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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22~35절/일시적 만족인가? 영원한 만족인가?
우리가 스스로에게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습니까? 왜 교회에 오시는 것입니까? 예수를 믿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은 믿음은 우리 관점을 일시적 만족을 추구하며 사는 삶에서 영원한 만족을 추구하며 사는 삶으로 옮겨준다는 것입니다.1. 사람들의 관심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의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주님께서 아직 자기들이 있는 곳에 계신 줄 알았다가 계시지 않은 것을 알고,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 건너편 가버나움으로 예수님을 찾으려고 건너왔습니다(22~24).A. 세상의 열심이 신앙의 표지가 될 수는 없습니다(22~25).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하는 것은 세상의 열심 자체가 신앙의 표지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이런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 열광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난 후에 보면 그는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섬기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여러분 중에서도 이런 경험을 과거에 하신 분들이 계신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가 다시 버리시기도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처음에 열심으로 나타난 것이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열심을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과연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알기 때문인가? 나는 그분을 알고 있는가? 내게는 그분의 자녀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는가?”라고 말입니다.B. 물질주의적 동기는 신앙의 표지가 될 수 없습니다(26)본문에서 우리의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주님을 찾은 후에 주님께 언제 여기 오셨느냐고 묻습니다(25). 주님은 그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으시고 매우 엄중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조금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으시고 그들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은 그들의 동기의 문제를 직접 지적하셨습니다. 신앙은 동기와 매우 중요하게 연관이 됩니다. 이들의 열심이 신앙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열심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하지 말고 마음속의 동기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다. 우리의 마음 중심에서 무엇 때문에 열심을 내었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은 표적을 보고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알고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습니다.(26) 우리는 이렇게라도 주님을 쫓아왔는데, 이것만도 훌륭한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들의 열심을 칭찬했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은 목회적 기교를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지적입니다. 이들의 물질주의적 동기는 결코 신앙의 표지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따르시는 이유, 동기는 무엇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을 주님께로 움직이도록 만든 요소입니까? 주님은 어떻게 여러분을 판단하시겠습니까?C. 기적은 일시적인 만족을 줄 뿐이다. 기적을 보고 효과를 누리지만, 유익을 얻지 못하는 신앙의 태도를 지적합니다. 이들은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표적을 통한 유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기적은 일시적인 만족을 줄 뿐입니다. 병이 낫고, 은사를 체험하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지만 기적 체험이 자동적으로 신앙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이 만들어내는 영원을 바라보는 관점은 중요합니다. 우리가 일시적인 만족에 머물러서 배부름의 체험, 문제 해결의 체험에 매여서 하나님을 믿게 된다면, 그것을 기적적으로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주님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일입니다. 그들은 천국의 비밀을 보여 주었음에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문을 박차고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다2. 예수님은 썩는 양식이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라 말씀합니다.(27).주님은 이렇게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목회적 가르침이었습니다. 27절에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깊이 상고해야 할 부분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으러 바다를 건너 온 열심은 대단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먹고 살자고 나를 찾아온 것이다. 이렇게 나를 찾는다면, 너희는 결국은 죽고 말 것이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나를 찾아라. 그러면 너희는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A.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가진 직업을 헛되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주님의 말씀을 오해하면 마치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사는 것 자체가 헛된 것이라고 하시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 자체, 먹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무시하시지 않으십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는, 오히려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살 때에 불신자 보다 더 열심이 일하라고 합니다. 마치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처럼 열심이 하라는 것이 성경의 권면입니다.B. 육신만 아니라 영혼을 위하여 염려하고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의도는 무엇보다도 영혼을 위해서 그만큼 염려하고 힘쓰라는 것입니다. 배부름의 욕구가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찾아 바다 건너로 오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여주는 열심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 신앙의 영역에서는 그런 열심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썩을 것을 위해서는 생명을 걸지만, 영생을 위해서는 조금의 시간도 들이지 않습니다. 썩는 양식이란 표현은 우리가 천국 갈 때 가지고 갈 수 없는, 일시적인, 지상에서 끝나게 되는 가치를 말합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우리가 죽은 후에도 영원히 우리의 것으로 남게 될 것을 말합니다. 일시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지만, 영원한 만족을 위해서는 약간의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 것을 성경은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오늘 이 갈릴리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은 바로 물질지상주의의 세상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너무나 불편한 지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편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이 불편한 말씀을 주님께서 하시는 것은 주님 앞에서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일을 더 이상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3. 영원한 만족을 얻기 위해서 어떤 프로그램이 필요한가?(28~29)사람들의 접근방식은 참 놀랍습니다. 주님께서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시자,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하고 묻습니다. 무슨 프로그램이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썩는 양식 때문에 움직이는 삶, 그 동기가 고작 배부름의 수준에서 움직이는 삶을 중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 내가 그렇게 움직였구나. 내 영혼을 염려하고 산 것은 아무 것도 없었구나?’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르겠다는 듯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일이 무엇이냐고 천연덕스럽게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너무나 직접적이고 분명한 말씀을 피하는 오래된 방식입니다. 영혼을 생각하고 살라는 것은 결코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프로그램을 알려달라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손에 잡히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심지어 고상해보이고 신앙적으로 보이기까지 할 수 있지만, 결국 불신앙이며 불순종일 뿐입니다.A. 생명의 떡은 신뢰 가운데서 받는 선물이다.우리를 세상에서 배부르게 하는 떡은 일과 수고에 대한 대가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일을 하면 그것을 얻을 수 있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하도록 있는 생명의 떡은 신뢰 가운데서 받는 선물이기 때문에 그들이 일을 해서, 얻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님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떡을 그들에게 주시기 위해서 일을 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함으로 받게 되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B.