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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55)
[천붕십일천마(天崩十一天魔)]
인마불거에 실린 불상은 소림사 폐허에 있던 것이다. 인마불거를 끌고 있는 사람들은 소림의 십팔나한이다. 목에 밧줄을 맨 개방 장로들이 끌려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 뒤로 수백에 달하는 무인들.
그들은 소림을 떠났던 승려들과 개방 방도들이라 했다.
인마불거의 마부는 독천쌍마다!
더 이상 소문이 아니었다. 아니, 소문일 수가 없었다. 인마불거의 마부가 되어 있는 두 사람이 독천쌍마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마차를 끌고 있는 자들의 신분은 강호 무인들이 확실하게 아는 자들이었다.
어느덧 하남성을 출발한 인마불거는 하북성을 지나 팽가가 있는 백석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사야, 여기 기억하겠냐?”
“당연히 기억하지요, 형님. 처음 우리가 왔을 때는 검게 탄 흔적밖에 없었잖소. 그리고 다시 형님과 같이 왔을 땐 십여 개의 건물이 간신히 세워진 상태였고.”
모사의 얼굴이 아득하게 변했다. 벌써 오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독인이 되어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병신 넷을 만났다. 사지는 멀쩡했지만 눈, 코, 입은 물론이고 이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백산 형님을 만났고, 오른 다리가 없는 일휘 형님, 오른팔이 없었던 석두 형님, 그리고 왼팔이 없는 살우 형님을 보았다.
독인이 되어 숨결마저 독이 포함되어 있던 자신들을 비롯하여 살아남은 광풍대원 여섯 명은 전부가 병신이었다. 제천맹을 멸문시킬 때까지 단 한 번도 옷을 갈아입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몸을 씻지 않았다. 그들의 피로 점철된 옷을 입고, 그들의 피가 묻은 손으로 육포를 뜯었다.
“우리 같은 놈들을 두고 뭐라 그러는지 아쇼?”
백여 채에 달하는 팽가 건물을 노려보며 모사는 비릿하게 웃었다.
“병신 육갑했다고 하는 거요. 그때 무림인들 씨를 말려 버리든지 아니며 지배를 해야 했소. 그랬더라면 이런 개자식들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또 형님을 무림공적으로 지목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여섯 명의병신들이 육갑을 떨었단 말이오.”
모사의 말에 뒤편에 있던 진청일을 비롯한 개방 방로들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강호를 통치하는 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붕십일천마는 은거를 택했다. 그리고 지난 오십 년간 단 한 번도 강호 일에 나서지 않았다.
그랬던 그들을 불러들인 자들은 강호 무림인이었다. 그 선봉에 개방이 있었다.
“이 자식은 왜 이리 안 나오는 거야? 팽월 너 이 새끼, 빨리 안 나와?”
진득한 살기를 내포한 모사의 고함소리가 벌판을 가로질러 팽가 정문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하북팽가 최심처인 일도각(一刀閣)에는 팽월을 비롯한 팽가 가신들이 곤혹스런 얼굴로 앉아 있었다.
“가주, 팽가는 잘못한 게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구나 소림에서 팽운산 장로를 비롯한 백여 명의 가솔을 잃었습니다. 우리 팽가도 피해자란 말입니다!”
팽월을 향해 고함을 지르는 자는 수석장로인 잔월도(殘月刀) 팽여웅(彭呂雄)이었다. 팽여웅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물론 소림의 멸문을 방치한 책임이 크고, 귀광두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건 팽가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느 누구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터이고 팽가 또한 그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일을 가지고 책임 운운 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그래서 어쩌자는 말입니까? 저분들을 상대로 칼이라도 뽑자는 말입니까?”
“잘못한 일이 없으니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죄인처럼 끌려가야 합니까? 죽었으면 죽었지 전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팽여웅의 말에 다른 가신들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팽월 이 개자식! 내가 들어가야만 나올 테냐!”
“참을 수 없습니다. 당장 나가서 따져야겠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를 들은 팽여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 가문의 가주를 향해 개자식이라니.
“끄응!”
우르르 몰려 나가는 장로들을 보며 팽월은 낮게 신음을 뱉어냈다.
“젠장......!”
급기야 욕설을 뱉어낸 팽월은 엉덩이를 들었다. 어찌 되었건 나가 봐야 할 일이다.
어기적거리며 대문을 나선 팽월은 팽가 앞 벌판을 쳐다보았다. 불상을 실은 마차와 마차를 끌고 있는 십팔나한들, 그리고 마차 뒤로 이백여 명의 인물들이 이편을 쳐다보며 묵묵히 서 있다. 그들을 보고 있자니 무심결에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한참 동안 전면을 주시하던 팽월은 벌판을 가로질러 천천히 걸었다.
“쿡!”
어깨를 편 채 당당하게 걸어오는 팽가 장로들의 모습을 본 모사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입가에서 시작한 미약한 미소는 점차 그 범위를 넓혔고, 이어 온 얼굴로 번졌다. 다만 그들을 쳐다보는 눈만은 차가운 광채로 번들거렸다.
“응?”
마차를 향해 걷던 팽여웅의 얼굴에 이채가 서렸다. 나이가 팔십이 넘었다고 했던 그들이 이제 사십대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느닷없이 의문이 꼬리를 쳐들었으나 꾹 눌렀다. 그리고 두 사람을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소생은 팽가의 수석장로 팽여웅이라 합니다. 두 분을 뵙습니다.
