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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풍무(160)
[세 번째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날 생각나?”
살육이 벌어지고 있는 한참 떨어진 곳에 두 사람은 마른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어 누웠다. 곁에 누운 소살우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백산은 낮게 물었다.
“언제 말이오?”
백산의 시선을 피하며 소살우는 말했다. 백산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만 해도 그가 형님임을 애써 부인하느라 안고 잠을 잔 적이 많았다. 아니, 그가 형님이란 사실을 알가 전보다 더욱 많은 날을 함께 잠을 잤다. 하나밖에 없는 팔을 일부러 그의 머리맡에 받쳐 주곤 했다.
서로가 서로를 알면서도 일부러 모른 체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는 이미 형님이 되어 버렸다. 아들인 소령이 아닌 백산 형님이.
소살우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소살우를 쳐다보던 백산은 대수롭잖게 말했다.
“네 왼팔을 잃었던 수양산 말이야.”
소살우의 왼팔을 잃었던 날이고, 소령이 태어났던 날이고, 흑색지안을 얻었던 날이기도 했다. 아버지 유골을 실었던 마차가 불태워진 날이기도 했고 소살우의 과거를 알게 된 날이기도 했다.
광풍대원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 그였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녀석은 창기를 어머니로 두고 태어났다. 돈이 많았던 아비의 유희로 태어난 녀석은 자식이 없었던 그 집안의 장자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런데 십여 년 이상 자식이 없었던 본부인이 아들을 낳게 되면서 그의 처지는 바뀌기 시작했다. 하인들이 머무는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고 수시로 매질을 당했고 학대를 받았다. 그때부터 녀석은 웃기 시작했다고 했다. 웃으면 조금이나마 매를 덜 맞기에
그런 아들을 보다 못한 살우 어머니는 자결을 택했다. 본인이 죽으면 아들인 살우가 학대를 덜 받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번엔 정말로 소살우를 노예로 팔아버린 거였다.
노예로 이 집 저 집을 전전하다 결국 그곳을 탈출했다고 했다. 그리고 탈출한 그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아비와 본부인의 몸에서 난 이복동생들을 돌로 쳐 죽이는 것이었다. 그의 웃음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맞다. 그날 추렴 형수님이 밤톨 하나 줬었지. 하도 먹으라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그 아까운 걸 먹은 생각을 하면.”
그때가 생각난 듯 소살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당시만 해도 광풍대원은 전부가 살아 있었다. 팔을 잃었던 곳이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입가에 절로 웃음이 맺힌다. 더없이 좋았던 시절.
“그때만 해도 좋았는데.”
“맞아. 우린 그냥 형제였을 뿐이야. 때로는 아버지 같은 사람도 있었고, 때로는 아들 같은 사람도 있었지. 부모가 없었던 우리는 모두가 아버지고, 우리 모두가 아들이었다. 그런 걸 구분 짓지 않았지.”
“맞소. 그랬지. 어머니는 천영 형수님 한 분이었지만 형님은 아버지 자격이 없었으니까. 뻑 하면 눈깔을 검게 만들어서는 아무나 보고 비도를 휘둘러댔지.”
소살우는 눈을 감았다. 같은 고아 처지라는 사실 때문에 소운 형수님을 가장 따랐지만 그래도 형수님들 중 가장 어려운 사람은 천영 형수님이었다. 어려워하면서도 힘든 일이 있으면 고민을 털어놓았던 분이 또한 천영 형수님이었다. 고아로 자랐던 광견조원들의 등불이 바로 그녀였던 것이다.
“우리 둘도....... 그렇게 살면 안 될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어색한 관계. 겉으로는 형 동생하고 있지만 행동거지는 여전히 서로를 의식해야 한다. 기분 나쁘면 어쩌나, 마음 상하면 어쩌나. 옛날처럼 편하지가 않았다.
“그러고 싶기는 한데........ 쉽지가 안습디다. 자꾸 먼저 간 마누라한테 미안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나도 어머니는 생각하고 있다. 작년에는 간단하게나마 제사도 모셨고.”
