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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52)
===7권 시작====
[비나이다, 비나이다.]
검이나 도를 든 자들, 또는 삼류 무공을 한 자락이라도 익힌 무인들을 붙잡고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백이면 백 심검을 성취하여 천하제일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심검을 넘어 무의 극에 이르면, 어느 순간 흰머리가 검게 변하고 얼굴에 피었던 검버섯이 사라지며 쭈글쭈글했던 피부가 탱탱하게 변하는, 일명 반노환동을 겪게 된다.
반노환동(返老還童).
심검을 성취한 무인들이 꿈꾸는 경지다.
또한 독공을 연마하는 무인들에게 질문을 던지면 그들은 하나같이 독공의 마지막 경지라는 독성지체를 원한다. 독성지체는 반노환동처럼 독공을 익힌 무인들의 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무인이 나온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무림사에서조차 언급된 적이 없었다. 그만큼 난해하고 얻기 힘든 경지라는 의미다. 반노환동과 독성지체,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얻었다는 것은 더 이상 바랄 게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죽어도 여한이 없는 경지.
하지만 그 두 가지를 전부 얻은 섯다와 모사는 결코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도, 하늘을 향해 양천광소를 터뜨릴 수도 없었다. 나이 팔십이 아니라 팔백 살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세속적인 남자이고, 남자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남자를 말할 때 흔히 쓰이곤 하는 ‘사내구실’이란 말이 반노환동과 독성지체를 이룬 두 사람의 당면 문제였다.
“휴우!”
“휴우!”
북경에서부터 이어진 두 사람의 한숨은 화정과 유화가 몰고 왔던 마차를 탄 후에도 그칠 줄을 몰랐다. 어린 여인들의 시선도 두 사람의 한숨을 멈추게 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꼬르륵!
작은 얼굴에 비해 유난히 눈이 커 보이는 여인의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모사의 몸종으로 내정된 유화(流花)였다. 제 뱃속에서 난 소리에 화들짝 놀란 유화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마부석을 흘끔거렸다.
“배가 고픈 모양이구나?”
“아니에요, 언니.”
화정의 물음에 유화는 얼굴을 붉혔다. 실상 배가 고팠다. 마차 안에는 단출하지만 음식 재료와 그릇들이 준비되어 있어 불만 피우면 식사 한 끼는 금방 해결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경에서부터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한 번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다.
마을에 들어서면 음식 재료를 준비했지만 다음 날이면 그것들을 내다 버려야 했다. 마차를 몰고 가는 두 사람이 도무지 식사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탓이다. 건량이나 육포로 주린 배를 채우고 있으나 그걸로 식사를 대신 하기엔 너무 부족했다. 더구나 지금껏 그런 거친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지 않았던가.
“저기....... 상공.”
유화를 가만히 쳐다보던 화정은 마차 문을 열고 섯다를 불렀다. 하지만 전에도 그랬듯 섯다로부터는 아무런 반응이 오지 않았다. 다만, 땅이 꺼져라 내쉬는 한숨 소리만 귓전을 때릴 뿐이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이러다간 우리 굶어 죽겠어.”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에 화정은 마차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밖으로 나왔다.
“상공!”
제법 날카로운 목소리로 섯다를 불렀다.
“응, 응? 왜 나왔느냐? 바람이 차다. 들어가 있거라.”
퍼뜩 정신을 차린 섯다는 마차를 세우며 말했다.
“싫사옵니다. 지금부터는 저희가 마차를 몰겠습니다.”
“무슨 말이냐? 너희들이 마차를 어떻게 몬다고 그래?”
놀란 눈으로 섯다는 화정을 보았다. 오늘따라 그녀의 얼굴이 꽤나 냉랭했던 탓이었다.
“두 분을 편안히 모시는 게 저희들의 임무라는 걸 잊으셨습니까? 안에 앉아서 호강 떨 신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비켜 주십시오.”
“야, 이 녀석아. 넌 여자야. 사내가 둘이나 있는데 왜 여자가 마차를 몰아?”
“방금 제 말 못 들으셨습니까? 그리고 저는 이 녀석이 아니고 일남입니다. 이름을 불러주시든지 아니면 화정이라 부르십시오. 그것도 싫으시다면 돌아가라고 하시든지요. 돌아가라면 북경으로 가겠습니다.”
화정은 냉랭하게 말했다. 정말 북경으로 돌아가라고 하면 돌아갈 태세로.
“어차피 저희들은 두 분의 노리개로 선택되었습니다. 언제든지 말씀만 하시면 떠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말씀하십시오. 유화야, 나오너라!”
섯다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마친 화정은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유화를 불렀다.
[모사야, 쟤들 왜 저러냐? 갑자기 무서워진다.]