“난 팽가 가주 그 개자식을 불렀다. 네가 가주더냐?”
푸욱!
일순 팽여웅의 발이 지면을 뚫고 들어갔다.
“그분은...... 오백여 명의 식솔을 거느린 가문의 수장입니다.”
가슴 저 아래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가까스로 내리누르며 팽여웅은 말했다.
“개떼들 수장이면 개자식이 분명한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단 말이냐?”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희 팽가로서는 방법이 없었단 말입니다! 팽가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왜 모르십니까?”
결국 팽여웅은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행위를 두고 누가 팽가에게 돌을 던진단 말인가. 소림 멸문을 방치한 행위가 잘했다는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천붕회가 한꺼번에 사는 방법은 그 외엔 없었다. 또다시 그런 상황이 온다 해도 팽가는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팽여웅이라 했더냐? 네 마음을 이해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팽가를 이해한단 말이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모사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팽여웅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모사의 마에 팽여웅을 비롯한 장로들의 얼굴은 해쓱하게 변했다.
“지금도 그때와 같다고 생각해라. 내말을 거부하면 팽가는 기둥뿌리 하나 남지 않을 것이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씨를 말려서 지워 버리겠단 말이다!”
“허억!”
부지불식간에 한 걸음 물러난 팽여웅은 나직한 비명을 내질렀다. 단지 마차에서 내려섰을 뿐 다른 동작은 일절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산악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이 앞을 가로막는 듯했다.
조금 전 들었던 의문이 꼬리를 말고 사라졌다. 독천쌍마가 아니라면, 천붕십일천마가 아니라면 지금과 같은 기운을 발하지 못한다. 얼굴이 변했지만 그들은 독천쌍마가 분명했다.
“사숙님!”
뒤늦게 따라온 팽월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아직도 나를 사숙이라 생각하는 거냐? 그런 놈이 형님을 무림공적으로 선포했더란 말이냐? 그런 놈이 과열지옥비의 주인인 형님을 잡겠다고 팽가 무인을 출병시켰더란 말이더냐? 일어서라, 팽월. 일어서서 우릴 포위해라.”
팽월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모사의 몸에서 검붉은 광채가 무럭무럭 솟아 나왔다. 이윽고 팽월 앞에 도착한 모사는 속삭이듯 말했다.
“오릴 포위하고 공격해라.”
검붉은 광채를 머금은 모사의 발이 팽월의 면상에 작렬했다.
“크악!”
나직한 비명과 함께 팽월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네 가문을 위해, 네 식솔을 위해 그렇게 하란 말이다.”
퍼억!
“아악!”
팽월의 입에서 튀어나온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백산 형님을 짐승 몰 듯 공격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렇게 하란 말이다.”
퍽!
“크윽!”
“네놈과 제천맹이 다른 점이 무엇인지 말해 봐라. 개떼처럼 달려들었다가 그가 죽으면 너희들은 영웅이 되는 거고, 네 식구들이 죽으면 그는 강호 공적이 되는 거냐? 그게 너희들의 법이냐?”
퍼억!
“으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팽월은 일 장가량을 날아가 떨어졌다. 그의 얼굴은 알아볼 수조차 없이 문드러졌다. 콧잔등이 내려앉고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개방의 거지새끼들이 그런 건 백번 이해한다. 하지만 네놈만은 절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장난이었다지만 넌 백산 형님을 사부로 모신 놈이었다.”
모사가 분노한 이유였다. 과거 팽월이 뇌룡현의 생사투인으로 참여했을 때 그에게 한천팽무도법을 전수해 준 사람이 백산이었다. 그때의 인연으로 팽월은 백산을 사부로 모시게 되었다. 나중에 장난이었다고 백산이 말을 했지만 그럴 수 없다고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팽월이었다.
더구나 팽월의 큰할아버지이자 자신들의 사부인 팽무도는 백산의 의부. 사부뿐만이 아니라 큰아버지뻘마저 되는 사람이 바로 백산인 것이다. 그런 사람을 죽이겠다며 팽월은 무인을 파견했다.
“너희들은 그랬다, 팽월. 결코 우릴 형제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이용할 대상으로만 생각했어. 난 그게 좆같은 거야!”
“아닙니다, 사숙. 오해이십니다. 저는 절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놈이 왜 그랬느냐? 광혈지옥비가 어떤 물건인지 몰랐다고 할 참이냐? 용왕유권이나 백보신권이 개나 소나 다 펼치는 무공인 줄 알아단 말이냐!”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불러왔다. 앙천마마묵독공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섯다의 몸은 검은색 광채를 사방으로 뿌려댔다.
저 바보는 이런 것들을 위해 천붕회에 나갔을 것이다. 천붕회가 강호 제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비무에 참석했을 것이다. 자기를 형제로도 생각해 주지 않는 이런 것들을 위해.
“우린 말이다, 너희들이 잘되길 바랐다. 천하제일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구도 넘보지 못할 그런 곳이 되길 바랐다. 그런데 너희들은 아니었더구나. 우리만의 착각이었던 말이다. 이게 그 좆같은 인연을 끊고 과거를 잊자. 네가 형님을 공격했던 것처럼 우리도 너희 팽가를 공격하겠다. 앞으로 반 시진의 여유를 주겠다. 그 안에 전쟁 준비를 끝내라.”
