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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딩이 여러 책과 인터넷 자료 짬뽕해서 쓴 글이라 잘못된 점이 많을 수도 있으니 바로바로 지적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블로그에 쓴 글 복사해 온 것이라 각주 등 링크 누르시면 블로그로 가지니 주의해주세요~
수정법 아시는 분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화는 자료가 너무 적어서 애먹었는데 이번에 한 2화는 자료가 넘쳐나서 자료 선별이 매우 힘들었네요...
책마다 내용도 조금씩 다르고 해서 많은 각주를 다는 수밖에 없었...
<신의 용광로>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특히 많은 도움을 얻었는데 둘이 내용이 다른 점이 너무 많더라고요.
최근에 나온 <신의 용광로>가 좀 더 신뢰가 가긴 합니다.
라시둔 할리파1들이 다스리던 시절, 시리아 아미르2이었던 무아위야는
자신의 부하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기 위해선
양쪽에서 공격해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이에 무아위야는 히스파니아3 지역을 통해 전 유럽을 정복할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그는 조언을 해준 부하의 아들인 무싸 븐 누사이르를 아미르로 임명해
그 계획을 이루려 했으나 곧이어 터진 내전들로 그 계획을 잊고 만다.
내전을 수습한 뒤 무아위야는 본격적으로 유럽 정복 계획에 착수한다.
히스파니아로 향하려면 북아프리카의 이프리끼야와 마그리브 지역 정복이 선행돼야만했다.
무아위야의 명으로 푸스타트4에서 우끄바 븐 나피의 1만 군대가 이프리끼야를 향해 진격했으며
670년에 북아프리카 정복의 전진기지 카이르완을 건설한다.
그러나 마그리브 지역에 살고 있던 스스로를 자유인이라는 뜻의 아마지겐으로 부르던 베르베르족은
우끄바의 강압적인 이슬람화에 대항하며 무슬림 군대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시리아에 있던 무아위야는 함대를 보내 한쪽 방향으로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1화 참고) 결국 자신의 계획을 이루지 못한 채 숨을 거두었다.
이슬람 초기의 군대. 왼쪽부터 안솨르 - 투구의 노란 터번이 안솨르라는 표시다, 페르시아 투항병, 베르베르 보조병
우마이야조의 군대. 왼쪽부터 여성 보병 - 이 시기에는 여성들도 집을 지키는 등의 군사 활동에 나섰다, 근위병, 보병
680년, 우끄바5는 베르베르족을 소탕하기 위해 마그리브 정복에 나섰다.
그의 군대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마그리브의 심장부인 탕헤르 직전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했으나
돌아오는 길에 내륙 깊숙이 미들 아틀라스 산맥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매복 중이던 베르베르족에게 전멸 당하고 만다.
게다가 우끄바가 682년에 이프리끼야에서 벌인 ‘산속의 사자’ 쿠사일라가 이끄는
베르베르족 및 비잔티움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함으로써 마그리브 지역에서의 이슬람 권력은 붕괴해버렸다.
쿠사일라가 이끄는 부대는 684년 카이르완을 점령했고 고대 도시 가베스까지 밀고 나갔다.
쿠사일라가 죽은 후에도 베르베르족과 비잔티움, 유대인 연합군은
오레스의 카히나6의 지휘 아래 이슬람 정복자들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이에 맞서 우끄바의 뒤를 이은
주하이르 아미르가 이끄는 무슬림 군대는 688년(혹은 그 이듬해)에 카이르완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주하이르도 트리폴리 해안에서 비잔티움 제국 함대와 교전 중 피살당하고 만다.
이집트 아미르 하산 븐 알 누만이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해 카히나를 전사시키자 겨우 전세가 역전됐다.
그는 690년에 비잔티움 제국의 마지막 아프리카 도시 카르타고를 함락시켜
비잔티움 제국군을 영원히 아프리카에서 물러나게 했으며 베르베르족을 패배시켜
1만 2천명의 베르베르족 전사들을 자신의 군대에 입적시키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었다.
698년, 이프리끼야의 아미르로 하산이 해임되고 독실한 무슬림인 무싸 븐 누사이르가 임명되었다.
