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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Nuwy0pIdPto?si=oU7FcIDRQ80lTBp_
Schumann: Piano Quintet Op. 44, Bernstein & JuilliardSQ (1965)
브람스의 피아노4중주 3번 op.60
브람스의 피아노4중주 작품60은 겨울에 들어야 하는 곡이다. 그리고 실연의 아픔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들이 들어야 하는 곡이다. 듣는 이를 대신하여 눈이 내리듯 펑펑 울어줄 것이다. 브람스의 고향인 함부르그는 북유럽에 위치한다. 그곳의 겨울은 음산하다. 편서풍의 영향으로 겨울 내내 차가운 바람이 북해에서 불어오고 진눈개비인지 눈인지 모르는 습기찬 방울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어두운 비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해는 짧아 웅크린 나무들은 숨을 데를 찾지 못해 울부짖는다. 그런 겨울의 풍경을 연상하며 이 곡을 들어야 한다.
그러나 실연의 아픔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 곡은 이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한마디로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까다로운 음악이다. 음악 자체는 순수하게 아름답지만 작곡자가 나타내고자 하는 감정의 복선이 이 곡의 뒤안길에 너무 짙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음울한 겨울에 맑은 햇빛을 찾거나, 생에의 희열을 확인하기 위해 음악을 들으려는 사람들에게 이 곡은 위험스러운 곡이다.
순수 음악에서 어떤 의도적이고 목적적인 것을 찾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미학에서 '아름다움과 예술품은 창작된 순간부터 창작자의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것이다.'라 했다. 또 음악의 선율을 아름답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듣는 이의 마음에 이미 어떤 아름다움이 내재해 있어 음악과 마음의 선율이 합쳐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브람스가 그의 피아노4중주 op.60에서 분명 실연의 아픔을 표현하고자 하였다면, 그리고 그 곡을 듣는 감상자들 역시 동병상린에 시달리고 있다면, 이 때 감상자들의 이 음악에 대한 공감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절실할 것이다.
결국 음악은 자기가 선택하는 것이다. 베토벤은 에그몬트 서곡을 괴테에게 헌정하였지만 막상 괴테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이가 든 그는 젊은 베토벤의 격렬함을, 그리고 자신이 젊었을 때의 격정을 그만 잊고 싶었던 것이다. 이해와 공감은 다른 것이다. 나는 브람스의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실제로 나 자신이 젊었을 때 성음사에서 발간된 이 곡을 판이 닳도록 들은 적이 있었다. 같은 판에 드보르작의 아름다운 둠키 트리오Dumky-Trio가 실려 있었지만 그 곡은 거의 안 듣고 브람스만 들었다. 당시 상황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후 이 곡은 전혀 손을 대지 않고 있다가 슈만의 피아노5중주와 더불어 음악에서 사랑의 표현은 어떤 것일까하는 주제가 떠올라 수십 년만에 이 곡을 다시 들었다. 물론 다른 LP로 듣기는 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옛 생각이 아련히 다시 떠오른다.
브람스의 피아노4중주 No.3 op.60은 1875년, 그가 우리나이로 43세에 작곡한 것이다. 그의 음악이 한창 완숙미에 이르렀을 때 작곡된 것이다. 그러나 이 곡은 그의 피아노4중주 세 곡중에서 번호와 연대는 마지막이지만 실제로 구상된 것은 훨씬 더 오래된 것이다. 이 곡은 보통의 사중주가 모두 그렇듯이 4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악장 Allegro ma non troppo
2악장 Scherzo - allegro
3악장 Andante
4악장 Finale - allegro
첫 악장은 강한 피아노 포르테로 시작한다. 그리고 들려오는 현들의 짤막한 소리는 음산하고 우울하다. 시작부터가 무거운 것이다. 가슴앓이를 하는 사람이 어디 가벼울 수 있겠는가. 이러한 분위기는 일악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한다. 울렁거리는 듯 나오는 피아노의 주제도 그렇고, 그 주제를 따라 부르는 현의 노랫소리도 마찬가지다. 브람스 특유의 반복되는 긴장감이 분위기를 더 가라앉게 한다. 간혹 격렬함이 있지만 그 것 역시 사랑의 아픔으로 견딜 수가 없어서 터져 나오는 고통스런 격정일 뿐, 다시 울음을 먹으며 조용히 내려온다. 사실 브람스가 전곡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감정은 이미 일악장에 모두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나머지 악장은 대립되거나 전개되는 항에 불과하다. 이악장 스케르죠는 일악장의 슬프고 비통한 감정을 반전시키려는 대립의 항으로 설정된 것이고, 삼악장 안단테는 일악장의 감정을 다시 되풀이하여 서정적으로 전개한다. 그리고 사악장에서 마무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곡은 전곡이 답답할 정도로 음울하고 비통하다. 아름다운 모차르트가 들으면 기절할 곡이다. 브람스의 곡들이 대부분 조용히 내면을 파고들어 어두운 분위기를 갖는데, 피아노4중주 3번은 그 중에서도 유난스러울 정도로 깊고 어두운 나락으로 한없이 빠져든다. 이는 브람스가 개인적인 사랑의 경험을 바탕으로 극히 주관적인 감정을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클라라에 대한 사랑의 좌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감정과 행동, 그리고 스스로 미워지는 자신, 그리고 다시 나타나는 절망.
