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래를 듣고 울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식민지 조선인의 민족정서를 자극
하였다. 이로 인해 왕평 이응호 선생은 일경에 잡혀가 많은 고초를 당하였다.
황성옛터는 일제에 의한 최초의 금지곡이 되었고 우리 민족에게 탄압과 압제가
가중되었다.
선생은 이후에도 일제에 항거하는 의미로 민족성이 강한 노랫말을 담아 ‘대한팔경’과 ‘조선행진곡’ 같은 노래를 작사 하였지만 일제에 의해모두 금지곡이 되었다.
‘황성옛터’는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효시이며 항일가요 제1호로 지칭되고 조선의
세레나데로 불리우며 일제에 의해 핍박받던 민족의 애환을 달래 주었던 노래이다.
왕평선생은 1908년 당시 영천군 성내동에서 태어났으며, 1941년을 일기로 평북
강계에서 신카나리아 여사와 함께 ‘남매’ 라는 극에 출연하던 중 무대에서 생을 마감하였으니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아까워 하고 추모하기 위해 1943년 OK레코드사에서 가수 남인수의 노래로 ‘오호라 왕평’ 을 발매하기도 하였다.
왕평은 어릴적 부친으로 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영천보통학교(현재의 영천초등학교)를 나와 서울에 있는 배제 중학교를 다녔다. 어린시절 왕평은 조부 산소의 비문을 직접 쓸 정도로 신동이라 불려 졌었다고 한다.
그 후 왕평 선생이 폴리돌 레코드사 초대 문예부장 시절에 우리나라 대표적인 민요가수였던 선우일선, 왕수복, 왕초선등과 작곡가 김용환(가수 김정구의 형)을 배출시켰다.
예명은 당시 일경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왕평, 편월, 추야월으로 바꿔가며 사용하였으며 대표작은 ‘황성옛터’ ‘조선팔경’(대한팔경)‘능수버들’ ‘항구의 일야’ ‘조선행진곡’등 수많은 노래를 남겼다.
또한, 극작에도 조예가 깊어 ‘경성야화’ ‘코스모스 호텔’ 등의 극본을 썼으며,
1933년경 당시 눈물의 여왕으로 불리는 여배우 전옥을 있게 한 ‘항구의 일야’
원작자이며 배우로서 전옥과 공연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시 ‘항구의 일야’ 는
라디오 드라마의 효시가 되었다.
1932년에 취입 한 ‘황성옛터’는 왕평이 지은 시에 전수린이 곡을 붙였으며
가수 이애리수가 불러 대단한 반향을 일으킨 노래다. 당시 빅터 레코드사에서
발매한 민중의 노래인 ‘황성옛터’는 5만장이나 팔렸다고 한다. 당시 축음기 1대를 보유하면 부자집이라 했으니 5만장의 sp판이 팔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아니 할 수 없다.
‘황성옛터’가 처음 탄생하게 된 것은1930년경 지두환이 이끄는 순회 극단
조선연극사는 만주 일대로부터 신의주, 평양에서의 공연을 마치고 경기도 개성을
거쳐 황해도를 바라보는 온천지 배천에 들어가 있었다. 당시 무대 감독이며
작사자인 왕평과 바이올린 연주자요 작곡가인 전수린이 개성 공연을 마치고
고려의 황궁인 만월대(고려왕조의 정궁인 연경궁의 앞뜰) 산책을 하고 있었다.
왕평은 그 옛날 고려가 영화를 누렸던 당시를 생각하며 희미한 달빛이 비치는
만월대를 걸으면서 이곳 개성이 고려의 도읍이었건만 그때의 부귀영화는 어디가고 옛 성터에 이렇게 잡초만 우거져 있나 생각하니 마음이 쓸쓸하고 괴로움에 잠겨 있었다.
「폐허가 된 옛 황성을 거닐면서 고려의 영화도 이젠 멸망하여 무성한 잡초와 벌레소리만 남았구나」
이는 우리 민족들이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는데 멸망한 옛 고려의 영화를 생각하며 일제의 탄압을 받고 있는 우리 민족의 아픔을 비쳐볼 때 그것과 무엇이 다르랴! 왕평은 그 아픔은 일제에 핍박 받고 있는 우리 민족들의 아픔이 아닌가? 일제 식민통치에 시달리는 우리 민족의 운명을 생각하며 서글픈 마음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작곡가인 전수린은 왕평 선생의 ‘황성옛터‘ 시를 받아 들고 감탄을 했다.