그는 오랫동안 마그리브 정복에 큰 공을 쌓아왔기 때문에 이집트 아미르의 지배를 받지 않는 최초의 이프리끼야 아미르가 되었다.
그가 아미르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큰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때 잡힌 포로만 30만 명이었다고 한다.
그는 전임 아미르들과는 다르게 베르베르족의 문화와 풍습을 존중해주고7 자카트를 면제해주었으며
다수의 베르베르 전사들을 자신의 부하로 채용했다.
채용된 전사들 중에는 톼리끄 븐 지야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무싸는 그의 뛰어난 군사적 자질을 알아보고 그를 마그리브 지역 정복에 앞장세운다.
무싸는 톼리끄와 함께 705년(혹은 그 이듬해)에 탕헤르를 함락시키고
얼마 후 쑤쓰 지역까지 정복함으로써 주까끄 해협8에 위치한 세우타9 요새를 제외한 전 마그리브 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가 되었다.
또한 그는 지속적인 비잔티움 제국 함대의 공격을 막기 위해 해군을 창설했으며 그 해군으로 발레아레스 제도를 정복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무싸에겐 유럽을 정복하고자 하는 마음이 거의 없었고
다마스쿠스의 할리파들도 제국이 더 이상 확장하는데 우려를 표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히스파니아를 통치하고 있던 서고트족의 상황은 어떤 적이라도 쳐들어오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하는데 충분했다.
원래 다키아10 지역에 살고 있던 서고트족은 훈족에 쫓겨 4세기에 로마 제국의 영토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5세기 초에 알란족, 수에비족, 반달족들을 막기 위해 로마군과 연합해 처음으로 히스파니아에 들어와 왕국을 세웠고
6세기에 프랑크족과의 전쟁에서 패배해 갈리아 남부를 상실한 뒤 계속해서 이 지역에 살고 있었다.
이슬람 제국이 마그리브 지역을 정복해 갈 때 당시 40만 명 쯤 되던 그들은 5백만 명이나 되는 원주민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심했는데, 이들은 북아프리카로 건너가 무슬림 군대에게 많은 정보를 안겨 주었다.
3, 4세기 고트족의 모습
5~6세기 고트족의 대이동
이 서고트 왕국의 정복은 마그리브 지역에 홀로 남은 비이슬람 도시 세우타에서 시작되었다. 세우타는 지중해 남부 연안의 여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너무 멀리 있었기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은 그 땅의 방위를 히스파니아의 서고트족에게 맡겨두고 있었고 당시 세우타는 서고트족의 장군인 줄리안11이 다스리고 있었다. 무싸는 이 요새를 한번 공격해봤다가 격퇴당한 적이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줄리안은 그의 딸 플로린다를 서고트 왕국의 궁정 숙녀로 교육시키기 위해 서고트 왕국의 수도 톨레도로 보냈다. 그러나 그녀가 궁정에 도착한 직후 늙은 위티자 왕이 사망했고 왕위를 둘러싼 싸움이 벌어졌다. 결국 위티자 왕의 맏아들인 아킬라가 쫓겨나고 로데리크라는 자가 왕이 되었는데 그는 플로린다를 강간하여 임신시켰다. 고향으로 돌아온 플로린다는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일러바쳤고, 그리하여 복수심에 불타는 줄리안은 아킬라 대공, 탕헤르 아미르 톼리끄 등과 연합하여
반역을 계획하게 되었다고 한다(루이스 2010: 187-188).
줄리안은 무싸를 방문하여 아름답고 풍요로운 히스파니아 정복을 제의했다.
이에 무싸는 관심을 가지면서도 심사숙고 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다마스커스에 있는 할리파 왈리드 븐 아브드 알 말리크에게 직접 보고하였다.
무싸는 711년 톼리끄에게 적을 정찰하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톼리끄는 이미 1년 전에 부하 타리프 븐 탈리브가 100명의 아라비아 전사들과 400명의 베르베르 전사들을 이끌고
이베리아12 남단 해안에 상륙해 마을을 약탈하고 가져온 정보가 있었다.13
몇 주 동안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재화와 부를 그냥 주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용기를 얻은 톼리끄와 다른 20명의 장교들은
1만 2천 명의 아라비아 군, 7천 명의 베르베르 군과 7백 명의 흑인 군14을 동원해
줄리안이 제공한 4척의 배에 나눠 타고 주까끄 해협을 건너 히스파니아로 향했다.