그가 클라라를 만난 것은 그의 나이 스물셋이 되던 해였다. 슈만이 그의 음악잡지 '음악의 신비평'에 브람스를 새로운 물결이라고 소개하여, 브람스는 시골이나 마찬가지인 함부르그에서 일약 독일의 음악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지 얼마 후였다. 그가 슈만과 클라라 부부가 살고 있는 듀셀도르프를 방문한 것이었다. 이어지는 슈만의 자살기도와 광기, 그리고 클라라에게 느껴지는 사랑의 감정, 그녀와 함께 하였던 라인강지역과 단찌히로의 연주여행, 여행도중 바다를 보고 싶다는 철없는 그의 희망을 어루만져주는 여인의 부드러운 심성, 그리고 마침내 슈만의 죽음. 젊고 감수성이 강한 브람스에게 이는 충격 이상이었을 것이다. 열네살이나 더 많은 여인에게 불꽃처럼 느껴진 그의 감정은 연민인가, 사랑인가, 동정인가, 충동인가. 하여튼 슈만이 세상을 떠난 후 그는 쫓겨나듯 듀셀도르프를 떠나 일시 함부르그로 돌아간다. 어떤 심정으로 떠났을까.
여인은 아름다웠다. 당시에 그린 초상화를 찬찬히 드려다 본다. 가르마를 타서 머리를 곱게 빗어 뒤로 넘겨 묶고, 달같이 밝은 이마 위에는 머리띠로 가느다란 줄이 지나 뒷머리로 젖혀졌다. 깊은 쌍거풀에 큰 눈. 무엇인가 그리움인가 상념에 젖어 바라보는 눈길이 커다란 호수에 떠 있는 달처럼 동그란 것이 깊고 그윽하다. 그 깊은 눈은 아마 바라보는 사람들의 혼을 뿌리째 흡입하려는 듯 매혹적이다. 그리고 기다랗고 높은 코, 갸름한 턱에 조그만 입술. 햐얀 목덜미에는 화려하지 않고 그저 수수한 목걸이가 걸려 아래 가슴으로 드리우고, 풍만한 가슴에는 숄이 무엇인가 가리듯 걸쳐 있다. 그리고 그런 아름다운 여인이 피아노는 왜 그리 잘 치는가. 피아노 건반이 울릴 때마다 브람스의 가슴은 마구 뛰었으리라. 스승이나 마찬가지인 슈만. 그리고 그가 광기로 라인강으로 뛰어 들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병원에 갇혀 살다가 얼마 안 있어 저 세상으로 떠났다. 저렇게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홀로 되다니. 불쌍한 사람 클라라, 아니 불쌍한 사나이 브람스.
