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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56)
[벽력황 사진악]
얼마 만에 꿇어보는 무릎인지.
장문인이 되면서 무당 조사전에 무릎을 꿇었던 게 이십 년 전이다. 그 이후에는 단 한 번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무릎을 꿇었다. 마차 위에 실려 있는 초라한 불상. 그리고 말이 되어 마차를 끌고 있는 귀광두와 십팔나한. 그들은 무당파와 천붕회에서 황실의 먹이로 던져 준 소림사였다.
“너희들은 왜 왔느냐?
섯다 일행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백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용서를 구하기 위해 왔습니다. 제 한 몸 살겠다고 소림의 멸문을 방치했습니다.”
“용서라........ 우리 소림이 무슨 힘이 있어 너희 무당을 용서하겠느냐. 우리 소림에 남은 거라곤 네 눈앞에 보이는 불상밖에 없다. 돌아가라! 가서 과거처럼 살아남아라.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을 짐승들의 먹이로 던져 주면서 그렇게 살아남으란 말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참으로 다변한 인간들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살아남기 위해 소림을 강호 공적으로 선포했던 자들이 아닌가.
그랬던 자들이 하후장설이 죽었다 하니 스스로 나타나고 있다. 저들을 단죄해야 하는데, 광혈지옥비를 뽑아 들고 없애야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없다.
‘나쁜 놈들. 나에게 녹옥불장을 맡긴 이유가 이 때문이었구나.’
멀리 요정의 얼굴이 보이는 듯했다. 과거 마불성승이 강호에 자비를 베풀라고 했던 말보다 녀석들이 맡기고 간 녹옥불장의 무게가 더 컸다. 녹옥불장을 들었다 함은 소림사 방장을 의미한다. 살행보다는 자비를 근간으로 소림을 세워 달라는 말이다.
“만일 나에게 이 녹옥불장이 없었다면 너희무당을 멸문시키고 말았을 것이다. 용서를 구하고 싶다고 했더냐? 그럼 저들처럼 불상을 따라라. 목에 밧줄을 걸고, 소림을 외면했던 죄를 참회하라. 내가 줄 수 있는 유일한 자비다. 이번에도 역시 선택은 너희들 몫이다.”
차가운 얼굴로 말을 마친 백산은 몸을 돌렸다.
막 삼천 배를 끝냈는지 대부분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그 자리에 너부러져 있다.
“떠날 사람은 잡지 않겠다. 하지만 따르고자 하는 자들은 일어나라. 일어나서 마차를 따라라!”
나직했지만 백산의 목소리는 천오백 무인들 귓속으로 선명하게 파고들었다.
“광자야, 불경을 외라!”
“알겠습니다, 방장님!”
반야심경을 읊는 십팔나한의 목소리가 북망산을 타고 울려 퍼졌다. 그 소리가 신호탄이 되었을까. 멈췄던 눈이 다시 흩뿌리기 시작했다. 점점이 떨어지던 눈발은 어느새 폭설로 변했고, 그 사이를 뚫고 초라한 불상을 실은 인마불거는 안휘성으로 향했다.
바로 그 시각.
안휘성 남궁세가의 신수각은 침중한 기운이 가득했다.
연일 들려오는 소문과 남궁미령이 가져온 소식 때문이었다.
“어떻게 할 거냐?”
복잡한 얼굴로 남궁미령은 남궁무를 향해 물었다.
하북팽가를 단죄하는 그들의 모습은 가히 충격이었다. 팽가의 불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부랴부랴 남궁세가로 왔다. 다른 면에 있어서 순한 양이고, 자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랐던 남편이다.
하지만 백산 사숙과 다른 형제들에 대한 일에서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가장 섭섭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곁에서 광풍대원을 지켜보았기에 뭐라 말할 수가 없다. 그랬던 그가 형제들과 함께 남궁세가로 길을 잡았다.
“누님 생각을 말해 주십시오.”
곤혹스런 얼굴로 남궁무는 남궁미령을 쳐다보았다.
비록 남궁세가가 잘못하기는 했지만 당시 상황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오히려 모든 일의 발단은 귀광두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소림은 멸문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귀광두의 신분이 묵안혈마 백산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머리를 숙이고 용서를 빌 수는 없다.
“네가 용서를 비는 수밖에 없다. 팽 대협은 스스로 팔을 자르고 팽가를 불태웠다.”
남궁미령은 억양 없이 말했다. 아직도 그때의 광경이 눈에 선하다. 팽월의 팔에 분수처럼 피가 솟구쳐 나오고, 백여 채가 넘는 하북팽가 건물이 타오르고 있음에도 그들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
만일 팽월이 반항했다면 전부 몰살시켰으리라는 건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만큼 그들의 분노는 컸다. 아니, 백산 사숙에 대한 사랑이라 해야 했다.
“그리고 과거를 내다 버린 건 그분들이 아니고 우리 천붕회였다.
그녀가 남편을 말리지 못하고, 도련님들을 말리지 못하는 이유였다.
광혈지옥비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몰라서 그랬다며 변명의 여지라도 있다. 하지만 광혈지옥비를 뽑아든 백산 사숙은 수천 명의 무인들을 도륙했다. 그 무인들 속에 남궁세가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를 버린 건 남궁세가를 비롯한 천붕회였다.
“일대 육대신마가 죽었습니다. 부가주가 죽었습니다. 남궁세가 무인 백오십 명이 죽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용서를 구하라고 하십니까? 죽음이 두려워서요?”
