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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숙 신작시 1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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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제어방식 외 9편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받고도 오지 못했다는 친구
함께 울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손을 잡아주고 싶다며 전화가 왔다
며칠 후 만난 친구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끌고 낙지볶음 집으로 갔다
마주 앉아 3단계의 매운 낙지볶음을 시켰다
마지막까지 그릇을 끌어안고 있던 산 낙지
제 몸을 죽이고서야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
매운 낙지에 콩나물과 슬픔을 함께 넣어 비벼먹었다
낙지보다 아버지의 시간이 목구멍을 넘어가며 덜컥 거렸다
집 귀퉁이 돌담 하나에도 집착을 보이던 아버지
집착은 세상에 대한 억울해 하는 방식이었을까
아버지와 함께 했던 시간이 빈 그릇위에 쏟아졌다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된 내게 손수건을 내밀며
“맵지”라고 묻는 친구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거렸다
가끔 사내 몰래 낭떠러지를 돌아 나왔다
사내가 떠나고 난 뒤 푸른 신호등에 집착했다 그건 내 안에 시도 때도 없이 사내를 향하는 신호를 묶어두고 싶기 때문이다 바람이 잦아들고 등뼈 사이에 모래가 쌓였다
서걱거리는 눈꺼풀의 배터리를 갈아 끼우며 달려간 방파제 그곳에는 밀물에 밀려온 파도가 제 몸을 쪼개고 있다 등대는 방파제 끝에서 하루 분량의 빛을 게워냈고 테트라포트*는 제 아랫도리를 물에 담그고 하루 분량의 거품을 게워 냈다 쿨렁거리던 물소리 길 밖으로 흐르고 늙은 물은 동심원이 되어 마모된 페달 안에서 자꾸 헛돌았다 그 후 건널목에서 푸른 신호가 바뀌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잦아졌다
하늘에는 비행기가 획을 그으며 지나가고 비행기소리는 대낮 등대에 갇혀 발바닥이 펄펄 끓었다 비행기 표를 사는 대신 비행기 꼬리로 낳은 길의 끝을 잡아당겼다 말랑거리며 흩어지던 사내의 영토
포구 안쪽 전신주에 삼일동안 굶었다는 달이 걸린 날은 물살도 안쪽으로 휘었다 휘파람 대신 숨비소리를 천천히 읽어 내리자 물살은 오래된 화장을 지우며 늙어 가는 나이테를 보여주었다 치마 끝이 젖을 때까지 등대 뒤에 숨어있었다
가끔씩 사내 몰래 낭떠러지를 돌아 나왔다
검은 여행자
―클림트
90도로 꺾었어요
목덜미를 누르고 키스를 해줘요
목덜미가 보이자
누군가는 눈을 흘기고
누군가는 침을 삼키고
누군가는 피를 흘리고
당신은 손등으로 입술을 닦았지요
몸 안에 박혀있는 단어들을 수집해서
당신에게 보내고 싶었어요 그러나
아버지에게서 훔쳤던 금은 바닥났어요
불안으로 꺾여진 목에
찬란했던 아버지의 시간을 그려 넣지 못하고
구석으로 밀어 넣었지요
고향집은 구불거리는 길 끝에 있고
바닥에는 발화점 높은 늑대의 피가 흐르고
손톱에 하현달이 둥지를 틀었어요
곱게 단장한 어머니가 골목 밖으로 빠져나가면
찬란했던 골목은 닫히지요
몸으로 몸을 건너고
몸으로 몸을 이야기하는
어머니의 어둠
검은 통증을 통해 경건해지는 눈물을 지우고
가만히 서 있어도 흔들리는
어머니의 어둠을 따를 뻔했어요
그녀의 눈이 월식으로 빛날 때