그들의 관계는 지금의 우리가 볼 때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답답했다. 소위 플라토닉 사랑의 표본이라 할 만하다. 욕망을 밖으로 터트리지 않고 억제하거나 짓누르고 있으면, 그 것은 독이 되고 또 절망으로 화한다. 그랬다. 1868년 그의 일악장 스켓치에는 '스스로 총을 쏘아 죽으려는 그리고 그 외에는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하는 남자를 생각해보라'라고 적혀 있다. 얼마나 절실한 호소요, 외침인가. 상처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해 절망에 빠져든 사나이가 바보처럼 자살을 하려는 심정, 바로 그러한 처절한 감정이 전곡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1874년 브람스가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말한 젊은 베르테르의 심정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니까 이 사중주는 스물네다섯 나이에 구상이 되기 시작한 것이 틀림없고, 슈만이 죽은지 십이년이나 지난 1868년 일악장을 스켓치할 때에도 그 상처는 아물지 못하고 생생하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물론 클라라와의 어렵고 달콤한, 하지만 생각만 하여도 몹시 쓰라린 관계는 지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연유로 이 곡은 하마터면 사라질 운명이었을텐데 브람스는 나이가 들어 이제 사랑을 승화시켰는가, 아니면 극복했는가, 1875년 손을 더 본 다음에 이 곡을 드디어 발표한다. 마음에 안 드는 곡을 수없이 파기시켜 버린 그로서는 의외의 일이라 할 만한데, 아마 브람스는 이 곡이 그의 인생에서 스스로를 표현한 몇 안 되는 사실적인 기록이기에, 부끄럽지만 남겨둘 생각이 아니었나 싶다. 그리고 다 아는 사실이지만 브람스는 죽을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다 죽었다. 여러 여인이 스쳐 지나가고 있지만 결국 그에게는 한 여인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저 멀리 세상을 떠나자 브람스는 일년도 안되어 그녀를 따라간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을 한다. 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껏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사랑은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노래하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인류가 존속되는 한 사람들은 사랑을 노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브람스의 사중주를 들으며 느끼는 것은 사랑은 즐거움이라기보다 눈물의 씨앗이요, 슬픔을 잉태시키는 고통의 덩어리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했던 브람스에게 연민의 정과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리고 나 스스로 이러한 감정을 다시는 갖고 싶지 않아, 아마도 브람스의 피아노4중주 제3번은 앞으로도 듣지 않게 될 것이다. 산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그 것들은 아름다운 것이다. 비극적인 것도 아름답다고 하지만, 짧은 인생에서 아름다운 것은 진정 고통과 슬픔 없이 그저 순수하게 아름다워야 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자꾸 모차르트를 듣는 이유이다.
https://youtu.be/POvIYFmR4ps?si=eLIlvQidO8ppRWY2
Glenn Gould, Schumann, Piano Quintet, Op 44 & Piano Quartet, Op 47
슈만의 피아노 5중주 op.44
1856년 7월 23일 슈만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죽어가고 있었다. 브람스와의 여행에서 갓 돌아온 클라라는 서둘러 그를 찾았다. 클라라는 썼다.
'그는 나를 보고 웃었다. 그리고 그의 팔로 무서운 힘으로 나를 껴안았다. 그 때 그는 이미 팔다리를 전혀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어떠한 보물을 준다해도 나는 이 포옹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7월 29일 슈만은 눈을 감았다. 죽는 순간까지 몇 시간 동안 고통스런 경련 끝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곱게 죽지 못하는 그 심성, 그 격렬함, 그는 47세의 짧은 생을 그렇게 마쳤다. 그러나 저러나 그가 가는 마지막에도 있는 힘을 다해서 껴안았던 여인, 그렇게도 사랑한 여인 클라라는 도대체 어떤 여인일까. 세기의 두 천재가 나이를 달리 하면서 아래 위로 세월을 나누며 사랑했던 여인 클라라. 브람스는 열네살이나 년하였다. 남편인 슈만은, 응큼해라, 클라라가 어렸을 때부터 보아 두었다가, 클라라가 성장한 다음에 클라라의 아버지인 비이크의 무서운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를 앗아왔다. 법정소송까지 불사한 불같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의 나이는 클라라보다 벌써 아홉이나 많았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복을 많이 받은 여인이다. 그럴까. 아닐 것이다. 천재들의 사랑이 어디 간단하고 순진했을까. 모를 일이다. 후세의 우리들이 단지 이러쿵 저러쿵 하기 좋은 말로 떠들 뿐일까. 그녀 자신도 당대의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였으니 슈만 정도 아니면 누구라도 마음에 들었을까. 한창 무르익었을 나이에, 그리고 인생의 즐거움을 마음껏 누릴 나이에 남편을 먼저 보내고 그 허전한 마음을 어떻게 달랠수 있었을까. 또 그 때 나타난 젊은 천재 브람스의 뜨거운 열정을 그녀는 어떻게 소화했을까. 참으로 궁금한 일이다.