“말을 이상하게 하는구나. 가만있는 그를 죽이라고 명령한 사람은 너였다! 가만있는 그를 쫓아간 사람은 남궁세가 무인들이었다. 그들을 죽인 사람은 사숙이 아니라 바로 너였다는 걸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이냐?”
남궁미령의 입에서 추상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누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북방으로 간 것 아닙니까?”
“그래, 알고 있었다. 아니, 내가 말하면 그들이 들어 줄 거라 믿었다. 그런데 남궁세가를 봐 달라고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소림사 승려 칠백 명이 죽고 삼천의 무인이 사숙을 공격했다. 그 선봉에 섰던 자들은 너와 팽월, 호연작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결국 남궁무는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그녀의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 묵안혈마를 사칭한다며 그를 무림공적으로 선포하는 데 앞장섰던 자신이다.
그를 잡기 위해 육대산마를 파견했고, 이백 무인을 소림사로 보냈다. 하지만 그때의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가솔들을 출병시키지 않았더라면 남궁세가도 소림사처럼 되었을 것이 아닌가.
“너희들은 충분히 시간을 끌었어야 했다. 그런데 기다렸다는 듯 사숙을 무림공적으로 선포했어. 나를 비롯한 도련님들이 화를 내는 건 그 부분이다.”
남궁무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남궁미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이상 자신이 해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형님이 되어 버린 주하연의 말처럼 선택은 가주인 남궁무의 몫일 수밖에 없다. 백산 사숙을 공격하기로 결정을 내렸을 때처럼.
“신중하게 생각해라. 너희가 반역자라고 잡으러 갔던 주홍이 돌아왔다. 아마 머잖아 그는 황제로 등극하게 될 거다.”
“제기랄!”
남궁무의 입에서 나직한 욕설이 흘러나왔다. 사면초가, 지금과 가은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천붕십일천마의 분노를 잠재울 방법도 없고 황제로 등극할 주홍을 피할 수도 없다. 어디에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어디 가십니까?”
밖으로 나가는 남궁미령을 향해 소리쳤다. 그나마 지금 순간에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남궁미령이다. 그런데 그녀마저 가문을 떠나려 하고 있다.
“광살검(狂殺劍)과 구혼도(九魂刀)를 가지러 독령곡에 간다!”
굳은 얼굴로 남궁미령은 말했다. 오십 년 전에 땅속으로 묻었던 석두와 일휘의 무기. 구혼도와 광살검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다. 먼저 간 형제들의 이름이 적혀 있고, 먼저 간 동생들의 혼이 담겨 있다.
영원히 쓰지 않을 거라며 땅속에 묻었던 그것들을 그들은 다시 들고자 한다. 강호를 유린하고 말겠다는 의지다. 일휘 도련님이 가지러 간다고 했을 때 말리고 대신 왔다. 남궁세가에 들르기 위해서였다.
“다시 한 번 말하마. 생각하고 또 생각해라.”
그 말을 끝으로 남궁미령은 세가 밖으로 몸을 날렸다.
“아버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말없이 듣고 있던 남궁창이 남궁무를 불렀다.
“말해라!”
“전....... 구차한 삶보다는 명예를 선택하겠습니다. 목에 밧줄을 걸고 개처럼 끌려가진 않을 겁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남궁창은 확고하게 말했다. 남궁세가는 결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 황실에서 원했기에 그렇게 했고, 잘못을 따지려면 황실에 대고 해야 한다. 명나라 백성으로 황실을 따랐던 일이 무에 그리 잘못이란 말인가.
오히려 많은 세가인을 잃은 남궁세가가 더 큰소리를 쳐야 할 입장이다. 그런데 죽음이 두려워 머리를 숙이다니.
“저를 비롯한 창궁위(蒼穹衛)는 대항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천붕십일천마다. 오늘 남궁세가를 있게 해 준 장본인들이란 말이다. 더구나 주홍이 황제로 등극한다면 우리 남궁세가는........”
남궁무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
“좀 더 생각을 해보자.”
결국 손을 들어 아들과 가신들을 내보냈다. 명예와 남궁세가를 동시에 지키는 방법은 현 상황으로서는 없었다. 둘 중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 명예를 포기하고 개가 되든지 아니면 대항을 하든지.
“가주님, 손님 오셨습니다.”
“손님?”
남궁무는 의아한 얼굴로 혼잣말처럼 물었다. 자신을 찾아올 사람도 없을뿐더러 시비에게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손님이라니.
“여기 있습니다.”
시비가 내민 첩지를 받아 든 남궁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회천검(回天劍) 담무광(潭武光)이란 이름자 앞에 쓰인 칠파연합맹주라는 글 때문이었다. 화산파를 비롯한 칠파가 하나로 뭉쳐 칠파연합을 만들었다는 말은 들었고, 그곳의 맹주가 회천검이란 말도 들었다.
그런데 그가 남궁세가를 방문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남궁세가나 하북팽가는 그들의 원수가 아니던가.
“모셔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남궁무는 시비를 향해 말했다.
“처음 뵙습니다. 담무광입니다.”
“소생은 화산파 문주 가운회(可雲回)입니다.”
“소생은 종남파 문주 건사준(乾士俊)입니다.”
안으로 들어온 삼 인은 남궁무를 향해 포권을 취하며 각자 소개를 했다.
“앉으십시오!”
세 사람을 찬찬히 살피던 남궁무는 자리를 권했다.
