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했다. 27년전 그날을 소재로 제작된 영화 '화려한 휴가'에 대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마음 한 구석은 마치 혀에 가시가 박힌 것 처럼 불편하기만 했다. 우선 영화를 보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고민스러웠지만 영화를 보지 않아도 훤히 짐작이 가는 그 끔찍한 살인과 폭력의 현장을 적나라하게 재현한 모습을 내가 지켜볼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마침 r강사랑에서 '화려한 휴가'를 단체로 감상하기 위한 번개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동참하리라.' 결심했다. 이렇게라도 해야만 영화를 피하지 않고 볼수 있는 심약함이 한심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게 있어 '광주'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동추님. 오션님. 전재용님. 심경당님. 세라님 등 반가운 얼굴들과 함께 식사를 마친 뒤 영화관에 입장했다. 사실 이런 단체 관람은 내가 학생 이엇던 유신시대에는 가장 보편적인 영화 감상 방법이었다. 그때 관람한 영화 대부분이 반공 영화였고 '빨간 마후라' 돌아오지 않는 해병, 들국화는 피었는데..'등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조국과 사랑하는 가족들의 생명과 행복을 지키기 위해 장렬하게 산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30년 만에 다시 접하는 단체관람 기회는 앞의 영화들과는 전혀 상반된 모습을 지닌 군인들을 지켜봐야 한다니, 이 또한 아이러니라 아니 할 수 없다.
영화가 시작 되었다. 평화로운 삶을 이어가던 광주가 도시에 난입한 '군복 입은 폭도들'에 의해 죽음의 도시로 변해가는 과정을 지켜보기는 역시 불편했다. 비록 소속은 달랐지만 나 또한 같은 제복을 입고 그 현장의 한 구석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제복 입은 폭도들에 의해 비극적으로 죽어간 '광주사람들'의 죽음을 담담히 그려내긴 했지만 제복입은 폭도들의 배후에 존재하는 신군부 주역들이 자행한 사실상의 '학살 교사'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두 시간 짜리 영화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화려한 휴가'는 죽어가는 주인공의 입을 통해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니었다."고 절규하고 있다.
'화려한휴가'는 수백명이 사망하고 수천명이 다치거나 실종된 채, 총체적 실체가 국민에게 알려지지 못한 27년전 비극의 현장에 숨은 그림을 맞춰보려는 첫 시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입소문을 통해 전해들어 막연하게 '광주항쟁' 혹은 '광주사태'로 기억하는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그때 광주시민들이 무엇을 지키기 위해 싸웠는지, 어떻게 항거하고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잘 보여준다. 영화 '화려한 휴가'가 가지야할 가치는 이미 이것 만으로도 차고 넘친다.
영화가 암시하는 그날의 진실..
"왜 5.18 같은 비극이 일어났을까?" "왜 하필이면 광주에서 ..?" 비록 제한적이지만 영화는 이 질문에 다음과 같은 암시를 주고 있다.
'이미 12.12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가 최규하의 과도체제를 종식시키고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위한 계기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더 혼란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고, 특히 안보와 관련한 위기가 급박하게 조성되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신군부가 나서서 그 혼란을 수습하며 집권의 당위성을 국민에게 납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일찍이 광주학생항일운동으로 일제에 저항해왔고 유신독재에 저항하며 정치 거목으로 성장한 '김대중'을 구심점으로 뭉쳐있는 호남사람들에게 적진에 침투하여 적을 교란하고 타격을 주는 것이 주 목적인 공수특전대를 투입함으로서 이미 광주시민들의 반발은 예견되어 있었다.