황당한 얼굴로 화정을 쳐다보던 섯다는 모사에게 전음을 보냈다. 지금껏 말없이 따라오던 그녀가 이렇게 나올 줄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그녀들이 마차 안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다.
[낸들 아냐? 그런데 쟤들이 우리 노리개였냐?]
모사 또한 섯다와 다르지 않았다. 주홍이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 딸려 보낸 걸로만 생각했을 뿐. 두 여인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미 작동 불능임을 확인했기에 관심이 없었다고 봐야 했다.
[시중이나 들어 주라고 딸려 보낸 줄 알았지! 우리가 무슨 수로 쟤들하고 잠을 자냐? 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는데.]
[그럼 북경으로 가라고 그럴까? 우린 돈만 있으면 되잖아.]
[저 얼굴 안 보이냐? 곧 울 것 같잖아, 임마!]
곁눈질로 화정을 쳐다보던 섯다는 모사를 향해 소리쳤다.
[그럼 새꺄, 왜 그러는지 물어봐야지. 이렇게 전음질만 하고 있으면 돼?]
[알았어, 임마.]
모사를 향해 눈을 부라린 섯다는 이내 얼굴을 풀고는 화정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지 말을 해보거라.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이유랄 것까지도 없습니다. 두 뿐께서 저희를 불편하게 여기시는 것 같아 허락하신다면 떠나고 싶습니다.”
“이놈은 몰라도 난 절대 아니다. 내가 왜 일남, 아니 화정을 불편하게 여긴단 말이냐? 턱도 없는 소리하지 말아라.”
“나도 아냐, 임마. 내가 유화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너 때문이야, 새꺄. 데려왔으면 책임지고 잘 보살펴야지. 시간만 나면 한숨만 처 쉬고 있으니 어떤 여자가 좋아 하겠냐, 자식아.”
“사돈 남 말하네, 나쁜 놈! 넌 안 그랬냐? 네가 뿜어낸 한숨을 담아 놓았다면 수십 섬도 넘을 거다, 자식아!”
“가자, 유화야!”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화정은 유화의 손을 끌고 몸을 돌렸다.
[야! 저것들 진짠가 보다. 어떻게 좀 해봐, 임마!]
멀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모사는 전음으로 고함을 질렀다.
[네가 해, 새캬! 데리고 가서 어디에 써? 쟤들만 힘들잖아!]
화정의 등을 쳐다보며 전음을 보내던 섯다는 이내 말을 끊었다. 그녀의 어깨가 들썩이고 있었던 것이다.
“끄응!”
나직한 신음을 뱉어낸 섯다는 화정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저기, 일남아.”
“말씀하세요.”
“그러니까 내가 말이다.......”
막상 입을 떼기는 했으나 할 말이 없었다. 그녀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는 판에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더듬거릴 뿐, 말을 꺼내지 못하는 섯다의 모습에 화정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섯다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천한 년이 과분한 꿈을 꾸었나 봅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섯다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화정은 조용히 몸을 돌렸다.
“거참!”
[모사야, 과분한 꿈이 뭔 말이냐?]
망연한 얼굴로 화정을 쳐다보던 섯다는 모사에게 전음을 보냈다. 노리개에다 이제는 과분한 꿈이라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우리가 쫓아내지만 않으면 평생 곁에 있겠다, 뭐 그런 말 같은데?]
의아하기는 모사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들의 처지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뻔히 알고 있는 그녀들이다. 아무리 상부의 명령이라지만 굳이 따라올 이유도 없거니와 북경으로 돌아가는 걸 더 좋아해야 옳다.
그런데 두 여자의 모습을 보자니 마치 소박맞은 신부 꼴이다. 그녀들의 행동이 이해가가지 않았다.
[그럼 첩, 뭐 그런 거?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임마.]
섯다는 고함을 빽 질렀다.
[아까 그랬잖아, 임마. 우리가 돌아가라고 말하면 간다고. 그런데 잡아야 하는 거 아냐?]
멀어지는 두 사람을 가리키며 모사가 말했다.
“야, 수박 두 통! 가긴 어딜 가, 임마. 난 너 가라고 한 적 없으니까 당장 돌아와!”
화정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섯다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나 배고프다.”
어둠 저편을 쳐다보며 배시시 미소를 지은 화정이 유화의 손을 슬쩍 말아 쥐었다.
“그럼 약속하십시오. 앞으로는 절대 한숨 쉬지 않겠다고.”
“한숨? 내가 한숨을 쉬었냐? 저 새끼는 몰라도 난 절대 아냐. 꽃 같은 미녀가 있는데 한숨을 왜 쉬냐? 알았다, 알았어. 절대 한숨 안 쉴 테니까 그만 들어가자. 춥지도 않냐?”