“요즈음 심려가 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차를 따라 준 시비가 밖으로 나가자 담무광은 넌지시 말을 꺼냈다.
“무슨 말씀이신지.......?”
찻잔을 들어 올리던 남궁무는 흠칫 손을 멈추고 담무광을 쳐다보았다. 오십대 정도 되었을까. 왜소한 체격과 날카로운 눈매는 심기가 매우 깊은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내부의 기가 자연스럽게 발산되고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강기 경지 이상을 성취한 고수임에 틀림없었다.
“천붕(天崩)을 말하는 겁니다. 팽가 가주를 비롯한 개방 장로, 그리고 무당파 수뇌들이 목에 밧줄을 걸고 개처럼 끌려가고 있답니다.”
“알고 있소이다!”
남궁무는 퉁명스레 말을 받았다.
인마불거에 남궁세가를 제외한 천붕회 소속 문파들이 전부 모여 들고 있다. 아니, 죄인이 되어 끌려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지는 다름 아닌 남궁세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우리 칠파연합맹이 남궁세가를 돕겠습니다.”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롭니다. 오십 년 전을 잊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칠파는 남궁세가와 팽가를 봉문시킨 적이 있었고, 남궁세가와 팽가는 오십 년 전에 우리에게 복수를 했습니다. 한 번씩 주고받았으니 은원을 잊자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만 그들은 오십 년 전부터 천하제일인이었소이다.”
담무광을 쳐다보며 남궁무는 말했다. 복수의 고리를 그만 끊자고 하는 말이다. 물론 남궁세가 역시 과거의 숙원을 끄집어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오히려 그들이 재기한다면 도와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천붕십일천마를 공격하겠다고 한다. 무슨 의도로 마을 꺼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오. 인마불거를 따르는 이들이 급속하게 천붕십일천마의 세력으로 변하고 있소이다. 방치하게 되면 우린 영원히 복수할 기회를 잃게 되오. 그래서 나선 것뿐이오. 더구나 그들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소이다.”
“설마....... 무공이 없는 이들을 공격하겠다는 말입니까?”
남궁무는 경악한 얼굴로 담무광을 쳐다보았다. 인마불거를 따르는 이들은 무인만 있는 게 아니다. 팽가를 떠난 이들은 아이부터 시작하여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을 약점으로 삼아 공격을 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전쟁입니다, 가주. 우린 정의니 뭐니 하는 그따위를 위해 천주산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과 같이 있는 자들은 전부 적일뿐입니다. 적을 칠 때는 신분이나 나이 따위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담무광은 차분하게 말했다. 어린아이나 노약자를 끌고 전쟁터로 들어온 이들이 잘못한 것이지 그들을 공격한 자를 비난할 수가 없다. 다치는 게 싫으면 항복을 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런데 왜 남궁세가를 끌어들이려 하십니까, 칠파연합맹만으로 준비가 된 것 같은데?”
담무광을 똑바로 쳐다보며 남궁무는 물었다. 자신감에 차 있는 삼 인의 얼굴을 보며 굳이 남궁세가까지 찾아올 이유가 있나 싶을 정도다.
“남궁세가에서 지원을 해준다면 일이 더 수월해지기 때문입니다. 남궁세가는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어서 좋고, 우린 대단한 방수를 얻게 되는 거지요.”
한동안 담무광을 쳐다보던 남궁무는 나지막이 말했다.
“알겠소이다.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그들이 도착하려면 보름 남았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담무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남궁무를 향해 포권을 취한 담무광 일행은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남궁세가 최심처에서 남궁무의 외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가의 전 가신들은 신수각으로 들라!”
어느 결에 거대 세력으로 성장해 버린 인마불거.
그들에 대한 논의는 남궁세가에서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개파대전 준비에 한창인 운남 사령계에서도 인마불거와 천붕십일천마에 대한 의견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귀하들은 천붕십일천마를 없애잔 말인데...... 왜 내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네 사람을 쳐다보며 뇌우는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북황련과 남천벌에서 사자가 왔다는 말을 들을 때부터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하지만 뇌우는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아니, 뒤통수를 쳐서 승리를 얻어낸다는 게 체질에 맞지 않았던 탓이다.
“그게.......”
제갈승후는 말끝을 흐렸다. 할 말이 없었다. 백성에 들어서면서 얼마나 놀랐던가. 북황련도 작은 세력이 아니다. 하지만 백성에 비하면 북황련은 중소 문파 수준이라 해야 했다. 물론 외적인 규모로 한 문파를 판단한다는 건 무리가 있지만 백성이 주는 첫인상은 위압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만큼 백성의 규모는 컸다.
그러나 규모만으로 강호를 정복할 수는 없는 일.
표정을 추스른 제갈승후는 뇌우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상대는 다른 자들도 아니고 천붕십일천마 다섯 명입니다. 그들을 상대로 큰소리칠 만한 세력이 강호상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소이다.”
“쿡!”
자존심이 상했던 탓일까. 뇌우의 얼굴 근육이 상하로 파르르 떨렸다.
“그래서 떼거리로 달려가 천붕십일천마의 뒤통수를 까 버리자, 이 말인가? 이거 실망이군.”
뇌우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만인이 인정하는 천하제일인이나 강호 제일 세력은 결코 비겁함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정당하게 상대를 물리치고 얻어야만 영광과 함께 온다. 수백 년 전통을 가진 구파일방이 곧 강호로 인정받았던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니었던가.