“사숙, 잘못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소생이 잘못했습니다.”
“용서를 구할 필요 없다. 형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무림공적으로 선포해라. 그리고 남궁무 그 개자식과 함께 우릴 공격해라. 강호 무인 전부를 동원해도 상관하지 않겠다. 어차피 우린 마두가 아니냐.”
“제가 죽겠습니다. 그러니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죽겠습니다, 사숙!”
급기야 팽월은 오호단문도를 뽑아들었다.
“가주님!”
질겁한 장로들은 팽월 곁으로 다가가며 외쳤다.
“용서해 주십시오. 가주를 종용했던 사람은 저희들입니다. 저희들이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저희들이 죽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해 주십시오!”
뒤이어 수많은 함성이 뒤를 따랐다. 하나 둘 벌판으로 모여들었던 사백 명의 팽가 무인들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섯다는 고개를 들어 벌판을 쳐다보았다.
“사숙조!”
고개를 들어 섯다를 쳐다보던 팽가 무인들은 일제히 바닥에 머리를 찍었다.
“형님!”
그런 팽가 무인들을 물끄러미 주시하던 모사는 백산을 쳐다보았다.
“살려줘야지 어쩌겠냐. 우리도 죽으면 의부를 만나야 할 텐데.”
백산은 희미하게 웃었다. 사부, 힘을 주었던 사람이고 광혈지옥비라는 운명을 주었던 분. 아버지의 도를 몸으로 받았으면서도 결국 가문을 위해 살았던 분. 그가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정말 사부님이십니까?”
고개를 든 팽월은 백산을 쳐다보며 물었다.
천붕회에서 처음 보았던 그. 소림의 속가제자답지 않게 오만한 성격이라 여겼고, 그 오만한 때문에 배척하게 되었던 사람. 귀광두라 부르며 무시했던 그가 한천팽무도법을 전수해 주었던 백산이었다. 하지만 백산의 입에서는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대신.
툭! 툭! 툭!
팽월을 비롯한 장로들 앞으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환약이 하나씩 떨어졌고, 모사의 차가운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불필요한 팔을 잘라라!”
“감사합니다, 사숙!”
고개를 숙인 팽월은 앞에 떨어진 환약을 복용한 다음 오호단문도를 들어 올려 왼팔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팽월의 팔에서 분수처럼 피가 쏟아져 나왔다. 뒤이어 장로들 또한 왼팔이 떨어져 나갔다.
“팽가를 불태우고 마차를 따라라!
팽월을 비롯한 팽가 장로들을 쳐다보던 모사는 고개를 돌렸다.
“왔네?”
우울한 얼굴로 마차 뒤편을 보며 말했다. 북방을 떠났던 소살우 일행이 이편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던 거였다.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합디다. 지가 무슨 불자라고 머리를 처자르더니 마치를 끌고 있소.”
백산을 슬쩍 가리키며 말을 마친 섯다는 한편으로 물러났다.
“와, 왔냐?”
어색한 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백산은 더듬거렸다. 일휘나 석두보다 소사우의 얼굴을 대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아버지라 불렀던 사람.
그를 보며 당당하게 ‘살우야!’하고 부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십일 년 만에 보는 얼굴임에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살우 또한 마찬가지였다. 망연한 눈으로 백산을 쳐다볼 뿐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골백번은 더 연습을 했다. 얼굴을 보면 바로 형님이라 부르겠다고. 힘껏 껴안고 백산을 형님이라 부르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하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대하지 입은 굳어 버린 듯 떨어지지 않았다. 몸은 얼어 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을 깬 사람은 한편에서 둘을 지켜보고 있던 설련이었다.
“도련님들께 인사 올립니다. 백랑을 모시고 있는 설련입니다. 그리고 이 동생은 주하연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주하연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나선 설련은 석두 일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형수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형수님 절을 받는 시동생들이 어디 있습니까!”
깜짝 놀란 석두가 설련과 주하연 곁으로 다가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동안 정말 욕보셨습니다. 그래, 어쩌다가 저 인간에게 발목을 잡힌 겁니까?”
“아이가 생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지요, 뭐.”
“네?”
느닷없이 흘러나온 주하연의 말은 폭탄이었다. 웃음을 흘리던 석두는 물론이고 굳은 얼굴로 서 있던 소살우조차 깜짝 놀라며 주하연을 쳐다보았다.
“도련님, 나이 먹었다고 귀까지 먼 거예요? 하연이 아이를 가졌다고요! 아이 때문에 열일곱 청춘이 발목을 잡혀 버렸단 말이에요. 소령이란 이름까지 지었다니까요!”
“에? 프! 하하하!”
“으! 하하하!”
주하연의 볼멘소리에 석두 일행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는 양처광소를 터뜨렸다. 다섯 명이 터뜨리는 웃음은 한참 동안 끝날 줄 몰랐다.
천영 누님을 닮은 형수가 아이를 가졌다고 했다. 이름을 소령이라 지었다고 했다. 세 번째로 짓는 소령이란 이름이다. 첫 번째로 소령이란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던 아이는 납치되어 죽었고, 두 번째 소령이란 이름을 가지고 태어났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소령이란 이름을 이어받은 아이가 태어난다. 그들은 자신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하염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감사합니다, 형수님!”
하늘을 쳐다보던 석두 일행은 동시에 무릎을 꿇으며 외쳤다.