슈만은 19세기 전반 낭만주의가 유럽을 휩쓸고 있을 때 그 자신이 위대한 낭만주의자로서 한 세상을 풍미한 천재다. 수많은 천재가 있지만 나는 슈만이야말로 진정한 천재라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어쩔 수 없이 치솟아 오르는 감정의 분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나오는 악상. 미처 손으로 다듬을 수조차 없어 그냥 터져야만 했던 그의 천방지축의 악곡들. 그러면서도 후세의 모든 음악의 전범이 될 만큼 시도되었던 새로운 형식들. 그 뿐인가 필요하다면 달아오르는 격정을 휘어잡고, 그 격정을 틀이 꽉 잡힌 고전주의 형식에 끼워 맞출 줄도 알았던 사나이. 그리고 자기만이 천재가 아니라 수많은 천재를 한 눈에 알아보는 비범함. 멘델스죤은 슈만에 의해 인정이 되고, 쇼팡과 브람스는 슈만 덕분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슈베르트도 그에 의해 새롭게 발굴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천재가 사랑을 썼다. 사랑을 열정적으로 노래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대상에게 곡을 헌정했다. 바로 피아노5중주 op.44이다. 슈만이 1840년 온갖 어려움을 물리치고 클라라와 결혼하는데 성공하고, 두 해가 지나 한창 사랑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을 때인 1842년, 이 곡은 작곡되었다. 이 해에는 현악4중주 세 곡과 피아노4중주 한 곡을 이미 작곡하고 있었고 피아노5중주는 마지막 작품이었다. 역시 사람이 행복할 때 최고의 걸작이 나오는가. 사랑도 앞서 이야기했던 브람스의 사랑과는 사뭇 다르다. 같은 여인을 두고 쓴 사랑이지만 하나는 이룰 수 없는 비극적 사랑이요, 다른 하나는 쟁취한 사랑의 이야기이다. 실패한 사랑이 아니라 성공한 사랑이다.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그래도 사랑을 주고 또 그 사랑이 받아들여질 때 완전한 사랑이 되는 것이고, 그 때의 기쁨이야말로 진정한 환희다.
슈만의 피아노5중주에는 이러한 기쁨과 환희가 전곡에 넘쳐 흐른다. 그리고 이 작품이 더욱 걸작이 되는 것은 이러한 가늠할 수 없는 커다란 감정을 슈만답지 않게 고전적인 소나타형식에 엄격히 맞추어 넣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감정이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고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잘 견디어 내며 즐길 수가 있는 것이다. 이 곡도 역시 네 개의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https://youtu.be/P2j3f-git9Q?si=EURNHc51SD36g8gW
Schumann Piano Quartet op.47 / Brahms Piano Quintet op.34 Glenn Gould (piano)
첫 악장은 '빠르게'이다. 그리고 brillante가 필시 영어의 brlliant와 같은 어원이라면 그 뜻은 화려하고 밝다는 뜻일게다. 말 그대로 곡을 빠르게 그리고 밝게 연주하라는 뜻이다. 곡은 시작하자마자 피아노의 힘찬 소리가 우리를 압도한다. 당장에 첫 주제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맛보기로 두 번째 주제가 아주 짤막하게 나타난 다음에 다시 첫 주제가 반복된다. 첫 주제는 그야말로 강렬하다. 피아노 포르테로 힘껏 건반을 두드린다. 사랑의 힘이다. 기쁘니 힘이 넘쳐 난다. 그리고 피아노가 다시 힘을 약간 죽여 제2주제를 끌어낸다. 그리고 바이올린이 주제를 이어 받는다. 그리고 첼로가 되풀이하고 피아노가 또 부른다. 다시 첼로가 굵게 주제를 반복할 때 바이올린이 옆에서 따라 붙는다. 주제가 전개되는 동안 듣는 이의 가슴은 떨린다.