“아니외다, 마존. 그들은 잊혀진 전설일 뿐이외다. 잊혀진 전설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없기에 드리는 말입니다. 북황련과 사령계, 그리고 남천벌 세 곳만의 전쟁으로 강호의 주인을 가리자는 말입니다.”
“북황련은 살아남을 자신이 있나 보군.”
“넓은 땅보다는 기름진 옥토를 가진 사람이 부자라 했습니다. 우리 북황련은 지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재미있군. 그러 자네들 편할 대로 하게. 난 관여하지 않을 거네.”
“마존, 지금 마존의 발언은 북황련과 남천벌의 합작을 부추기는 말이라는 걸 아십니까?”
“그것도 괜찮겠지. 이미 경험이 있는데 뭘 방설이나. 하나로 합친 다음 천붕십일천마를 깨트려 보게. 그럼 그대들을 상대로 인정해 주겠네. 손님 가신다!”
자리에서 일어난 뇌우는 밖을 향해 낮게 소리쳤다.
“마존, 오늘 일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외다.”
“후회라....... 자네를 보고 있으면 위지천악은 정말로 바보라는 생각이 들어. 부하의 능력조차 파악하지 못한 자가 어떻게 한 문파의 수장이 되었는지. 하기야 제 힘보다는 천붕십일천마 힘이 더 컸겠지만.”
살피듯 제갈승후를 쳐다보던 뇌우는 몸을 돌렸다.
순간 제갈승후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뇌우의 무공 때문이었다. 거의 온종일 같이 생활하디시피 한 위지천악조차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무공 정도를 뇌우는 한눈에 간파한 것이다. 적어도 위지천악보다는 몇 단계 위의 고수라는 의미였다.
망연한 눈으로 뇌우의 등을 쳐다보는 그의 귓전으로 더욱 충격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가서 위지천악과 남효운에게 전해라. 우리 사령계와 비슷한 수준에 오른 다음 협상을 하러 오라고 말이다.”
“반드시....... 전하겠소이다. 반드시!”
이를 악문 제갈승후는 몸을 돌렸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지금처럼 치욕을 당할 줄은 몰랐다. 적어도 강호 삼강의 한 곳으로 대우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사령계는 북황련이나 남천벌을 상대로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밖으로 나온 제갈승후는 남천벌 대표로 온 성천계주 기대음(基大陰)을 향해 물었다.
“북천황은 뭐라 하셨소?”
기대음 역시 기분이 상했는지, 잔뜩 붉어진 얼굴로 백성을 노려보며 물었다.
“사령계에서 거절하면 두 문파 합동으로 처리하자고 했습니다. 뇌우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우리 말고도 인마불거를 노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친 다음을 노린다면 별반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봅니다.”
“무슨 말인가?”
기대음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강호상에 그럴 만한 세력이 있다는 사실도 금시초문이거늘, 인마불거를 공격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칠파가 나섰습니다. 그들이라면 인마불거의 세력을 충분히 약화시킬 수 있을 겁니다.”
“칠파라....... 그럼 굳이 마교가 필요 없지. 자넨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나?”
“북황련 눈을 벗어날 곳은 없습니다.”
기대음의 시선을 피하며 제갈승후는 말했다.
“비밀이란 말이군. 좋네, 굳이 알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그들이 남궁세가에 도착하기 전에 끝장을 보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군.”
고개를 끄덕인 기대음은 힘차가 지면을 찼다.
‘그렇소이다, 계주. 남궁세가가 있는 안휘성은 전쟁터가 될 것이오. 오십 년간 칼을 갈았던 칠파와 북황련 남천벌의 이전투구가 벌어지는 전장 말이오.’
“가십시아, 악 가주님!”
악봉을 향해 소리친 제갈승후는 기대음을 쫓아 몸을 날렸다.
거의 이천에 달하는 엄청난 인원의 이동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관에서 간섭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식사 문제부터 시작하여 잠자리까지, 난관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마차를 끄는 백산과 섯다 일행은 뒤따른 자들을 향해 어떤 간섭도 하지 않고 관심도 두지 않았다. 마치 싫으면 떠나라는 듯, 안휘성을 향해 말없이 인마불거를 끌 뿐이었다. 그나마 각 문파의 수뇌들을 향해 말을 건네고 있는 사람은 주하연과 설련이 유일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차 꽁무니에 붙어 목에 밧줄을 걸고 가는 팽월과 진청일, 그리고 현진자 곁에서 하루 종일 떠나지 않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쫑알거렸다.
“여기서 쉬었다 간다!”
널따란 벌판이 나오자 섯다는 뒤편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일행이 머무는 곳은 대별산맥 초입인 송자관이었다. 송자관에서 대별산맥을 따라 남동으로 이동하면 남궁세가가 있는 천주산에 도착하게 된다.
“이번에도 한 세 시진 정도는 쉴 거예요. 지금부터 여러분들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합니다.”
섯다의 고함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주하연은 일행을 향해 말했다.
“군주 마마!”
팽월을 비롯한 일행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수하들을 풀어 죽이려 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듯 살아날 방도를 알려 주고 있다. 절을 하며 쉴 동안 음식 장만은 물론이고 식사 준비를 시킨다. 심지어 관아가 나오면 그곳에 들러 군용으로 준비된 이부자리 등을 가져와 세가인들에게 나눠 주었다.
