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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동방 교회는 전통적으로 5세기 말부터 예루살렘의 마리아 성당 봉헌일인 9월 8일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생 축일을 지내 왔다. 사실 성모님께서 언제 태어나셨는지 역사적으로 불분명한 상황이었기에 마리아 성당 봉헌일을 성모님의 탄생일로 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전통은 8세기에 이르러 성모님의 탄생 축일을 정하는 데 기반이 된다. 성모님께서 9월 8일에 태어나신 것으로 볼 때 여기에 일반적인 인간의 수태 기간인 9개월을 뒤로 뺀 12월 8일이 자연히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대축일이 된 것이다. 이러한 동방의 전통은 9세기경에 서방 교회에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1476년 식스토 4세 교황이 로마 전례력에 도입하였다. 비오 9세 교황은 1854년 12월 8일, 전통으로 내려오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신앙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38)
Behold, I am the handmaid of the Lord.
May it be done to me according to your word.
루카 복음사가는 동정 마리아께서 성령으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하실 것이라고 전한다. 이 세상에 구원이 도래하는 데에는 성모 마리아의 순명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였다. 하와의 불순종과 성모 마리아의 순명이 극명히 대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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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에 관한 신심은 1830년 11월 27일 프랑스의 성녀 가타리나 라부레 수녀에게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사건에서 시작합니다. 이때 성모님 주위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시여, 당신께 매달리는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고, 성모님께서는 당신이 보여 주신 모습대로 메달을 만들어 지니고 기도하는 사람은 큰 은총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뒤 이 메달 착용이 늘어나면서 기적이 많이 일어나 ‘기적의 메달’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1854년 비오 9세 교황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사람이 이러한 공식 교리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1858년 2월 11일부터 7월 16일까지 18회에 걸쳐 성모님께서 프랑스의 루르드에 발현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흰옷에 푸른색 허리띠를 두르시고 오른팔에 묵주를 늘어뜨리신 채 양손을 가슴에 모은 모습으로 14세의 소녀 베르나데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때 성모님께서는 당신이 진정한 ‘원죄 없이 잉태된 자'임을 밝히시면서 기도와 보속, 회개를 촉구하시고 특별히 묵주기도를 권고하셨습니다. 당시는 자유주의 사상이 팽배하고 지식인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불신하며 속속 교회를 떠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성모님의 루르드 발현은 성모님의 원죄 없이 잉태되신 교리를 의심하는 수많은 사람을 다시 교회로 불러들였고, 계속되는 루르드의 기적들은 이 신심을 더욱 널리 퍼져 나가도록 하는 은총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새벽을 열며
이 세상 안에는 나이를 가지고서 이러쿵저러쿵 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즉,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마치 나이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신부님, 저는 나이가 많아서 못해요.”
“아니, 저렇게 어린 사람이 뭘 안다고…….”
나이가 많아도 문제고, 나이가 적어도 문제인 세상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요? 정말로 어떤 일을 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은 나이일까요? 아닙니다. 나이가 문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마음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사실 주님께서 우리들을 뽑으실 때 절대로 나이를 보고 뽑지 않으십니다. 또한 월등한 실력과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뽑는 것도 아니십니다. 그보다는 주님의 영광을 이 세상에 보일 수 있는 사람을 뽑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부족해 보이는 사람을 당신의 일꾼으로 삼으십니다. 하긴 그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만약 일하는데 있어서 가장 적당한 나이를 가지고 있고 또한 많은 재주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을 뽑아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모습이 아니지요.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는 약간 부족한 상황,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에서도 완전한 상황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보여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오히려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을 선택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을 맞이하는 오늘 복음에서는 성모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십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굳게 믿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당시 성모님의 나이는 불과 15세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그래서 이 세상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아기 잉태 소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모님께서는 주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시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겠다는 결심을 하십니다.
우리들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요? 이러한 순종을 가지고 있나요? 철저하게 못하겠다는 부정적인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지금 이 순간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나이 때문에’라는 핑계를 대시는 분, 지금 이 순간에도 바쁘게 활동하시는 주님보다 나이가 많지 않다면 절대로 그러한 말씀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부족한 재주와 능력’에 핑계를 대시는 분, 불가능이 없는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힘을 믿는다면 역시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철저한 믿음과 순종의 마음에서 하느님의 역사는 이루어지고 있음을 성모님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마음에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었을까요?
오늘 사제서품을 받는 12명의 신부, 15명의 부제를 위해 기도합시다.
