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김용순 | 날짜 : 11-06-22 20:45 조회 : 1480 |
| | | 그해 6월25일 하늘도 그날을 잊지 못하는지 잔뜩 찌푸려 금세라도 쏟아 부을 기세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이제 잊혀져가는 전쟁, 6,25동란으로 남, 북한 500만 명이상 죽었고, 일천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생겼다. 우리나라 남, 북한은 물론 중국 조선족동포까지, 무사한 가정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세계에서 그 유래가 없는 동족상잔을 치렀다. 6.25가 일어 난지 60년이 지났지만 매년 이때쯤이면 생각나는 가슴 아린 우리 가족사(家族史)가 있다. 우리가족은 우리나라 국토 중 유일하게 인민군에게 점령되지 않고 손바닥만 하게 남아 있었던 지역에 살았기에 피난을 가지 않아도 되었다. 다행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피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가족은 전쟁으로 막내삼촌을 잃었다. 1950년은 내가 5살이 되던 해였다. 나를 유달리 귀여워한 삼촌이 나를 목말 태우고 햇빛이 눈부신 대문 밖을 나서던 기억, 하얀 논에서 스케이트를 태워주던 기억, 어지럽게 꾼 꿈처럼 흐릿한 기억의 조각들이 더 또렷해지지도, 연결되지도 않은 채 머릿속 깊이 60년 동안 머물러왔다. 삼촌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을 도우고 있을 때 둘째형인, 우리 아버지가 자신이 재직하고 있던 이웃 면(面)의 중학교에 입학 시켰다. 조부모님은 일손이 모자란다며 학교 보내기를 반대하셨지만 아버지는 적령기를 넘긴 막내 동생을 기어이 중학교에 다니게 하였던 것이다.
중학교 3학년 19살 여름, 삼촌은 학도병으로 참전하였다. 평소와 같이 책 보따리를 들고 집을 나선 삼촌은 그 길로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말았다. 막내가 학도병에 지원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는 선걸음으로 읍내 집결지로 달려갔으나, 만나지도 못하고 빈 걸음으로 돌아 오셨다. 동네에서 같은 학교에 다니던 친구도 같이 입대하였다한다. 당시 아버지는 부산으로 전근하여 혼자서 떠나신 후였다. 나의 기억 속에, 멀리 메아리처럼 쿵....쿵하는 소리와 집 앞 작은 논 몇 도가리 건너, 산자락 길에 보퉁이를 이고 진 사람들이 줄지어 아래쪽으로 가고 있었다. 우리들의 놀이터였던 당산나무 아래에도 낮선 사람들이 빼곡 차, 누워 있거나 밥을 지어 먹고 있던, 바랜 흑백사진 같은 토막기억들이 남아있다. 당시 야학교에 주둔하면서 밥을 구걸하러 다니던 사람들이 국민방위군이었다는 사실은 훗날에야 알았다. 엄청난 난리가 터졌지만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놀기만 하였던 것이다.
나의 5살 시골 기억은 여기쯤에서 멈춘다. 아버지가 혼자 부산으로 떠나신 후 뒤늦게 어머니와 나, 여동생이 따라갔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는 혼란스러웠던 부산 모습이 내 기억을 이어간다. 내가 초등학교를 입학하여 산중턱 천막교실에서 엎드려 공부하며, 피난 온 아이들과 “초코랫”,“추잉껌”을 외치며 미군 지프차 꽁무니를 쫓아다닐 때, 휴전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삼촌은 입대한 이후 한 번의 연락도 없었다. 전쟁이 멈추어 휴전이 되었는데도 내내 소식이 없었다. 막내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할머니의 눈물은 마를 날이 없었다. 여름방학 때 장맛비가 내리고 두꺼비가 엉금엉금 마당으로 기어 나오던 날, 마루를 두드리며 ‘홍두야’....., 삼촌을 부르며 통곡하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문풍지가 파르르 우는 한겨울 화롯불 앞에서는 ‘이놈이 어디서 떨고 있는지’, 색다른 음식은 넘기지를 못하고 ‘어디서 굶고 있지나 않는지’하시는 등, 앞앞이 눈물을 뿌리고 다니셨다.