이 선율은 분명 울렁거림의 가락이다. 사랑하는 이를 쳐다볼 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은 울렁거린다. 심하게 울렁거릴 때는 가슴의 맥박이 한껏 요동치고,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이 하늘이 노래진다. 어찔어찔하면서도 어디론가 떠내려가는 듯 하다. 세상의 잡동사니들은 모두 사라진지 오래다. 그리고 오로지 사랑만 들리고 사랑만 보이는 것이다. 자나깨나, 눈을 감거나 눈을 뜨거나, 생각나는 것은 사랑스런 얼굴이다. 아아, 인간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 이런 사랑의 느낌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신 조물주에게 감사를 드릴진저.
아마도 슈만은 사랑하는 클라라를 품에 안고 하늘로 그저 둥실둥실 떠다니며 춤이라도 추고 싶었을게다. 어렵게 쟁취한 사랑, 그 사랑이 어떤 것인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새삼스럽고, 새록새록 솟아나는 강렬한 환희, 그리고 그 기쁨으로 울렁거리는 가슴. 일악장에서 슈만은 지치지 않고 이러한 느낌을 쏟아 낸다. 소나타 형식은 이러한 느낌을 되풀이해서 나타내도록 도와준다. 이러한 사랑의 기쁨은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법, 아니 그보다 한 번만이라면 오히려 아쉬운 법이어서 곡은 되풀이된다. 그러나 이어지는 전개 부분은 갑자기 약간의 어두움이 드리운다. 검은 구름이 몰려온다. 그리고 폭풍우가 몰아친다. 피아노가 격렬하다. 하지만 이러한 날씨는 오래 가지를 못하고 곧바로 끝이 난다. 거친 바람 뒤에 다시 이루어지는 사랑 그리고 결코 꿈이 아닌 사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곡은 다시 앞으로 돌아가 아름다운 주제들이 되풀이 된다.
2악장은 '행진곡풍으로 - 천천히' 이다. largamento가 영어로 slowly 또는 broadly라고 번역되니 천천히의 의미가 약간은 미묘하다. 피아노가 첫 부분을 열면 곧 현이 이분음표와 온음표로 구성된 첫 주제를 시작한다. 이 것이 바로 행진곡풍의 곡조인데 이는 어디까지나 리듬이 그렇다는 이야기일 뿐, 느낌은 어둡고 슬픔에 잠겨 있다. 비탄에 잠겨 슬픔을 짧게 끊어지듯 토해낸다. 갑자기 웬 슬픔일까. 사랑의 환희를 노래하더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그러나 슬픔이라 해도 비통하게 눈물이 얼굴을 주루루 흘러내리는 그런 슬픔이 아니다. 가슴이 메어지고 머리에 통증이 오는 그런 슬픔이 결코 아니다. 사랑의 뒤안길에서 느껴지는 환희의 슬픔이다. 좋아서 흘리는 눈물이다. 웃으며 흘리는 눈물인 것이다. 어디 사랑이 그저 쉽게 얻어지는 것인가. 밝은 사랑이지만 어두운 뒤안길이 또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런 감정의 느낌을 다른 곡에서는 발견한 바가 없다. 슈만같이 마음속에 마성魔性이 도사리고 있는 위대한 천재만이 이런 역설의 아름다움을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이 흘리는 눈물이라는 것이 대체로 그렇기는 하지만 나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노발리스Novalis의 산문 '하인리히 폰 외푸터딩겐'의 슬픈 아름다움을 잊을 수가 없다. 순수의 세계에서는 슬픔이 아름다운 꽃으로 산화된다. 눈물을 흘리지만 우리는 슬픔 대신에 강한 아름다움에 빠져든다. 노발리스가 1803년에 죽었으니 아마도 슈만은 그 책을 읽었을 지도 모른다.
슈만이 누군가. 다른 위대한 작곡가들과는 달리 그는 젊어서 바이런과 같은 낭만주의 문학을 탐닉하였고, 대학에서는 법학을 전공하였지만, 칸트나 셸링 그리고 피히테 같은 철학에도 심취하였던 바다. 밑받침이 아주 튼튼한 것이다. 그렇다. 여기서 그는 슬픔을 표현하되 이미 꿈속에 들어가 아름다운 환상에 젖어드는 것이다.
