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김의 떡
오징어 먹물 염색약을 사용해도 부작용이 일어나 가려움증과 피부 트러블에 피가 날 정도였다. 매일 달리기로 흘린 땀이 머리띠를 넘어 눈으로 들어오면 쓰렸다. 눈 건강을 해치는 장애물이었다. 어머니가 모다 모다 샴푸를 인터넷 구매해 주셨다. 그것도 동일한 부작용에 한쪽으로 치웠다. 구운 돌가루를 섞어 사용하면 괜찮다 말에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고심 끝에 머리 염색을 중단했다. 마음 편하고 활동하기 좋았다. 하지만 장로 임직을 앞두고 어머니 성화에 못 이겨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머리 물을 들였다. 피부과 약을 복용해도 가려워 밤마다 긁는데 속도 모르고 권사님께서‘목사님, 10년은 더 젊어 보이네요. 앞으로 계속 염색해야겠네요.’ 비행기를 태웠다. 어머니는 ‘순서 맡은 목사님 중에 한 사람도 머리 흰 분이 없었다’고 거들었다. 이 나이에 내 머리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 고민이 앞선다. 3년 전, 생일 선물 받은 가발은 사용하기 불편해 쓰지 않고 있어 돈이 아까웠다. 시간이 나서 어머니 틀니를 손보려고 모셨다. 윗니를 빼고 가짜 이를 만들어야 한다는 진단이었다. 혈압약 복용으로 당장 할 수 없어 사흘 후 예약하고 나섰다. 어머니가 허탕 쳤다고 얼굴 점이나 빼러 가잔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는 격이었다. 백운동 클로아 성형외과로 갔다. 어머니 얼굴 검버섯 제거는 쉽게 끝났다. 내 얼굴은 간호사가 마취 크림을 바른 후 침대에 뉘어 40분간 레이저로 벌집을 만들었다. 작은 점은 따끔따끔 견딜 만했지만 큰 곳은 온몸에 전율이 흘렸다. 입과 눈 주변은 움찔움찔 참기 어려웠다. 살타는 냄새도 역겨웠다. 화끈거리는 얼굴에 간호사가 재생 테이프를 붙여줬다. 목은 마데카솔 연고만 발랐다. 항생제 처방받아 약국으로 갔다. 세안하지 않고 물티슈로 닦았다. 듀오덤이 부풀어 오르면 아내에게 새것을 내밀 참이었다. 다음 날, 오전 8시 강 집사님 전화였다. ‘목사님, 잘 계시지요. 오늘 바쁘신가요?’ ‘바쁘지 않은데 점을 뺐네요.’ ‘그래요, 처남이 세상을 떴네요. 조문할 사람도 없고 가족장으로 다 아는 사이라 입관 예배 좀 드려 주세요.’ 사실 그 얼굴로 나서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개척 멤버나 다름없는 가정이라 응하고 일찍 나갔다.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교회를 떠났지만 늘 한마음으로 어울렀다. 빈소 이름이 없어 관리실에 물었더니 혼자 사신 분이라 차리지 않았단다. 두 여동생을 기다리다 만나 안치실로 향했다. 고인이 수의를 입고 편하게 누워 계셨다. 요양병원에서 고통 할 때 그 아픔을 덜어주지 못한 안타까움에 여동생인 전 권사님이 흐느끼며 눈물을 훔쳤다.
전 권사님의 섬김은 남달랐다. 이 땅에서 외롭게 투병하며 살았지만 오빠 영혼 구원 위해 기도하며 확신을 갖게 도왔다. 지난날 늘 푸른 요양병원으로 옮긴 이유도 우리 교회가 코로나 전 예배로 섬길 때였다. 비록 휠체어로 생활했지만 목요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였다. 퇴근길에 들려 안부를 묻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드렸다. 명절이면 집으로 모셔 대접하고 영화 관람을 시켰다. 난 그 오빠를 우리 교회 예배에 모셔 보려고 매일 아침 달려가 휠체어를 밀고 효동초교로 갔다. 구원에 필요한 성경 구절을 하루 하나씩 읽고 가르쳤다. 하지만 예배당으로 모시기는 화장실 문제가 있어 무리한 요구였다. 그는 알코올 중독을 극복하려고 날마다 학을 접었다. 내성적이라 마음 가는 사람들에게 나누며 소외감을 이겼다. 손재주가 탁월하여 젊은 시절 대한 통운에서 경력을 쌓았다. 한동안 자동차 정비업에 종사하여 한 자매에게 중매 선 일도 떠올랐다. 무엇보다 장남으로 어머니 사랑을 듬뿍 받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오만 곳이 다 아프다 하시면서 아들 시중을 들었다. 그 어머니의 사랑을 이어받은 여동생의 섬김은 감동이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남매가 보고 배울 교훈이요 자랑할 만한 모습이었다. 지난 5월 급격히 건강이 약화되었을 때였다. 엘리암 요양병원으로 옮겨 치료 중이었다. ‘목사님, 오빠 상태가 안 좋으세요. 오셔서 기도 한번 해 주세요.’ 전화를 받고 찾아갔다. 코로나로 출입이 어려운 때 특별 면회로 방호복을 착용하고 입원실을 찾았다. 고통 중에도 날 알아봤다. 복음의 말씀을 전하고 기도를 따라 하게 했다. 또렷한 목소리로 따라 하며 아멘 하는 소리에 동생이 놀랐다. 본인이 할 때와 다른 모습이라 오빠 이름으로 헌금을 드렸다. 그 후에 기도하며 생각나서 요양병원에 연락했더니 다른 곳으로 옮긴 상태였다. 개인정보 보호라 더 이상 물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동생 생각에 가장 불친절하고 문제가 많은 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게 한 것처럼 느껴져 마음 아파하셨다. 입관 예배를 드리며 주 안에서 죽음이 복됨을 전했다. 위로할 자리라 내 얼굴로 점심을 같이 먹었다. 다음 날 아침 조촐하게 출관 예배 인도하고 장지로 떠났다. 영락공원 화장장에서 기다리며 오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마지막 고통을 덜지 못하고 임종을 보지 못한 서운함이 가시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끝까지 잘 모시려는 마음이 귀했다. 운구를 마치고 화장장으로 모신 후 유가족 대기실에 앉았다. 섬김의 수고가 헛되지 않음을 전하고 위로의 기도를 드렸다. 장례 후 오빠 이름의 감사 헌금과 식사비를 챙겨 보냈다. 식비 중 절반은 흘려보내고 추수 감사절 날 드린 잘 익은 호박으로 시루떡을 주문해 뒀다. 내일은 그 떡을 나눌 것이다.
2022. 12. 3 서당골 생명샘 발행인 광주신광교회 이상래 목사 010 4793 0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