복수를 해도 시원찮은 판에 그녀는 은혜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제가 했던 말을 제자들에게 반드시 주지시키세요. 그럴 리가 없겠지만 대비는 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군주 마마!”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일행은 밧줄을 벗고 각 문파로 흩어졌다.
“형수, 어디서 그런 걸 다 배웠습니까?”
얼굴 가득 웃음기를 머금은 소살우가 주하연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볼수록 놀랍다는 생각뿐이다.
이천 명이나 되는 대병력이 그녀의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절반 정도 인원은 섯다와 모사를 따라 삼천 배를 올리고, 다른 이들은 밤을 날 준비를 한다. 지난 한 달 동안 그들을 그렇게 훈련시킨 사람이 그녀였다. 요즈음은 이상한 진법까지 전수시키고 있는 듯해, 무슨 목적으로 전수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천자문만 익힌 도련님 할아버지는 말해 줘도 몰라요.”
“컥! 형수, 도련님이면 도련님이지 도련님할아버지는 또 뭡니까? 이 얼굴이 할아버지로 보인단 말입니까?”
사례 걸린 듯 밭은기침을 내뱉은 소살우는 제 얼굴을 가리키며 거품을 물었다.
“그리고 제가 천자문만 익힌 건 또 어떻게 하였습니까?”
“저기 백랑하고 같은 수준이라고 하던데, 아니었어요?”
“무슨 소립니까, 형수? 삼 년 동안 대가리 터지게 공부해서 간신히 익힌 저 돌대가리하고, 이 년 만에 익힌 이 머리하고 어떻게 비교가 됩니까? 저건 말 그대로 돌입니다. 여기 있는 딱딱한 돌멩이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천자문을 익힐 때 한 달 정도 걸리는데요?”
“에이, 그것들은 전부 천재 아니면 정신병자겠지요. 어떻게 천 자나 되는 걸 외우는데 한 달밖에 안 걸립니까?”
“그럼 저도 정신병자겠네요?”
“저런 인간을 남편으로 들였다는 것 자체가 정신병자만이 할 수 있다는 걸 몰랐습니까?”
“살우 도련님, 자꾸 놀리면 다 말해 버릴 겁니다. 오십이 넘어서 상사병 나 가지고....... 우읍!”
“아이고, 형수님! 뱃속에 애기 놀랍니다. 살살, 살살 이야기하십시오.”
주하연의 입을 틀어막으며 소살우는 다급한 얼굴로 말했다.
“알았으니까 이 손 좀 치우세요. 씻지도 않고. 그보다는 어디서 탁자나 하나 구해 오세요. 술도 좀 필요할 것 같아요.”
“탁자요?”
소살우는 놀란 얼굴로 주하연을 보았다. 탁자와 술, 분명 손님이 온다는 소리다.
“누가 오기로 했습니까?”
“수어 있던 거물이 오기로 했으니까 준비나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형수님!”
고개를 끄덕인 소살우는 허공을 흘끔 응시했다.
움찔!
소살우의 시선을 받은 유몽은 재빨리 몸을 이동하며 기척을 숨겼다. 하지만 그의 실력으로는 소살우의 이목을 벗어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유몽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돌린 소살우는 낮게 말했다.
“살수야, 들었냐? 잘 마른 걸로 구해 와라. 탁자로 쓰고 난 다음에는 불쏘시개로 쓸 수 있도록.”
“끄응! 전 묵안혈마 백산을 주공으로 모셨지........”
불쑥 고개를 내민 유몽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무공 배우기 싫어?”
“그 말 들은 지 보름이 지났습니다.”
유몽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보름 전에 들었던 말이다. 무공을 가르쳐 준다는 말에 혹하여 그의 심부름을 했었다. 그런데 그때부터 물을 떠오는 것부터 시작하여 사사건건 ‘살수야’를 외치고 있다.
“살수야, 사부로부터 무공을 배웠으니까 너도 잘 알겠구나. 네가 무공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무엇부터 했지?”
“그거야 물 긷고 장박 패고 밥하고........”
“그러다 잘못하면 뒈지게 맞았지?”
“다녀오겠습니다.”
소살우 주먹에 붉은 기운이 어리자 유몽은 재빨리 허공으로 숨어들며 몸을 날렸다. 하지만 유몽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춰서야 했다. 중얼거리듯 내뱉은 주하연의 말 때문이었다.
“도련님 운동시켜 드리려고 일부러 했던 말인데.”
“살수야, 같이 가자!”
주하연의 말이 들리자마자 소살우는 유몽을 부르며 그가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잠시 후.
숲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커다란 바위 하나를 들쳐 메고 마차가 있는 곳으로 왔다.
“도련님, 나무를 해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낑낑거리며 바위를 메고 오는 소살우를 보며 주하연은 안타까운 얼굴로 물었다. 뒤에서 유몽이 받쳐 주고는 있지만 바위 무게의 상당 부분이 내공을 운용하지 않는 소살우에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무가 쓸 만한 것들이 없어서요. 그래서 이걸로 탁자를 만들려고 합니다.”
마차 한편으로 바위를 내던지고 소살우는 거친 숨을 골랐다.
“형님이 준 칼도 시험해 보고 싶고.”
싱긋 미소를 지으며 날이면 날마다 닦았던 혈월을 뽑아 들었다.
“살수야!”
“네, 사부님!”
“이 혈월이 말이다. 저기 있는, 그러니까 형님이 지저사령계라는 엄청난 곳에 일부러 들어가서 구해 왔다는 것 아니냐. 네가 봐도 멋있는 것 같지 않냐?”