당시 히스파니아 지역을 라틴어로 고트족의 땅이라는 뜻의 소르테스 고티카라고 불렀는데
이것을 고트식으로 읽으면 란다 하울라츠가 되고, 이것을 다시 아라비아식으로 읽으면 안달루쓰(al-Andalus)15가 된다.16
이제 이 땅은 8백년 가까이 안달루쓰라고 불리게 된다(최영길 2009: 66).
무슬림 연합군은 칼페 산17이 바다와 수직으로 만나는 반도에 상륙했다.
그들은 그날을 기념해 그 산에 ‘톼리끄의 산’이라는 뜻의 자발 앗 톼리끄18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톼리끄는 상륙하자마자 부하들에게 이런 말을 해줬다고 한다.
오, 나의 전사들이여, 어디로 피하겠는가? 뒤는 바다고 앞에는 적들이 있다. 지금 이 순간 남은 건 오직 용기와 절개뿐이다. 이 나라에서 우리의 처지는 잔혹한 주인의 식탁에 앉은 고아보다도 더 불행한 입장이라는 걸 명심하라. 우리 앞의 적은 엄청난 규모의 군대로 무장하고 있다. 적들에게는 수많은 병사들이 있지만, 우리는 단지 자기 검만을 가지고 스스로 방어해야 한다. 목숨을 유지할 기회는 적의 손아귀에 있으니 낚아채야 한다. 이제껏 욕망을 절제했던 태도가 조금이라도 해이해지거나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그대들의 운은 다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공포에 휩싸였던 적들은 다시 용기를 얻을 것이다. 꿈속으로 도피하려는 치욕스런 생각을 멀리하고, 눈앞에 있는 강력한 요새 도시의 군주를 공격하라. 죽음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한다면 그를 패배시킬 멋진 기회가 주어질 것이다. 그대들만 위험을 무릅쓰도록 선동한 뒤 나는 뒤로 빠질 거라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마라.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해도 나 스스로 맨 앞에 나서서 공격 전선에 뛰어들 것이다.
고통스런 순간을 조금만 참는다면 곧 엄청난 보상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대들과 나는 한 배를 탄 운명이다. 만약 그대들이 부상당한다면, 나는 부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러분의 복수를 할 것이다. 이 나라에 아름다운 그리스 출신 여자들이 많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것이다. 아름다운 몸을 진주, 산호, 순금의 호화스런 옷으로 치장한 그녀들은 왕실 궁궐에 살고 있다. 진정한 이슬람 신도이자 통치자이며 압드 알 말리크의 아들인 알 왈리드가 모든 아랍 전사들 가운데 그대들을 선택했다. 그의 동지가 됨과 동시에 이 나라에서 상류사회의 일원이 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대들의 용맹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가 그대들의 용맹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단 한 가지이다. 바로 이 땅에 신의 말씀이 울려 퍼지고 진정한 종교가 이곳에 뿌리내리는 것이다. 그 외의 모든 전리품들은 다 그대들의 것이다.
그대들을 격려해 나서는 이 전쟁에서 내가 앞장설 것임을 명심하라. 적과 직접 대면해 싸우는 순간이 오면, 신의 뜻에 따라 독재자 로데리크를 찾아내 결투하는 내 모습을 분명히 보게 될 것이다. 결투 후에는 내가 죽게 될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여러분들에게 이런 말을 했으니 만족한다. 그대들 중에서 임무 지시를 내릴 수 있는 믿을 만한 노련한 지도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로데리크를 만나기 전에 죽는다면, 열정을 다잡아 공격에 몰두해 이 나라를 정복하고 로데리크를 죽이도록 하라. 그를 죽인 뒤에는 군사들을 해치우는 데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모건 2009: 47-48).
톼리끄는 신임하는 장수 두 명을 데려왔는데 한 명은 1년 전 해안을 습격한 타리프 븐 탈리브이고,
다른 한 명은 무기트 알 루미19다.