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29).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들의 영혼을 위해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얻으려 한다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일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쳐주는 믿음은 인격적인 것입니다.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의 인격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너, 나를 믿느냐”고 물을 때, 이것은 인격에 대한 신뢰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으면 문제가 해결된다든지, 형통하게 된다든지 하는 신앙적 명제를 믿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의 수준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믿음이 정말 좋은 믿음이겠습니까? 언제나 기도하면 문제가 해결되고 기도응답이 원하는 대로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할렐루야’ 하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사람의 믿음과, 비록 오래도록 기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그대로 안고 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고 이 과정을 통해서도 범사에 유익하게 하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가지는 믿음, 어떤 것이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더 깊고 확실한 신뢰요, 믿음이겠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져야 하는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돈을 내라고 요구하거나, 일을 더 많이 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신앙이 일시적인 수준의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결코 만족스러운 것이 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함정이 일시적 만족을 추구하는 우리의 마음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C. 이 일은 하나님이 하셔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다(44).믿음은 나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형되신 후 내려오셨을 때,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주기를 바라고 제자들에게 데리고 온 한 아버지를 보셨습니다(막 9:14~27). 제자들은 그 아이에게 들린 귀신을 능히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책망하시고는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고 대답하면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22)하고 구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23)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대답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그 아버지는 큰 소리를 질러 말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24). 이것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자세입니다.
아버지는 자기는 주님의 말씀과 인격을 믿겠지만,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이라면 자기에게 그 믿음을 달라고 구하는 것입니다. 그는 조건적으로 ‘믿음을 주시면 믿지요’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믿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으로 안 된다면, 그 믿음을 제게 주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믿음을 우리 속에 주시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내가 믿습니다.’ 라는 자세가 동시에 요구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요한복음 6장 44절에 주님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4. 자기 지향적인 마음이 요구하는 것, 또 다른 표적(30~33)자기 지향적인 마음이 모든 인간의 본성일 것입니다. 마음은 계속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니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아멘하고 받지를 못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당신을 믿게 하시려면 또 다른 표적을 제시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들의 음란한 마음은 결코 어떤 것으로도 채워질 수 없고, 하나의 기적을 경험하면 그보다 더한 기적을 요구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A. 하늘에서 내린 떡/만나(신 8:3)그들이 요구한 것은 하늘에서 떡을 내려 보라는 요구였습니다. 광야에서 조상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었듯이, 모세가 한 것처럼 당신도 그렇게 해보라는 것입니다.(31) 왜냐하면 주님이 하신 것은 도시락의 재료를 가지고 많은 떡을 만들어 남자만 5천명, 여자와 어린아이 합하여 약 2만 명을 먹이신 것이라면 모세는 하늘에서 떡을 내려서 200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먹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만나가 의미한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신명기 8장 3절에 하나님께서는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만나는 하늘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전히 갈릴리 사람들이 마음의 눈이 가려져 있으니까? 그들은 모든 영적 상징과 의미들을 발견하지 못하고 육신적 필요와 일시적 만족에 부합하는 것들만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일시적인 만족에 눈이 멀면, 결코 영적이고 영원한 만족을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열심을 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B.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35).이제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에 도착했습니다. 주님은 여기서 비로소 진짜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주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것일 뿐 아니라, 사실 우리 주님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참 떡이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실 세상의 양식에 주목할 것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바로 생명의 떡이십니다. 주님이 무엇을 주실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 자신에 대해서 배고픔을 가지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썩는 양식은 일시적 만족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생명의 떡이신 주님 자신에 대해서 굶주려하고 그분을 경험하고 맛본 사람들은 영원히 굶주리지 않는 영적 만족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죽음 후에도 여전히 우리의 양식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의 참뜻은 다시는 영적으로 굶주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추상적 선언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이것은 간절한 호소입니다.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시니 사람은 그에게 와야 하며 그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5. 교훈A. 그림자 때문에 실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육신적 배부름에 취하여 영적으로도 만족을 누리는 것처럼 착각하고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육신적 건강에 취하여 영적으로도 건강한 것인 양 착각하지 마십시오. 육신적 성공과 성취에 취하여 그것이 영원한 만족을 보장해줄 것인 것처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림자를 보면서 실체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즉각적인 기도의 응답이 전부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오래도록 기도하지만, 여전히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인격을 믿으며 영원을 향하는 그런 믿음의 수준으로 나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B. 영혼을 염려하는 지혜그러므로 여러분의 영혼에 대하여 합당한 염려를 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혼의 상태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나님께 구하십니까? 하나님께 구하는 여러분의 기도의 제목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말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여러분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인가를 보여주는 시금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일시적인 만족을 줄 뿐인 것들입니까, 아니면 영원토록 쇠하지 않고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만족을 주는 것입니까?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인하여 여러분의 삶이 움직여지게 하십시오. 일시적 만족 때문에 바다를 건너 주님을 찾으러오는 열심이 아니라, 영원한 만족이 되시는 주님, 친히 생명의 떡이 되어서 자기 몸을 깨뜨려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그 주님 자신을 원하기 때문에 주님께 나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영혼을 영원토록 만족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잠 1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