은 중국인을 도륙하였습니다.
일본은 수백만의 대군과 온갖 근대병기를 동원하는 한편, 왕징웨이 등의 친일정권을 수립하여 전쟁을 수행하였으나, 중국 민중의 항전 의지를 꺾지는 못하였으며 중국의 국공합작으로 전쟁은 장기화하였습니다.
* 중국군을 위문하는 중국 여배우들
일본 제국주의는 중일전쟁의 전선을 동남아시아로 확대하고, 태평양을 넘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합니다. 이리하여 중 ·일전쟁은 태평양전쟁으로 확전되고 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승승장구하던 일본군은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참패를 당하면서 사기는 저하되고 군기도 문란해졌으며, 105만에 이르는 대병력이 이미 제2전선(第二戰線)이 되어버린 중국 전선에 못 박혀 있음으로써 제구실을 못한 채, 원자폭탄 2방을 얻어 맞고 1945년 8월 15일 포츠담선언 수락과 더불어 중화민국에 항복합니다.
* 충칭시 일본기의 폭격 참상
* 만리장성의 일본군
* 상해 전투시 일본 해군육전대, 독가스를 살포하고...
* 멀리 노구교가 보입니다.
* 장병들을 위문하는 손문의 부인이었던 쑹칭링 여사, 그녀는
죽을 때까지 상해에 거주하였고 가입은 안했지만 끝까지 공
산당 편이었습니다. 동생 쑹메이링은 장개석의 부인이었구요
* 중일전쟁을 지휘한 장개석(장제스)
* 일본군의 진격
* 난징 대학살
난징시 점령과 대학살 관련해서는 본 시리즈 제4편< 진링의 13소녀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삼광작전(三光 作戰)
일본군이 중일전쟁에서 벌인 제노사이드이자 초토화 작전입니다. "삼광 작전(三光 作戰)"이란 일본군이 사용한 조직적 전쟁범죄를 중국에서 일컫는 말입니다. 말의 직접 출전은 전후 중국 측에 체포된 일본군 전범의 자술서에서 나온 것으로, 중국 측에서 붙인 이름이며, 일본군측이 부르던 명칭은 진메츠(신멸) 작전입니다.
그래서 삼광이란 다음 세 가지의 지시를 의미합니다.
• 살광(殺光) = 다 죽여
• 소광(燒光) = 다 태워
• 창광(搶光) = 다 뺏어
* 이치고 작전
* 이치고 작전 지도
이른바 "대륙타통작전"은 1944년 4월 17일부터 12월 10일에 걸쳐 중국 대륙 남북에 걸쳐 펼쳐진 일본군 최후의 대공세입니다. 일본 측 정식 작전명은 "이치고 작전"이라고 하며, 중국은 "예상계회전"이라고 부릅니다.
일본군이 만주에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까지 연결하여 중국대륙을 남북으로 횡단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인데, 이는 남방의 자원을 만주를 거쳐 일본 본토까지 육로로 가져오겠다는 목적과 중국내의 미 공군 비행장들을 공격해 파괴함으로서 미 폭격기들이 일본 본토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결과만 놓고 볼 때 일본군의 공세자체는 성공적이었으나 제공권이 없었기 때문에 점과 선으로 연결된 중국내 점령지의 상황에서 남방의 자원을 육로로 운송하겠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이었고, 마리아나해전에서 일본군이 참패하고 오키나와가 함락되어 여기서 발진한 B29 폭격기들이 동경까지 폭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역시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 마루타와 731부대
* 하얼빈에 있는 기념관
* 731부대장 이시이 중장
2차대전 당시 일제 세균부대중 하나였던 '731부대'에서 희생된 인체실험 대상자를 일컫는 말로, '마루타'는 일본말로 통나무라는 뜻입니다. 3천여 명의 병력을 거느린 731부대는 모두 8개 부서로 구성됐습니다.
1부는 페스트, 콜레라균 등 각종 전염병균에 대한 연구를 중점 실시해 300~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감옥에 수감된 마루타들에게 세균실험을 자행했습니다. 2부가 이들 세균을 사용하는 실행부서였습니다. 제4부인 생산부는 말 그대로 병균과 세균을 대량생산하는 부서였습니다.
산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인체실험으로 악명을 떨친 731부대에서는 1940년 이후 매년 600명의 마루타들이 생체실험 대상이 돼 최소한 3천여 명의 중국 러시아 한국 몽골인이 희생된 것으로 소련의 일제전범재판 결과 드러났습니다.이 재판에서 731부대 관계자들은 마루타 감옥이 만들어진 뒤 살아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731부대는 연구에 그치지 않고 지난 39년 일제가 몽골과 소련 접경지대인 노몬한에서 소련에 대해 도발하다 대패하자, 소련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강물에 장티푸스균 등을 실제로 살포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1945년 8월 9일 일본 육군성은 일본의 패전을 미리 알고 부대시설을 파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 공병대가 긴급히 투입되어 8월 9일부터 13일까지 4일간 본부동을 제외한 주요 건물들은 모두 폭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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