며칠 뒤 톼리끄는 타리프를 만 건너편으로 보내 고대 로마 정착지 폐허에 교두보를 확보하라고 지시했다.
그 곳을 교두보로 톼리끄의 주력 부대가 합류하자, 이들은 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해안 지대로 행군했다.
그곳은 알헤시라스인데 아라비아어로 ‘푸른 섬’이라는 뜻의 알 자지라20 알 하드라라고 불렀다.
지브롤터
마그리브와 안달루쓰
7월 초, 톼리끄는 기병 부대를 인솔하여 산간 지대로 들어갔다. 아라비아 기병 부대가 베르베르 조랑말에 올라타서 작은 만과 절벽이 즐비한 해안 지대를 벗어나, 북쪽 내륙의 소나무 삼림 지대로 재빠르게 달려가자 놀란 현지 농부들은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711년 이전에도 무슬림이 해안 지대를 약탈한다는 보고서는 간간이 올라왔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침략이라는 것을 톨레도의 로데리크는 금방 알아차렸다. 적들은 왕이 아주 어려운 시기에 쳐들어 온 게 틀림없었다.
북부에서는 바스크족의 반란이 있었고 남동부에서는 아킬라 대공과 그 형제들이 계속 반항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왕의 깃발을 올리자, 대부분의 귀족들은 서고트 전통의 깃털 달린 전투모를 쓰고 황금이 장식된 가슴막이를 입고서 수도로 달려왔다 (루이스 2010: 189~190). 7월의 셋째 주, 드디어 톼리끄가 이끄는 병사들은 로데리크가 이끄는 서고트 병사들과 과델레테 강 근처(또는 헤레스)에서 전투를 벌인다. 진주 왕관을 쓰고 황금가 비단실로 수놓은 치렁치렁한 예복을 입고 흰 노새 두 마리가 끄는 상아 가마에 기대고 앉은21 로데리크가 이끄는 서고트 군대는 톼리끄의 군대보다 수가 약간 더 많았지만 오랜 평화에 익숙해져 있는 병사들이었다.
반면에 톼리끄의 군대는 오랜 정복 사업에 참여한 적 있는 전사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거기다가 무슬림 군대가 쳐들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온 유대인들 또한 무슬림 편에 서서 서고트족에 맞섰다. 전투가 시작되자 무슬림 군은 재빠르게 치고 빠지는 전술로 적을 공격했다. 이에 서고트 군은 견고한 진형을 유지하며 맞섰다. 무슬림 군대는 용맹스러웠으나 워낙 수적으로 밀렸다. 전투 5일 째, 치열한 전투 중에 갑자기 서고트 군의 한쪽 날개를 맡은 기병대가 적에게 길을 열어주었다.22 그 사이로 톼리끄의 무자프파파 기병대23가 들어가 순식간에 적의 진형을 무너뜨렸다. 전투 중에 부상을 입은 로데리크는 계곡으로 몸을 던졌고24 대다수의 귀족들도 무슬림 군대에게 목숨을 잃었다.
무슬림 군대 또한 1/4 정도가 사망해 꽤 큰 손실을 입었다. 어쨌든 이 한번의 끔찍한 전투로 서고트 왕국의 고위 계급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서고트 귀족의 머리들은 장뇌에 적신 천으로 싸서 화려한 칼자루, 금반지 등과 함께 다마스쿠스로 보내졌다. 과델레테 전투의 대승이후 톼리끄는 서고트의 수도 톨레도로 진격하는 동시에 세우타 지사 줄리안의 조언에 입각해 700명 정도의 기병을 무기트에게 맡겨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코르도바 점령 명령을 내렸다. 톼리끄의 본대가 옛 로마 시대의 도로를 따라 동진하는 동안 무기트의 별동대는 또한 옛 로마 시대에 지어진 단단한 요새인 코르도바 앞에 도착했다. 그들이 공격에 나섰을 때 서고트의 귀족들과 병사들은 이미 도망치고 없었고25 도시 안은 많은 시민들의 환호로 가득 찼다.
