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산사 불화기행] <8> 부안 능가산 개암사 영산회괘불도
“1749년 스님 불자 200명 뜻 모아 이뤄낸 佛心의 결실”
1749년 개암사 불사 결과물
높이 12m 달하는 걸개그림
법당 밖 대규모 법회 때 사용
대화사 의겸스님의 역작으로
시각적 현현성 묘사 뛰어나
이마 백호 등에 숨겨진 범자들
불화에 신비한 생명 불어넣어
괘불화 초본 전하는 유일한 예
화사 필력, 채색과정 변화 확인
1749년에 그려진 개암사 영산회괘불도. 삼베에 채색했으며 크기는 1209cm×870cm이다.
법당 밖에서 마주하는 대형 걸개그림, 괘불화(掛佛畵)는 한국 불교미술의 특성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의식용 불화이다. 괘불, 괘불탱, 괘불도 등으로도 불린다. 사찰에서 영산재, 수륙재, 예수재, 부처님오신날 등 대규모 법회 때 야단법석(野壇法席)에 거는 그림으로, 현재 80여 점이 전해진다. 평소에는 법당 내부 괘불함에 넣어 보관하다가 야외에서 의식이 행해지는 날 이운(移運)해서 내온다.
괘불화는 주불전과 누각 사이의 중정(中庭)에 현괘(懸掛)되는데, 일반적으로 높이가 10m 정도 되므로 멀리서 보아도 도량에 강림하신 부처님의 모습이 잘 보인다. 괘불화는 대부분 국보나 보물 등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한 점, 한 점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 조선 18세기 대화사(大畵師) 의겸(義謙)스님이 그린 부안 개암사 영산회괘불도(靈山會掛佛圖)를 소개하고자 한다.
개암사(開巖寺)는 전라북도 부안군 능가산에 자리한다. 백제 무왕 때 묘련스님이 창건했다고 전하며, 인근 우금암에는 원효스님이 수행했다는 ‘원효방(元曉房)’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고려 때는 원감국사가 쓰러진 불전과 당우를 재건했지만, 조선에 들어와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후 인조 임금 때 계호스님이 대대적인 중창을 한 후 지금의 면모를 갖추기에 이른다. 개암사에는 현재 보물로 지정된 대웅보전과 영산회괘불도를 비롯해 목조석가삼존상, 석조십육나한상, 동종, 석조 등 다수의 유물이 전한다.
그중 영산회괘불도는 세로 1208.0cm, 가로 868.5cm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의 불화로, 총 25폭의 삼베를 한 땀 한 땀 바느질로 이어서 바탕을 만든 후 불·보살을 그리고 채색했다. 총 무게는 181kg에 이른다.
화면의 중앙에는 영산교주 석가모니 부처님이 서 계시고 그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위치하며, 두 협시보살의 뒤쪽으로 아미타여래와 다보여래,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시립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구성은 불교 의례서인 오종범음집(五種梵音集, 1661)에 근거한 것이다. 석가모니는 오른손을 무릎까지 늘어뜨리고 왼손은 손바닥을 보인 채, 가슴 위까지 들어 올려 엄지와 약지를 마주 잡을 듯한 모습이다.
부처님 눈의 범자들.
개암사 영산회괘불도에는 ‘숨겨진 문자들’도 있다.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지만, 곳곳에 범자(梵字)가 쓰여 있다. 불보살의 눈동자, 눈꺼풀, 이마, 백호, 육계는 물론 가슴과 어깨 심지어 발등에도 붉은색으로 범자를 서사했다. 이 글자들은 가까이 다가가서 세심하게 살피기 전에는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작고 세밀하다. 범자의 서사는 아마도 불화를 모두 그린 후 마지막으로 진행되는 점안의식(點眼儀式)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의식집에 따르면, 몸의 눈(육안, 肉眼), 하늘의 눈(천안, 天眼), 지혜의 눈(혜안, 慧眼), 진리의 눈(법안, 法眼), 부처의 눈(불안, 佛眼) 등에 청정함, 원만함, 신통력, 용맹심, 자비심이 형성되도록 범자를 적는다고 되어 있다. 범자를 적어 넣는 점안의식을 통해, ‘물질’로서의 불화에 신비한 생명을 불어넣고 신성성을 부여한 것이다. 신비롭기 그지없다.