화려한휴가 총을 든 광주시민은 폭도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미증유의 비극이 단지 타 지역 주민에 비해 호남인들이 좀더 저항정신이 강하고 단합이 잘되는 광주였기에 가능했던 것 만은 결코 아니다. 조금만 생각을 달리해보자. "만약 대구나, 대전이나, 혹은 서울에서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 그것도 최정예의 특수부대가 영화처럼 주민을 무차별 폭행하고 살상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도시가 어디에 위치했던, 그 지역 주민의 정치적 성향이 어쨌건 간에 그 야만적 폭력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은 나라와 국민의 행복을 수호하기 위해 선발되고 훈련된 군인들이 오히려 주인을 향에 이빨을 들이대는 그 상황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불행하게도 영화가 재현하는 그 시기에 계엄군의 신분으로 광주에 있었고, 수 많은 폭력의 희생자를 직접 목격하였다. 당시 나는 신병교육을 마친지 몇 개월 되지 않은 신출내기 사병이었다. 처음에는 지역 계엄사령관에게 있었던 자위권(발포권)이 연대장, 대대장을 거쳐 시시각각 중대장 그리고 마침내 "적(당시 군인에게는 시민군이 적이었다.)이 발포하면 즉시 응사하라."는 사실상의 발포 명령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 나는 심각한 갈등에 빠져야 했다. 군인이 명예로운 것은 자신이 희생함으로서 조국의 그리고 부모와 형제들의 안위와 행복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 강요당한 눈 앞의 적은 군복을 입은 군대가 아닌 고향에 두고온 내 가족과 다름 없는 우리 국민들이었다.
당시 지휘관들은 '선량한 시민과 폭도가 뒤섞여 있다.'고 말했지만 '선량한 시민과 폭도'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나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왜냐하면 '폭도'란 원래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광주에 가족들이 살고 있는 중대장은 수 백미터 앞에 살고 있는 가족의 생사를 알지 못해 애태우고 있었고, 전남대 출신인 소대장 역시 주변 친지들의 안부를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광주 출신 소대원 몇명 역시 아수라 지옥으로 변한 도시에서 가족의 생사를 몰라 입술이 타 들어가고 있었다. 소대의 선임하사는 호남 출신히 유달리 많은 우리 소대를 '빽군대'라고 불렀지만 그 역시도 호남 출신 이었다.
더는 이 땅에 부끄러운 군인이 없기를..
하지만 우리는 군인 이었다. 지휘관들이 '적'이라고 말하는 '폭도'의 실체를 기어이 '선량한 시민'과 구분해 내야만 했었고, 폭도들을 제압하는 것은 우리에게 부여된 피할 수 없는 임무였다. 실전에 배치되기 직전 혹시라도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비장한 마음에 동기병과 서로에게 남긴 유언이 떠오른다. '혹시라도 내가 죽으면 내 가족들과 사랑했던 그녀에게 내 소식을 전해달라.'고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전선에 배치되었고 곧 바로 총격에 의해 처참하게 사망한 시신들을 볼수 있었다. 사복을 입은 시신처리 담당자가 희생자가 '폭도'였는지 '선량한 시민'이었는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시신에 신분증이 있으면 시민이었고 신분증이 없으면 폭도 였다. 이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폭도와 시민으로 분류된 시신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나는 모른다.
화려한휴가 적진에 깊숙히 침투 교란하는 것이 주 임무인 특전대원이 무고한 시민을 향해 갈고 닦아온 폭력을 마음 껏 휘둘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당시 우리가 적으로 여겼던 폭도들은 소문처럼 조직적이지도 않았고, 나라의 전복을 꿈꾸지도 않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증거들이 속속 드러났고 5.18은 '폭동'이 아니라 '민주화 운동'이었다는 법적 역사적 심판을 받음으로서 그 때 그 자리에서 군인과 대치하던 시민들은 폭도가 아니었으며, 그 경위가 어찌됐던 광주시민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우리들은 자신의 부모 형제들에게 총구를 겨눈 불행하고 부끄러운 군인의 이력을 가슴에 담고 살아야만 했다.
많은 시간이 흐르면 아물줄 알았던 상처가 시간이 흘러도 아물지 않고, 떼어 낸 피딱지에 쓰라린 피가 흐르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비극의 도시 한켠에 있었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비극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직 명확하게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21일 전남 도청 앞 광장에서 있었던 무차별 총격을 누가 명령하였으며, 왜 그래야만 했는지 짐작만 할 뿐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충정작전'에 의해 도청을 탈환 한 며칠 후 우리는 빗자루를 들고 거리로 나섰다. 아스팔트에 말라 붙은 희생자들의 피자국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많은 내.외신 기자들의 카메라 앞에서 아스팔트에 스며든 피자국을 지우기 위해 물을 뿌리고 수세미로 문질렀지만 억울하게 산화한 피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 그렇게 지우려고 애썼던 피의 흔적이 나의 이드 깊숙히에 스며들었나 보다.