서쪽을 바라보는 나무가 몸으로 수행하는 계절이다 눈물로 가득한 주석註釋은 본문보다 왼쪽으로 기우러져 지구 밖을 헤맸다 기도를 위한 그녀의 주문呪文이 나무에서 추락하는 동안 바람의 송곳니에 찢어진 잎들은 해거리하는 숲 앞에 엎드려 있다 쇄골을 파 먹혀 돌아올 시간을 놓쳐버린 그녀 저녁이면 마을 어귀에서 헐거워진 몸을 누구에게나 들켰다
그림자가 사라진 달은 안으로 창을 내고 무릎보다 위쪽을 겨냥했다 그때가 그녀의 봄이었을까 싹을 틔우는 숲은 그녀의 이름 앞에서 무성했다 싱싱해진 정강이뼈를 세우고 그녀가 기억하는 길과 달이 삼킨 허공을 게워내곤 했다 그 또한 무성했다
쇄골에 접힌 이름을 꺼내어 문장 속으로 집어넣었다 목차로 서 있는 숲을 검색할 차례 설정은 언제나 일직선상에서 이루어졌다 달을 삼킨 손톱과 밍밍한 맛에 길들여지는 밤을 토해낸 그녀 건반을 기어 다니며 일곱 개의 음으로 뱀의 허물을 벗기고 잃어버린 음 하나를 찾아 치마 아래로 숨겼지만 돌아올 주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시간을 삼킨 거울 뒤에 속눈썹을 붙였다
바람은 여전히 거울 뒤에서 상처를 단련시켰다 이제
그녀는 계절과 상관없이 제 안에 완전한 허공 하나를 만들었다
기억의 단층
땡땡이 지하도를 지나면 자유시장*
골목 좌판에서 경건하게 살아낸 시간의 단층을 본다
꾹 눌러 놓은 돼지머리는 자본주의의 텍스트다
중심을 잃은 기호는 문장의 행간을 배회하다
의도적으로 자주 길을 잃었다
감정의 폐기물을 쌓아 놓은 탄맥이 겹칠 때마다
진술자는 흑과 백으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돌개바람 몇 개가 자본주의의 골목으로 들어서면
우리는 인간이 버린 연대기를 절름거리며 관통해야 했다
바람은 신의 대한 주문呪文의 증거로
나뭇가지 위에 바람의 흘림체를 남겼지만
우리는 눈치채지 못했고
주어에 체한 수식어들만 무성했다
고봉밥 아래 엎드린 치욕을 치유하기 위해 바라건대
반찬이 아닌 것에 무릎을 꿇는 헐거운 계절은
퉁퉁 부운 발을 끌고
청보리밭이 아름답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오래전에도 신들은
풀이 눕는 방향에 대해
바람이 부는 방향에 대해
서로의 입술을 주고받았다 그럴 때마다
이방의 말을 혀끝에 달고 입안에 침이 흥건해진 돈족들
왕성해진 식욕으로 인해
가해자의 주어가 명치끝에 걸려 넘어가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지워진 이름으로 읽힐 것이다
시장 골목 좌판에서 신은 죽은 눈으로
발아를 꿈꾸는 우리의 시간을 바라보고 있다
*자유시장 : 부천역 부근에 있는 시장
카보다 로카*
몇 생애를 돌아와야 이곳에 몸을 던져 부서질 수 있을까
마지막 남아있는 온기로 그리움의 둘레를 닦는다
들숨과 날숨 사이에서 바람알을 슬어낸 파도는
제 몸을 찢어내며 절벽 아래서 무릎을 꿇었다
끝과 시작이 같다는 지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경계에 서서 바라보는 또 다른 경계
벼랑을 타고 올라온 돌개바람이
동양에서 온 여자를 사정없이 밀쳤다
까보다 로카에 주저앉았던 여자
바람의 뼈를 붙잡고 일어섰다
적어도 이끼 낀 절망 하나쯤은 가슴에 지니고 와야 대서양과 마주설 수 있다는데 벼랑에 서있던 왼쪽 발끝이 별도봉* 자살바위에서 흔들리던 바람의 속도를 기억했다 심장에 돌멩이 하나 박아 놓고 뒤돌아보지 않고 가던 사랑의 시간이 끌려 왔다 까보다 로카에서 마주한 슬픔은 몇 번째 슬픔일까
여자의 정오는 기울어지고 생의 간극을 메우던 눈물로 문장을 쓴다 남겨진 자의 영혼은 무슨 색실로 감침질을 해야 할까 춥고 외로운 씨방에 뿌리 내린 여자 침묵의 둘레를 서성이다 심장이 파 먹힌 새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소환된 익명의 시간은 재편되었고 바다는 연인의 상처를 감싸 줄 푸른색을 낳았다 절망을 배경으로 기억의 셔터를 눌렀다 심장에 박혀 있던 돌멩이는 사라지고 관음觀音으로 읽어도 좋을 파도소리가 무늬로만 찍혔다
그제서야 바람에 밀리던 동양 여자 오래된 사진 속을 빠져 나왔다
