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688)
■ 3부 일통 천하 (11)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 2장 자객 예양(豫讓) (1)
조양자(趙襄子)의 가신들은 점점 야박해져 갔다.
먹을 것을 구하면 자신들부터 먼저 먹고 나머지를 조양자(趙襄子)에게 갖다주었다.
자리가 나면 자신들부터 먼저 눕고 조양자에게는 일절 양보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이 전과 다름없이 조양자를 공경하고 아끼고 지켜주었다.
가신 고혁(高赫)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조양자(趙襄子)는 성이 물에 잠겨 있는 동안 조금도 체면과 권위를 잃지 않았다.
조양자(趙襄子)는 고지대에 피신해 있으면서 연신 탄식했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모두 물귀신이 되고 말 것이다. 아아, 곽산의 신이 나를 속일 작정이었단 말인가!"
'곽산의 신'이란 강성을 탈출해올 때 가신 원과(原過)가 왕택에서 만났다는 세 신인을 말함이었다.
그때 그들은 원과에게 조씨가 지씨를 이길 것이라는 예언이 담긴 대나무 통을 건네주었었다.
조양자(趙襄子)는 은근히 그것에 기대하는 마음이 생겼다. 지금도 그 대나무 통을 품속에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결국 그것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인가.
이 탄식을 가신장 장맹담(張孟談)이 들었다.
어느 날, 장맹담은 조양자가 혼자 앉아 있는 틈을 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백(知伯)을 비롯한 삼가(三家)가 우리를 포위한 지 어느덧 일 년이 넘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한씨와 위씨를 설득할 때가 왔습니다."
"오늘 밤 제가 몰래 성 밖으로 나가 한공과 위공을 만나뵙고 지백을 배신하라 권하겠습니다.
주군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한씨(韓氏)와 위씨(魏氏)가 이제 와서 새삼스레 지백(知伯)을 배신할 리 없지 않은가.
공연히 그대의 목숨만 잃을까 두렵도다."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저에게 이미 계책이 서 있습니다. 주군께선 모든 장수를 시켜 뗏목을 많이
만들어두고 병장기에 녹이 슬지 않도록 준비나 철저히 해두십시오."
"그럼 그대만 믿겠소."
그 날 밤 장맹담(張孟談)은 지백(知伯)의 군사로 가장하고 몰래 진양성을 빠져나갔다.
한씨의 가병들은 진양성 동편 높은 지대에 영채를 세워두고 있었다.
늦은 저녁을 마친 한강자(韓康子)는 자신의 군막에 앉아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지루하군.'
일 년이 넘는 포위전이었다.
애초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길어진 전쟁이었다.
한강자(韓康子)로서는 굳이 악착같이 싸워야 할 싸움은 아니었다.
어차피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취하기 위해 따라나선 싸움이 아니던가.
그러나 일 년이 넘도록 아무런 진전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넘길 문제가 아니었다.
강성 내에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물론 지백(知伯)이 철저한 조치를 취해놓았겠지만,
삼가(三家)의 주인이 다 공석인 상태다.
언제 어느 곳에서 돌발 사태가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지백(知伯)이 무능한 것인가?'
'아니면 조씨(趙氏)가 강한 것인가?'
'애초 땅을 떼어주지 않고 조씨와 합세하는 것이 나을 뻔하지 않았을까'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뒤흔들었다.
그때였다.
옆에 밝혀놓은 등불이 크게 일렁거렸다. 군막 문이 열리며 초병(哨兵)이 들어왔다.
한강자(韓康子)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
"지백께서 알자(謁者)를 보내셨습니다."
알자란 심부름하는 사람을 말한다.
"들어오라 이르라."
잠시 후, 지백 군의 갑옷을 입은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제법 풍모가 있어 보이는 군관이었다.
"지공(知公)의 심부름이라고?"
"그렇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해 보라."
심부름 온 군관은 군막 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군사 기밀에 관한 일입니다. 좌우 사람들을 물리쳐 주십시오."
"군사 기밀?"
"그렇습니다. 한씨, 지씨, 위씨, 조씨 사가(四家)의 운명이 달린 문제입니다."
한강자(韓康子)는 술상은 그대로 내버려둔 채 시종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자, 이제 말해 보라. 무엇이 사가(四家)의 운명이 달린 문제라는 것인가?"
별안간 심부름 온 군관이 한강자 앞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
"사실 저는 지백의 알자가 아니라 조씨(趙氏)의 가신입니다."
순간 한강자(韓康子)는 움칫 했다.
그러나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자신도 모르게 군막 안을 둘러보았을 뿐이었다.
잠시 후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이름이 무엇인가?"
"장맹담(張孟談)이라고 합니다."
"들어본 기억이 나는군. 조공께서는 별고 없으신가?"