삼촌이 행방불명되었다는 통지서를 받았다. 삼촌 친구 집에서도 같은 통지를 받았다. 최후의 보루였던 낙동강 전선, 학도병들을 총알받이로 내 세웠던 포항전투에서 실종된 모양이었다. 군번도 없었던 학도병들은 전사를 하여도 신원확인 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식구들은 그나마 전사통지가 아니므로 한 가닥 희망을 놓지 않았다. 삼촌이 금방이라도 ‘오매’하면서 삽짝 문을 밀고 들어 올 것 같아 밤에도 문을 걸지 못하였다.
휴전이 되고도 한참을 지나, 삼촌 친구가 돌아왔다. 혼자만 돌아 온 친구를 본 할머니의 절망감은 더욱 커져, 친구를 붙들고 ‘왜 혼자만 왔느냐’며 통곡하셨다. 한편으로는 실종통지를 받고도 돌아 왔으니, 삼촌도 살아 돌아 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셨다. 그러나 기다리는 삼촌은 해가 몇 번씩 바뀌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삼촌 친구를 동네 길이나 들에서 마주칠 때마다 눈물을 보이셨고, 가끔씩 집에 들려 죄지은 사람처럼 미안해하는 친구를 붙들고 통곡하셨다. 아버지가 억지로 학교에 보냈기 때문에 군대에 가게 되었다며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하셨다. 아버지는 삼촌이 포로로 잡혔다가, 강제로 군복을 갈아입고 의용군으로 나서게 되고, 다시 국군의 포로가 되는, 시나리오까지 생각하시어 거제포로수용소에 찾아가기도 하셨다. 반공포로가 석방되었을 때도 혹시나 하여 한참동안을 기다리셨다.
언제부터인지 보훈처에서 매달 연금이 나왔다. 조부모님은 연금을 받고는 있었지만 아직 삼촌의 죽음을 인정하지는 못하셨다. 삼촌의 죽음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기까지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차츰 죽음을 인정하고부터는, 장가도 못가고 죽은 아들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삼촌이 총각으로 죽어, 제삿밥도 얻어먹지 못하는 몽달귀가 되어 구천(九天)을 떠돈다는 것이다. 실종통지를 받은 십여 년이 지난 후, 조부모님은 삼촌을 장가보냈다. 신부는 20살에 병으로 죽은, 좀 떨어진 마을의 처녀였다. 신랑각시 인형을 만들어 산 사람 혼례식과 별 다르지 않는, 영혼혼례식을 올렸다. 신부 부모와는 사돈이라며 장터, 등지에서 만나면 같이 막걸리도 나눈다고 하셨다. 그 이후로 조부모님은 삼촌부부의 제사를 지내 주셨다.
세월이 훌쩍 지나 내 나이 50이 가까울 때였다. 사업차 중국에 머물면서 만주에 있는 외갓집 식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외가(外家)는 한일합방 직후, 외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하시느라 만주로 오셨다. 일제시대 만주에 가셨던 아버지가 어머니를 만나 결혼하였고, 해방 후 같이 고향으로 내려 오셨다. 외가에는 외삼촌이 셋 계셨는데, 큰 외삼촌은 국공(國共)전쟁에 인민해방군으로 참전하여 해남도 전투에서 전사하셨다 하였다. 둘째 외삼촌은 놀랍게도 6,25동란 때, 중공군으로 참전하여 의정부까지 내려 오셨다한다.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고, 마을에서 같이 징집된 사람들 중 대부분 살아 돌아오지 못하였다 한다.