“어머니라고 생각은 하는 거요?”
고개를 돌린 소살우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십 년 만에 백산의 입에서 어머니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부터인가 어머니란 말을 하지 않았고, 제사를 모실 때도 나타나지 않았던 그였다.
“어찌 되었건 낳아 주신 분이잖아.”
백산은 어색하게 말했다.
“며칠 안 있으면 제사네.”
“씨팔!”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죽을 것처럼 보고 싶어서 그녀를 데려왔는데 행복하게 해주지도 못했다. 소령을 낳고 며칠 견디지도 못한 채 그녀는 혼자 떠나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살우 네가 차려 준 생일 밥도 먹고 싶다.”
“이젠 만두 말고 다른 것도 처먹나 보오?”
“응, 그렇게 됐어. 달마동에서 백산과 그녀들을 봤거든. 세 분 사부와 한수 형님, 강구두 대협, 그리고 먼저 간 광풍대원들........ 그곳에서 웃으며 살고 있더라. 그래서 애명환도 두고 나왔다. 백산의 가슴속에.”
“요몽이었소?”
“응. 녀석이 그곳에 우리가 살 곳을 만들어 두었더구나.”
“그럼 작은형수가 가진 애명환은 또 뭐요?”
소살우가 지나가는 투로 슬쩍 물었다. 백산을 만나 가장 섭섭한 게 있었다며 바로 애명환이었다. 세 분 형수님께 선물했던 애명환을 주하연의 손가락에서 발견했을 때 기절할 뻔했다. 하마터면 백산의 멱살을 잡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거 현무호에서 하연이가 선물로 사준 거다. 그런데 같은 소리가 나더라. 처음엔 얼마나 놀랐던지. 용문석굴에서 장사하던 노인장과 친척 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나 봐.”
“쿡! 인연은 인연이네.”
어이가 없어 소살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게 된 일을 가지고 공연히 섭섭해 했던 것이다. 아울러 주하연과는 묘한 인연을 가졌다 싶었다. 천영 형수님을 닮은 얼굴에 소운 형수님을 닮은 성격까지. 두 분이 그녀를 통해 환생한 듯한 생각이 들 정도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천영이 딸을 저지해 주었으니까. 소령이라 이름 지었지.”
“소령이라....... 그 이름은 아무리 들어도 좋단 말이야.”
소살우는 환하게 웃었다. 살기를 뿌리는 웃음이 아닌 가슴속에서 솟아 나오는 진솔한 웃음이었다.
“나 졸리다. 베개!”
소살우의 팔을 흘끔 쳐다보며 백산은 말했다.
“하아고, 자식 낳기도 전에 노망이 먼저 났네! 다 늙은 노인네가 팔베개를 하고 싶다니.”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소살우는 오른팔을 내밀었다.
“역시 베개는 이게 최고야. 너 죽으면 다른 몰라도 팔은 잘라 주고 가라.”
“이 인간이 미쳤나. 내가 죽긴 왜 죽어? 소령이 시집보내고 증손자까지 키우고 난 다음에 죽는 건 생각해 볼 거구만. 아니면 새장가를 가서 아들을 낳든지.”
소살우는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는 넌 새장가 못 가. 넌 죽을 때까지 수절해야 해.”
“형님, 이 얼굴을 가지고 수절을 하라니 말이 되는 소릴 하쇼.”
“하라면 해, 임마. 다른 건 못해 드려도 어머니께 그건 해줄 거야. 나중에 저승 가면 어머니께 할 말은 있어야 할 거 아냐. 아버지 정절을 지킨 사람이 바로 아들이었다고. 그리고 광풍대원의 성을 이어주는 건 우리가 하기로 했어. 설련과 하연이도 노력한다고 했고.”
“이것들 전부 정신병자 아냐? 어떻게 인간이 오십 명의 자식을 낳아?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요?”
어이없다는 얼굴로 소살우는 소리를 질렀다. 오십 명의 자식은 과거의 약소이었다. 광혈지옥비를 버린 백산과 함께 마지막으로 강호를 주유할 때 우스갯소리로 장가를 가게 되면 광풍대원의 성을 이어 주자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을 지금 백산이 하고 있는 것이다.