*카보다 로카 : 포르투칼 땅끝마을
*별도봉 : 제주시에 있는 오름
불온한 오독誤讀
퇴근길
버스에서 내려
골목길로 접어들어 얼마나 걸었을까
같이가 처녀 같이가 처녀
굵직한 사내의 음성이 발자국을 잡아 당겼다
등뼈를 뻣뻣이 세우고 최대한 천천히 걸었다
다시 부르는 소리
같이가 처녀 같이가 처녀
길바닥에 발자국을 꾹꾹 눌러 찍으며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며 걷는데
다시 애절하게 부르는 소리
같이가 처녀 같이가 처녀
마지못해 돌아본다는 느낌으로 돌아서 사내의 목소리를 찾았다
들어올 때까지는 보이지 않던
골목 어귀에 세워진 생선트럭
순간 사내의 목소리에서 오래된 비린내가 확 풍겼다
화끈 거리는 얼굴을 숙이고 돌아서는데
다시
갈치가 천원
갈치가 천원
행간은 지워지고 음절로 끊겨 뚜렷하게 들리는 단어
어떤 사랑
내안에는
내가 없다
너를 향해 모두 떠났다
아직도
닫혀있는 너의 문 앞에서
닳아버린 정강이뼈를 끌고 서성이는 나를 본다
목구멍에 방울 달기
원미동에는 걸어 다니는 풀들이 산다
풀은 풀[草]이 되기도 하고 풀이 되기도 한다
늙은 풀은 바람이 불면 납작 엎드려
굽은 등으로 낮달과 내통하고 웬만해선
태풍이 불어와도 방향을 탓하지 않는다
몸 안에 핏줄처럼 사람의 가슴으로 온기를 넓히는 골목길 누군가는 ‘돈 필요하신 분 싼 이자로 빌려’ 준다는 일수명함을 날리고 가게 앞에 떨어진 명함 안쪽으로 기웃거리는 과일 가게 사장님과 이불가게 사장님은 허기진 웃음을 턱 아래로 흘렸다 돈은 필요 없고 일수명함만 필요하다는 누군가는 굽은 등으로 일수명함을 주워가며 얼마냐고 묻는 등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나에게는 세 개의 절벽으로 읽혔다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햇빛을 나눠주며
상처 난 부위에 시간을 발라주던 새끼손가락에선
뒤끝 없다는 문장만 툭 떨어질 뿐
앞 끝은 여전히 난폭했다
돌아가기엔 너무 늦은 시간 가난한 신은 흉터 속으로 난 길을 택했다
담 밖으로 고개를 내민 목련가지 끝에 잎 몇 개가 매달려 있는 계절이다
발아래 그늘은 야위어 가고 담장에 기대어 집안을 들여다보던
바람이 천천히 돌아나가는 것을 보았다
시간의 주머니를 탈탈 털었다
수식어가 사라진 문장 몇 개가 전부였다
발밑에서 찢어져 너덜거리는 나뭇잎 하나를 주어 손바닥에 올렸다
손바닥이 따뜻해졌다
오늘도 나는 원미동 난전에 앉아 거미줄에 걸려있는 풀씨를 줍는다
갠지스의 저녁
서쪽 하늘에 불씨를 당기며 강에 당도 하였네
가트마다 마지막 시간을 준비하는 노을이 즐비하였네
시간에 미행당하다 남아 있는 생애 대신
탐독하지 못하고 흘려보내는 물결을 바라보았네
짧게 잘린 바람이 뱃전을 흔들었네
흔들수록 선명해지는 물살 앞에서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못한 나
그저 강 건너를 바라보았네
강에는 빈 웃음소리만 가득 흐르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이
안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사람의
몸 안에 지은 기억이라는 낡은 집 한 채
갠지스 강에 헹구어
장작불과 함께 피워 올리는
죽음의 밤이 거기 있었네
강은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으로 가득 흐르네
나는 아직도 강 입구 첫 번째 질문 앞에 서 있네
김양숙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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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개의 섬을 항해하다
왜 내 안쪽의 어둠이 자꾸 읽혀지는 것일까? 자꾸 만져지는 것일까? 발이 묶인 시대적 상황이어서 그럴까?