빠다킹신부
미인 선발 대회
-민경철 신부-
국가적인 행사라고 알고 있었던 ‘미스 코리아’부터 시작해서
각종 미인 선발 대회가 참 많습니다. 대회를 개최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만의
기준을 만들어서 이에 합당한 최고를 뽑으려고 하겠지요.
하느님의 아들이 오실 때도 미인대회가 있었습니다. 기준은 하느님의 아들의
거처가 되어야 하기에 참으로 깨끗하고, 순수하고, 거룩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천상의 신하들이 아름다운 외모와 재력과 갖가지 재주를 가진 여인들을
추천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미리부터 점찍어 놓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얼굴은 태양빛에 그을렸고, 가진 것도 없고, 내세울 만한 것도 없지만 어릴 적부터
당신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했고, 해맑은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했고, 모든 이에게
따뜻함을 간직했던 시골처녀였습니다. 단 한 번도 하느님의 은총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여인이었지요. 당신의 아름다움을 완벽하게 발산하고 있던 이 여인에게
미인대회 왕관을 씌워주신 것입니다. 왕관에 ‘원죄 없이 잉태된 동정녀’라고
적혀 있었지요.
봉헌하는 마음으로
-신금재(캐나다 캘거리 성 안나 한인 천주교회)-
얼마 전 미국에 계시는 신부님이 오셔서 우리 캘거리 본당 신자들에게 ‘성모 신심’에 관해 특별 강론을 해주셨다. 신부님은 담배를 많이 피우셨는데, 기관지가 나빠져 자꾸 목에 가래가 끼었단다. 강론 중에 신자들에게 분심을 들게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담배를 끊어볼 결심을 하셨다는데, 사순절 40일 동안 회개와 보속으로 금연을 해보았지만 사순절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 담배를 피우기를 몇 해. 그러다가 새해 1월 1일 성모님 앞에서 “우리 신자들을 위하여 이제 금연을 하려 하오니 성모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제 기도를 봉헌합니다”라고 기도하셨는데 정말로 그 이후로는 담배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의지로 하는 것과 성모님께 봉헌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성모님의 특성은 ‘생명을 키우고 양육하시는 분’으로, 우리가 그분께 의지하고 봉헌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그분은 아기 예수님을 키우듯이 우리를 그렇게 돌보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모님께 우리 마음의 자리를 내어 드리는 만큼 성령께서 그 자리를 채워주신다고 하셨다. 성모님의 거룩한 짝은 성령이라는 것을 그 말씀으로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신부님은 묵주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알려주셨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기를 계속 반복되는 묵주기도가 뭐 그렇게 중요할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기들이 “마, 마” 같은 말을 반복하며 옹알이를 할 때 엄마들이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행복감을 맛보듯이 성모님께서도 우리가 반복해서 바치는 기도의 꽃다발을 기쁘게 받으시고 하느님 대전으로 올려주신다고 한다.
신부님은 묵주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일생을 묵상할 수 있다고 거듭 강조하셨다. 예수님 태어나심을 묵상하는 환희의 신비, 세례 받으심과 성체성사를 세우심을 묵상하는 빛의 신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를 묵상하는 고통의 신비 그리고 주님 부활과 성모님의 승천으로 이어지는 영광의 신비. 나는 신부님의 특별 강론을 듣고 나서 의무적으로 바치던 하루 5단의 묵주기도를 좀더 늘려볼 결심을 했다. 무리하게 욕심을 내어 하루 20단을 해보려고 했는데 내 의지만으로는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욕심까지 부린 결심은 이룰 수가 없었다. 10단을 겨우 바치고는 졸음에 겨운 눈으로 잠자리를 찾기에 바쁜 내 모습이다. 신부님 말씀대로 성모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다시 묵주기도를 시작해야겠다.
하느님 나, 친구 그리고 당신
-이회진신부-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오늘의 이 신비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구원 의지가 어떻게
우리 신앙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삶 안에 드러나게 되었는지를 묵상하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하느님과 마리아 사이에 이루어진 만남의 결과로 인해
이 세상에 드러나게 된 하느님의 사랑을 보게 되었고,
하느님의 존재와 그분의 의지를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첫 만남의 순간에 하느님과 마리아는 “어떤 모습의 만남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리아는 처음 천사 가브리엘의 전언(傳言)을 들었을 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루가 1,34) 하며
하느님과 자신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에게 하느님은 자신과는 다른 존재였기에,
마리아는 그런 하느님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어떻게 만나야 하는 지도 알지 못했던 것이죠.