우리는 2악장의 제2주제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악장의 첫 주제가 피아노의 피아니시모로 끝나면서 갑자기 아련히 떠오르는 바이올린과 현의 선율 그리고 뒤에서 뒷받치는 피아노의 리듬이 나타나는데, 나는 맹세코 이야기하건대 이렇게 아름다운 선율을 들은 적이 없다. 하늘에서 내린 선율이다. 모차르트의 하늘에서 내린 선율은 천사들의 선율로서 결점이 없이 완벽하다. 그러나 슈만의 이 선율은 하늘에서 내린 것이되, 인간의 선율이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주어진 선물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위대한 것인가. 아니 음악이란 이렇게 위대한 것인가. 학창시절 광교의 음악감상실 아폴로에서 처음으로 들은 이래, 청춘이 지나고 장년을 보내고, 이제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도록 아직도 가슴에서 울렁거리며 솟아나는 그대 아름다운 선율이여, 청춘은 아름다워라 그리고 사랑은 아름다워라, 그리고 음악이여 영원하거라. 선율은 우리의 호흡과 심장을 멈추게 한다. 꽃보다도 아름다운 선율이여. 그리고 그 선율은 슬프고 어두운 첫주제 뒤에 나오길래 그 선율의 아름다움은 상대적으로 더 밝고 투명하게 빛나며 우리를 현혹시키고 있다. 그리고 다시 피아노와 현이 첫 주제로 되돌아가 곡을 반복한다. 그리고 세 번째 주제가 나타난다. 피아노가 강렬하다. 아마 감정을 종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분 같다. 그러나 정해진 형식은 여기서도 위력을 발휘하여 1주제 그리고 2주제 다시 1주제로 곡을 구성하며 아름다운 선율을 계속 선사한다.
그리고 슈만이 클라라에게 바쳤던 아름다운 사랑의 감정을 우리는 한 세기가 훨씬 넘어서도 마음껏 공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제들은 곡의 끝부분으로 가면서 속도를 약간 빨리 하는데, 서두르는 듯한 멜로디가 우리를 사로잡다가 또 터져 나오는 두 번째 주제가 귓가를 건드리면, 아 어쩌나, 아 어쩌나 이 심사를 어찌 달래나, 우리는 가만히 절로 첫 주제의 아름다운 슬픔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3악장과 4악장은 전개와 종결이다. 피아노가 격렬하게 현을 리드하며 앞선 악장들의 주제가 변주가 되어 곡을 지배한다. 특히 삼악장의 리듬은 춤이라고 할 수가 있다. 특히 3악장에서는 바이올린이 1악장의 제2주제를 변주하는데 이는 사랑하는 여인과 손에 손을 잡고 빙빙 돌며 춤을 추는 느낌을 준다. 얼마나 좋을까. 비바체의 속도로 아주 빠르게 돌아가는 춤이라도 출 수 있으니. 그리고 4악장에서는 첫 악장의 첫 주제가 화려하게 변주되며 끝난다. 한마디로 빛나게 밝고 불타는 듯한 열정이다. 열정으로 가득 차 곡은 마감된다. 슈만은 이후로도 그녀를 이런 열정으로 사랑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죽음을 앞두고서 전혀 움직이지도 못했던 손으로, 무슨 힘인가가 움직여, 사랑하는 여인 클라라를 으스러지게 포옹하였던 것이다.
나는 슈만의 피아노5중주를 아직도 아끼며 사랑하고 있다. 내 스스로 힘들거나 외로울 때, 그리고 슈만처럼 사랑이 넘칠 때, 나는 이 판을 틀고는 하였다. 사람이 살면서 필요한 것은 기쁨이요 환희가 아닌가. 슬픔은 오직 몰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있어야 하는 법. 사람들은 말한다. 고통이 기쁨의 밑거름이라고.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고통을 기억에서 지우고자 한다. 고통을 나눌 수 있는 것은 내가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한 순간일 뿐이고, 우리는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에도 한 줄기 밝은 빛이 하늘에서 내리기를 바라는 것이다.
https://youtu.be/-lXXOWpxLo4?si=3W9L-d9LXzldXkGp
Schumann Piano Quartet op.47 - Piano 4 hands transcription by Brahm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