[잘했다.]
덩달아 고개를 숙이던 설련은 주하연에게 눈을 찡긋하며 전음을 보냈다. 주하연의 재치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번에도 역시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소령 이야기를 꺼낸 것이리라. 이제 열일곱 살이란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주하연은 어른스러웠다.
“뭐 하시는 거예요? 전부 일어나세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라도 한잔해야지요. 몽 할아버지는 가서 술 좀 구해 오세요. 죽엽청으로 열 말 정도면 되겠어요.”
“알겠습니다, 작은 주모님!”
허공에서 불쑥 고개를 내민 유몽은 제자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형님도....... 이쪽으로 오시오!”
이편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 백산을 발견한 소살우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 그래! 이거.”
“뭐요, 이게?”
“지저사령계에 들어갔다가 얻은 건데 네 생각이 나서 가져왔다. 여기 적힌 글이 혈월(血月)이래.”
“이 글....... 읽을 줄 아쇼?”
“내가 뭔 수로 이 어려운 글을 읽나? 하연이 말해 줘서 알았지. 갑골문잔가 하는 거래.”
“그러게 공부 좀 하라고 하지 않았소. 맨날 뒈진다고 지랄을 떨더니 이젠 마누라한테 글까지 배우고, 잘하고 자빠졌다.”
쿡! 쿡!
백산을 향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순간, 옆구리에서 기이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어? 형수.......!”
“살우 도련님, 방금 뭐라고 했죠? 마누라 어쩌고 하던데 저 두고 한 말은 아니겠죠?”
허리에 손을 척 올린 주하연은 소살우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형수님?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보다 임산부가 이렇게 움직이면 어떡합니까. 일어설 때도 조심, 앉을 때도 조심, 걸을 때도 조심하셔야 합니다.”
“흥! 그걸 아는 도련님이 동생은 소개시켜 주지도 않고, 제가 직접 찾아오게 만들었단 말이죠?”
한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조우령을 가리키며 주하연은 말했다.
“네?”
일순 소살우를 비롯한 석두 일행은 뜨악한 얼굴로 주하연을 보았다.
지금껏 형수로 삼겠다고 데려온 조우령의 신분이 주하연의 한마디에 소살우의 부인으로 변해 버린 거였다.
“도련님, 저도 소개시켜 주세요.”
가만히 쳐다보던 설련까지 나서자 소살우는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길!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이거?’
당혹스런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백산 형님을 만나도 전혀 어색함이 없도록 하기 위해 꾸준히 세뇌 교육을 시켰다. 그런데 소개를 시키기도 전에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지고 있다. 결국 보다 못한 소살우는 모사에게 구원 요청을 하고 말았다.
[모사 새꺄, 어떻게 좀 해봐.]
[낸들 무슨 방법이 있겠소. 더구나 작은 형수는 주홍 그 녀석의 외동딸이 아니오. 얼마 안 있어 이 나라의 공주가 될 분이란 말이오. 난 오래 살고 싶소.]
‘니미럴!’
소살우는 내심 욕설을 내뱉으며 쩔쩔맸다. 더욱 황당한 노릇은 주하연과 설련의 말을 들은 조우령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저기......”
“네가 자령 사저의 딸이구나. 난 조우령이다. 저 뒤에 있는 이들이 수신가의 가솔들이고.”
“엄마를 잘 아세요?”
“아니, 친한 건 아니었다. 그분이 떠난 바람에 수신가 가주가 되었단다. 그래서 그분 원망을 많이 했다. 지저사령계에 다녀왔다고 들었는데......”
“그럼 몸을 고치기 위해서 떠나온 거로군요.”
주하연은 측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또한 천음신맥을 앓았기에 그 고통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수신가 인물 대부분은 천음신맥을 앓고 있다.
“그렇다고 봐야지. 그리고.......”
조우령은 힐끔 백산을 쳐다보았다. 북방에서부터 끊임없이 말을 들었던 사람. 오히려 들었던 말이 부족할 정도로 미남에 바싹 밀어 버린 머리는 묘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그에게는 벌써 두 명의 부인이 있고 주하연은 임신을 했다고 했다. 굳이 계약을 이행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홀가분한 마음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했다.
“그럼 동생이 아니라는 말이네. 공연히 좋아했네. 이모라 부르기는 너무 젊고, 앞으로 언니라 부를게요. 이쪽으로 오세요. 사람들을 소개시켜 드릴게요.”
같은 병을 앓고 있다는 동정심 때문이었을까. 주하연은 환하게 웃으며 조우령의 손을 잡아끌었다.
“여긴 앞으로 무림황제가 될 분이자 하연이의 하늘인 백산.”
“헉!”
백산은 눈을 치뜬 채 한참 동안 조우령을 보더니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처음....... 뵙겠습니다.”
그런 백산을 빤히 쳐다보며 조우령은 고개를 숙였다.
“조우령이라 합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조우령은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언니, 이쪽으로 와요. 소개시켜 줄 사람이 많아요.”
“그, 그래!”
조우령을 이끌고 다니며 주하연은 근처에 있던 모든 이들을 소개시켜 주었다. 화정과 유화를 소개시켜 주었고, 십팔나한은 물론이고 밧줄을 목에 걸고 있는 개방 장로들과 팽가 수뇌들까지 전부 소개를 시켰다.
