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달빛’을 보고
세상이 어수선합니다. 북쪽에서는 연일 미사일을 쏴대는 건 ‘날 좀 보소’하고 애타게 보채며 봐 달라는 몸부림이죠.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봐주려면 그만한 값어치가 있어야겠지요. 중국이 대만 ‘해방’을 위한 전쟁에 돌입하지 않은 이상 북한이 정말 핵무기를 쏜다면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겁니다. 중국은 북한의 최근 행위들이 그들의 설정한 레드 라인을 넘었다고 볼까요? 아니면 좀 더 미국이나 한국을 갉아 보라고 할까요? 이번 캄보디아에서 한 발언을 보면 과거와는 달리 적당한 수준에서 개입하겠다는 신호인 것 같지 않는가요? 중국은 북한의 도발로 인해 미국을 중심으로 한국과 일본이 밀착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이태원 참사는 어린 생명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다’는 말 외에 나오는 게 없군요. 국민학교 6학년 때 부산으로 수학여행 간다고 들떠 있을 무렵 전국체전(?)이 열린 부산 구덕운동장 정문에서 한꺼번에 나오던 관중들 중 여러 명이 깔려 죽은 참사가 있었지요. 집안에서 말려 수학여행을 못 가 울고불고 하던 게 생각 나군요.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지만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야 살만한 세상을 만들 것인지, 또 이같은 세상이 언제 올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9월의 마지막 날 전시를 두 개 구경한 글을 쓴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이 글은 10월29일 연극에 대한 때늦은 감상문입니다. 이날 畏友 이인재 사장이 이사장으로 있는 동국대 여해연구소에서 주최한 ‘남해 달빛’이란 충무공 마지막 해전에 관한 연극을 관람했습니다. 여해(汝諧)는 충무공의 자입니다. 부산에도 ‘여해 연구소’가 있습니다. 2,000년대 초 공직자 재산등록자 중 가장 가난했다는 조무제 대법관이 부산 여해연구소에 500만원을 기부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나의 아저씨 됩니다. 며칠 전 의대병원사 학술대회가 열린 곳이 1960년대 사법고시 합격자들 기숙사 자리였다고 하더군요. 연탄난로를 피운 방에서 아저씨와 늦게 이야기하며 놀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오랜만에 전화를 했더니 반가워하면서 부산 여해연구소 이사장이 친구라고 하더군요. 서울 여해연구소 이사장은 나의 친구이고.... 인연이란 참 묘한 것 같네요.
‘남해 달빛’ 연극 팸플릿을 받는 순간 무언지 짜릿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충무공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노량 앞바다를 출렁대는 푸른 파도 위에 달이 떠 있는 밤을 배경으로 그린 것이네요. 음력 11월 19일 여기서 전사했으니 보름달은 아니고 하현이겠지요. 그렇지만 팸플릿에 찌그러진 달을 그려 넣을 수는 없지 않은가요?(사진 1) 원래 남해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는 남해대교 하나 뿐 이었는데 최근에 그 옆에 노량대교를 만들어 쌍둥이 다리가 되었지요. 노량대교를 지나면 충무공 기념관이 있습니다. 전쟁이 벌어진 해협 주변 관음포라는 포구는 파도가 잔잔하여 요즈음은 질 좋은 죽방멸치를 잡는 대(竹)나무 그물발이 처져있습니다. 남해대교를 넘어가서 바로 왼쪽으로 들어가면 관음포를 보면서 회 한 접시 먹기 좋은 식당들이 많지요. 아마도 이같은 추억이 얽혀 ‘남해 달빛’의 멋진 팸플릿을 보자 감동이 다가 온 것 같습니다.
노량해전은 충무공의 결의가 빚은 임란 마지막 전투입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흉 히데요시가 죽은 뒤 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울산, 부산 등지에 모였던 왜군들은 이미 떠났고 이순신이 막고 있는 순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지원하기 위해 집결한 왜군들은 명나라 장수 진린(陳璘)에게 뇌물을 주고 빠져나갈 계획이었지요. 진린 역시 남의 나라 전쟁에서 도망가는 적을 쫓아 피를 흘리면서 싸울 필요가 없어 퇴로를 터줄 생각이었으나 충무공은 수의여진멸(讐夷如盡滅)이면 수사불의사(雖死不爲辭)라는, 원수를 모두 죽이면 죽음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결의로 일본군을 막아선 것이 노량해전입니다.