무기트는 즉시 적의 추격에 나서 한 명도 빠짐없이 죽이는데 성공한다. 이들의 머리와 보석들 또한 다마스쿠스로 보내졌다. 코르도바로 돌아온 무기트는 유대인들과 ‘협조적인 기독교도들과 소규모 무슬림 파견대’에게 도시를 맡겨 두고 톼리끄의 뒤를 쫓아갔다. 무기트의 별동대와 합류했다 하더라도 톼리끄의 본대엔 로마인들이 건설한 천연의 요새 톨레도를 함락시킬만한 충분한 병력도, 공성무기도 없었다. 그러나 톨레도의 수비병들은 항복조건에 동의했고 이에 톼리끄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유대인들의 환호성 속에 입성했다. 그들은 20만 디나르의 가치가 있는 톨레도의 대성당 제단인 ‘솔로몬의 탁자’26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 더 많은 전리품을 원했던 그들은 역시 유대인들에게 도시를 맡겨두고 도시를 버린 채 도망간 성직자들을 추격해 학살과 약탈을 행했다.27 톼리끄가 히스파니아의 심장부를 점령하는 동안 북아프리카에 있던 무싸 븐 누사이르는 둘째 아들에게 이프리끼야 아미르를 맡겨 두고 712년 6월, 톼리끄를 지원하기 위해 예멘계 아라비아인 1만 8천 명을 이끌고 해협을 건너 줄리안의 환영을 받으며 알헤시라스에 상륙했다. 무싸는 원래 톨레도에서 톼리끄와 합류할 생각이었으나 톼리끄가 그냥 지나친 남부 도시들을 점령하기로 하고 카디스를 점령한다. 그 후 로마시대 히스파니아의 주도였던 세비야 공격에 나선다. 세비야는 다른 도시들과는 다르게 3개월이 넘는 공방전을 거쳐 함락시킬 수 있었다. 소규모 부대와 유대인들에게 세비야를 맡겨두고 서고트 잔당을 공격하러 베자28로 향했다. 그 곳에서 무싸는 병력의 절반을 맏아들 아브드 알 아지즈에게 맡겨 남쪽 무르시아의 서고트 잔당의 소탕 명령을 내리고 자신이 이끄는 주력 부대는 북동쪽의 메리다로 향했다. 히스파니아의 기독교 중심지였던 메리다는 서고트 귀족들과 사제들에게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 도시였다. 이 도시는 서고트 도시들 중에서 무슬림에 맞서 방어 준비가 가장 철저했다. 무슬림 군대가 도시를 포위했지만 수도교를 통해 도시 내로 계속해서 물이 공급되고 있었다. 결국 히스파니아에 온 이래로 무슬림 군대는 처음으로 공성 무기를 만들어야만 했다. 또한 도시를 지키던 서고트 지휘관이 성문을 열고 기습공격을 해 무슬림 군대에 피해를 입혔다. 5개월 동안의 공격에도 서고트족의 방어는 무너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한편 아들 아브드는 여러 차례 교전 끝에 713년 4월, 무르시아의 대공 테오데미르의 항복을 받는다. 아브드는 지즈야와 군사 정보에 대한 조건으로 테오데미르에게 무르시아의 자치를 맡겨 두고 기독교 유지도 허락해줬다. 그는 메리다에서 고전하고 있는 아버지의 군대에 합류해 한 술책을 내놓았다. 그는 병사들의 수염을 붉게 물들여 적을 겁주려고 했으나 서고트족은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이 때 무싸의 부대에 속해있던 세우타 지사 줄리안이 자신의 병사들을 이끌고 메리다의 성벽 앞으로 나아갔다. 메리다를 지키던 수비병들은 줄리안의 부대를 기독교 지원군으로 착각해 성문을 열어 줬고 도시는 함락되었다.29 무싸는 기독교도들에게 도시를 떠날 수 있게 허락해 줬고 도시의 행정은 역시 유대인에게 맡겼다.