“그리고 저기 술통을 가져오는 할아버지는 중원에서는 살황(殺皇)이라 부렸던 분이에요.”
“작은 주모, 술 가져왔습니다.”
“수고했어요, 할아버지. 여기 두 통 놓고 남은 술은 다른 분들 드리도록 하세요. 뭐 해요. 백랑? 멍에 벗고 이쪽으로 오셔야죠. 광자 스님도요.”
팽가 앞 벌판에 때 아닌 술잔치가 벌어졌다. 조금 전 팽월의 팔을 자리고 팽가가 불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건 겉모습에 불과할 뿐이었다. 술을 마시는 백산 일행이나 목에 밧줄을 걸고 있는 이들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다음은 남궁무 그 개자식을 만나러 간다!”
섯다의 고함 소리가 평원을 타고 울렸다.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북황련도, 남천벌도, 마교도, 어느 누구도 그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오십 년이 흘렀고 그 기간 동안 그들은 잊혀진 존재였다. 그들이 강호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랬던 그들이 강호상에 등장하고 말았다. 그들의 행보는 충격적이었다. 소림사 폐허를 출발한 그들은 가장 먼저 낙양에 있던 북황련 하남지부를 초토화시켜 버렸다. 개봉에 들러 개방 총타를 불태우고 장로들을 죄인처럼 마차 뒤에 매달았다.
하북팽가에 들러 팽월을 비롯한 팽가 가신들의 팔을 자른 다음 팽가를 불태웠다고 했다. 팔이 잘린 팽가 무인들은 개방 장로들처럼 목에 밧줄을 걸고 마차 뒤를 죄인처럼 따른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기행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기이한 행보였다.
인마불거의 뒤를 따라 수백 명의 개방 무인들이 모여들었고, 수백 명의 소림 승려들이 모여들었다. 수백 명의 팽가 무인들이 뒤를 따랐고 지금도 그들의 수는 증가한다고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유랑만처럼 떠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에서는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몇몇 고을에서 그들을 해산시키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마부석의 두 사람과 잠시 이야기를 나눈 그들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돌아갔다.
인마불거를 따르는 자들의 행동 또한 비슷했다. 가장 먼저 앞 마차에 있는 불상을 향해 합장한 다음 묵언수행을 하는 승려들처럼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마차를 따른다.
천붕십일천마(天崩十一天魔)
오십 년 만에 등장한 그들의 행보를 모든 강호인들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한 사정은 강호 삼강의 한 곳이라 불리고 강북의 패자라는 북황련이라 하여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이어지는 악재에 북황련의 분위기는 침울하기 그지없었다.
“허허! 하후장설이 죽어서 좋아했더니 이번엔 천붕십일천마라.......”
경직된 얼굴로 앉아 있는 가주들을 보며 위지천악은 낮게 중얼거렸다. 머릿속은 실타래처럼 엉켜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말을 처음 실감했다. 혈삭마령인가 혈사지옥인을 잃었고 산동만씨세가와 요서모용세가, 그리고 철혈패씨세가를 잃었다. 많은 전투를 치렀지만 단 한 번도 승리한 적이 없었다. 조금씩 축나기 시작한 전력은 어느새 과거에 비해 오할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더더욱 황당한 노릇은 북으로 떠나보냈던 천붕십일천마 다섯 명이 귀환했다는 사실이다. 다른 일은 덮어 두더라도 천붕십일천마의 귀환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니, 큰일이라 할 수 있었다.
비록 금의위 영반이었던 천태진의 부탁으로 움직이긴 했지만 그들을 북방으로 보내는 부탁의 현장에 남천벌 벌주인 남효운과 자신이 있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그것까지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들의 귀환은 결코 환영할 일이 아닌 것이다.
“의견을 말해 봐라.”
위지천악의 시선이 제갈승후를 향했다. 하지만 현 상황에서 제갈승후라 해서 특별한 의견이 나올 리가 없었다. 애초에 귀광두를 이용하여 일을 꾸몄던 일부터가 실수였다. 차라리 천붕회 각 문파를 각개 격파했더라면 피해가 더 적었을지도 모른다.
“우선, 우리 북황련에서 대비해야 할 상황은 천붕십일천마가 세우는 세력입니다.”
“무슨 말이냐?”
위지천악을 비롯한 일행은 놀란 눈으로 제갈승후를 쳐다보았다. 금시초문이었던 탓이었다. 지금까지 정황으로 봐서, 독천쌍마는 소림의 멸문을 방치한 천붕회 소속 무인들을 단죄하고 다녔다.
개방 무인을 죽이고, 수많은 무인들 앞에서 팽가 가주인 팽월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짓밟았다. 팽월을 비롯한 팽가 가신들을 평신으로 만들었음은 물론이고 팽가 건물마저도 전부 불태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세력이라니.
“저는 그렇게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독천쌍마를 따르는 무인들은 개방을 비롯한 소림에서 도망쳤던 승려들, 그리고 하북팽가 무인들을 합치면 거의 천여 명에 달합니다. 그런데 독천쌍마는 그들의 수장을 죄인처럼 끌고 다니면서도 해산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을 데리고 어딘가에 정착한다면.......”
“으음!”