요즘은 친구라고 쓰고 그리움이라 읽는 절망을 몸으로 감내한다. 그렇다면 절망에 갇혀있는 나의 어둠은 어떤 것들이며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둠의 뿌리는 사는 동안 자의에 의해 또는 타의에 의해 받는 상처들인 것이다. 내 안의 상처받은 영혼들을 치유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 행간을 읽어내는 일이 시인의 역할이라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행간, 자연과 사람 사이 행간에 존재하는 어둠을 시라는 형식을 통해서 밖으로 끌고 나오는 것이 나의 책무인 것이다. 나와 내 안의 여러 나 사이에도 어둠의 행간은 존재한다. 그곳에는 또 다른 나의 얼굴들인 많은 상처가 숨어 있다. 그 상처들을 치유하기 위해 시를 쓴다고 하면 왜 시를 쓰는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까?
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단연코 모른다, 일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 당신의 시가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묻는다면 나의 시는 내 삶의 기표라고 말할 수 있다.
망망대해에 혼자 떠 있다고 느꼈을 때 시는 나에게 부표가 되어주었다. 출구 없는 방에 갇혀 방황할 때도 시는 손을 내밀어 문을 만들어 주었다. 절망의 절벽에 서 있을 때도 시는 절벽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서게 해주었다. 그때마다 나는 절망의 대척점을 향해 발을 내딛는다.
내면을 통해서 울려오는 고뇌와 절망의 소리를 오관으로 받아들이고 은유적이거나 상징적인 말의 옷을 입혀 세상으로 내놓는 일은 시인의 직분인 것이다. 이때 탄생한 시의 역할은 치유인 것이다. 여기서 시는 시인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의 치유하는 일이며 상대적 치유인 것이다. 치유의 속성은 공감에 있다고 본다. 시는 읽는 것이 아니라 시에게로 한 발 짝 다가가 오감으로 느끼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즉 시와 교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서로의 상처를 안다는 것이며 손을 내밀어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일이다. 이렇듯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는 시 한 편을 짓고자 나는 오늘도 자음 19개와 모음 21개의 섬, 총 40개의 섬들을 향한 긴 항해를 위해 배를 띄운다.
김양숙 시인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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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제주특별자치도 출생.
1968년̰~1971년 제주여자상업고등학교 입학. 1학년 휴학. 1969년 복학. 3학년재학 중 6월 제주행정공무원시험 합격 그해 10월 공무원으로 임용되어 근무.
1988년 <여백> 동인을 결성, 동인지 4권 발간.
1990년 『문학과 의식』 시 부문 등단.
1990년 『문학과 의식』 출신 모임인 <흐름>동인을 결성, 동인지 5권 발간.
2005년 경기문학상 수상.
2007년~2010년 한국방송통신대학 국문학과 입학, 졸업.
2008년 첫 시집 『지금 뼈를 세우는 중이다』출간(시와산문사).
2009년 한국시인상 수상.
2013년 두 번째 시집 『기둥서방 길들이기』 출간(시와소금사).
2013년 광화문시인회 동인활동 시작. 매년 동인지 발간 참여. 『광화문』 8권 발간.
2013년 역사생태문화 해설사 취득 및 활동.
2014년 독서지도사 취득. 어린이 일기교실 3년간 활동.
2014년 독서심리치료사 취득.
2017년 『시와 산문 작품상』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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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 김양숙 / 기둥서벙 길들이기
계간 《시와소금》, 춘천 입주를 마쳤습니다.댓글(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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