“제발 부탁인데, 머리 좀 쓰고 삽시다. 천자문 하나 가지고 팔십 년 우려먹었으면 됐으니까 이젠 제발 공부 좀 하든지. 형님, 혹시 고인이 뭔지 아쇼?”
“고인? 미친 새끼, 별 거지같은 걸 다 묻네. 내가 너 같은 줄 알아? 높은 데 있는 놈이니까 뒈진 놈이잖아, 임마.”
“지랄하고 자빠졌네.”
“넌 알아?”
“됐으니까 그렇게 알다 뒈지쇼. 소령이 태어나서 고인이 뭐나고 물으면 꼭 그렇게 대답하쇼. 아마 다음 날 바로 아버지 바꿔 달라고 할 거요.”
“씨팔! 이번엔 정마로 공부해야겠네. 무식한 새끼 아버지 노릇 하려면 말이야. 그럼 천자문을 공부했던 게 그 때문이었어?”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나 백산은 물었다.
어느 날 갑자기 천자문을 배우겠다며 소살우가 나섰다. 먼저 글을 깨우친 섯다와 모사에게 배우던 소살우는 글을 가르칠 때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두 놈의 무시를 견디지 못하고 혼자 독학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런 그가 불쌍하기도 하여 어깨 너머로 천자문을 가르쳐 주기도 했었다. 그때 소살우는 무공을 처음 익힐 때처럼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했었다.
“당연히 그랬지. 어떤 빌어먹을 인간 땜에 하다가 그만두긴 했지만.”
소령이 아닌 백산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 글 배우는 걸 때려치우고 말았다.
“우리 같이 배울래? 소령이가 나한테만 물으란 법 없잖아. 아마 살우 너에게도 물을걸?”
“배울 사람이 있어야지. 천붕십일천마 둘에게 글을 가르쳐 줄 사람이 있을 것 같소? 모사나 섯다 그 개자식들에게라면 난 그냥 소령에게 무시당하면서 살라오.”
“설련이라 하연이에게 배우면 돼. 얼마 전에 하연에게 좀 배우다 말았는데.”
“작은형수? 엄할 것 같은데.”
“그때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까 그녀는 훈장 체질인 것 같아.”
“니미럴, 그럼 안 되는데. 이렇게 합시다. 난 큰형수님께 배울 테니까 형님은 작은형수더러
가르쳐 달라고 하쇼. 어차피 배운 건데 끝장을 봐야 할 것 아뇨.“
“도둑 놈 새끼. 지 혼자만 빠져나가려고. 알아서 해, 임마.”
소살우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린 백사은 눈을 감았다. 갑자기 피로가 밀려들었다.
“그만 잘란다.”
“그러쇼.”
빙그레 미소 띤 얼굴로 소살우는 가만히 내공을 끌어올려 따스한 기운으로 사방을 감쌌다.
“쩝! 잠자긴 틀렸군!”
잠이든 백산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소살우는 툴툴댔다. 새벽이 올 때까지는 이 상태로 있어야 하리라. 내공을 끌어올려 주변을 따스하게 해야 할 터이고, 팔이 저리는 것도 참아야 하리라.
“조용히 좀 싸울 것이지.”
멀리서 비명 소리와 병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소살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두 세력의 싸움은 극을 향해 달라가고 있는지 사진악의 화황척이 내뿜는 열기가 이곳에까지 전해져 왔다.
“사진악 너 내일 죽었다, 개자식아.”
내공을 한껏 끌어올린 소살우는 백산 주변으로 강기막을 쳤다. 소리도, 바람도, 추위도 통과하지 못하는 막이 백산을 철통같이 에워쌌다. 그것은 아들을 위한 소살우의 마음이었다.
다음 날.
숲을 나와 인마불거 쪽으로 가던 백산과 소살우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사풍도 거령이 한 인물의 목을 틀어쥔 채 질질 끌며 이편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입 주위는 피가 말라붙어 있고 흐릿한 눈동자의 그는 다름 아닌 칠파연합맹의 맹주인 회천검 담무광이었다.