잽싸게 화정 곁으로 몸을 날린 섯다는 그녀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춥고....... 저도 배고파요.”
마지못한 척 그제야 화정은 몸을 돌렸다.
“그러게 나오긴 왜 나오! 일단 가자. 가서 불도 피우고 밥도 해먹고 그러자꾸나.”
혹여 다시 몸을 돌릴까 봐 화정의 팔을 단단히 붙잡은 채 섯다는 마차로 향했다.
“뭐 하냐, 모사야? 밥 먹을 준비 안 하고? 마차 안에 보면 음식 재료랑 주방 기구 있다. 전부 꺼내 놔라.”
섯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사는 주방 기구를 꺼내고 마른 나무와 돌을 주워 오는 등 부산하게 움직였다.
“식사 준비는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서로를 쳐다보며 싱긋 미소를 짓던 화정과 유화는 잽싸게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소한 음식 냄새가 진동하고 때 아닌 음식 잔치가 벌어졌다. 그동안 먹지 못했던 것에 한이라도 맺혔는지 화정과 유화는 마차 안에 있던 모든 재로를 꺼내 양껏 음식을 장만했다.
“화정, 아니 일남아. 이걸 다 먹을 참이냐?”
섯다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음식들을 쳐다보며 물었다.
적어도 열 명 정도는 먹을 분량이 차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그동안 굶은 걸 생각하면 이것도 부족해요. 식기 전에 드세요. 전부 다 드셔야 합니다. 음식 남기면 욕먹는 거 아시죠?”
“그건 그렇지만 이건 좀 많은 것....... 아, 알았다. 먹어 보자.”
노려보는 듯한 화정의 시선에 섯다는 화들짝 음식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
“왜 그러세요? 맛이....... 없어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섯다의 표정을 살피던 화정은 어색한 얼굴로 물었다. 기루 생활을 하는 내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은 적이 거의 없었던 탓에 맛을 내는 데는 자신이 없었던 터였다.
“아냐. 정말 맛있어서.”
싱긋 미소를 지으며 정신없이 음식을 쓸어 넣었다. 실상 그다지 맛있는 요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북경을 떠난 이후로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던 두 사람에게는 맛을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무조건 다 처먹는 거다. 밥알 한 톨 남기지 말고.]
곁눈질로 모사를 쳐다보며 섯다는 전음을 보냈다.
[내 걱정은 말고 너나 잘해, 새꺄. 배가 터질 것 같으면 내공을 이용해서 음식을 전부 가루로 만들어 버려.]
[거 좋은 방법이다.]
서로 간에 전음을 나누며 두 사람은 빠르게 접시를 비워 나갔다. 식사가 끝나고 근처 냇가에서 설거지를 마친 일행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
“상공, 소림사에 가면 정말 집을 지을 거예요?”
모사를 안으로 들여보내고 마부석 한편을 차지한 화정이 물었다.
“그럴 수는 없겠지. 본래 소림사가 있던 자리에는 절을 지을 거고 우리 집은 산문 밖 공터에 지어야지. 참! 돈은 얼마나 주더냐?”
“돈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던데요?”
“정화루가 그렇게 돈을 많이 버는 곳이었냐?”
“상공이 받았던 그 접대를 받으려면 최하 은 오백 냥은 있어야 해요.”
“컥! 정말?”
“보통은 거기서 백 냥 내지 이백 냥이 더 추가되는걸요.”
“허! 그 돈을 주고 술을 처먹는 놈이 있다는 게 더 놀랐다. 그럼 최고급으로 집을 지어도 되겠네?”
“그건 상공이 원하는 대로 하세요.”
왼편 숲으로 고개를 돌린 화정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장대근이란 이름과 하늘을 뒤엎을 정도로 엄청난 무공을 지녔다는 것밖에 모르지만 그의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그런 점 때문에 따라나섰는지도 몰랐다.
“참! 일남이 너, 정화루에 쓰인 자재 이름 알고 있냐?”
“자재라면?”
“왜, 바닥에 깔린 벌건 천 쪼가리나 이상하게 생긴 화병들 말이야. 이름이라도 알아야 할 것 아니냐.”
“정화루처럼 꾸미고 싶으세요?”
“굳이 그렇게 클 필요는 없지만 내부 장식은 그곳과 비슷하게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이왕 뜯어먹는 건데 왕창 뜯지, 뭐. 그리고 주홍 그놈이 황제가 될 건데........”
“상공!”
질겁한 얼굴로 화정은 손을 들어 섯다의 입을 틀어막았다.
“함부로 말하시면 안 돼요! 그러다 잘못하면.......”
“잘못될 일이 어디 있어, 임마. 거의 끝났는데.”
“그래도 조심하셔야 해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그 자재들 이름 알아, 몰라?”