화려한휴가 그것이 비록 명령일지라도 부모와 형제를 향해 총구를 겨누는 불행한 군인이 다시는 없기를...
그 이후로 나는 단 한번도 광주를 찾지 않았다. '화려한 휴가'는 겨우 말라 붙은 피딱지에 다시 쓰라린 통증을 준다. 아무래도 광주를 다녀와야 할 것 같다. 그 때 도청 뒤의 식당에서, KBS방송국 뒤편에서, 전남대학교 캠퍼스 부근에서 죽음의 공포에서 채 벗어나지 못했지만 선하기만 했던 구수한 입담의 주인공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 그리고 억울하게 고혼이 된 영령들의 영전에 '우리는 참 부끄러운 군인' 이었노라고, 그리고 진정으로 '이 땅에 다시는 우리와 같은 불행한 군인들이 없기를' 희생된 영령들의 이름을 받들어 기원하고 싶다.
역시 이요원이군요. 고양이를 부탁해....고양이는 고졸 여직원을 칭하는 속어인데...그런데 광주에 출동했던 군인들은 불행한 군인들이지만 그들의 출동을 지휘했던 장군들은 불행한 군인이 아니고 아직 행복한 존재들이겠지요. 텔렌트를 며느리로 맞이할 만한...결과를 두고 법적 판단이 내려져야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단순하게 발포권에 집착하는 연역적 사고가 5.18문제해결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 아닐까요. 5.18살인은 결과이며 그 원인은 출동명령자체에 있는 것이지요. 꼭 발포명령자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데 <내친구 빈센트>라는 책을 써서 고호전문가로 알려진 영남대 법학교수 박홍규박사가 사기죄역시 내란죄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는 물꼬를 터주었고 그래서 전노에 대한 1,2차적인 처벌이 가능했던 것이었고..이제 3차원의 처벌,, 이것은 시민세력이 주도하는 어느 정도 자발적인 형식의 재산 헌납이나 고백형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그것을 거부하면 역사적 책임을 열배는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6.25를 경험한 어떤 연만하신 분이 5.18과 육이오의 피해규모를 양적으로 비교하시는 것을 듣고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육이오는 남과 북이 어쨌든 한번씩 치고 받았던 과정이 있어서 화해가 가능한 지 모르지만 5.18은 질적으로 그 刺傷,즉 칼자국이 깊고 넓은 정신적 內傷이라 결코 쉽게 화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가해자들이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으면 국운이 기울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 분열과 동서갈등의 깊은 골은 여러가지 정치적 변명과 경제적 실익을 포장하고 있지만 그 뿌리는 바로 5.18일것입니다. 5.18로 인한 민족의 분열과 불신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회 각분야가 계속 삐걱댈 것입니다. 물론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도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뉘어서 가면무도회가 성행할 것이고...불행한 일입니다. 정말 정치가 잘못 방향을 비틀어놓아 바로잡기도 힘들고..