그것은 자기가 구상하고 있던 악상과 딱 맞아 떨어진 것이었다.
전수린은 즉석에서 바이올린의 선율에 담아 연주를 했다. 황성옛터의 노랫말에
실은 바이올린의 애절한 선율은 듣는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였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황성옛터를 서울 단성사 극장에서 처음 무대에 올려 졌을때
관객들이 나라 잃은 설움에 복받쳐 울부짖으며 열광하자 일경은 민중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왕평을 투옥하여 모진 고초를 겪게 하고 더 이상 사람들 앞에서 이 노래를 공연하지 못하도록 금지 하였다.
그 후에는 본 공연인 연극보다 막간에 나오는 이애리수가 부르는 ‘황성옛터’를 듣기위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으며 민중들의 마음속에 내재된 나라 잃은 민족의 슬픔과 회한을 노래로서 풀어 보려는 듯 자신들도 모르게 노래 속으로 끌려 들어가 마음껏 합창했다. 또한, 전국 방방곡곡 시골논밭, 골목 골목에서도 노래하게 될 정도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대구의 어느 보통학교 학생들이 길을 가며 ‘황성옛터’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것을 일경이 발견하자 노래를 가르친 교사와 교장선생님을 일경에 잡아 가두어 문초를 한 사건도 있었다.
이렇듯 왕평선생은 항일적인 노랫말로 민중의 심금을 울리며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어 주는 수많은 작품을 남긴 예술가로 우리나라 대중음악사에 길이 남아 있는 자랑스런 예술인이다.
이애리수 / 황성옛터 (1932)
이애리수
경기도 개성 출신인 이애리수의 본명은 이음전. '애리수'라는 예명은 '앨리스'에서 따온
것이다. 이애리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10세 무렵부터 배우로 활동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배우로 활약하면서 막간 가수로도 활동하던 이애리수는 소박한 창법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18세때 나라 잃은 슬픔을 표현한 '황성옛터'로 국민가수로 등극한다.
왕평이 작사하고 전수린이 작곡한 '황성옛터'는 고려 옛 궁궐인 개성 만월대의 쇠락한 모습을 노래해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랠 길 없던 국민들의 마음을 적셨다. 특히 '황성옛터'는 최초로 한국인이 작사•작곡한 대중가요로 평가받기도 한다.
1931년 '메리의 노래', '라인강' 등의 노래를 담은 음반으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한 이애리수는 다음해 '황성의 적'이라는 이름의 음반을 발표했고, 이 음반은 5만장이라는 놀라운 판매량을 기록했다. 당시 5만장은 현재 기준으로 500만장에 육박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이 노래를 통해 나라를 잃은 슬픔을 상기할까 걱정된 일본 경찰이 이 음반을 발매금지시켰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애리수의 전성기는 길지 않았다. 이애리수는 같은 해 연희전문학교
(현재 연세대학교) 학생이던 배동필씨를 만나 결혼을 약속했지만, 배동필씨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딴따라' 취급 받던 가수와 엘리트였던 대학생의 현격한 신분 차이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결국 이승에서 못 이룬 사랑을 저승에서 이루자며 독약을 먹고 동반자살을 기도한다. 우여곡절 끝에 구출된 이애리수는 자신의 처연한 심정을 담은 노래 '버리지 말아 주세요'를 부르고, 그의 애처로운 노래를 들은 배씨의 부모는 결국 두 사람의 결혼을 승낙한다. 가수 출신임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는 것이 결혼 승낙의 조건이었다.
이애리수는 결혼 이후 2남 7녀를 낳아 기르면서 철저히 자신을 숨긴 채 살아왔다.
맏아들조차 어머니가 '황성옛터' 가수라는 사실을 대학생이 된 이후에야 알았을 정도였다. 무심코 노래를 읊조리는 일도 없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비록 이애리수는 70년 넘게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 평범한 삶을 살아왔지만, 그가 부른 '황성옛터'는 이후 수 많은 후배 가수들의 입에 올라 아직까지 한국인이 사랑하는 음악으로 꼽히고 있다.
은퇴한 뒤 소식이 끊어지며 한 때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오다가 2008년 일산의 한 요양원
에서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도 했다. 2009년 3월 31일 노환으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