“대단한 칼이 분명합니다. 수백 명의 피를 먹은 칼인데 오죽하겠습니까. 하지만 이것과 비교해서는 조금 모자란다고 봅니다. 참! 말씀 안 드렸지요? 주공이 선물해 준 칼인데 말입니다, 이건 철류라고 부릅니다.”
유몽 또한 지지 않고 등에 메고 있던 철류를 뽑았다.
“이놈에게 피를 먹인 놈들을 보자면, 천음양씨세가 가주라 했던 양호상 놈이 있었고, 팽가의 팽운산의 숨통을 끊었고, 고웅선이란 놈의 목을 잘랐고, 북황련 신병대를 지휘했던 놈하고, 남천벌의 어떤 놈, 주로 대가리 값이 나가는 놈들로만 없앴습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야, 새꺄!”
소살우의 고함 소리를 듣지 못한 듯, 유몽은 바위를 향해 철류를 횡으로 그어 버렸다.
“어떻습니까, 사부님? 이 정도면 혈월 못지않게 훌륭한 검이지 않습니까?”
“너, 이 새끼! 노망난 것 맞지?”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찬물도 위아래가 있지, 어찌 사부님을 놔두고 제가 먼저 노망이 나겠습니까? 절대 그럴 리가 없습........ 이크!”
붉은 광채가 벼락처럼 떨어지자 질겁한 유몽은 재빨리 몸을 날려 월영은둔술을 펼쳤다.
“끄아악!”
허공으로 거의 몸을 숨겼던 유몽은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미처 감추지 못했던 엉덩이로 기다란 물체가 사정없이 박혀 든 것이었다.
“꼬리가 길면 잡히게 되어 있어, 자식아.”
일순간 바닥을 찬 소살우는 오른쪽 다리를 번쩍 들어 올리며 유몽을 향해 날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항문에 그걸 꼽는 사람이 어디 있습....... 크아악!”
“피해라! 내 발을 피하기만 해도 너는 엄청난 무공을 익히게 된다. 아니, 제대로 피하는 것만 배워도 늙어서 죽기 전까지는 객사할 일 절대 없단 말이다!”
붉은 광채를 뿌리는 소살우의 양발이 정신없이 허공을 강타했다. 그럴 때마다 유몽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터졌다.
“비명 지를 시간 있으면 발의 움직임을 살펴라. 관절에 의해 움직이는 다리는 한계가 있다. 그 경로를 길게 이어 놓은 것이 검이고 도이고 창이다.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게 초식이란 말이다!”
“제길! 어째 주공보다 더 해.”
연신 비명을 지르면서도 유몽은 발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했다. 관절의 움직임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했다. 관절의 움직임은 두 가지다. 무릎이 굽혀지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비명을 지를 사이가 없었다. 오른발과 왼발이 올라오는 속도는 눈으로 좇기도 힘들었다.
“철이 좀 들었나 했더니 아직 아니구먼!”
그 참에 먼 곳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소살우의 발을 살피던 유몽은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분명 소리는 바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왔다. 하지만 허허벌판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엄청난 무공의 소유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의미였다.
“도련님, 제가 기다리던 사람이에요. 그러니 정중하게 맞아 주세요. 백랑도 이쪽으로 오시고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보던 주하연은 호들갑을 떨었다. 파면신개를 통해 행적을 알게 된 사람. 그를 초대하기는 했지만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정말 그가 나타난 것이다.
잠시 후 일행의 시야에 이편으로 다가오는 열 명의 무인들이 잡혔다. 뒷짐을 진 채 그들은 산책하듯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초상비와 허공답보를 동시에 구사하는 고수들이라니.”
유몽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동안 천하제일인으로 불리는 천붕십일천마를 따라다녔지만 무공을 펼치는 걸 별로 본 적이 없다. 아니, 분명히 두 눈으로 보기는 했다. 패황이라 불리는 팽월을 복날 개 잡듯 두드려 팼다.
하지만 그건 구타일 뿐 무공이라 볼 수도 없었다. 천붕십일천마가 펼친 무공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무공을 사용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통에 그들이 강자라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 다가오는 자들은 아니었다. 물론 초상비 경공은 자시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저들처럼 산책하듯 느긋하게 펼치지는 못한다. 허공을 평지처럼 걷는다는 허공답보의 경공술이 가미되어야만 저런 상황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고수네요. 그럼 곤란한데.”
주하연 또한 유몽과 같은 생각이라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상대가 너무 거물이란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그들의 무공은 그만큼 경이로웠다. 열 명의 인물이 마차 앞으로 내려섰으나 조그마한 파공성조차 들리지 않았다.
“허허! 사람을 초대했으면 자리라도 권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 죄송합니다. 제가 총채주를 초대한 장본인입니다. 주하연이라고 합니다.”
화들짝 놀란 주하연은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오! 그대가 봉선군주였구먼. 다쇠불알 그 친구는 무슨 여복이 그리도 많은지.”
“헤엑!”
주하연은 경악한 얼굴로 상대를 쳐다보았다. 복건성 일대의 개방을 장악한 파면신개로부터 얼마 전 놀라운 소식이 전해져 왔다. 그동안 신비에 쌓여 있던 녹림수로채가 드디어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사령계 개파대전에 초청을 받은 녹림수로채에서 총채주가 직접 강호로 나섰다는 것이었다.