역사청산은 전,노 스스로가 결자해지할 일이며 어쩌면 광주는 5.18로 인해 역사적 부채로부터 자유롭고도 홀가분해졌을수도 있으나 비호남은 더 심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지역주의타파는 대증요법으로서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병의 뿌리,즉 영호남분열의 원인은 어중간하게 봉합해 버린 역사청산에 뒤이은 삼당야합이었습니다. 물론,그 봉합의 논리에 깊게 자리한 또 하나의 이유는 전,노세력의 주둥이에서 전남도청진압작전을 펜타곤이 승인했다는등의 망발이 나올 것을 두려워해서인지도 모릅니다 . 그날의 화려한 휴가,참상을 직간접으로 경험했던 기성세대들도 알게모르게 또은 홧병으로
첫댓글 '화려한 벙개'를 마치고 쓴 영화 감상문입니다. 같이 혹은 그날 함께 영화를 보지 못하신 분들도 감상문을 올려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역시 이요원이군요. 고양이를 부탁해....고양이는 고졸 여직원을 칭하는 속어인데...그런데 광주에 출동했던 군인들은 불행한 군인들이지만 그들의 출동을 지휘했던 장군들은 불행한 군인이 아니고 아직 행복한 존재들이겠지요. 텔렌트를 며느리로 맞이할 만한...결과를 두고 법적 판단이 내려져야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단순하게 발포권에 집착하는 연역적 사고가 5.18문제해결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 아닐까요. 5.18살인은 결과이며 그 원인은 출동명령자체에 있는 것이지요. 꼭 발포명령자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법률이론가들의 유연한 사고가 뒷받침되어야 법과 제도가 국민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비자금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법조계내부에서 내란범을 금전적 책임을 물어 처벌하는데 대한 이론적 논란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내친구 빈센트>라는 책을 써서 고호전문가로 알려진 영남대 법학교수 박홍규박사가 사기죄역시 내란죄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는 물꼬를 터주었고 그래서 전노에 대한 1,2차적인 처벌이 가능했던 것이었고..이제 3차원의 처벌,, 이것은 시민세력이 주도하는 어느 정도 자발적인 형식의 재산 헌납이나 고백형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그것을 거부하면 역사적 책임을 열배는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어린시절 광주의 아픔을 겪은.....해질무렵 3살 여아 시신을 찾아가라고 동네를 마이크로 떠들석하게 했던.... 모두모두 잊혀지지않은 광주의 아픔입니다.
그런 아픔이 있으시군요.. 비극이 어찌 그뿐이겠습니까만... 3살 어린아이의 영혼에게 우리 모두 빚을 진것 같습니다. 그 아이가 천사가 되었기를..
6.25를 경험한 어떤 연만하신 분이 5.18과 육이오의 피해규모를 양적으로 비교하시는 것을 듣고 이의를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육이오는 남과 북이 어쨌든 한번씩 치고 받았던 과정이 있어서 화해가 가능한 지 모르지만 5.18은 질적으로 그 刺傷,즉 칼자국이 깊고 넓은 정신적 內傷이라 결코 쉽게 화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가해자들이 적극적으로 해결하는 자세를 보이지 않으면 국운이 기울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정치적 분열과 동서갈등의 깊은 골은 여러가지 정치적 변명과 경제적 실익을 포장하고 있지만 그 뿌리는 바로 5.18일것입니다. 5.18로 인한 민족의 분열과 불신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회 각분야가 계속 삐걱댈 것입니다. 물론 개인과 개인과의 관계도 피해자와 가해자로 나뉘어서 가면무도회가 성행할 것이고...불행한 일입니다. 정말 정치가 잘못 방향을 비틀어놓아 바로잡기도 힘들고..
감동을 느끼기보다 서러운 생각이 먼저드는건 뭣때문일까? 민주주의를 꽃피우고 박정희 독재정권을 심판할 기회를 놓쳤다는 것이~~~
박정권을 심판할 기회를 놓친 것은 천추의 한이 됩니다.
풀빛님의 말씀처럼 5.18은 가해자들의 반성과 사죄가 그 상처를 아물게 하는 첫 걸음 입니다. 이제 개괄적인 윤곽이 드러났다 할 지라도 여전히 가해자들은 광주사태니 폭동이니 하면서 피해자의 상처를 헤집고 있습니다.
영화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포사랑님 후기글... 저만치 찌그러져 오션은 반성중... ioi...
역사청산은 전,노 스스로가 결자해지할 일이며 어쩌면 광주는 5.18로 인해 역사적 부채로부터 자유롭고도 홀가분해졌을수도 있으나 비호남은 더 심각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 지역주의타파는 대증요법으로서 틀린 것은 아니지만 병의 뿌리,즉 영호남분열의 원인은 어중간하게 봉합해 버린 역사청산에 뒤이은 삼당야합이었습니다. 물론,그 봉합의 논리에 깊게 자리한 또 하나의 이유는 전,노세력의 주둥이에서 전남도청진압작전을 펜타곤이 승인했다는등의 망발이 나올 것을 두려워해서인지도 모릅니다 . 그날의 화려한 휴가,참상을 직간접으로 경험했던 기성세대들도 알게모르게 또은 홧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