그런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이라고 말합니다.
하늘이 땅을 덮어 하늘과 땅이 별개의 다른 존재가 아닌 사람이 사는 세상이 되었듯이,
하느님의 힘이 사람을 덮는다는 것은 하느님과 사람이 다른 존재가 아닌 하나인 존재,
즉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을 자신과 다른 “너”와 “나”라는 별개의 존재로서 만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존재 안에 자신을 두어 하느님의 사람이 되었고,
하느님 역시 마리아의 존재 안에 당신을 두어 사람의 하느님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어떻게 만나고 있습니까?
탈출 33,11에서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을 또한 떠올려 봅니다.
이때 모세와 하느님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사람들은
‘마치 친구처럼’ 만났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두렵기만 하던 하느님, 멀리 있다고만 느끼던 하느님을
모세가 ‘마치 친구처럼’ 만나고 있었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리아는 모세가 하느님과 친구가 되어
‘너를 내게 받아들이고, 너도 나를 받아들이는’ 그런 정겨운 친구와의 만남을 넘어서
마리아는 하느님의 사람이 되고, 하느님은 사람의 하느님이 되는
하느님과 사람의 새로운 관계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늘 하느님께 묻습니다.
“주님, 저는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그때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묻겠죠?
그러면“나는 너에게 무엇이냐?”
...
“주님, 한 마음에 두 개의 ‘나’가 있을 수 없듯이, 제 안에는 오직 하느님 당신 한 분뿐이십니다. 아멘.”
은총이 가득한 이
-강영구 루치오 신부(마산교구) -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대에게
오늘은 성모 무염시태(無染始胎) 대축일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앙(信仰)은 원죄(原罪)를 전제(前提)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원죄(原罪)에 물든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원죄(原罪)란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인류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유독 마리아님만 무염시태(無染始胎) 즉 원죄에 물들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보통 인간과는 다른 별종(別種)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받은 특은(特恩)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초대(招待)입니다.
마리아님의 무염시태(無染始胎)가 하느님 나라를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엄한 심판의 빌미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님은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초대에 응답합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비워진 그릇에 보물을 담듯이 예수를 받아 담습니다.
예수의 어머니가 된 마리아님은 예수의 길을 함께 갑니다.
세례(洗禮)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마리아처럼 무염원죄(無染原罪)의 특은을 누립니다.
그리스도인이 세례를 통해서 누리는 무염원죄(無染原罪)의 특은이 하늘나라(天國)를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늘나라에로의 초대(招待)입니다.
마리아님처럼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고
응답하는 사람이 하늘나라를 누립니다.
마리아님처럼 무염원죄(無染原罪)의 그릇이 되어
‘말씀’을 받아 담고 말씀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이 하늘나라를 누립니다.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겸손하신 어머니
-박동진 신부 -
노예와 종은 둘 다 부정적인 의미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누군가에 의한
종속상태냐 아니면 스스로 낮춤을 표현하느냐에 따라 달리 나타납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노예는 여러 가지 이름, 형태로 있어 왔습니다. 아주 심할 때는
모든 자유가 주인에게 속해 있어서, 심지어는 ‘죽는 것도 주인 맘이다’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모습은 달라도 요즘도 노예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동현장 체험을 하신 어느 분은,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하는데 심지어는 점심밥도 서서 먹게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이주노동자가
하소연을 하길래 기숙사에 가 보니, 아주 작은 단칸방에 세 명씩 밀어넣은 것을
보고 ‘교도소보다도 더 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처럼 누군가에 의한 종속,
예속상태는 하루 빨리 벗어날수록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낮춤을
표현하는 ‘종’의 자세는 누구나가 가져야 할 겸손의 모습입니다.
동방교회와 로마교회가 우위권을 놓고 논쟁을 하던 시기의 일입니다.
동방교회에서 로마교회의 우위권과 맞먹는 우위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당시 교황이신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거기에 대한
답변으로, ‘나는 종들의 종일 따름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그의 겸손이
존경을 뒤따르게 하였습니다.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는 세상의 노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주님의 종이 되는 것을 택하셨습니다. 그러하기에 마땅히
‘하느님의 어머니’로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하유설 신부(메리놀외방전교회)-
◆신학생 때 마더 데레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이 내 손을 잡을 때 강한 힘과 친절함을 느꼈지만 무엇보다 크게 다가온 것은 그분의 눈빛이었다. 그 순간에 그분과 나밖에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곧 축복의 눈길을 경험했다고 본다. 인도에서 마더 데레사 품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그 눈빛을 보고 자신이 소중한 사람임을 느끼며 축복 속에 죽어갔다는 말을 실감했다.