“알기야 전부 알죠. 하지만 그것들은 외국에서 가져온 것들이 대부분이라서 하루 이틀에 구할 수도 없어요.”
“걱정 마라. 정 구할 데가 없으면 황실에 가서 뜯어 올 테니까 넌 필요한 목록이나 적어 둬.”
하지만 섯다 일행은 새집을 짓기 위해 돈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다음 날 저녁 무렵 공현을 지나 소실산에 도착한 일행은 소림사 산문 앞 광장에 버려진 집을 발견했던 것이다.
몇 달 전 천붕회 기간 동안 지어졌던 가건물 중 하나였다.
“너희 둘은 잠시 여기 있거라. 혹시 그릇 남은 것 있으면 두 개만 챙겨 줄래?”
“그릇은 왜.......?
의아한 얼굴로 화정은 물었다. 어두운 밤에 어딜 가려는 것도 이상한 일인데 갑자기 그릇이라니.
“그냥....... 좀 필요해서 그래.”
“알겠습니다.”
섯다를 빤히 쳐다보던 화정은 주방용품을 넣은 상자에서 접시 두 개를 꺼내 와 섯다에게 내밀었다.
“다녀오마.”
그릇을 받아 든 두 사람은 건물을 나와 왼편 계곡에서 물을 받은 다음 소림사로 향했다.
“효과가 있어야 할 텐데.”
별빛이 가득 담긴 접시를 내려다보며 섯다는 중얼거렸다.
“그런데 여기가 소림사 맞기는 하냐?”
소림사가 있던 자리를 더듬어 보며 모사가 물었다.
“우리가 지옥에 잘못 들어온 모양이다.”
모사를 따라 시선을 돌렸던 섯다는 눈을 비볐다. 소림이 멸문 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생경스럽기까지 했다. 공손히 받치고 있던 접시가 바닥으로 떨어졌음에도 두 사람은 알지 못했다. 시체, 시체들. 왼편을, 오른편을, 전면을 보아도 전부가 시체뿐이었다.
“빌어먹을 인간! 아예 도살을 해놓았구먼.”
낮게 한숨을 내쉰 모사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투덜거렸다.
차가운 날씨 탓에 시체는 썩지도 못하고 대부분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공포에 질런 얼굴들, 사지가 절단된 시체들, 따로 떨어진 모리들, 길게 비어져 나온 내장들.
불가의 도량이었던 소림사는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아니, 가보지 않아 모르지만 지옥도 이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형님이 우리를 부르는 거다.”
지옥도를 쳐다보며 섯다는 혼잣말처럼 말했다.
“무슨 말이냐?”
“모르겠냐? 형님이 우릴 지옥으로 들어오라고 부르는 거라고.”
“니미럴!”
또다시 진득한 욕설을 뱉어낸 모사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뭘 원하는 거냐? 우리가 뭘 어떻게 해주길 바라느냔 말이다! 천하를 없애길 바라는 거냐? 살아 숨 쉬는 것들을 전부 없애길 바라냐?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겠다! 하지만 이번엔 오십 년 전처럼 끝나지 않는다. 귀마겁처럼 끝내지 않을 거란 말이다. 갈가리 찢어서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만들겠다! 네가 원하는 게 그것이면 그렇게 해주겠단 말이다! 천붕십일천마의 이름을 걸고, 이 전영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천둥 같은 고함이 모사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화가 치밀었다. 소림사에 죽어 있는 놈들은 뭐며 그들을 죽인 백산은 또 뭐란 말인가.
자살하려는 인간을 간신히 살려 놓았다. 차라리 자살해 죽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문득 후회가 밀려왔다. 저승으로 먼저 간 형수님들께 미안하고 형제들에게 미안했다.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형님을 다시 악마로 만들어 버린 죄를 어떻게 감당하란 말인가.
“나....... 지옥으로 들어갈란다!”
섯다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모사는 북경에서처럼 신발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시체로 가득한 소림사의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다. 강호를 지배할 거다. 개자식들에게 우리도 다스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줄 거다.”
야트막한 언덕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가는 모사의 몸에서 광기 같은 붉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어 주변에 나뒹굴고 있던 시체들이 하나 둘씩 그의 뒤를 따랐다. 허공섭물을 이용하여 시체들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도 마찬가지다. 다스릴 수 없으면 전부 없애 버리면 된다.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전부........ 어차피 우린 마두니까.”
섯다 또한 미련 없이 신발을 던져 버리며 모사의 뒤를 따랐다. 그의 몸에서도 모사와 마찬가지로 붉은 광채가 폭발적으로 솟구쳐 나와 시체들을 끌어가기 시작했다.
“우엑!”