이 이야기를 연극무대에 올린 겁니다. 보름이 지난 달 밝은 밤의 전경에 이인재 이사장의 상상력까지 더해졌지요. 그의 소설 <1592 이순신>은 광화문 광장에서 충무공의 뒷모습만 보고 있던 세종대왕이 어느 비오는 날 저녁 충무공을 불러 청진동 골목 막걸리 집에서 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대화로 시작됩니다. 아이디어가 참신하고 몇 장(章)을 넘기면 두 분의 대화가 계속 나오지요. 저자가 오늘날 현실에 빗대어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연극에서는 서막과 마지막에만 대화가 짧게 나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1시간 40분이란 시간적 제약으로 더 이상 길게 하기 어려웠겠지요. 충무공 외에는 그의 휘하 장수들을 조연으로 등장시키지 않은 것은 좋았습니다. 그런데 민초 백성들의 역할을 강조하다보니 이야기가 산만해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의 소설은 일본 자료도 참조하여 새로운 이야기들이 여럿 있습니다. 논개가 촉석루에서 같이 죽으려고 고른 장수는 원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였다고 합니다. 논개는 화려한 복장을 한 그의 부관이 가토인 줄 알고 촉석루 아래 의암으로 꼬셔 목을 껴안고 죽었다고 하네요. 그런데 일본에서의 이야기는 사뭇 다릅니다. 논개가 이 장수를 사랑하여 같이 죽었다는 겁니다. 이 일본 장수의 고향에는 그의 묘 곁에 논개의 묘도 같이 있답니다.
저자가 더 강조하고 싶었던 인물은 김천손이란 목동일 겁니다. 그리스 연합군이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 군을 무찌르자 승리의 소식을 아테네에 알렸다는 필리피데스라는 인물이 있지요. 이것이 오늘날 마라톤의 기원이라는 것도 잘 아실 겁니다. 한산대첩 전날 이순신 함대는 거센 바람을 이기고 당포에 도달합니다. 고성에서 마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당항포 해전이 일어난 곳이 아니라 통영반도 남쪽입니다. 왜군을 피해 숨어 지내던 거제 (혹은 통영) 사람 김천손은 일본 함대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먼 길을 달려 조선 수군에 이 사실을 알립니다. 한산대첩의 서막입니다. 그가 달린 거리는 20km가 넘었을 겁니다. 연극 중에 그의 이름이 한번 언급되더군요. 드라마 전개상 한산대첩(1592)과 노량해전(1598)을 연결시키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그러나 아쉬웠습니다. 이인재 이사장과 내가 학창시절 동숭동에서 같이 하숙하던 친구가 마산 시장이 되었을 때 김천손 마라톤 대회를 만들면 기념비적인 행사로 발전할 것이라고 열심히 설득했는데 이 친구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면서 나와 둘이서 ‘무식한 xx’라고 뒷다마질를 싫건 한 기억도 나군요.
연극을 본 뒤 식사 자리에서 간단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먼저 임란 당시 조선의 인구입니다. 당시 지방관이 올린 인구 수를 집계한 것이라 정확한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더 이상 더 정확한 자료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요. 인터넷에 나오는 <조선실록>과 <증보문헌비고> 등에는 임란 70년 전인 1519년(중종 14) 374만, 1531년(중종 26) 396만, 1543년(중종 38) 416만으로 나오네요. 임란 50년 전으로 가장 가까운 시기입니다. 이 후로는 1678년(숙종 4) 인구는 524만(호구는 124만), 1720년(숙종 46) 680만으로 나옵니다. 경제학자들의 통계도 이와 비슷합니다.
<실록>의 수치를 신뢰할 수 없다면 할 말이 없지요. 정치적 변화가 심한 중국에서는 안정기에 접어들면 인구가 5천만 혹은 그 이상으로 급증합니다. 그러나 한말(기원 후 180년경부터)과 삼국시대, 동진을 거처 581년-619년 수-당이 통일하기까지 혼란기를 거치면 인구는 1-2천만으로 줄어듭니다. 그리고 당의 안정기에 다시 4,5천만으로 늘어나지요. 당 말기 안사의 난(775-763)과 황소의 난(875-884)을 거쳐 당이 망하고(907) 송이 건국하기 까지(960) 200여년의 혼란기에 인구는 또 1,2천만으로 줄어들었으나 안정기에 다시 5천만 수준으로 늘어난다고 합니다. 명말에서 청초기 짧은 혼란기를 있었으나 1368년 명의 건국부터 4백년 이상 장기간 안정기를 지나면서 1850년 태평청국 난 시기에는 4억이 넘는다고 하네요.