무싸는 톨레도로 톼리끄를 만나러 떠나고 아들 아브드는 세비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떠났다. 아브드는 반란을 간단하게 진압하고 북상해 오늘날 포르투갈 지역의 서고트 잔당 토벌을 벌였다. 코임브라와 산타렘을 함락시키고 나서야 아브드의 정복이 끝나게 된다.30 한편 무싸는 톨레도 서쪽 탈라베라에서 톼리끄와 만났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많은 기록들이 무싸에게는 은근히 톼리끄를 견제하는 마음이 있었다고 하고 몇몇 기록에서는 톼리끄를 붙잡아 벌을 줬다고도 한다. 어쨌든 톼리끄는 무싸에게 ‘솔로몬의 탁자’를 포함한 여러 전리품을 바쳤다.31 그들이 함께 있는 동안 무싸의 지시를 받고 다마스쿠스의 할리파에게 보고서를 제출하고 온 무기트가 답장을 받고 돌아왔다. 답장에는 다마스쿠스에서는 현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점령 작전을 세우고 있으니 히스파니아는 접어두고 모두 다마스쿠스로 돌아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무싸의 정복을 시기했고 심지어 무싸가 독립국이라도 세우지는 않을까 의심했던 다마스쿠스 귀족들의 속셈이 반영된 지시였다. 하지만 무싸와 톼리끄는 이제 와서 회군한다면 현재까지의 정복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에브로 강과 두에르 강 너머에서 재편성되고 있는 저항 세력들을 소탕하기 위해 아라곤 주로 들어갔다. 그들은 아라곤의 주도 사라고사32를 가위처럼 양쪽에서 공격해 함락시키는데 성공한다. 고트인들은 피레네 산맥 너머 랑그도크의 갈리아 속주까지 추격당했다. 유명한 도시 카르카손도 점령됐었고, 론 강 계곡의 아비뇽과 리옹을 마지막으로33 무싸의 부대는 이베리아 반도로 돌아갔다. 무싸는 본래 예전 자신의 아버지가 계획했던 것처럼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진격할 생각이었지만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것이다(노리치 2009 : 142).
톼리끄의 부대는 레온과 카스티야로 들어가 레온과 아스토르가를 점령했고 무싸 역시 에브로 강을 따라 아스투리아스로 들어가 오비에도를 함락시켰으며 비스케이 만 일대까지 휩쓸었다.34 할리파의 지시를 어김으로써 무싸와 톼리끄는 714년 가을에 이르러 히스파니아 전역을 점령할 수 있었다. 무싸는 ‘오직 알라만이 주이시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使者)이다’라는 말을 아라비아어와 라틴어로 새겨 넣은 황금 동전을 주조함으로써 이슬람의 히스파니아 지배를 선언했다.
이슬람의 안달루쓰 정복. 빨간 선은 톼리끄의 군대, 노란 선은 무싸의 군대, 분홍색은 아브드의 군대다.
무싸는 곧 안달루쓰로 알려지게 될 땅의 수도로 세비야를 선택하고 그곳에
아들 아브드를 아미르로 남겨두고 톼리끄와 함께 714년 9월 다마스쿠스를 향해 출발했다.
할리파의 귀환 명령을 지체한 대가로 불명예나 죽음을 당할 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들은 400명의 서고트 죄수들과 1천 명의 처녀들, 수천 명의 노예들35, 100마리 이상의 노새 등을 가득 채운 금은보화를 가지고
다마스쿠스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이 다마스쿠스에서 2주 정도 시간이 걸리는 팔레스타인의 티베리아스를 지날 때 할리파의 동생으로부터 전령이 왔다.
할리파가 몹시 위독하니 서거 소식이 있을 때까지 현 위치에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이는 무싸의 히스파니아 정복을 할리파의 동생인 자신이 할리파가 된 이후의 업적으로 만들 속셈이었다.
그러나 무싸는 할리파가 될 사람의 명을 거절하고 당당하게 다마스쿠스 시내로 개선했고36
모든 영광을 자신을 의심하고 견제했던 이젠 죽어가는 할리파에게 돌렸다.
이에 시민들은 무싸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할리파는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두 달이 못 되어 사망했다.
이제 할리파의 자리에 전 할리파의 동생인 술레이만 븐 아브드 알 말리크가 올랐다.
그는 두 정복자에 대한 불쾌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새 할리파는 무싸의 모든 전리품을 요구했고37 무싸는 이를 거절했다.
결국 무싸는 모든 직위가 박탈되었고 전리품 또한 모두 뺏겼다.