그 참에 뒤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모사의 고함소리에 놀라 소림사로 뒤따라왔던 화정과 유화였다. 두 여인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창백했다. 급기야 두 여인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못 볼 걸 보고 말았구나. 여기 있는 모습이 우리가 걸어왔던 길이고 앞으로 걸어갈 길이다. 여기까지 따라와 준 너희들 마음은 고맙게 받겠다.”
측은한 얼굴로 화정과 유화를 쳐다보던 섯다는 나직이 말했다.
“화정, 네가 과한 욕심이라 했지만 실은 과욕을 부린 건 저 녀석과 나였다. 세월을 거스르려고 했던 우리가 잘못했구나. 미안하다.”
화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섯다는 몸을 돌렸다.
“상공!”
화정은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전히 다리가 떨리고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천붕십일천마라 했다. 죽음과도 같은 고독을 짊어지고 가는 그에게 뭐라고 할 것인가. 막연한 눈으로 섯다의 등을 쳐다보던 화정은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언니.”
“유화야, 나는 여기서 저분을 지켜보고 싶구나. 오늘 밤을 견디면 떠나지 않을 것이고, 견디지 못하면 그때는 떠나련다. 너는 가도 좋다.”
“가라고?”
유화는 고개를 돌려 방금 떠나왔던 건물을 쳐다보았다. 검은 건물에서 금방이라도 시체가 벌떡 일어나 튀어나올 것 같았다.
“여기....... 있어 볼래요.”
그녀는 엉덩이를 깔고 철퍼덕 주저앉았다. 떠나고 싶어도 갈 자신이 없었고 걸을 힘도 없다. 무서워도 지금 있는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두 여인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섯다와 모사는 끊임없이 소림사를 오르내렸다. 한 번은 시체를 끌어가고, 한 번은 부서진 건물 잔해를 끌어간다. 그리고 소림사 맨 위쪽 달마동 아래에 그것들을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불경이라도 외는지 두 사람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중얼거렸다.
어느덧 동쪽 하늘이 뿌옇게 밝아왔다. 과거 방장실이 있던 최심처에는 쌓여진 시체와 건물 잔해로 산이 만들어져 있었다.
잠시 후.
흰 연기가 하늘ㄹ 솟아올랐다.
“잘 탄다.”
점점 거세지는 불길을 보며 섯다는 낮게 중얼거렸다.
“내려가자! 지금부터는 알아서 탈 거다.”
망연한 눈길로 불길에 휩싸인 시체들을 쳐다보던 모사는 몸을 돌렸다.
“쟤들이?”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산문 앞 배불뚝이 나한상 곁에서 두 여인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가고 없을 줄 알았던 그녀들이 여태 남아 있었다.
“안 갔느냐?”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간 섯다는 화정을 보며 말했다.
“떠나란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무서웠습니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화정은 웃고 있었다. 밤새도록 두 사람을 쳐다보고 있자니 어느결에 시체가 주는 두려움이 사려져 버렸던 것이다.
“시체를 무서워하는 걸 보면 바보구나. 죽은 자들보다 살아 있는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다. 시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거든. 그런데 이건 무슨 냄새냐?”
화정을 쳐다보며 미소를 짓던 섯다는 느닷없이 코를 킁킁거렸다.
“어마!”
두 여인은 동시에 뾰족한 비명을 질렀다. 언제 그랬는지 속바지가 축축이 젖어 있었다.
“혹시 큰 건........”
“상공!”
잔뜩 붉어진 얼굴로 화정은 소리를 질렀다. 생각도 못했던 일이었다. 소피를 보러 가고 싶었던 적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없는데 속바지가 젖다니. 창피하여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쯧쯧! 읏차!”
“상공, 내려 주세요. 냄새가 심하게 납니다.”
섯다가 번쩍 안아 들자 화정은 질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버둥거리면 냄새가 더 심하게 올라온다.
그 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화정의 버둥거림이 뚝 멈췄다.
“저, 상공. 여기 신발.......”
“신발?”
섯다는 놀란 얼굴로 화정을 쳐다보았다. 전날 밤에 버렸던 신발을 그녀가 찾아 들고 있었던 거였다.
“혼자는 무서워서 못 가고 유화랑 같이 갔어요.”
“그거 해져서 버리려고 했던 건데?”
“정말요?”
“그렇다니까. 그래도 이왕 주워 왔는데 다시 신지, 뭐.”
“나빠요.”
그제야 장난임을 알아차린 화정은 섯다의 가슴을 치며 입술을 샐쭉거렸다.
“고맙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영영 사내구실을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스스로 떠날 때까지는 편하게 해줄 참이었다.
“그런데 잘 타네요.”
고맙다는 섯다의 말에 어색한 듯 화정은 소림사에서 오르는 불길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불길은 거셌다. 투둑거리는 소리가 네 사람이 있는 곳까지 들려올 정도다.