“쿡!”
담무광의 모습을 보며 백산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과거 적을 포로로 잡을 때 광풍대원이 했던 방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혀를 깨물어 자살하는 걸 방지하기위해 이를 없애고, 다음엔 단전을 박살내 버렸다.
그런데 끌려오는 담무광의 모습이 그랬다.
“사숙, 이 자식 가짜인 것 같습니다.”
“가짜?”
거령의 말에 백산은 놀란 눈으로 담무광의 얼굴을 살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입 주위가 살갗이 일어나 있는 것처럼 너덜거렸다. 그것은 변장을 할 때 주로 사용하는 인피면구였다.
“벗겨 볼까요?”
담무광의 얼굴을 향해 손을 가져가며 거령은 물었다.
“글쎄, 다른 것들하고 같이 묻어 버리는 게 더 낫지 않겠냐?
아는 놈이 분명할 터이지만 굳이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서 하는 말이었다. 이제와 얼굴을 확인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거니와 공연히 기분만 찜찜할 것 같았다.
“으으!”
백산을 노려보며 담무광은 신음을 흘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이.
“쟤, 왜 그래?”
“아, 깜빡했습니다, 사숙. 아혈을 점혈해 두었거든요. 호연작이 어쩌고 하면서 헛소리를 하는 바람에.”
“풀지 마!”
아혈을 풀어 주려는 거령의 행동을 말리며 백산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미치겠군. 제 입으로 호연작이라 했단 말이지? 어째 눈에 익은 놈이라 했네.”
그제야 녀석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익숙한 느낌이 들었던 게 바로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놈은 얼마 전까지 개방 방주로 있던 호연작이 분명했다.
[너 호연작 맞지?]
멀리 떨어져 있는 개방 무인들을 흘끔 쳐다본 백산은 담무광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백산의 생각대로였다. 아혈을 점혈당한 담무광은 호연작의 또 다른 분신이었다.
호연작은 미칠 지경이었다.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 진청일을 비롯한 개방 무인들이 있다. 그들에게 자신의 진면목을 알리고 싶어도 방법이 없다.
[맞는 모양이군. 말을 하고 싶어 죽겠지? 나는 호연작이다, 개방 무인들은 나를 구하라 하고 말이다.]
차가운 눈으로 호연작을 보며 백산은 말했다. 지금껏 강호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이 호연작 때문이었다. 개방 방주로 가장하고 있으면서 팽월과 남궁무를 조종했을 것이다. 천붕회를 해체하고 남궁세가나 하북팽가를 벼랑 끝으로 내몬 다음 제 놈은 유유히 사라졌다.
아마 칠파연합맹이 잘못되면 다시 개방 방주로 복귀할 심산이었을 것이다.
[기화가 없어서 안됐구나.]
비릿한 조소를 흘리던 백산은 고개를 들어 거령을 쳐다보았다.
“지금 상태에서 두 팔과 다리를 자르고, 머리만 나오도록 땅에 파묻어.”
다시 한 번 호연작을 쳐다본 백산은 몸을 돌렸다. 인마불거를 향해 한참을 걸어가던 백산은 문득 생각난 듯 몸을 돌렸다.
“참! 거령아, 나무를 옮겨 심을 땐 물을 수북이 줘야 한다.”
“아, 알겠습니다, 사숙!”
일순 거령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두 팔과 다리를 자르는 것만 해도 엄청난 형벌이거늘, 묻고 난 주변에 물을 주라니. 얼려서 죽이겠다는 말이다.
백산과 담무광은 아는 사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쩝! 그러게 임마,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어야 하는 거야. 아니, 최소한 인간을 상대로 싸움을 해야 하는 거라고. 우리 사부가 그랬는데 저분들은 인간이 아니래. 혹시 영수(靈獸)라는 말 아냐? 단전에 내단을 가지고 있는 영험한 짐승들 말이다.”