개암사 괘불화는 1749년에 스님들 70여 명과 재가 신자 180여 명이 동참, 발원해 제작했다. 한 점의 불화 불사를 위해 이렇게 대규모의 인원이 동참한 것만 보아도 당시 개암사에서 괘불화의 제작에 얼마나 많은 정성을 기울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시주자들의 이름 앞에는 기포(基布, 바탕감인 삼베), 채색 (彩色, 안료), 견사(繭絲, 비단), 그리고 공양(供養, 공양물) 등 시주 물목을 적어두기도 했다. 그림은 수화사 의겸스님을 비롯해 총 13인이 공동으로 작업했다.
그 외에도 최종 감수를 맡은 증명 스님, 불화 제작을 위한 권선을 독려하고 비용을 조달하는 화주 스님, 당시 주지 스님의 법명도 기록했다. 괘불화를 현괘하기 위해 필요한 괘불지주도 함께 만들었으며 현재도 사찰에 석주들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인물은 이 영산회괘불도 제작을 총괄한 화사 의겸스님이다. 의겸스님은 1713년부터 1757년 무렵까지 전라도 및 지리산 인근을 중심으로 활동한 18세기의 대표적인 화승이다. 석가설법도를 비롯한 여래설법도, 관음보살도, 지장보살도, 십육나한도, 그리고 괘불화 등 다양한 주제의 불화를 두루 섭렵했다.
괘불화는 총 5점을 제작했는데, 그중 개암사본이 마지막 작품이다. 전작들을 통해 터득한 경험과 방법을 총동원해 완성도를 높이려 했던 것이 화풍을 통해 고스란히 확인된다. 더욱이 화기를 보면, 의겸스님을 존숙(尊宿)이라고 칭하고 있어 당시 스님의 명망을 짐작할 수 있다.
개암사 영산회괘불도는 초본(草本, 밑그림)도 남아 있다. 괘불화의 초본으로는 유일하다. 현재 통도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전체 화면의 크기, 불보살의 배치와 세부 크기, 그리고 존상들 사이의 간격도 같다.
따라서 이 초본은 수화사 의겸스님이 그린 것일 가능성이 크다. 초본을 보면, 그의 필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불화의 밑그림이 채색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변화되어 갔는지 확인할 수 있다. 밑그림에는 일체의 문양이 그려져 있지 않아 문양은 채화 과정에서 추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개암사 괘불화 그림에는 상호 중 눈썹과 속눈썹 등이 매우 세밀하게 처리되어 있지만, 밑그림에는 윤곽만 그려져 있어 이 부분 역시 채화 과정에서 그려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종이를 몇 번씩 겹쳐 바르거나 윤곽선을 고치면서 수정했으며 동일한 채색이 필요한 곳에 표시를 해 두기도 하였다. 밑그림에 쏟은 공력을 엿볼 수 있다.
1749년, 종이에 먹선으로 그린 개암사 영산회괘불도 초본이다. 사진=성보문화재연구원
이렇듯 개암사 영산회괘불도는 1749년 승속(僧俗) 200여 명이 뜻을 모아 이루어낸 불심의 결과물이다. 도량에 부처님의 영산회 설법을 재현하고 중생들의 복덕과 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높이 12미터가 넘는 크기로 제작된 야외 의식용 대형 불화이기도 하다. 수화사 의겸스님의 주도 아래 부처님의 숭고한 모습을 재현하고 아름다운 장엄을 세부적으로 추가해 완성도를 높였다.
또한, 감춰진 작은 범자들은 불보살의 신성성과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다. 함께 전해지는 초본과 더불어 조선 후기 사찰의 의식과 괘불화 연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역작이다. 현재 보물 제1269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교신문3580호/2020년5월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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