소림에서 오르는 연기는 섯다 일행만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어쩌다 한 번에 불과하지만 공현에 사는 많은 이들은 멸문당한 소림사를 주시하고 있었고, 숭산에서 오르는 연기를 보았다.
그들 중에는 하남성 지부를 세웠던 북황련 무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알아보았느냐?”
허리춤에 매달린 대감도를 만지작거리며 전죽(田竹)은 부하를 향해 물었다. 단순한 불일지도 모르는 상황이지만 그의 얼굴은 심각했다.
공현 조장으로 전출된 그가 심각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얼마 전 북황련 무인들을 향해 살겁을 저질렀던 십팔마승 때문이다. 십팔마승의 행적을 조사하던 중, 그들이 소림사를 들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하남지부는 발칵 뒤집혔다.
그 당시 공현 조장으로 있던 막장순은 해임되었고, 그를 천거했던 자들까지 된서리를 맞았다. 그도 그럴 것이 멸문당했다고 하지만 소림에서 죽음을 당한 승려는 칠백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여전히 중원을 떠돌고 있다.
더구나 소림 멸문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하후장설과 천태진이 죽은 상황이고 보니, 그들의 소림사 복귀는 시기가 문제일 뿐 북황련에서는 기정사실로 인식하고 있다. 공현에 백여 명의 무인을 상주시켜 끊임없이 소림사를 감시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소림하고는 관련이 없는 걸로 보였습니다.”
사내는 낮에 보았던 상황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소림사 쪽에서 오르는 연기를 본 그는 상부에 보고를 올리고 곧바로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소림사 옛터에 도착해서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소림사에 널려 있던 모든 시체들이 한곳에 쌓여 불태워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폐가로 방치되어 있던 가건물에서 생활하는 네 명을 목격했다.
“그러니까 무기도 없고 평범하게 생긴 자들이 머물고 있더란 말이냐?”
전죽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자신이 알기론 소림사 옛터에는 천여 구 이상의 시체가 방치되어 있었다. 공동묘지보다 더한 공포를 심어 주는 그곳은 설령 무인들이라 할지라도 쉽게 접근하기 어려울 터였다. 그런데 그 많은 시체를 태우고 머물다니.
“그렇습니다, 조장님. 그런데 여자들의 행색이 좀 특이했습니다. 여염집 여인네들처럼 보이지 않는 게........”
공동묘지로 변한 소림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라 할 수 있었다.
“무슨 말이냐?”
“옷차림새로 봐서는 도시에서 온 사람들이 분명한 듯 보였습니다.”
“그래?”
전죽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여염집 아낙이 아니라면 신중하게 접근을 해야 한다. 하후장설이 죽은 이후 북경 정계는 안개 속처럼 변했고, 상부에서 내려오는 명령서에는 정계 인물들과는 절대 충돌하지 말라는 내용이 반드시 들어 있다. 그만큼 북경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의미다,
“일단 먼저 낙양에 보고를 한 다음 처리한다.”
조심해서 나쁠 게 없다는 결론을 내린 전죽은 부하를 향해 말했다.
“소림사라.......”
창밖으로 보이는 숭산을 흘끔 쳐다보던 전죽은 이내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상공, 식사.......?”
소림에 온 지 삼 일이 지났다.
이제는 폐허가 된 소림에 제법 적응이 되었는지 섯다를 향해 다가가는 화정의 얼굴은 생각보다 밝았다. 아직은 여전히 연기가 나고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지만, 산더미처럼 쌓였던 시체들은 어느새 재로 변해 더 이상 두려움을 주지 않았던 까닭이다.
식사 준비를 마치고 섯다와 모사를 부르러 왔던 화정은 의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보았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시체를 태웠던 장소 전면에 세워진 조그마한 단을 보며 화정은 물었다. 탑림에서 부서진 조각을 가져와 만든 단 위에는 삼일 전 그들에게 주었던 접시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일남아!”
“네, 상공!”
“네가 보기엔 모사나 내가 착한 일을 한 것 같냐?”
“무슨........?”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어, 화정은 대답을 못하고 멍한 얼굴로 섯다를 쳐다보았다.
“내말은 말이다. 시체를 거둬 주고 화장까지 시켜 주지 않았느냐. 그들이 편안하게 저승에 가도록 빌어주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에 대한 아주 작은 보답을........”
“그럼 저 물은 정안수? 설마........”
접시 위에 담긴 물을 보며 화정은 비명처럼 소리쳤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지닌 사람. 장차 황제가 될 주홍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사람. 원하기만 한다면 두 사람은 정계 최고 실력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정안수를 떠놓고 빌 일이 무에 있겠는가.
“방해하지 말고 내려가라. 여기서 죽어 간 자들의 극락왕생을 빌려면 아직 멀었다. 밥은 나중에 먹으마.”