양약평 한가운데로 담무광을 질질 끌고 가며 거령은 훈계하듯 말했다.
잠시 후, 양약평 중앙에는 칠파연합맹주 담무광의 처벌이 행해져다. 사풍도(砂風刀)로 호연작의 사지를 잘라 버린 거령은 피가 흐르지 않도록 지혈을 한 다음 그를 땅에 묻었다. 물론 백산의 말대로 호연작을 묻었던 주변에 수북이 물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출발한다!”
다시 인마불거의 멍에를 진 백산은 일행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처음부터 빠른 속도는 아니었지만, 많은 부상자들로 인하여 인마불거의 행렬은 더뎠다.
느릿한 속도로 움직이던 인마불거가 멈춰 선 곳은 뇌공폭포 근처였다. 밤을 보내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뇌공폭포 앞으로 새카맣게 덮여 있는 무인들 때문에 더 이상 전진할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있는 이천 명의 무인들. 남색 도복을 걸친 그들은 칠파연합을 떠나온 무당파 도인들이었다.
“장문 진인!”
이천에 달하는 도인들 전부가 지면에 머리를 박았다.
대무당파 장문인이 목에 밧줄을 걸고 끌려가다니.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소문이 와전된 걸로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장문진인을 비롯한 진선자 사조와 무당파 장로들은 목에 밧줄을 걸고 죄인처럼 끌려가고 있었다.
처음 장문진인을 발견했을 때 무작정 달려들어 구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장문진인의 표정 때문이었다. 목에 밧줄을 걸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장문진인의 얼굴은 모욕당한 자의 모습이라 볼 수가 없었다. 가슴 벅찬 희열을 애서 감추고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더구나 양약평에서 보았던 장문 진인의 행동이라니. 그는 끌려가는 게 아니었다. 스스로 목에 밧줄을 걸고 죄인이 된 것이다.
“왔느냐.”
앞으로 나선 현진자는 제자들을 보며 나직하니 말했다. 여전히 그는 목에 걸린 밧줄을 풀지 않은 채였다. 말라붙은 땀으로 인해 밧줄에서는 악취가 풍기고 있지만 인상조차 찌푸리지 않았다.
“사부님!”
무당파 무인들 선두에 있던 무검이 재차 머리를 찍으며 현진자를 불렀다.
“장문진인!”
이어지는 이천 무당 제자들의 함성이 다시 한 번 뇌공폭포를 타고 올랐다.
“들어라! 우리 무당은 많은 잘못을 저질러 왔다. 백 년 전에는 음모를 꾸며 오천맹을 강호 무림에서 몰아냈고, 오십 년 전에는 광풍대원을 혈광마인으로 만드는 데 일조를 했다. 작금에 와서는 소림 멸망을 방조했다. 그러면서도 우리 무당은 태산북두였다. 그러면서도 우리 무당은 천하제일이라 외치고 다녔다. 그게 우리 무당이었다.”
그다지 큰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현진자의 외침은 폭포의 굉음을 뚫고 무당파 제자 전원의 귓속으로 선명하게 박혀 들었다.
“해서 나는 결심을 했다. 소림이 바로 설 때까지, 소림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때까지 인마불거를 따르고 소림 방장을 따를 것이다. 누구의 강요도 아니다. 무당 장문인의 신분으로 결정한 사항도 아니다. 오직 원시천존을 믿는 현진자 개인의 결정 사항이다!”
그 말을 끝으로 현진자는 인마불거 뒤쪽으로 돌아갔다.
“가자!”
현진자가 자리하자 백산은 다시 인마불거를 끌기 시작했다.
“저기, 형수!”
현진자의 말을 곰곰이 되씹어 보던 소살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설련을 불렀다.
“왜 그러세요, 도련님?”
형수란 말에 얼굴을 붉힌 설련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벌써 수십 번을 더 듣는 말이지만, 형수란 말을 들을 때마다 아직은 어색하다. 도련님이라며 살갑게 부르는 하연이 부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른 게 아니고 말입니다. 저기 현진자 자식이 금방 했던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따라오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가라는 말입니까?”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무당파 무인들을 가리키며 소살우가 물었다.