부랴부랴 파면신개에게 소식을 보내 천붕십일천마 이름으로 그를 초대했고 허락을 받아냈다. 그런데 도착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라니. 하지만 그녀의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니미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별호인 줄 알면서. 약초나 파먹고 살 일이지 왜 나왔어”
십팔나한과 같이 있던 백산이 엉덩이를 털며 말했다. 그의 얼굴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오십 년 전 무욕인(無慾人)들과 함께 강호를 떠났던 인물. 마군자(魔君子)라 불렸던 사진악이 바로 그였다.
“왜는, 광혈지옥비를 휘두르는 작자가 나타났다고 해서 나왔지. 그런데 정말인가 보네? 독종이라 그런지 저승에서도 받아 주지 않았나 보구먼.”
사진악 역시 백산과 다르지 않았다. 가슴까지 내려온 수염을 부르르 떨며 백산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한때는 연적이었던 사람. 결국 그에게 냉추렴을 빼앗기고 말았다. 냉추렴을 지켜주지 못했던 그를 원망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와 같이 자결을 택했다고 했을 때, 백산에 대한 원망을 접었다. 자신은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는 분이셨어요?”
백산 곁으로 다가온 주하연은 속삭이듯 물었다. 녹림수로채를 광풍성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그를 초청했으나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이미 아는 사이였다. 반말을 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
“내가 산적 놈을 어떻게 알아? 오다가다 얼굴 한 번 본 게 전분데.”
“나도 마찬가집니다, 제수씨. 저런 어린애를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저기 눈 작은 친구도 그렇고, 팔 병신, 다리병신, 검둥이 두 마리는 정상인이 됐나 보구먼.”
“에라, 이 개자식아! 죽고 싶으면 뭔 짓을 못할까!”
듣고 있던 소살우가 희번덕 눈을 치뜨며 고함을 질렀다.
“그럼 병신이지. 차려진 밥상을 마다하고 오십 년 지난 이제 와서 지랄을 떨고 있는데, 그것들을 병신이라 부르지 뭐로 불러?”
“너도 산으로 숨었잖아, 새꺄!”
“그럼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긴 놈이 산으로 숨지 어디로 수어? 그만 쳐다보고 이리 와서 앉게. 제수씨고 이쪽으로 오십시오. 초대장을 보낸 분이 멍하니 서 있으면 어쩝니까?”
“네, 네. 이게 어찌된 일인지.”
황망한 얼굴로 주하연은 백산에게 이끌려 사진악 곁으로 다가갔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어. 사진악 저놈은 인간성이 괜찮아서 우리 사이에 끼워 준 것뿐이야. 원하는 게 있으면 마음껏 말해도 대. 더구나 저 자식 부하 중의 하나인 회하채 놈들이 남경왕부를 공격했잖아. 하연에게 아주 큰 약점을 잡힌 놈이라고.”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저분도 소개시켜 줘야지.”
“아! 이름은 설련. 하연이 형님이다. 천마심공을 익혔고.”
“천마심공? 결국 자네에게 주었군.”
일순 사진악의 눈이 아련하게 변했다. 철목승, 비록 상급자였지만 마음속의 영원한 스승이다. 당신이 천마심공을 전수해 주겠다고 했을 때 거절했다. 익혀낼 자신도 없었거니와 벽력혼원황(霹靂混元荒)을 다듬는 데도 시간이 부족했던 탓이었다.
“죽지 못하게 하려고 날 줬어. 누군가에게 천마심공을 전수해 주려면 살아남아야 가능하니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으니까 그분이 제대로 된 선택을 한 거구만.”
“그렇게 된 건가?”
“여긴 내 제자들이네. 이 녀석은 사풍도 거령이고 여긴 독인마검 풍신웅, 이 아이는 광혈마도 마금성이고, 저 녀석은 천수 강재용일세. 그리고 저 아이는........”
“그들의 별호를 그대로 물려주었구나.”
사진악의 제자들을 찬찬히 쳐다보며 백산은 말했다. 그들의 별호와 무기는 과거 무욕인들이 사용했던 그대로였다. 광사 초상의 사풍도가 있고, 반동의 광혈마도가 있고, 거이산의 독인마검이 있다. 사진악이 제자라 소개한 저들은 마지막 남은 무욕인이라 해야 했다. 무공을 익히는 행위에서 인생의 낙을 찾았던 사람들.
“그분들에게 해줄 게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제법 많이 모았구먼. 저 정도면 한바탕 휘저을 수도 있겠는데?”
새카맣게 벌판을 채우고 있는 무인들을 보며 사진악은 너스레를 떨었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내심은 과장된 행동가 다를 바 없었다. 올라온 보고에 의하면 백산과 그의 형제들은 저들을 죄인처럼 끌고 다닌다고 했다.
그런데 이곳에 와 보니 아니었다. 편안한 얼굴로 밤을 지새울 준비를 하는 그들이 죄인일 리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인마불거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되어 있었다. 요컨대 백산의 세력이란 말이다. 주변을 둘러보는 사진악을 보며 백산은 짤막하게 말했다.
“한바탕으로는 안 돼.”
“그럼?”
“너 공부 좀 했으니까 유방이 누군지 알지?”
“쿡! 이제야 정신 차린 모양이구먼.”
사진악은 쓰게 웃었다. 젊었을 때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던 친구들이 팔십이 넘은 나이에 와서야 강호를 지배할 마음을 먹다니. 문득 세월이 참으로 얄궂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이제 털이 들었다고 봐야겠지. 녹림수로채를 하나로 만들면 어느 정도나 되냐?”
