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넘는 박달재 - 나훈아
작사: 반야월
작곡: 김교성
1.천둥산 박달재를 울고넘는 우리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집는 고개마다 굽이 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가슴이 터지도록~
2.부엉이 우는산골 나를두고 가신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왕님께 빌고가소
도토리 묵을짜서 허리춤에 달아주면
한사코 우는구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
3.박달재 하늘 고개 울고 넘는 눈물 고개
돌부리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 길아
도라지꽃이 피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금봉아 불러 보면 산울림만 외롭구나~
1.울고 넘는 박달재
옛날, 경상도의 사내 박달(朴達)은 과거를 보기 위해 서울로 가다가 금봉이라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만나게 됩니다. 박달과 금봉은 아픈 사랑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 낭떠러지에서 박달이 떨어져 죽게 되었는데 그 뒤부터 사람들은 그 고개를 ‘박달재’라 부른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박달재 하늘 고개 울고 넘는 눈물 고개’에서 ‘금봉아 불러 보면 산울림’을 외롭게 울리는 운명적 사랑의 장소, 천등산(天登山)은 실제 박달재가 있는 시랑산과 다릿재, 지등산, 인등산 등과 같이 평범하게 어울려 살아갑니다.
특정한 국내 지명 ‘박달재’가 두드러져(2009. 이영미) 과거의 신민요 모습을 보이는 이 노래는 해방 후 가수 진방남(반야월)이 만든 노랫말입니다. ‘남대문 악극단’을 창설하고 단원들과 같이 충주행 버스를 타고 비가 내리는 박달재를 넘어가는 길에 고개 마루에서 버스 고장으로 쉴 때 성황당 앞에서 어떤 부부의 애절한 이별 장면을 보고 '울고 넘는 박달재' 의 노랫말을 지었다(2008. 박찬호)고 전해집니다.
(1절) 천동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 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2절)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한사코 우는 고나 박달재의 금봉이야 (3절) 박달재 하늘 고개 울고 넘는 눈물 고개/ 돌부리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 길아/ 도라지꽃이 피는 고개마다 구비마다/ 금봉아 불러 보면 산울림만 외롭구나/ (제목 울고 넘는 박달재 작사 반야월 작곡 김교성 노래 박재홍)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을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습니다. 모두들 2절의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님’을 간직한 사람들입니다. 이 노래를 유독 좋아하던 S 선배님께서 절실하게 부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1절의 마지막‘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부분입니다.
S 선배님은 온 얼굴에 힘을 주고 울면서 소리치는 모습이 그 옛날 악극단원의 실감 표정을 넘어섭니다. 몰론 노래 실력도 보통이 아니시고요. 중요한 것은 이 부분에서 선후배의 부분 합창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참여한 모든 사람이 자연스럽게 ‘울었소 ♪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을 목이 아프도록 외칩니다.
박달재, 그 인생 고개를 힘들게 넘어가시는 우리 부모님 세대들의 방랑길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꼭 박달재를 넘어가는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모두 돌부리 걷어차며 돌아서는 이별 길을 걸어온 분들이며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모두 나를 두고 떠난 님을 아직도 간직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이별의 정한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도 표현되는데 그 아픔의 생채기가 젊은 우리의 푸른 유전자에도 얼룩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둘째, 부모님들의 세대는 왕거미가 집을 짓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달이 뜨고 바람이 불어 가슴을 때리겠지요. 해마다 도라지는 지천으로 필 것이며….
셋째, 음악적 소양이 뛰어나다는 것입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순간, 아무도 지휘하지 않았는데 합창이 되어 ‘울었소 ♪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2절에서는 짝을 찾아 우는 부엉이가 등장하고 3절에서는 도라지꽃이 핍니다. 그 산골에 나를 두고 가는 님은 지금 생각해도 야속합니다. 그러나 돌아올 기약을 성황님께 빌어주던 박달재 사랑 효험이 여러분의 사랑에 나타날 것입니다. 꽃말이 영원한 사랑인 도라지꽃이 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작사가 반야월이 이름을 불러주어 대한민국 대표 고개가 된 제천의 박달재를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노래비도 있고 공원도 있습니다. 실제로 넘어보면 별로 높지도 않고 특별한 의미도 없을 것 같은 이 고개가 이제는 여러분의 이름을 불러줄 것입니다. 물항라 젖은 저고리로 금봉처녀가 도토리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는 휴게소도 만날 것이며 산울림 뚝뚝 눈물을 흘리는 조각공원도 만날 것입니다.