할리파는 또한 당시 76세였던 무싸의 목에 밧줄을 매단 채 다마스쿠스 거리를 행진하게 시켰다.
이슬람 제국의 영토를 대서양 연안까지 확대시킨 위대한 장군은 길거리에서 구걸로 겨우 살아가는 걸인이 되고 말았다.
할리파 술레이만은 무싸 외에도 투르크스탄과 신드의 정복자들에게도 비슷한 벌을 내렸다.
톼리끄의 경우에는 그간 쌓은 공훈 덕분에 용서를 받고 노예가 될 수 있었다(기번 2009: 352).
안달루쓰 이슬람 문화의 극치를 보여주는 알람브라 궁전38
5세기 경 서고트 전사
무싸의 뒤를 이어 받은 아브드는 로데리크의 아내였던 에길로나39와 결혼했으며 안달루쓰를 통치하면서 여러 법령을 제정하였다.
그는 농업과 도로건설에 힘썼으며 서고트족의 전제정치에 억압되어 있던 백성들을 해방시키고
무거운 세금을 줄였고 민족이나 종교에 의한 차별을 철폐하고 백성들의 자유와 재산을 보호하였다.
또한 무슬림 정복자들에게는 자신처럼 국제결혼을 장려했다(최영길 2009: 67).
그러나 그는 누군가에 의해 암살되고 만다.40
그의 머리는 다마스쿠스로 보내져 할리파에 의해 무싸를 포함한 대중에 공개되었다.
할리파는 무싸에게 이 머리가 누구의 것인지 아냐고 물었고 무싸는
‘알고말고. 이 아이의 무고함을 주장하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은 그와 똑같은,
아니 한층 정의로운 운명을 맞이할 것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기번 2009: 352).
무싸는 죽을 때까지 할리파를 저주하며 살았다.
이제 막 이슬람 제국에 편입된 안달루쓰.
게르만족들의 약탈과 뒤이은 서고트족들의 강압적인 통치, 그리고 오랜 기근과 무슬림들의 침입이 이어달리기하듯
이어지며 문화는 문화대로 경제는 경제대로 파탄 날 지경에 까지 이르러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달루쓰 지방의 사람들은 그곳이 800년 동안 찬란한 이슬람 문화를 꽃피울지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참고 문헌
데이비드 리버링 루이스, <신의 용광로>, 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2010.
마이클 모건, <잃어버린 역사, 이슬람>, 김소희 옮김,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9.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 송은주/김혜진/김지현 옮김, 민음사, 2009.
이븐 바투타, <이븐 바투타 여행기>, 정수일 역주, 창비, 2001.
존 줄리어스 노리치, <지중해 5,000년의 문명사>, 이순호 옮김, 뿌리와 이파리, 2009.
최영길, <아랍에서 출발한 이슬람의 역사와 문화>, 세창출판사, 2009.
인터넷 참고
http://blog.naver.com/byron1st 휘이씨, <Life is METAL - 네이버 블로그>.
http://ko.wikipedia.org/wiki 위키백과
http://www.britannica.co.kr/ 브리태니커
사진 출처
1쪽 중간 : 영국의 오스프리 출판사(Osprey Publishing)의 책 중 하나에서 나온 것인데 책 제목을 모르겠다.
2쪽 중간 좌 : 위키백과, 우 : 브리태니커
4쪽 상단 좌 : 브리태니커, 우 : 구글어스 (글씨는 직접 넣음)
6쪽 중간 : 구글어스 (표시는 직접 넣음)
7쪽 상단 좌 : 위키백과, 우 : Germanic Warrior 236-568 AD Weapons Armour Tactics
1화는 자료가 너무 적어서 애먹었는데 이번에 한 2화는 자료가 넘쳐나서 자료 선별이 매우 힘들었다.
책마다 내용도 조금씩 다르고 해서 많은 각주를 다는 수밖에 없었다.
<신의 용광로>와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특히 많은 도움을 얻었는데 둘이 내용이 다른 점이 너무 많았다.
최근에 나온 <신의 용광로>가 좀 더 신뢰가 가긴 한다.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다음편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시험기간이라 다음편은 언제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ㅠㅠ
억후 좋은 글입니다 (__) 이렇게 자세하게 다루는 글은 처음 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