축복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곧 성숙한 여성과 남성의 특성이라 본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축복」이라는 책에서 여러 형태의 축복을 배우게 되었다. 먼저 우리의 오감을 사용하는 축복이다. 마더 데레사와 만났던 경험처럼 눈으로 바라보기.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님의 눈길은 아이의 정체성을 불러일으키는 소중한 축복이다. 손잡기. 육체적인 접촉은 아이의 성장에 필수적일 뿐 아니라 노인에게도 아주 필요하다. 말하기. 예수님은 축복하시며 이 모든 방법을 사용하셨다. 부자 청년을 사랑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시고, 아픈 사람을 어루만지시고, 많은 이에게 축복의 말씀을 하셨다. 다음 단계는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의 가능성을 믿기인데, 이는 그 사람들에게 특별한 미래가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축복이다. 또한 적극적으로 그의 미래를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축복이다. 예수님은 이 모든 축복 방법을 사용하셨는데 제자들 각자의 소중함을 보고, 그들의 가능성을 믿고 당신의 목숨까지 바쳐 달성하기까지 축복하셨음을 볼 수 있다. 이번 대림절에 누가 나에게 이러한 축복을 주었는지, 받은 축복의 경험을 돌이켜보자. 또 나는 누구에게 이러한 축복을 주었는지, 부모로서 자녀에게 이렇게 하고 있는지, 배우자에게 이렇게 하였는지?
몇 년 전부터 여동생이 가족끼리 전화할 때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로 제안했다. 그래서 이제는 모두가 실천하고 있는데, 동생이나 어머니에게 이러한 표현을 함으로써 더 가까워지고 사랑스럽고 축복을 주고받는 느낌을 받았음을 체험한다. 가족이나 수도 공동체는 축복이 넘쳐흐르는 곳이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와 천사,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대화는 축복을 주고받는 모범이다.
"나는 하자 없는 잉태로다."
-박상대신부-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다. 우선 오늘 대축일에 ‘한국 교회의 수호자’가 붙은 이유를 살펴보자. 1784년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된 이후 1831년 조선교구의 설정을 인가하고 수호성인으로 성 요셉을 지정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는 조선선교를 자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입국하지 못하고 북경에서 병사하였고, 제2대 교구장으로 엥베르 주교(1796-1839)가 임명되었다. 1837년 북경에서 주교성품을 받고 조선으로 입국한 엥베르 주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조선교구의 공동수호자로 모실 수 있기를 교황청에 청원한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 청을 받아들여 엥베르 주교가 순교한 후 1841년 8월 22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성 요셉과 함께 조선교회의 공동 수호성인(Compatroni)으로 선포하였다.
다음으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축일에 대하여 살펴보자. 우선 이 축일에 대한 생각이 마리아의 ‘탄신축일’에서 거꾸로 계산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신을 기념하는 축일은 동방교회에서 먼저 9월 8일로 지냈다. 이는 마리아가 탄생한 곳으로 여겨지는 예루살렘에 5세기말경 마리아 성당을 지어 봉헌한 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방교회에서는 제84대 교황 세르지우스가 재임기간(687-701) 중에 ‘성모영보축일’, ‘성모승천축일’, ‘성모성탄축일’, ‘마리아 빛의 축일’ 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4대축일을 정하고 우선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이를 경축하였다고 한다. 이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초대교회의 교의(敎義)와 신심에 근거한 것이었다.