급기야 위지천악은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금과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강호상으로 숨어든 무당파 또한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무당파와 남궁세가까지 가세한다면 과거 천붕회보다 더 큰 세력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천붕회를 전부 합친 숫자보다는 적지만 그때는 각각 문파가 분산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부 하나로 합쳐진 상태. 그 파괴력은 천붕회를 능가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만 나서서 그들을 공격할 수 없지 않느냐?”
위지천악은 곤혹스런 얼굴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북황련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점입니다.”
제갈승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오십 년 전부터 천하제일인이라 알려진 천붕십일천마 다섯 명. 설령 그들과의 전쟁에서 이긴다 하더라도 북황련 또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될 것이고, 남천벌이나 마교에 어부지리를 안겨 주게 된다. 천붕십일천마를 공격하는 행위는 현 상황에서 최악의 수라 할 수 있다.
“최선의 방법은 합작입니다. 남천벌과 마교, 그리고 북황련이 합작하여 천붕십일천마를 부수고, 그 다음에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결하는 겁니다.”
“마교라........ 넌 사령계가 어떤 곳인 줄 아느냐?”
“죄송합니다. 사령계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제갈승후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이천 년 전, 세상의 지배자였다. 지저사령계에 가 보았으니까 잘 알겠구나. 그곳에서 살아온 자들이 바로 사령계다.”
“그럴 수가.......”
제갈승후는 경악한 얼굴로 위지천악을 쳐다보았다. 지저사령계는 결코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니었다. 햇빛조차 들지 않고 진으로 가로막힌 그곳에서 사람이 살았다니. 그것도 이천 년 전에 그들은 천하를 지배했다고 한다.
기절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제갈승후는 금방 냉정을 되찾았다.
“그럼 설득하기가 쉽지 않겠군요.”
“마교 교주가 지저사령계의 적통이라면........ 그래도 접촉은 해 봐야지. 악 가주가 가주시오. 물론 총사도 따라가고.”
“알겠습니다, 련주님!”
“오늘 회의는 여기서 마칩시다.”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위지천악은 손을 들어 가주들을 내보냈다.
“빌어먹을.......! 귀광두를 그냥 뒀더라면.”
수하들이 밖으로 나가자 위지천악의 입에서 나직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 또한 제갈승후와 같은 생각이었다. 귀광두를 건들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천오백여 명이 동시에 절을 올리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더구나 사방은 온통 눈 천지. 새하얀 눈 위로 수많은 점들이 일어섰다 엎드렸다를 반복하고 있다. 선두의 네 명으로부터 시작된 오체투지는 천오백 중인들로 이어져 물결치는 파도를 방불케 했다.
“그게 그렇게도 좋냐?”
북망산을 오르며 일휘는 소살우를 향해 물었다.
하북팽가에서부터 소살우의 벌어진 입은 닫힐 줄을 몰랐다. 사람 죽이는 칼이 무에 그리도 좋은지 시간만 나면 닦고 또 닦는다. 혹여 다른 사람이 만질라치면, 마치 먹이를 빼앗긴 개처럼 으르렁거리기 일쑤였다.
“날 주기 위해 그 험한 곳에서 가지고 나왔다고 하지 않았소. 그러니 좋을 수밖에.”
“그거 아까워서 어떻게 쓸래?”
황당한 얼굴로 일휘가 물었다.
“좋은 손 놔두고 왜 칼을 쓰오? 만년한철을 구해 상자를 만든 다음 집안에 잘 모셔 둘 거요.”
“미친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일휘는 아래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저것들은 뭐 하는 짓이래?”
쉬지 않고 절을 올리는 섯다와 모사를 보며 일휘는 물었다. 북망산에 도착하자마자 모사와 섯다는 물을 떠오더니 불상 앞에 놓고 그때부터 절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멀뚱멀뚱 쳐다보던 무인들이 이내 그들을 따랐고, 급기야 인마불거를 따르던 모든 이들이 모사와 섯다를 따라 절을 하는 상황으로 번졌다. 소림 멸문을 방치한 죄를 참회라도 하는 듯, 때로는 나무관세음보살을 읊으며 절을 올리는 중인들의 얼굴은 경건하기 그지없었다.
“삼천 배를 한다고 합디다. 삼천 배를 하면 원하는 소원을 들어 준다고 하더만.”
소살우는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저 짓을 삼천 번 한다고? 뒤에서 절하는 새끼들만 불쌍하게 됐네.”
일휘는 픽 웃었다. 섯다와 모사가 삼천 배를 올리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다. 고장 난 그것을 복구시켜 달라고 절을 올리고 있을 터인데, 그들을 두고 천오백 명이나 되는 이들이 덩달아 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저 두 놈은 지금 기분 째질 거야. 천오백 명이 같이 비는 거잖아.”
“큭! 그렇게 되는 건가?”
일휘를 따라 뒤를 돌아보았던 소사우가 픽 웃었다.
“남 걱정 할 일이 아니에요. 도련님들도 문제가 생겼을 걸요?”
그때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뒷짐을 지고 두 사람을 천천히 따르고 있던 주하연이었다.
“무슨 말입니까, 형수님?”
소살우는 뜨악한 얼굴로 주하연을 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제 말은 도련님들 또한 안심할 수 없다는 거예요. 지금 무공을 이용해서 걷고 있죠?”
“네!”
소살우와 일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지난 오십 년간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던 적이 있어요? 잠잘 때 빼고.”
“글쎄요....... 아마 없었던 것 같은데요?”