“따라오라는 말이겠지요. 무당파도 불타 버렸다는데, 저 많은 무인들이 겨울은 어디서 날 거며, 또 뭘 먹고살겠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식, 별것도 아닌 걸 어렵게 말해가지고 사람을 헷갈리게 만들어. 저, 형수!”
고개를 끄덕이던 소살우는 눈웃음을 치며 설련 곁으로 다가왔다.
“말씀하세요.”
설련은 움찔, 간격을 띄었다.
“다른 게 아니고 말입니다, 어제 형님에게 허락을 받았는데....... 저 글 좀 가르쳐 주십시오.”
“네?”
깜짝 놀라며 소살우를 쳐다보았다. 백산을 형님이라 부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그는 시아버지다. 그런 그가 글을 가르쳐 달라니.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 그게. 저 인간이나 나나 둘 다 대가리가 돌 아닙니까. 조카들이 태어날 텐데.......”
“킥! 그러니까 도련님 할아버지는 조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고 싶어서 그런 거죠?”
호기심 어린 얼굴로 설련과 소살우를 주시하던 주하연이 끼어들며 말했다.
“천자문을 가르쳐요.......? 맞습니다, 맞고요. 절대로 녀석들에게 무시당할까 봐 배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소령이 녀석부터 천자문을 가르치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명색이 삼촌 아닙니까.”
소살우는 하지 말아야 할 말마저 마구 꺼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랑 말로는 천자문을 배웠다고......”
“배우다 말았습니다. 저 인간이 바로 옆에서이건 이렇게 읽는 거다, 저건 저렇게 읽는 거다 하는 통에 팍 김이 샜지 뭡니까.”
“알았습니다. 가르쳐 드릴게요. 천자문도 가르쳐 드리고 사서삼경도 가르쳐 드리고, 가장 훌륭한 훈장님이 될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
설련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소령에게 글을 가르치고 싶어서 천자문을 배우려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육신만 아들일 뿐 영혼은 백사이란 사실을 알고 나서 천자문 배우는 걸 포기했음에 분명하다. 그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련님 할아버지, 나도 잘 가르칠 수 있는데요?”
“작은형수는 저 돌대가리를 기름칠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큰형수께 배우기로 했습니다. 너는 왜 이쪽을 기웃거려, 임마!”
슬쩍 마차 뒤쪽으로 다가온 사진악을 보며 소살우는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게 아니고 내가 소령의 유모 아닌가. 그러니까 소령에게 글 가르칠 생각은 애초에 접으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그러니까 너는 유모만 해. 소령에게 천자문 가르치는 건 내가 할 테니까.”
“자네 대가리로는 불가능하다니까 그러네. 글이란 천자문을 외웠다고 해서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냐. 그 글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원리까지 가르쳐야 한단 말이지.”
“원리?”
“그래, 원리. 예를 들 면 천자무의 첫 글자인 하늘 천(天)자는 사람 위에 하늘이 있음을 나타내는 거라네. 자네는 그런 걸 모르니 가르칠 수가 없다는 말이지.”
사진악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소살우는 슬쩍 고개를 돌려 설련을 쳐다보았다. 그의 말이 맞느냐는 얼굴로.
그러자 설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사진악. 그것까지 전부 배울 테니까. 그런데.......”
“왜,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사진악은 소살우를 빤히 쳐다보았다.
“늙은 새끼가 젊은 사람들 노는 데 왜 끼어들어? 냄새 나니까 좀 비켜 줄래? 갑자기 코가 막히려고 그래.”
“소살우, 너!”
“아우, 냄새! 하여간 늙은 것들 옆에 있으면 안 된다니까. 형수, 자리 옮깁니다.”
“야, 새끼야. 여기서 나이를 가장 많이 처먹은 놈이 바로 너야. 네가 나보다 두 살이나 더 먹었다는 것 알아! 노망은 내가 아니고 네가 났단 말이다. 나쁜 놈 새끼!”