이 노래는 KBS 가요무대 100선과 추억의 히트 가요 제 3집에 실린 곡으로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부르고 있습니다. 어려운 고개를 만났을 때 ‘이 가슴이 터지도록’ 울고 소리치면 그 어려움을 넘어갈 힘이 생겨날 것입니다. 금봉이를 불러 보아도 산울림만 외롭겠지만 그래도 불러보는 것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남아 사랑하는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힘든 고개를 만납니다. 울음을 참고 이 고개를 넘어가야 합니다. 비가 내립니다. 박달재! 혹은 그대가 지금 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그 고개 어디쯤에 가슴을 치면서 함께 울어줄 첫사랑 금봉이, 아니면 굳센 금순이를 닮은 희망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내일은 ‘웃고 넘는 박달재’가 되면 좋겠습니다.
자료출처: 새리 정상득
2. 울고 넘는 박달재
○ 박달재 [朴達岾] 해발 453M
충북 제천시 봉양읍[鳳陽邑] 원박리[院朴里]와 백운면[白雲面] 평동리[平洞里] 경계 고개로 1217년[고려 고종 4] 7월 거란군이 10만 대군으로 침공해 왔을 때 김취려[金就礪] 장군이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전공을 세운 전승지로 유명하다.
또한 인근의 지등산. 인등산과 함께 천[天].지地].인[人]을 모두 갖춘 신령스런 곳으로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성소로도 알려져 있다. 그래서 "천등산" 이라고도 하는것 같다.
박달재에 관해 여러가지 설이 있다. 일대에 박달나무가 많이 자생하므로 박달재 라고도 하고 이 근처에서 죽었다는 박달이라는 청년의 이름을 따서 박달재라고 부른다고도 한다.그러나 박달재 안내 판에 의하면 제일 정확한것으로 보여지는 설이 아마도 맞지 않을까 한다.
안내판에서는
박달도령과 금봉이 처녀의 애틋한 사연이 구전으로 전해온다. 옛날 경상도 청년 박달도령이 서울로 과거보러 가는 길에 이 고개를 넘어 아랫마을 금봉이 처녀를 만나 사랑을 나눴는데 박달은 과거급제 하면 돌아와서 금봉이와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언약하고 상경하고 금봉이는 도토리묵을 장만하여 낭군이 될 박달도령 허리춤에 매달아주고 먼길에 요기하도록 배려했다. 낙방한 박달이 슬픔에 잠긴 채 돌아오다가 평동 금봉이 집을 찾았는데 금봉이가 박달을 기다리다 지쳐 3일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식음을 전폐하면서 슬피 울었다고 한다.
그 때 마침 박달은 고갯마루 방향을 바라보니 꿈에 그리던 금봉이가 춤을 추면서 고개 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고, 있는 힘을 다해 박달은 고개 쪽으로 달려가 금봉이를 잡으려고 했으나 손이 미치지 못하였다. 박달은 간신히 고개 위에서 금봉이를 끌어 안았으나 금봉이는 이내 사라지고 박달은 허공으로 몸을 날려 천길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박달은 금봉이의 환상을 보고 낭떠러지에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그 후로 이 고개를 박달재라고 한다.
1948년에 박달선비과 금봉이 낭자의 애닯은 사연을 담은 노래 "울고넘는 박달재 [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 가 발표되어 오랫동안 애창되고 있다. 제천시 국도변의 박달재 휴계소 입구에 노래가사를 적어 넣은 박달재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박달재의 높이 504M 이고, 해발 453M로, 차령산맥의 지맥인 구학산[九鶴山, 971M]과 시랑산[侍郎山, 691M]의 안부[鞍部]에 해당한다. 박달재를 박달산, 박달령, 박달현[朴達峴], 박달치[朴達峙]로 부르기도 하였는데 요즈음 에는 천등산 박달재로 알려져 있다.
자료출처: 칠이의 아름다운 동행
첫댓글 호소력 짙은 나훈아님의 좋은 곡주심 ..감사드립니다
크낙새님 반갑습니다
발자취 남겨 주심에 감사 드리며....즐거운 시간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