여전히 의문스런 얼굴로 소살우는 말했다. 내공 또는 무공, 이미 몸의 일부분이 되어 버렸고, 마음을 먹으면 절로 발휘된다. 앉거나 일어설 때, 걷거나 달릴 때,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내공을 발휘하여 해결하곤 한다.
심지어 변비가 걸렸을 때도 내공으로 해결을 봐 버렸으니 무슨 말이 필요하랴. 어쩌면 잠잘 때도 숙면을 취하기 위해 내공을 사용했는지도 모른다. 내공은 곧 생활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게 문제인 것처럼 주하연은 말을 하고 있다. 그녀가 의술을 익혔다는 말을 듣지 않았으면 무시했을 터이지만,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는 의원이라 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몸이란 말이에요, 원래 균형과 조화를 바탕으로 정상적인 상태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어요. 즉 더우면 옷을 벗게 되고 추우면 옷을 껴입게 되지요. 몸에 영양이 부족하면 절로 고기를 찾게 되고, 소채의 성분이 부족하면 절로 채소를 찾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도련님들은 그 모든 걸 내공으로 해결을 하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완전한 것 같지만, 그건 이미 인간의 몸이 아니라는 말과도 통하지요.”
“저기, 형수님! 좀 쉽게, 아주 편하게 설명을 해주시면 안 됩니까? 그러니까 우리도 저놈들처럼 고자라, 이 말입니까?”
깜짝 놀란 소살우는 형수가 이제 열일곱 살이란 사실도 잊고 소리를 질렀다. 다시 혼례를 올린다거나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하지 않는 게 아니고 능력이 없어 못한다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다. 자신이나 일휘도 후자에 속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러나 소살우기 받은 충격은 일휘에 비하면 충격이라 말할 수도 없었다. 백짓장처럼 하얗게 탈색되어 있는 일휘의 얼굴은 보기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아직은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고 조옥상도 그런 낌새를 차리지 못하고 있지만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다.
그런데 섯다나 모사처럼 고자가 되었을 거라니.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그의 귓전으로 더욱 충격적인 말이 들려왔다.
“그건 저보다는 도련님들이 더 잘 알겠지요.”
부르르!
일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랬다. 모사와 섯다를 놀렸지만 자신 또한 정상인지 아닌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지난 오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여자와 관계를 갖기 못했다는 것이다.
“형수님, 고칠 방법은.......”
일휘는 다급한 얼굴로 물었다.
“간단해요. 다시 인간의 몸으로 되돌려 놓는 수밖에 없어요. 도련님들은 순서가 바뀌었다고 볼 수 있어요. 내공은 몸을 보조하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도련님들은 몸이 내공을 다르고 있어요. 그걸 뒤집지 않으면.......”
“않으면?”
침을 꿀꺽 삼키며 두 사람은 주하연을 쳐다보았다.
“남은 세월을 고자로 살아야 해요. 물론 장가를 가지 않겠다면 별다른 문제는 없지만.”
“하하하! 형수님 저는 상관없습니다. 이 나이에 무슨. 어차피 혼자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잘됐지요, 뭐.”
과장되게 손사래를 치며 소살우는 크게 웃었다.
“그럼 일휘 도련님은 장가를 가야 한다는 말인데, 지금부터는 웬만하면 무공을 쓰지 말고 생활해 보세요. 우선은 여기 내려갈 때부턴 내공을 거두고 가 보세요.”
“알겠습니다, 형수님.”
“형님,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빨리 내려갑시다.”
“아냐, 임마. 형수님 말이 맞아. 그동안 우린 너무 내공에만 의존해서 살았어. 과하면 넘친다는 말을 잊은 거지. 난 걸어서 내려갈 테니까 먼저 가라.”
“나 혼자?”
“왜 혼자야, 임마. 석두도 있고 형수님도 있는데.”
“에이, 재미가 없잖아. 형님하고 같이 가지, 뭐.”
석두와 조우령을 흘끔 쳐다보던 소살우는 이내 내공을 풀고 일휘 곁으로 다가섰다.
“도대체 얼마만이야, 이거. 내 다리가 아닌 것 같네.”
기분이 이상한 듯 자꾸만 다리를 털며 소살우는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갔다.
“개새끼! 고자 되는 게 싫어서 그런다는 말은 죽어도 안 하네.”
소살우를 노려보며 일휘는 낮게 이죽거렸다.
“하연아, 무슨 말이야?”
뒤처져 따라오던 조우령이 주하연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일휘 도련님 말이 맞아요. 도련님들은 너무 과해서 문제가 생긴 거예요. 일상적으로 필요한 육체적인 기능이 거의 죽었다고 보면 돼요. 즉 내공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된 거지요.”
“그렇구나. 그런데 백산이란 그분은 어떻게 만났어?”
“백랑?”
“응! 그동안 저분들과 같이 오면서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 주로 대화 내용이 백산 그분에 대한 말밖에 없었어. 시근 만두를 좋아한다든가, 자식을 잃었던 일이며 애명환에 대한 이야기까지. 같이 오다 보니까 듣게 된 거야.”
주하연의 안색이 굳어지는 듯하자 조우령은 재빨리 말을 늘어놓았다.
“그랬어요? 하기야 오빠도 도련님들 얘기를 많이 했으니까. 그러니까 오빠를 만난 건.......”