설련과 주하연을 데리고 자리를 옮겨 버리는 소살우를 향해 사진악은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사부, 애들 듣습니다!”
사진악의 고함 소리에 깜짝 놀란 거령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사부가 지금처럼 씩씩대는 걸 처음 보았던 탓이었다.
“근데 무슨 일입니까?”
“저 새끼가 나더러 늙었다고 하잖냐. 늙은이 냄새가 난대. 너도 그러냐?”
팔을 들어 올려 킁킁거리며 거령을 향해 물었다.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구먼요. 그러게 목욕 좀 자주 하라고 했잖습....... 크아악!”
말도 마치기 전에 거령은 얼굴을 감싸 쥐고 비명을 내질렀다. 순식간에 날아온 사진악의 주먹이 얼굴을 강타해 버린 것이었다.
“저것을 제자라고.......”
거령의 얼굴에 주먹을 박아 넣었으나 여전히 화가 풀리지 않았다. 뭔가 그럴싸한 대상을 찾던 사잔악의 눈에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는 무당파 도이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야, 무당파 말코들! 빨리 안 따라와? 지금부터 셋 셀 동안에 인마불거 뒤로 따라붙지 않으면 벽력혼원황을 날려 버릴 테니까 알아서 해!”
“갑니다!”
무검은 일행을 향해 낮게 말했다. 결코 녹림수로채의 총채주의 협박 때문이 아니었다. 앞에서 멍에를 지고 마차를 끌고 있는 이들 때문이었다.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었던 귀광두, 아니 묵안혈마가 있었고 소림의 십팔나한이 있었다. 그들은 허연 입김을 토해내며 초라한 불상과 부상자가 실린 마차를 끌고 있다. 그들 때문이었다. 인마불거에 실린 검게 그을린 불상 때문이었다.
재빨리 인마불거 뒤쪽으로 따라붙은 무당파 무인들은 부상자를 부축하며 광풍성 인파에 끼어들었다. 어느새 광풍성 인원은 삼천 명을 헤아리게 되었고 이마불거를 따르는 인원은 계속해서 늘어만 갔다.
뇌공폭포를 떠난 일행이 구정하를 건너 남궁세가가 보이는 평지에 도착한 때는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오늘은 여기서 밤을 지새고 간다!”
인마불거를 끌던 백산은 뒤편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팽각은 쉴 준비를 하라!”
“개방각은 땔감을 준비하라!”
“소림각은 식량을 분배하라!”
“세상에......!”
분주하게 움직이는 각 파 수뇌들을 보며 무검은 입을 쩍 벌렸다. 그들은 팽가나 개방 또는 소리이란 말끝에 각(閣)이란 말을 집어넣고 있다. 천붕회 소속 문파가 아닌 광풍성에 소속된 하나의 기관이란 의미다. 어느새 그들은 광풍성이란 단체의 일부분이 된 것이다.
슬쩍 고개를 들어 사부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소림승려가 건네준 음식을 조금씩 뜯어 입 안으로 가져가고 있었는데 그것은 분명 육포였다. 무당파에 들어와 화식은 물론이고 육식조차 하지 않았던 당신이 아닌가.
사부뿐만이 아니었다. 소림 승려들도 육로를 찢어 입으로 가져가고 있다. 파계의 현장을 보고 있는 듯했다.
“드시겠습니까?”
황당한 얼굴로 서 있는 무검 앞으로 다가온 소림 승려 한 명이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절반 크기도 되지 않는 그것은 육호였다. 이곳에 모든 무인들이 오물거리고 있는 음식.
“삶을 유지할 저도만 먹습니다. 숨을 쉬기 위해, 걷기 위해 먹는 음식일 뿐입니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은 이 한 조각으로 하루를 나고 있습니다.”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무검은 다시 사부를 쳐다보았다.
“아미타불! 그럼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삼 일칩니다.”
“스님! 법명이......?”
“무계라고 합니다. 방장사조께서 내린 법명입니다.”
자신을 무계라 밝힌 스님은 무검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새롭게 만들어질 소림의 방장으로 내정된 사람이다.]
