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차일드
2005년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다르덴 형제의 [더 차일드]는, 의심할 바 없이 우리 시대 영화언어가 빚어낼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작품이다. 이미 [아들]로 한국 관객들과 만난 바 있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뭍으로 올라와서도 팔딱 팔딱 살아 숨쉬며 몸을 뒤채는 물고기처럼, 강렬한 생명력을 갖고 우리들의 정서를 자극한다. 항상 배우들의 근접 거리에서 핸드헬드로 촬영하는 다르덴 형제의 카메라는, 관객들로 하여금 등장인물들의 내면 속으로 파고들게 하는 기이한 경험을 선사해준다.
돈이 될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훔쳐서 암시장에 내다파는 좀도둑 청년이 갑자기 아빠가 되면서 겪게 되는 불안과 혼란을 형상화하고 있는 [더 차일드]는, 다르덴 형제의 다른 영화들처럼 전부 핸드헬드로 찍혀져 있다. 따라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화면은 이 세계의 안정성을 희구하기 보다는 그 결핍과 불안정성을 드러내는데 주력한다. 그리고 시작한지 모르게 시작하고 끝난지 모르게 끝이 나는 다르덴 형제표 영화 스타일도 여전하다.
영화의 무대는 벨기에 동부의 퇴락한 공업도시 세랭. 브뤼노는 자신보다 어린 십대 불량소년들과 함께 좀도둑질을 해서 먹고 산다. 영화가 시작하는 시점은, 브뤼노의 연인인 소니아가 아이를 낳고 돌아오면서부터이다. 브뤼노에게 아이는 귀찮은 짐일뿐이다. 그는 소니아를 사랑하지만 아이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그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실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브뤼노가 지금까지 훔친 물건을 암시장에 팔아서 생활했듯이 어느날 그 아이를 암시장에 내다 판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소니아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이것이 어머니와 아버지의 차이다. 아직 아버지가 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자신이 한 어린 생명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전혀 인식도 못하는 브뤼노는, 충격 속에서 돌처럼 굳어버린 소니아의 반응을 보고 비로소 자신이 큰 잘못을 했다는 것을 깨닫는디. 그러나 한 번 아시장에 내다 판 아이를 다시 사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이 받은 돈의 몇 백배에 달하는 돈이 필요했다. 갱스터 집단에게 돈을 빌려 아이를 되찾아 온 브뤼노는, 그때부터 빚 독촉에 시달린다. 그 빚을 갚는 방법은 좀도둑질 뿐이다.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형제는 벨기에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다큐멘타리 영화를 만들었고, 1986년 처음으로 극영화 [거짓]을 만들었다. 1999년 실직 위기에 몰린 소녀의 고통스런 성장과정을 그린 [로제타]로 칸느 황금종려상과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다르덴 형제는 [더 차일드]로 칸느에서만 두 번째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수많은 리허설을 통해 배우들이 실제 캐릭터의 내면속으로 동화되는 완충과정을 거친 후 촬영이 시작되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작업은, 사실성을 최대한 확보하면서 관객들의 감정을 상황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데 성공한다.
[가장 위대한 바업은 방법을 갖지 않는 것이다]는 다르덴 형제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어떤 특정한 기교를 선호하지 않는다. 자신이 표현하려는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찾아 연구한다. 그러나 다르덴 형제의 영화적 특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그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음악을 쓰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제 우리들의 삶에서 음악은 흘러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최대한 일상성을 확보하여 화면을 만들기 때문에 관객들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서사의 완벽한 사실성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또 하나는 근접 카메라다. 감독이 먼저 주제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들은 끊임없이 대상을 관찰하고 따라붙으며 삶의 구체성을 확보한다. 그래서 관객들이 상황을, 캐릭터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만드는데 기여를 한다.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감독은 그들이 만든 허구적 이야기에 튼튼한 뼈대를 만들고 구체적인 살을 부여하여 생동감 있는 생명체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다르덴 형제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