"어찌 별고 없을 리 있겠습니까? 저의 주군인 조공(趙公)께서는 오랫동안 포위당하여 그야말로
그 존망이 조석(朝夕)을 헤아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비록 목숨을 잃고 집안이 망할지라도 마음속에
있는 말을 남길 곳이 없어 이렇듯 저를 변장시켜 한공(韓公)께 보내신 것입니다."
"이제 한공(韓公)께서 제 말을 들어주시겠다면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지만, 만일 그럴 수 없으시다면
이 자리에서 저를 죽여 주십시오."
장맹담의 결연한 어조에 한강자(韓康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죽으러 왔다? 진양성 안의 사정이 어떠한지 가히 알겠도다. 내가 그대를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조공(趙公)이 무슨 말을 남기고 싶어하는지 조금은 궁금하군. 들어본 뒤에 죽여도 늦지는 않겠지.
그대는 어서 하고 싶은 말을 말해 보라. 참, 자리가 불편하겠군. 이리로 와서 앉게."
장맹담(張孟談)은 꿇었던 무릎을 일으켜 한강자의 맞은편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러고는 낮으면서도 힘있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으로 아뢰겠습니다. 지금 한씨와 위씨는 지씨를 도와 우리 조씨를 치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성공하여 조씨(趙氏)는 이제 멸문지화를 당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한공(韓公)께 여쭙겠습니다. 조씨가 망하면 다음엔 누가 망하겠습니까?"
"..................?"
"답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바로 한씨(韓氏)와 위씨(魏氏)가 오늘날 조씨가 당한 불행을 그대로
이어받을 것입니다."
한강자(韓康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두 눈을 끔벅거리며 장맹담의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오늘날 한씨와 위씨가 군대를 동원하여 지씨(知氏)를 돕는 것은 결국 조씨의 땅을 세 조각으로
나누어 갖겠다는 뜻이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 주군은 알고 계십니다. 한공도, 위공도 결국 우리 조씨(趙氏)의 땅을 한 조각도 갖지
못할 것임을 말입니다."
한강자(韓康子)와 위환자(魏桓子)는 이미 사방 1백 리 땅을 지백에게 바친 바 있다.
그 정도로 지백(知伯)은 땅에 대한 욕심이 많고 다른 가문의 세도를 경계하는 사람이다.
그런 지백이 과연 조씨의 땅을 순순히 한씨와 위씨에게 나누어 줄 것인가.
아니다.
지백(知伯)은 틀림없이 이 핑계 저 핑계 대고 조씨의 땅을 독차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백의 힘만
더욱 키워주는 꼴이 되며, 한씨(韓氏)와 위씨(魏氏)는 결국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게 된다.
"그런 후에 지백(知伯)이 다시 한씨에게 땅을 내놓으라 한다면 그때 한공께서는 어찌 하시렵니까?
순순히 내놓지는 않으실 터이고..... 그리 되면 오늘날 조씨의 사정과 무엇이 다를 바 있겠습니까?"
한강자(韓康子)의 얼굴빛이 전보다 한결 달라져 있었다.
"그대의 말이 옳다. 그러나 일이 여기까지 왔는데, 달리 무슨 방도를 취할 수 있단 말인가?"
"어찌 방도가 없다고 단정하십니까? 한공께서 저의 주군과 손을 잡으시고 지백(知伯)을 치면 그것이
곧 존속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더욱이 지씨의 땅은 조씨보다 배나 큽니다."
"그 땅을 한씨, 위씨, 조씨 삼가(三家)가 나누어 가지면 이 삼가는 지금보다 더 부강해지며 모든 불행을
완전히 막을 수 있게 됩니다. 저의 주군께서는 바로 이 점을 안타까이 여기시고 오늘 밤 저를 한공(韓公)께
보내신 것입니다."
"내가 이제 조공(趙公)의 뜻을 분명히 알았다. 하지만 이는 나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위공(魏公)과 상의한 후 답을 줄 터이니, 그대는 사흘 후에 다시 한 번 내게 오라."
그러나 장맹담(張孟談)은 고개를 저었다.
"진양성(晉陽城)은 포위당한 상태입니다. 이 곳에 또 오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만일 지씨의 군사들에게 발각이라도 되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청컨대, 이 곳에서 사흘간 머물게 해주십시오."
장맹담(張孟談)이 이렇게 고집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일을 성사시키지 않는 한 돌아가지 않겠다는 각오였다.
한강자(韓康子)가 어찌 그것을 모를 리 있겠는가.
"과연 조씨(趙氏)의 가신답도다."
한강자(韓康子)는 곧 심복 가신이자 모사인 단규를 불렀다.
"어떤가, 장맹담의 계책이?"
단규(段規)는 지난날 지백으로부터 심한 모욕을 받은 바 있었다. 한시도 그 일을 잊은 적이 없었다.
단규(段規)는 두 손을 뻗어 장맹담의 어깨를 잡았다.
"내가 생각하던 바가 바로 그것이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결의 형제를 맺었다.
🎓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