이내 안도의 표정을 지은 주하연은 백산을 마난 시점부터 시작하여 그와 겪었던 일들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어느덧 이야기를 하다 보니 지저사령계 지하에 도착해 있었다.
한쪽 구석에서는 헤어짐을 아쉬워하며 일휘가 옥상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다른 사라들은 운무가 넘실대는 지저사령계 안쪽을 불안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불안해할 것 없어요. 수면 아래 보면 연꽃 문양으로 깊게 파인 흔적이 있어요. 그것만 따라가면 지저사령계에 도착할 거예요.”
수신가 일행에게 고함을 지른 주하연은 지저사령계 내부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고개를 끄덕인 조우령은 소살우를 보며 물었다. 몸을 고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다음도 문제였다. 주홍이 도움을 주겠다고 했지만 말을 들어보니 아직은 상황이 여의치 않은 듯했다.
“글쎄다. 낙양에 땅을 좀 사서 집을 짓는 건 어떻겠냐?”
“아니에요, 언니. 남경으로 찾아오셔서 광풍성(狂風城)을 찾으세요.”
“광풍성?”
주하연의 말에 소살우와 석두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무림황제 백산이 기거할 곳이에요.”
“형수님!”
두 사람은 경악한 얼굴로 주하연을 쳐다보았다. 하북팽가에서 백산을 소개할 때 무림황제란 말은 이미 했다. 하지만 그다지 의미를 두고 듣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는 정말로 군림을 준비하고 있었다.
“설마 팽가나 개방 무인들을 끌고 다니는 것도........”
“그래요. 제가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오빠랑 같이 그들에게 쫓길 때, 이 손으로 오빠의 피를 받았어요. 입에서 흘러나온 피를 받았고 가슴에서 흐르는 피를 받았어요. 그 때 결심했어요. 천살성의 서러운 운명을 끊어 버리겠다고. 광풍성은....... 강호 무림을 지배할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세상에! 정말이었군요.”
석두는 홀린 듯 중얼거렸다. 자신 또한 그런 생각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일시적인 충동으로 끝났을 뿐,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하연은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고 있다. 이제 열일곱 살 소녀가 자신들보다 훨씬 어른처럼 보였다.
“물론 사령계나 무극계가 얼마나 강할지 아직은 모릅니다. 하지만 광풍성은 해낼 겁니다. 끌고 가지 못한다면 강호를 새롭게 구성해서라도 그들을 지배하고 말 겁니다.”
“쿡! 좋습니다, 형수님. 한 번 했던 일인데 두 번은 못하겠습니까.”
석두와 소살우는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언니는 그만 들어가 보세요. 되도록 빨리 나오세요.”
“알았어, 동생.”
조우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연의 어머니인 조자령과는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하연을 보고 나니 그녀가 왜 차기 가주로 내정되었었는지 그 이유를 알 듯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옥상아, 그만 가자!”
소살우와 석두를 향해 고개를 숙인 조우령은 여전히 일휘에게 잡혀 있는 조옥상을 불렀다.
“네, 가주님!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일휘에게 인사를 건넨 조옥상은 빠르게 다가왔다. 잠시 후 두 사람의 신형은 운무 속으로 사라졌다.
“미친놈! 노망이 단단히 낫구먼.”
일휘를 쳐다보며 석두는 낮게 혀를 찼다. 녀석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조옥상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데 녀석은 아련한 눈으로 운무 속을 더듬고 있었다. 어이없다는 얼굴로 일휘를 쳐다보는 석두의 귓전으로 더욱 황당한 말이 들려왔다.
“석두야, 너도 제수씨를 떠나보낼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냐? 심장이 터질 정도로 아팠냐고! 나 따라갈까 보다.”
퍼억!
“에라, 이 개자식아! 따라가라! 따라가서 영원히 나오지 말고 지저사령계에서 처박혀 살아라, 이 도둑놈아!”
일휘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갈겨버린 석두는 주하연을 안고 몸을 날렸다.
“나도 쪽팔린 것 알아. 하지만....... 옥상아, 보고 싶다.”
호자 남은 일휘는 안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운무 속에서 그녀가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 같아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건강한 몸으로 다시 뵙겠다고 했다. 그때는 꼭 무공을 익히고 말겠다고 말하던 앙증맞은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안 올 거야?”
“옥상아, 빨리 와야 한다.”
석두의 고함소리가 드려오자 그제야 일휘는 몸을 날렸다.
‘가 봐야 절이나 하고 자빠졌을 텐데 괜히 지랄이야, 개자식.’
힐끔 위쪽을 쳐다보며 투덜거리던 일휘는 신경질적으로 바닥을 찼다.
그의 말대로였다. 모사와 섯다를 비롯한 인마불거를 따르는 모든 이들은 쉬지 않고 절을 하고 있었다.
“저것들은 뭐야?”
섯다 일행이 절을 하는 앞쪽, 마차 건너편에 무릎을 꿇고 있는 다섯 명을 발견한 일휘가 물었다.
“보면 모르오? 도복을 입었잖소.”
짜증스런 얼굴로 소살우가 말했다.
“무당파 새끼들이란 말이네?”
일휘의 입에서 나직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마차 건너편에서 불상을 향해 무릎을 꿇고 있는 자들은 백산을 찾아 나섰던, 무당파 장문인 현진자와 장로들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감니다
즐독 입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입니다
즐~~~감!
즐감합니다.
즐감하고 깁니다.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0^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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