나는 우리나라의 인구를 <삼국사기>에서 나오는 백제 멸망 당시(660) 76만호, 고구려 멸망 때(668) 69만호를 하나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백제는 신라와 당의 공격으로 한 순간에 망하여 인구가 대부분 보존되지만 고구려는 수-당과의 오래 소모전으로 만주의 주민들이 중국에 흡수되거나 흩어져 인구가 백제보다 작은 게 아닌가 합니다. 조선시대 1 호구가 4명 정도인 것을 기준으로 하면 고구려와 백제의 인구는 약 300만 정도입니다. 통일신라는 백제의 인구만 흡수했다고 하면 약 5-6백만이 되겠지요. 삼국통일 후 전란이 장기화 된 시기는 후삼국 시대 약 50년과 몽고침략 전쟁 (1216-1270) 60년 정도일 겁니다. 그 후 임진왜란입니다. 그렇다면 임란 이전 인구의 부침을 충분히 고려하드라도 4백만 초반 혹은 5백만 이하라고 하는 것이 ‘보수적’ 계산이 아닐까요?
그 다음 충무공이 결핵 환자였다는 논쟁입니다. 지금은 폐렴이나 폐암, 폐결핵 등을 구분하지만 옛날엔 폐병이란 범주에 포함시켰다고 합니다. 며칠 전 서울대 병원 연례 학술대회에서 병원장을 비롯한 여러 의대교수들에게 충무공의 폐결핵에 관해 물어보았습니다. 대뜸 하는 말이 ‘옛날엔 서울대병원 입원환자들 대부분이 결핵환자였어요.’라는 겁니다. 폐결핵 흑은 폐병은 전란으로 영양이 부실할 경우 더욱 창궐하여 풍토병이 된다고 합니다. 페니실린이 나오기 이전에 ‘가슴이 아파온다’면서 20대부터 죽은 사람들이 대부분 폐병환자들이었지요. 해변 지역에서 태어나지 않은 충무공이 차고 습한 바다바람을 맞으며 장기간 전쟁에 임하였으니 폐결핵에 걸렸을 개연성은 높다는 것이 이들 교수들의 대답이었습니다. 당시 <실록>에 남해 지방에 폐결핵이 창궐했다는 기록도 맞는 말일 겁니다.
마지막으로 원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박종화의 소설에 나오듯이 충무공이 전투에서 승리한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동동 떠다니는 왜군을 머리를 베어 전공으로 삼았는지, 혹은 드라마에 나오 듯 맹목적으로 진격하는 ‘용장’인지를 떠나 웃기는 인물로 매도하지는 말아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원균을 단순히 주인공(protagonist)인 충무공에 대항하는 악당(antagonist 혹은 villain)이라는 누명은 벗기고 재평가하여 본래의 위상으로 찾아주어야 할까요? 찾아 줄 위상이나 있나요? 임란이 끝난 뒤 선조는 충무공과 원균을 같은 선무공신 1등이지만 권율과 이순신은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원균은 종1품 숭록대부로 봉했습니다. 이후 이순신의 품계가 계속 오르지요. 마치 관우가 죽은 뒤 후(侯, 제후)에서 왕으로, 그리고 황제로, 이어 신으로 추앙되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 들지요. 반년 <난중일기>에서 충무공이 원균을 폄하하는 말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구체적 상황에서 보인 원균의 처신에 관한 것들이며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동동 떠다니는 왜군을 머리만 베었다’는 말은 박종화의 소설에만 있는 게 아니라 <난중일기>에도 유사한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걸 떠나서, 원균이 정말로 왜군과의 전쟁에 임하면서 전략, 전술적 마인드를 가지고 조선 수군을 지휘했을까요? 임란 발생 때 그는 경상우수영(慶尙右水營) 절도사였습니다. 우수영, 좌수영은 왕이 있는 서울을 기준으로 정하는 것이니 우수영은 일본군을 맞는 제1선인 동래 부산에서 서쪽을 관할하지요. 충무공의 전라좌수영은 여수에서 서쪽 수역을 관할하구요. 원균은 일본군과 제일 먼저 마주친 조선군이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불행이라면 불행이겠지요. 그러나 육지에서는 동래부사 송상현이 일본군과 첫 접전에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내어 주기는 어렵다.’면서 장렬히 전사하지요. 부산진 첨사 정발도 부산진 전투에서 죽습니다. 원균은 아무른 대책 없이 있다가 싸우지 않고 도망가고 각 포구에 있던 전선들은 각개격파 당하지요. 나는 원균을 못된 놈이라고 매도하기도 싫고 그렇다고 그를 복원시키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임란 초기 아무른 대비가 없었다는 점, 그 뒤에도 반격을 위한 어떤 전략적 마인드가 없었다는 점,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뒤에도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지 않다가 거북선 등 이순신이 건설한 조선수군을 모두 잃었다는 점, 극한 상황에 놓인 나라의 운명을 앞에 두고 권율에게 곤장을 맞을 정도로 지휘관으로서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 등은 분명할 겁니다. (2022.1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