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을 답사 하는 중에 선정비를 보았는데 자세히 연구하여 보니 울산과 관련된 인물이다.
창원도호부사를 역임한 장붕익인데 경상도 좌병사도 역임하였다.
경상좌병사를 역임한 시기는 조선왕조실록에는 1716년에 나오긴 하지만 언제 임명되었는지는
승정원 일기에 나와 있다.


▲ 창원 천주사 입구에 있는 장붕익 선정비-- 2좌의 비 중 향 우편의 선정비
승정원일기 ------ 숙종 41년 9월 11일 계묘 13/13 기사 1715년
康熙(淸/聖祖) 54년李弘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有政。兵批, 以李弘述爲訓鍊都正, 李郁爲訓鍊習讀, 表膺瑞爲江華監牧官, 張鵬翼爲慶尙左兵使,
승정원 일기에는 1715년에 좌병사에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에는 장붕익 좌병사 기록은 아래와 같은데 장붕익 좌병사에 대한 기록 중 유일하다.
숙종 42년 병신(1716) 10월 3일(기축)
사헌부에서 경상 좌병사 장붕익과 철원 부사 임순원을 나문하여 치죄하기를 청하다
헌부(憲府)에서 전에 아뢴 일을 다시 아뢰고, 또 논핵(論劾)하기를,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장붕익(張鵬翼)은 군무(軍務)를 포기하고 백성과 군졸을 침학(侵虐)하며 술에 취하여 날을 보내고, 아문(衙門)에 나아가 집무하는 것을 전패하며 죄가 없는 자를 때려 죽인 것이 대여섯 사람이나 됩니다. 패악(悖惡)한 일을 낱낱이 말하지 않아도 족하니,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죄를 정하소서. 철원 부사(鐵原府使) 임순원(任舜元)은 백성과 산지(山地)를 다투고 위협하여 무덤을 팠으니, 나문하여 청컨대 밝혀서 처치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임순원의 일만을 따랐다.
위의 기록에는 장붕익의 벌하라는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임순원만 벌주는 내용이다.
아마 숙종이 아량을 베푼 것인지 어떠한 이유로 군무를 제대로 보지 않은 장붕익의 처벌을 왜 안
하였는지 알 수 없다.
아니면 믿는 무관이었기에 선처를 하였다고 추정만 가능하다,
숙종 조에 서는 장붕익은 여러 무관을 거치지만 영조 때의 일 중 가장 잘 한 일은
검계 소탕이다.
검계는 요새로 치면 비밀 조폭집단 이었는데 장붕익이 완전히 소탕하였다 할 정도로 많은 검계를 없앴으며
검계는 장붕익으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영조 때의 최고의 무관이었으며 정조때의 무관은 이주국이다.
각각의 왕 때는 믿는 무관이 있었다고 본다.
다만 경상좌병사로서 기록은 많이 없는 것이 아쉽지만 울산 병영1동 사무소에는 그의
선정비가 남아 있어는데 약간이나마 기록이 있어 다행이다.
더 많은 자료가 발굴되기를 기대하여본다.

창원 천주산 입구에 나란히 있는 장붕익의 선정비로 하나는 귀부이수의 형식이고 하나는 이수형태이지만
받침은 다시 세워서 원래의 모양은 알 수 없다.
비옆에는 자세한 안내비가 있다.
상부에 새긴 용이 화려하고 뒷면 또 한 용으로 조식 되어 있다.
울산과 관계된 인물이 하나 더 늘어 난 것이다.

▲ 울산 병영1동사무소에 있는 장붕익 선정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