놀란 눈으로 무계를 쳐다보는 무검의 귓전에 나직한 전음이 흘러들었다.
사부의 목소리였다.
[무계 스님 때문에 나도 육포를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먹을 만하더구나.]
“알겠습니다, 사부! 먹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무검은 무계가 남기고 간 자루를 열었다. 일순 노린내가 확 끼쳤다. 차곡차곡 쌓인 육포를 한동안 쳐다보던 무검은 그것들을 꺼내 무당파 제자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한편에 자리를 잡고 말없이 육포를 뜯었다.
그렇게 얼마쯤 육포를 뜯던 무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저녁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온은 차가웠다. 하지만 누구 한 명 인상을 찌푸리는 이가 없었다. 수백 개의 모닥불을 피우고, 강한 무공을 가진 이들의 내공을 끌어올려 주변을 따뜻하게 하고 있다.
무공이 강한 자나 약한 자의 구분이 없었다. 벌판에 모인 모두는 하나였다.
“무섭군.”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런 대인원을 대동하고 강호를 횡단하는 발상 자체도 놀랍지만, 그 짧은 시간에 그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능력은 더욱 가공했다.
주변 인물들을 하나씩 훑어가던 무검의 시선이 어느 한곳에서 딱 멈췄다. 등을 돌리고 남궁세가를 쳐다보고 있는 왜소한 여인. 그녀는 화황이라 불리는 남궁미령이었다.
“남궁세가는 최고의 악수를 두고 말았군요.”
멀리 보이는 수백 채의 건물을 쳐다보며 무검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이제는 무당까지 가세했으니 이곳에 모인 무인은 모두 삼천 명이 넘어간다. 만일 묵안혈마의 입에서 공격 명령이 떨어진다면 남궁세가는 오는 아침을 맞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주? 벗어날 방법이 있는 겁니까?”
어떻게 하겠냐는 말은 비단 무검의 입에서만 흘러나온 게 아니었다. 남궁세가에서도 무검과 같은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주님!”
망연한 얼굴들. 신수각에 모여 있는 남궁세가 수뇌들 얼굴이 그랬다. 치욕스럽게 살지 않겠다고, 모욕을 차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며칠 전의 모습은 그들의 얼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남궁무 또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왜 이 지경까지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직 한 가지만 생각했다.
남궁세가.
가주가 되었을 때부터 언제나 머릿속에 담고 살았던 말이다. 남궁세가를 위해서라면 자식마저도 버리겠다고, 죽어야 한다면 죽겠다고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데 지금 그런 상황이 오고 말았다.
“다녀오겠소.”
남궁세가 수뇌들을 면면히 쳐다보던 남궁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희들도 가겠습니다.
세가 수뇌들이 벌떡 일어났다. 지금까지 모든 일은 이곳 신수각에서 의결되어 집행되었고, 자신들 또한 책임이 있다. 가주 혼자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남궁무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내가 돌아오지 않거든 그때 나오도록 하시오. 지금은 혼자 가야 하오.”
가신들을 말린 남궁무는 신수각을 나서 밖으로 나왔다.
“가주님!”
남궁무가 밖으로 나오자 남궁세가 무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비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차분하게 기다리도록 해라. 함부로 나서는 일 없도록 하고.”
맨 앞에 있는 아들을 보며 남궁무는 말했다. 혈기를 참지 못하고 창궁위를 데리고 뛰쳐나올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아버님! 하지만 아버지를 해친다면 참지 않을 겁니다. 목숨을 걸고 저들에게 대항할 겁니다. 저를 비롯한 창궁위는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남궁창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선 안 된다. 참아야 한다. 무조건 참아라. 이건 가주로서 명령이다.”
단언하듯 말한 남궁무는 자식으로부터 혹여 다른 말이 나올까봐 정문을 향해 몸을 날려 버렸다.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즐독 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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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즐독.감사합니다.
즐독 ㄳ
잘읽었습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참아라...그것이 사는길
감사합니다 .
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재미 있게 읽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고 행복 하세요
감사 하고 사랑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0^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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