어색한 얼굴로 화정을 쳐다보던 섯다는 몸을 돌렸다.
‘니미럴!’
몸을 돌린 섯다는 내심 욕설을 뱉어내며 곁에 있는 모사를 흘끔 쳐다보았다. 죽일 듯이 쳐다보는 모사의 시선에 섯다는 찔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새꺄! 꼭 보답이란 말을 하고 싶냐? 그냥 극락왕생을 빌고 있다는 말만 하면 되잖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걸 어떻게, 임마. 그리고 화정은 눈치가 빨라서 말 안 해도 금망 안단 말이야.]
[하여간 잘났어. 노망이 골수까지 미쳤구나]
[헛소리 그만 하고 빌기나 해, 새꺄. 정성을 다해 빌어야 한다는 것도 몰라?]
[알았어, 임마!]
“비나이다, 비나이다. 극락왕생을 비나이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아울러 우리의.........”
손을 싹싹 비비며 연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경건하기 그지없었다.
“언니?”
“마침 잘 왔다. 너 잠깐 나 좀 보자.”
마침 곁으로 다가온 유화를 붙잡고 화정은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어찌 됐어?”
“잠만 잤어요.”
“그냥?”
“네, 언니.”
“휴우! 너도 나랑 같구나. 모든 게 정상인데........”
여전히 정안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두 사람을 보며 화정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요, 언니. 제가 언젠가 들은 말로는 정신적인 것 때문에 그런 경우가 많대요.”
“정신적인 거? 저분들이 정신적으로 문제될 게 없잖....... 맞다! 나이?”
중얼거리던 화정은 짧게 소리쳤다. 얼마 전 알게 되었지만 외모와는 달리 두 사람은 이미 팔십이 넘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건 나이일 것이다. 안 된다는 조급함과 팔십이 넘었다는 생각이 종일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 보니 그게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너....... 저분 좋아해?”
유화를 빤히 쳐다보며 화정은 물었다.
“좋다기보다는 그냥 편해요. 어쩔 때는 아버지 같은 기준이 들기도 하고, 어쩔 때는 편한 아저씨 같을 때도 있고....... 같이 생활하는 게 불편하지 않으면 좋아하는 것 아닌가요?”
“버려!”
“네?”
유화는 놀란 얼굴로 화정을 보았다.
“아저씨 같다는 생각도 버리고 아버지 같다는 생각은 더더군다나 버려. 지금 이 시간부터 저분들은 우리와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해. 짜증도 부리고 이것저것 집안일도 해달라고 요구도 하고, 다른 생각을 전혀 할 수 없도록 부려먹으란 말이야. 그리고 가능하면 무공도 쓰지 못하도록 하고.”
“알았어요, 언니.”
화정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유화는 위쪽을 흘끔 쳐다보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저분들을 고쳐 달라고 비는 건 여인네들인 우리가 해야 하는 거야. 올라가자.”
싱긋 미소를 지은 화정은 유화의 손을 잡고 섯다와 모사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윽고 섯다와 모사 곁에 도착한 두 여인은 각자의 자리에 무릎을 꿇고 공손하게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뭐 하는 짓이냐?”
섯다는 뜨악한 얼굴로 화정을 쳐다보았다. 자신들이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무릎을 땅에 대고 두 팔과 머리까지 말 그대로 오체투지라도 하는 양 절을 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도 빌어야 할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산천 배를 올리면 원하는 소원을 들어준다고 했습니다.”
“삼천 배?”
“네, 상공. 요령을 피워서도 안 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삼천 배라?”
[모사야 어쩔래?]
하지만 섯다는 모사의 의향을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화정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오체투지의 자세로 절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저 혼자만 고쳐 보겠다, 이 말인데. 나도 한다, 자식아.]
섯다 또한 재빨리 화정을 따라 절을 올렸다. 물론 그녀의 말대로 내공은 전혀 끌어올리지 않은 채다. 따라 하기는 했지만 처음엔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았다. 삼천 배를 한다고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절간은 삼천 배를 하는 사람들로 넘쳐날 것이 아닌가.
하지만 한 시진 정도 지났을 때 처음으로 섯다의 표정이 변했다. 곁에서 묵묵히 절을 하고 있는 화정 때문이었다. 그녀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부터 시작하여 땀으로 옷은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그때야 비로소 섯다는 깨달았다.
간절한 바람. 과거 백산 형님이 달고 살았던 말이다. 간절한 바람은 곧 힘을 불러온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 오십 년간 그 말을 잊고 살았다.