마리아의 탄생 장소와 일시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탄생은 분명히 있었고, 탄생이 있으면 잉태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탄생 축일인 9월 8일에서 9개월을 거꾸로 계산한 12월 8일이 곧 성녀 안나가 마리아를 잉태한 날이 되는 것이다. 12월 25일 주님성탄대축일에서 9개월을 거꾸로 계산한 3월 25일이 주님탄생예고, 즉 주님의 잉태축일이 아닌가? 동방교회가 10세기경부터 12월 8일을 지정하여 ‘거룩한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잉태 축일”로 지냈고, 서방교회에서는 1100년 캔터베리의 안셀모 주교가 자기 교구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1476년 교황 식스토 4세는 이를 로마 전례력에 도입하였고, 1708년 교황 클레멘스 9세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잉태‘를 대축일로 전 세계 교회에 선포하였고,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 12월 8일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따라서 1855년부터 12월 8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 된 셈이다. 그러나 개신교회와 동방교회는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교리상의 문제로 삼고 있다. 325년 니체아공의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란 칭호를 드린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므로 마리아는 당연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이다. 후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가 잉태의 순간에 원죄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1854년 12월 8일 위풍이 당당한 교황 비오 11세가 대미사를 마치고 선언문을 낭독하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올 때 베드로 대성전 안에는 경외의 침묵이 흘렀다. “나는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잉태되신 첫 순간부터 원죄에 물듦이 없으심을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교의(敎義)로 확실히 선언하는 바이며, 이에 따라 모든 신자들은 이를 확실히 믿을 것을 선포한다.” 낭독을 마친 교황의 눈에서 기쁨과 경외의 눈물이 흘러내렸으며, 4만 명의 목소리가 감사가 ‘테데움’(Te Deum)을 노래했고, 로마의 모든 성당에서 종이 울렸으며, 그날 밤 로마는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바깥사람들은 가톨릭교회의 ‘성모무염시태’ 교의를 두고 좀 지나쳤다고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교의를 성모님 스스로가 추인(追認) 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1858년 2월 11일 루르드의 작은 동굴에서 일어난 성모님의 발현에서 시작된다. 성모님은 7월 16일까지 18번에 걸쳐 당시 14세의 소녀 베르나뎃타에게 발현하셨다. 3월 25일 성모영보축일, 12번째 발현한 성모님께 베르나뎃타가 “부인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침묵을 지키던 성모님은 소녀의 세 번째 물음에 “나는 하자(瑕疵) 없는 잉태로다.” 하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성모님 스스로가 4년 전에 선포된 ‘무염시태’ 교의를 추인해 주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성모님의 그 한마디 속에는 원죄(原罪)의 교리와 그리스도를 통한 강생구속 교리가 한꺼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원죄를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교의는 결코 마리아를 인간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마리아 또한 분명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그녀가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녀의 믿음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모두가 불가능하게 여기는 엄청난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잉태’를 가능하다고 믿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주님의 종이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몸에 품어 하느님께 인간의 생명을 선사한 마리아는 그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마리아의 이 엄청난 은총에 동참한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품위를 높여주시기 위해 스스로 인간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신 하느님 스스로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하고 눈물나도록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주님의 종입니다(루가 1, 28-36)
-유 광수신부-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어제 저희 수도원에서 두 수사님의 종신서원이 있었다. 종신서원이란 주님과의 결혼식이다. 즉 일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약속이다. 이들이 주님과의 결혼식을 거행하기 위해서 대략 34년의 시간이 걸렸고 수도회에 입회한 후 약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 두 수사님의 삶은 주례사제가 수사님은 오직 "평생을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예,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는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살아온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제부터 이 두 수사님의 삶은 주님과 약속한 "예, 저는 종신토록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고 약속한 이 삶을 죽을 때까지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이 두 수사님의 삶의 목표이고 삶의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 두 수사님은 언제나 또 어디에서 생활하든 오직 주님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예"라는 말은 아주 간단하지만 그
"예"라는 한 마디를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은 평생을 살아야만이 지켜지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 하느님이 들려 주신 소식을 듣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하셨다. 결코 성모님이 약속드린 삶을 살으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이미 요셉과 약혼한 처녀였다. 그런데 갑자기 낯선 분이 찾아와서 느닷없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한 말이나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입니다."라는 말씀이나,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라는 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며 또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대답하셨으니 정말 제정신 가지고 대답할 수 있는 약속들인가? 그렇지만 마리아는 주위 사람들의 몰이해 특히 약혼자였던 요셉마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헤어지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흔들림 없이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였다. 그 결과 인류를 구원하실 구세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수 있었고 또 당신의 구원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치실 수 있었다.
주님의 종이란 주님의 하인이라는 뜻이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주인을 섬기는 하인으로서 주인이 말씀하시는 것만을 하면서 살겠다는 것이다. 성모님이 "예"라고 말씀드렸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삶을 바치셨듯이 어제 종신서원을 하신 두 수사님의 앞으로의 삶도 "예 주님을 위해서 살겠습니다."라고 약속한 그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이 두 수사님이 앞으로 살아야할 길이며 목표이다. 나는 주님을 위해서 어떤 삶을 살겠다고 약속하였는가? 우리에게는 ".... 위해서 준비하고 ....위해서 종신토록 살겠다."라는 "예"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 각자가 가는 길이고 목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은총이 언제나 함께하시길 빕니다.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로 은혜받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단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