“글쎄, 그래 봐야 오합지졸인데 얼마나 하겠는가. 왜, 도둑놈들도 데려다 써먹으려고?”
“녹림수로채에 살아남을 기회를 주려는 거야. 북경 돌아가는 상황은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말할 필요도 없을 테고. 새롭게 지어지는 광풍성으로 들어와. 무욕각(無慾閣)이란 현판 하나 만들어 줄게.”
“어떤 자리를 주느냐에 달렸지. 이 친구들하고 같은 위치면 안 가.”
소살우 일행을 가리키며 사진악은 말했다.
“노망이 골수까지 뻗었구먼. 그 나이에 감투를 쓰고 싶냐?”
사진악을 빤히 쳐다보며 소살우가 이죽거렸다.
“나도 감투는 쓰기 싫어, 이 친구야. 하지만 젊은 것들하고 같이 노는 게 싫어서 그래.”
“그러니까 우리가 젊어져서 그런다고? 에라, 도둑놈아! 부러우면 부럽다고 솔직히 말해라.”
“그래서 싫다는 거야, 이 멍청한 친구야. 잘못해서 나도 반노환동을 하게 되면 자네들처럼 단체로 노망이 날 것 같아서.”
“그래, 하고 싶은 게 뭔데?”
소살우와 사진악의 노닥거림을 보다 못한 백산이 소리를 빽 질렀다.
“자네보다는 낮고 저 친구들보다는 높은 자리!”
“별 거지같은 걸 가지고 지랄이네. 그건 내 소관이 아냐. 내 작은 마누라에게 허락받으면 돼.”
“그럼 진작 얘기해야지.”
백산을 향해 인상을 쓴 사진악은 주하연을 쳐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우선 실력을 먼저 봐야겠는데요. 광풍성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거든요.”
“칠판가 하는 놈들을 말하는 겁니까?”
“잘 아시네요. 전면으로 나설 필요는 없고, 혹시라도 남천벌이나 북황련이 나타나면 그들을 맡아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제수씨.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제 직책은?”
“유모로 하지요, 뭐.”
“유모요? 그럼 저것들보다 높은 겁니까?”
유모란 말에 놀랄 만도 하건만, 사진악은 별다른 내색 없이 소살우 일행보다 높은가만 물었다.
“이 녀석의 사부가 되는 거잖아요.”
주하연은 제 배를 슬쩍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 약속....... 어기시면 안 됩니다.”
아이라는 말에 자세를 고쳐 앉은 사진악은 확인하듯 말했다.
“제가 왜 거짓말을 합니까. 앞으로 팔 개월만 있으면 아이가 나오는데요.”
“팔 개월이라, 그럼 그 안에 무림을 정리해야겠군요. 거령(巨令)아!”
“네, 사부님!”
사진악의 부름에 기다란 장도를 메고 있던 거구의 중년인이 앞으로 나서며 고개를 숙였다.
“너도 들었지? 팔 개월이란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뒤통수 까러 온 놈들을 전부 없애 버리라는 말 아닙니까?”
“잘 아는구나. 가서 준비해 와라!”
사진악 앞에 놓인 술잔을 훌쩍 들이킨 거령은 어둠 속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마도야, 술 다 마셨으면 너도 가 봐라!”
“형님 혼자서도 잘할 겁니다, 사부. 정 못 미더우시면 막내 천수를 딸려 보내겠습니다.”
“뒤통수 까는 건 원래 네가 전문가 아니냐. 그러니까 가 봐라.”
셋째 제자인 광혈마도 마금성을 빤히 쳐다보며 사진악은 말했다.
“끄응! 모처럼 만에 술 좀 먹는가 했더니.”
나직한 신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 마금성은 조금 전 거령이 그랬던 것처럼 술을 한입에 털어 넣더니 몸을 날렸다.
“너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녀석들을 제자로 삼았다?”
거령과 마금성을 주시하던 백산이 의아한 얼굴로 사진악을 보며 물었다.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했지만 사진악은 마군자라 불릴 정도로 예의가 발랐다. 그런데 녀석의 제자들은 마치 젊은 시절 자신들을 보는 듯했다. 한마디로 싸가지가 없다는 말이다.
“너희들 사는 게 부러워서 자유롭게 키웠더니, 정신이 이상이 돼 버렸다.”
“그래도 머리는 좋은 것 같은데?”
“백산 자네만 빼고 저 친구들도 전부 그랬잖아.”
“사진악, 늙어도 좀 곱게 늙어라. 널 보고 있으면 뒈질 날 받아 놓고 심술부리는 노인네 같아. 금방 밥 먹어 놓고도 밥도 안 준다고 우기는 사람 말이다.”
“사실을 말했을 뿐이네. 남들은 한 달 걸리는 천자문을 삼 년 동안 익히고 쓰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무슨 말을 할까.”
“술이나 처먹어라, 새꺄. 늙은 것이 기억력은.......”
“술을 안 주니까 자꾸 그런 소리가 나오지 않는가. 그런데....... 말을 듣지 않으면 어쩔 건가? 그들이 명예를 택하면?”
술잔을 들어 올리던 사진악은 백산과 석두를 쳐다보며 물었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 책임은 선택한 자의 몫이고요.”
두 사람을 대신하여 말을 한 사람은 주하연이었다. 남궁세가가 있는 천주산 쪽을 쳐다보며 주하연은 차갑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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