심지어는 독인을 벗어나려고 노력을 하면서도 간절하게 바랐던 적이 없었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이론을 바탕으로 방법을 찾고자 했었다. 어쩌면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든 무공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화정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섯다는 이내 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몸에서 금세 열이 나는 듯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왜 절을 하고 있는지조차 잊었다. 땅바닥에 입을 맞추고, 일어서고, 다시 땅바닥에 입을 맞추는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결국 체력이 바닥난 화정과 유화는 더 이상 무릎을 세우지 못하고 무너지듯 쓰러졌다. 이로서 그들의 첫 삼천 배 의식은 끝이 났다.
“일남........”
“지금은 말하는 게 아닙니다. 조용히 물러나는 겁니다.”
섯다의 품에 안긴 화정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처음 해보는 삼천 배였다. 섯다를 좋아하고 그를 따르겠다는 생각으로 시작은 했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그랬던 것만은 아니었다.
주홍이란 막강한 배경을 가진 사람이고 그 곁에 있으면 최소한 침모로 늙어 가는 것보다는 나을 거란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절을 하면서 그 모든 걸 버렸다. 오직 한 가지, 섯다가 정상으로 돌아오기만을 빌었다.
자신의 욕심보다는 그가 원하는 걸 들어 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자신을 버릴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빌었는데 왜 이리도 기분이 좋은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젠 말해도 됩니다.”
“일남이 넌 뭘 빌었느냐?”
“일남이만의 비밀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상공이 식사 준비 좀 해 주세요. 전........”
“그래, 알았으니까 네 몸부터........”
화정의 명문혈에 손바닥을 붙인 채 진기를 밀어 넣으려던 섯다는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화정이 손을 꼭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던 탓이었다.
“당분간 무공은 사용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맞다, 그랬지.”
섯다는 어색한 미소를 물며 손을 뗐다.
“당분간은 평범한 사람처럼 그렇게 살아 보아요.”
“그래 보지, 뭐.”
“에게! 그것 좀 했다고 다리가 후들거리면 어떻해요?”
“다리가 후들거려? 뭔 소리래? 켁! 정말이네?”
제 다리를 쳐다보던 섯다는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의 말처럼 정말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더하여 묵직한 느낌이 허벅지께로 밀려왔다.
“쿡! 재밌네. 도대체 얼마 만이냐.”
섯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무려 오십 년 만에 느껴 보는 피로감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쾌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내공을 사용할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 온몸 구석구석에서 배어 나왔다. 땀과 함께 흘러넘치는 그것은 활력이었다.
‘훗!’
행여 들킬세라 화정은 슬쩍 미소를 물었다. 이야기를 나눌 때 그의 시선이 머무는 곳 때문이었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의 시선은 젖가슴이 머무른 시간이 눈을 마주치는 시간보다 길었다. 땀에 젖은 옷 사이로 드러난 가슴이 그의 시선을 붙잡고 있는 거였다.
‘드디어 치료법을 발견했네요. 당신의 치료법은 삼천 배였어요.’
내심 중얼거린 화정은 섯다의 목을 와락 틀어쥐었다.
“쓰러져, 임마!”
갑작스런 기습에 섯다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잠시 비틀거렸다.
“호호호! 이 상태에서 한번 달려 봐요. 늦게 도창한 사람이 밥하기, 어때요?”
커다랗게 웃으며 화정은 모사와 유하를 보며 말했다.
“언니, 그거 정말이지? 전랑, 달려요!”
‘저런 여우 봐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대인이라 부르더니 이젠 아주 전랑이래.’
“뭐 해요? 우리도 달려야지요.”
“모사 너 이 자식, 전랑이란 말 들었다고 무리하면 큰일 난다!”
“상공이 이기면 앞으로 저도 장랑이라 부를게요.”
“정말이지? 모사, 너 죽었다!”
앞서가는 모사를 향해 고함을 지르며 섯다는 집을 향해 내달렸다.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다리가 꼬일 정도로 비틀거리면서도 두 사람은 결코 안고 있는 여인을 놓치지 않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두 사람은 과거 비무대를 가로질러 집으로 향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오해하는 자들이 있었으니, 지금껏 네 사람을 감시하고 있던 북황련 무인들이었다.
“조장님께 보고해라! 서방 몰래 바람피우는 계집들이라고!”
지난 삼 일간 지켜보면서 북황련 무인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재밌게 보고 물러갑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
잘읽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독입니다
잘읽었습니다
즐독 입니다
즐감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3.09.12 05:55
즐감하고 깁니다.
너무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즐독 ㄳ
무슨 일 있으신가요? 후속이 안 올라와서 궁금 합니다.
감사합니다
재밌게 잘 읽고 있습니다 요며칠 연재가 안되니 너무 궁금하네요 작가님의 신상에 무슨일이 있나 걱정도 되구요 다음글은 언제 올리는지 기다려지네요 날짜라도 게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궁금 합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잘보고갑니다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