당시 중공군 100만 명이 참전하여 수십 만 명이 전사하였다. 6, 25가 일어나자 중국정부는 조선족동포들에게‘항미원조(抗美援朝)’,‘조국을 해방시키자’는 대대적인 선동으로 징집하였다. 당시 동포 가정 중 징집되지 않은 집이 거의 없었다한다. 변변한 무기도 없이 동족전쟁의 총알받이로 내 몰렸었다. 인해전술로 내려온 중공군 중에는 수많은 우리 동포 젊은이들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나의 친삼촌과 외삼촌이 같은 전쟁에서 서로 총을 겨누었다. 이런 비극이 우리 집 뿐만은 아닐 것이다. 소용돌이쳤던 역사 속에서 남, 북한, 중국, 등 당시 어디에 살고 있었던지 같은 시대를 산 우리민족 모두가 피해자가 되었다.
단동(丹東)시내, 압록강에는 미군에게 폭격당하여 부서진 철교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강 건너 신의주가 바라다 보이는 야산 위에는 중공군의 6,25 참전 기념공원이 있다. 거기에는 참전의 당위성을 상징하는 조형물, 거대한 기념탑도 있다. 이제 와서 전쟁의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생명보다 더 중요 할 수는 없다. 분명한 사실은 어떤 전쟁도 승자는 없고 오직 패자들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부서진 철교를 그대로 보존하는 뜻이 무엇이든, 반드시 평화의 필요성을 증명해 주는 기념물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되었다. |
| 강승택 | 11-06-22 22:44 | | '아 아 잊으랴, 어찌우리 이 날을~' 매년 6월25일이면 6,25 노래와 함께 각종 기념행사도 많았건만 언젠가부터 6,25의 교훈마저도 외면하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김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역시 아득한 기억 저편의 이야기들을 떠올려봅니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에서 참전기념공원을 조성하여 참전의 당위성을 운운한다니 참으로 역사의 아이로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라기는 호국영령들이시여, 편히 잠드소서! | |
| | 김용순 | 11-06-23 11:09 | | 강선생님, 우리세대라면 누구인들 6,25의 기억이 없겠습니까. 그래도 우리집이 겪은 6,25는 가장 작은 비극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전쟁을 잊어버리고, 종북주의자들이 판을치고 있으니 기가막힐 따름입니다. 며칠뒤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 |
| | 임병문 | 11-06-23 07:50 | | 김 선생님, 어찌 잊겠습니까. 이 날을, 현대사를 온통 새롭게 써야했던 이 일은 결국 한 사람, 아니 소수의 욕망이 일으킨 대 제앙이 아니겠는지요. 그 고통이 수십년을 흘러 지금 껏 이어지고 있군요. 불구하고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에게 읽힐 좋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 |
| | 김용순 | 11-06-23 11:20 | | 임선생님, 천안함 사건으로 몇 십명의 병사가 희생되어도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는데, 당시를 상상 해 보세요. 너무 엄청나 먹먹 해진 상태였을 것입니다.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니, 과연 이 나라가 6,25를 격은 나라인지 의심 스럽습니다.며칠 뒤에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 |
| | 이희순 | 11-06-23 17:25 | | 그렇습니다. 이데올로기가 생명보다 소중할 수는 없다고 믿습니다. 생을 영위하기에 이데올로기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많은 문학작품들이 이데올로기를 위해 아낌없이 생명을 버린다는 이야기를 위대한 영웅담으로 포장하고 있으니 유규무언입니다. 지구촌 모든 사람이 창조주가 부여한 생명의 존엄성을 최고의 선으로 삼는다면 인간의 생명을 소모품으로 삼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 |
| | 김용순 | 11-06-23 19:51 | | 이희순 선생님, 이데올로기란 더 나은 삶을 위한 이론일 뿐인데, 마치 그것이 존재의 의미가 되는 것처럼, 그것을 위하여 삶 자체를 버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어쩌면,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많은 생명이 사라진다는 것, 그 또한 어떤 이유가 있는 자연의 섭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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